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7-03-10 00:00
[정신대 할머니들]절대 잊지 마라/배상하라 지금!
 글쓴이 : minjok
조회 : 6,044  

[샌후란시스코=민족통신 종합]오늘 3월8일은 세계여성의 날이다. 그러나 이 날의 취지와는 다른 일들이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다. 일제시대 성노예로 팔여갔던 이른바 정신대 할머지들이 20만여명이 넘는데 일본의 아베 수상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어 분노가 치민다. 우리 말이 서툰 윤미란씨가 영어로 쓰고 이인희씨가 우리 말로 번역한 글 "절대 잊지 마라/비상하라 지금!"이라는 제목을 글을 민족통신에 특별기고해 주었다. 이들을 여기에 소개한다.





절대 잊지마라/ 배상하라 지금!

푸리 3을 위하여: 피어나지 못함/ 우리 할머님들과 함께 가기


윤미란/미리암 칭 윤 루이



우리 말 번역 이인희

<##IMAGE##>



1992년 7월—세월이 흘러. 시간이 강물처럼 흘러. 그때 너는 어디에? 그리고 지금은 또 어디에 ? 그때? 딸 엔 여영, 열일곱살. 아들엔 용산, 열한살, 우리 할머니들의 모국, 매미 울어 대고 교통에 진땀빼는 서울의 여름, 차양모 쓰고 앞치마 두르고 주먹을 불끈 쥐고 확성기에 입에 대고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이끄는 우리 심미자, 강덕경 할머님들을 보았는가?

* 그뒤 침침한 지하 식당에서 이야기하시는 것을 당신들의 자매인 김학순, 문옥주 할머님들도 숨어 있던 곳에서 나오셨습니다. 반백년의 비밀과 비밀의 노예제도를 뚫고 죽은이들을 깨우고, 정복국을 망각에서 깨어나게하는 눈물을 해일로 만들어 머리가 다 세어버린 심미자 할머니는 데모하러 가느라 한복으로 갈아 입으시고나서 당신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IMAGE##> 소학교시절 선생님이 일본지도를 수놓으라 하시길래
나는 무궁화를 보태서 새겨 수를 놓았더니 경찰이 와서 왜 벚꽃을 수놓지
않았냐고심문하더니만 나더러 일본에 대한 비애국자라 죄명을 씌운 뒤
심하게 때려 기절을 했지.

열여섯에 나는 정신대에 징집이 되어 후뀨오까로 보냈졌어. 6년간을 후쿠오까에서 고베로, 오싸까로, 군대를 따라 징집살이를 했어.
일본여자는 하나도 정신대에 없고 중국인 여성 셋 빼고 모두 다 한국인 여성들이었지.

전후에는 고향인 황해도 봉산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지. 우리는 수당이 하나도 없어서 집으로 갈 차비가 없었어. 기숙사에 살며 신발공장에서 2년간 일을 했는데 한푼도 못받았어. 일해서 여비를 모아 집으로 돌아가는데 3년이 더 걸렸어.

거짖말쟁이 일본정부관리들이 정신대가 불량배나 깽단의 소행이라 할때 나는 피가 부글부글 그만 끊어 올라. 그래서 한국 정신대 문제대책협의회에 등록을 했어. 나는 이 운동에 참가해서 한국과 일본의 미래의 세대를 위해 진실을 알리기로 했지.


강덕경 할머님은 경상도 진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일본인 선생님의 권유로, 보수가 좋고 직장훈련이 좋다는 정신대에 든 것은 열 다섯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지꼬의 비행기 공장에서 무보수로 일하는 노예가 되었습니다. 굶주림과 심한 고생을 피하려 공장을 탈출하다 군인에게 잡혀 더 심한 곳으로 끌려가게 된 이야기를 하십니다.

나의 주인은 별 세개를 빨간 옷깃에 달고 있었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상등병 고바야시 타데오 였어. 나를 잡은 후에, 그는 운전수 옆에 타고 어딘가로 가는 도중에 차를 세우고 나더러 내리라 명령을 내렸어. 그리고는 나를 강간했어. 성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터이라 저항을 하기에도 너무 겁이 났었어. 그런 일이 지금 일어났다면, 혀를 깨물어 자살이라도 했을 건데. 그당시에 나는 너무나 겁이 났고 힘이 없었지. 다시 차를 타고 군부대에 도착했어. 그는 나더러 거기 있어라 명했어. 나말고도 여자가 다섯명이 더 있었는데, 그녀들은 나를 멍청히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 사흘 뒤 고바야시가 돌아와 다시 나를 강간하고, 그 뒤에 다른 군인들이 왔어. 하루에 열 몇명에게 봉사 해야했고, 그들은 나를 하루에라 부르고 있었어. 우리는 셀 수도 없는 많은 군인을 야산에서 치루어야 했어. 내 아랫배와 자궁이 아팠어. 하도 많은 남자들에 당해서 걸을 수도 없었지. 다시 천막으로 돌아 갈 수도 없어 군인들이 산에서 나를 끌고 가야했어. 내가 겪은 참상을 말로 할 수가 없어.

<##IMAGE##> [감시병이 홀연히 사라진 어느 날 일본의 항복을 알았지. 우리 여자들은 길에 나가, 깃발을 흔들며 환호를 지르는 징집당해 온 다른 한인들을 만나게 되었어. 한인 방씨와 그분의 부인을 만나서 알게 되었지.]

