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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문재인 대통령의 생일이 오늘(1월24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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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9-01-26 02:25 조회11,1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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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최고지도자들의 생일이 모두 1월에 있다.김정은위원장은 1982년 1월8일이고, 문재인 대통령의 생일은 1953년 1월24일이다. 만66세를 맞은 문재인대통령 생일을 맞아 남녘 언론들은 그를 축하하는 방송들을 내보냈다. 대전의 한 제과점에서는 그의 생일을 맞아 생일케이크를 만들어 노래와 함께 선물로 올렸다. 촛불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역사적으로 북녘 최고지도자와 3차례나 정상회담을 거쳐 새역사를 쓰기위해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 15만 북녘관중들 앞에서 연설한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민족의 운명을 우리민족 스스로가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해내외 동포 8천만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만66세를 맞는 문재인 대통령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청와대 사이트에 올라있는 그의 인생 발자취를 여기에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문재인생일.jpg
[사진]대전의 한 제과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66세 생일을 축하하는 모습


 
 
 
실향민의 아들

실향민의 아들문재인 대통령은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의 시골 농가에서 실향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6.25 한국전쟁 당시 흥남에서 피난을 내려와 거제에 정착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의 가족은 부산 영도로 이사하였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부산의 명문인 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그가 경남중학교에 합격했을 때, 평소 과묵했던 아버지께서는 자랑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않고 교복을 맞춰주겠다며 그를 국제시장에 데리고 가셨다고 한다.가난 때문에 하고 싶어도 못한 것이 많았지만, 그에게 가난은 오히려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또 어릴 적 가난했던 기억은 그대로 인생의 교훈이 되어, 불우하고 어려운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돕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격동의 청년기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부조리하고 불공정한사회에 대한 저항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중요한 시국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시위대열에 동참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참여하였다.1972년 경희대 법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문재인 대통령은 1975년 유신독재 반대 시위를 이끌다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강제 징집되어 특전사령부에 입대하였다.

인권변호사

1982년, 문재인 대통령은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마쳤지만, 유신반대 시위 전력이 결격 사유가 되어 판사 임용에 탈락하였다. 대형 법률사무소에서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억울한 사람을 돕고 보람을 찾는 것’이 변호사의 소임이라고 생각한 그는 결국 이런 제안을 마다하고 부산으로 돌아가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그때 처음 맺어졌다.처음부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은 학생운동 사건과 노동운동 사건들이 많았다. 그는 탄압에 시달리다 못해 자신을 찾아온 노동자들을 피하지 않았고, 그들의 말에 진정으로 공감하면서 최선을 다해 이들을 변론했다. 당시 학생회 활동을 했던 많은 학생들은 ‘그 당시 문재인 변호사의 얼굴을 지겹도록 보았다’고 기억한다.

정치에 눈뜨기 시작하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정치적 관심을 일깨워준 최초의 스승은 바로 아버지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장삿길에서 돌아오실 때마다 책을 사다 주신 덕에 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되었고, 중・고등학교 6년간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길렀다. 집에 이웃집 대학생이 찾아오면 아버지께서 사회 문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곤 하셨는데, 그때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과 식견들이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분석적 태도를 기르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참여정부

2003년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인권변호사라는 말을 들으면서 권력을 비판하는 역할만 했을 뿐, 국정운영 경험이나 행정경험이 없었던 그였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의 설득 끝에 민정수석 자리를 받아들였다.1년여 동안 청와대 생활을 마치고 민정수석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네팔 히말라야를 여행하던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접하고 곧장 귀국하여 탄핵대리인단 구성을 비롯하여 법적 대응 전반을 도맡았다. 탄핵재판 중에 있었던 탄핵반대 촛불시위 현장에도 참석하였다. 탄핵심판이 기각되자,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시민사회수석과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대통령의 친구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2009년 5월, 갑작스러운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문재인 대통령뿐만 아니라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상주가 되어 서거 발표부터 장례 준비를 위한 회의주재까지 도맡았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친구였고, 동지였으며, 정계 입문을 결심하게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이후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범야권 단일후보로 출마하였다. 2015년부터 2016년 1월까지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과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로 활동했다. 2016년 11월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 앞장섰으며,이게 나라냐라는 탄식과 함께 촛불을 든 국민들의 의사를 대변하고 이들과 시종일관 함께 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결정된 조기 대선에서 든든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하여 41.1%의 지지율로 제 19대 대통령에 당선된다.유례없는 정치적 격변기를 겪은 대한민국을 위해 다시 일어선 그는 이번에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 그는 직책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보다 세상을 바꾸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대통령의 지위가 의미를 가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만약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세상을 바꾸는 것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없고 국민의 지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기에 국민들과의 소통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경력
2017.05제 19대 대한민국 대통령
2015.12~2016.01더불어민주당 당대표
2015.02~2015.12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2012.05~2016.05제 19대 국회의원
2011.12민주통합당 상임고문
2011혁신과 통합 상임대표
2010.08~2012.04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2009.09~2010.08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상임이사
2007.08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회 위원장
2007.03~2008.02대통령비서실 실장
2005.01~2006.05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2004.05~2005.01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
2003~2004.02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2001~2003부산시교육청 행정심판위원
2001~2002노동자를 위한 연대 공동대표
1996부산 YMCA 이사
1995~2001.02법무법인 부산 대표변호사
1995~2002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1994노동자를 위한 연대 노동상담소장
1987~2002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 부이사장
1988한겨레신문 창간위원
1985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1984한국해양대학교 해사법학과 강사
1980제 22회 사법시험 합격
 





학력
1980경희대학교 법학과 졸업
~1971경남고등학교 졸업
~1968경남중학교 졸업
~1965남항초등학교 졸업

수상
2015.12제17회 백봉신사상
2014.12제16회 백봉신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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