헌병대가 나를 납치했을 때 월경이 없었는데, 두번째 위안부대에서 부터서 월경이 조금씩 비쳣어. 그뒤 임신이 되었어. 고국으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뛰어 내려 죽으려 했지만, 그 부인이 눈치를 채고 한시도 눈을 안 떼고 따라 다녀, 자결을 할 새가 없었지. 방씨 부부는 전라도 남원에서 왔길래 우리는 거기로 갔지. 1946년에 방씨 부인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낳았어.

진주로 돌아가니, 어머님께서 우리 아들과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셔서 먼 친척 뻘 아저씨에게 부탁을 해 부산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어. 카톨맄이 경영하는 큰 고아원에다 아기를 두고 나는 매 주마다 방문했는데, 어느 날 가보니 다른 애기가 우리 아들 옷을 입은 것이 눈에 뜨이고, 우리애기는 폐렴에 걸려 죽었다는 것을 알았어. 네 살 밖에 안되었는데, 그 아이의 시체를 본 적이 없어서 그애가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 나는 결혼을 한 적이 없어.


내가 나서서 정대협에 등록를 한 이유는 나의 반감을 다 드러내기 위해서지. 몇번이고 내가 겪은 이야기를 하려고 글을 쓰긴 했는데, 하도 이사를 많이 다녀 공책을 다 잃어 버렸어. 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제 다시는 그 누구도 내가 겪은 일을 당하지 않기를 바래서이지. 그리고 당연히 일본 쪽에서 받을 것은 받아야지, 공식사과와 배상. 아직도 우리가 겪은 일이 치욕이라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그저 무식하지.**

세월이 흘러. 시간은 강물 처럼 흘러.
그때 너는 어디에? 그리고 지금은 또 어디에?

<##IMAGE##> 지금. 어린 딸 엔여영은 자라 결혼을 하고 아시아 태평양지역 주민의 보건소에서 일하고, 용산 은 오크타운의 주민에게 책을 빌려주는 일과 마닐라타운 주민센터에서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맡고 있습니다.

그때. 내 남편 벨빈이 비데오에 담은 심할머니와 강할머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처럼 당신도 이 할머님이 살아오신 내력이 무섭습니까?
이분들의 내일은 지금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월이 흘러. 시간은 강물 처럼 흘러. 지금 -- 수만명의 한국인을 강제노동에 징집시킨 그 정책을 담당하고 수상직을 맡았던 전범-- 전 수상, 키시 노부수케의 손주, 아베 신조가 일본의 새 수상입니다. 심할머니의 고향이 있는 북한에 강경 대책을 쓰겠다고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심할머님과 당신의 자매들이 일본에다 소송을 제기했던 15년 전에 이사람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반 백년전, 연합군은 나찌를 누렘버그 전쟁재판소에서 재판했지만. 천황 히로히토와 그의 수하, 즉, 아베의 할아버지 같은 사람은 법정에 코 끝 하나 보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반 백년 전.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유태인 학살 생존자들을 배상했지만, 일본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반 백년전. 미국은 일본을 벌주기보다는 어마어마한 군비로 상을 추고, 생화학전 전문가들을 한국전 당시에 월급장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20년 전. 미국은 (2차 대전 때) 수용소에 감금했던 일본인들에게 배상금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성노예와 강제 노동자들에게 한 푼도 배상하지 않았습니다.

11년전. 전 (남한의) 대통령들, 전두환과 노태우는 군부 구테타와 1980년 광주 학살의 죄로 고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평화스런 데모, 1919 년, 3.1 의거 때 학살당한 (독립투사들의) 가족들을 배상하지 않고 있습니다.

3개월전. 이랔의 하디타에서 14세 소녀, 아비르 알 자나비를 강간하고 죽인 후, 불태운 미군 병사 제 101 공수부대의 기술하사관 제임스 베이커를 실형선고 했습니다. 증거를 없애려고 아비르의 식구들도 죽여버린 베이커와 그의 동료 군인들도 구속됐습니다. 그러나 강덕경할머님을 강간하고 성노예로 만든 상등병 코바야시 타데오의 얼굴은 창살의 그림자로 드리워 진 적이 있습니까?

<##IMAGE##> 뻔쩍거리른 디지탈 기술을 내 놓고 아주 뽑내는 일본이지만 세계의 지도자격이 없습니다. 과거의 모든 희생자들에게 정의로운 일을 하지 않는 한.

· 일본정부, 공식사과문을 쓰고 희생자들을 배상하라!
· 정신대에 대한 진실을 한국과 일본의 --그리고 정말--미국 역사책에 쓰라!
· 한국여성. 재일 교포들, 그리고 모든 곳의 폭력의 희생자들의 인권을 존중하라!
· 절대 잊마마라/ 절대 잊마마라/ 절대 잊마마라.
· 잊어버리지 말고: 배상하라! 배상하라! 지금 배상하라!
지금 배상하라!


세월이 흘러, 시간은 강물 처럼 흘러.
마지막 할머니께서 돌아가서 묻히더라도
우리들, 당신들의 자식들. 손주손녀들, 그리고 손주손녀의 손주손녀들
모두 계속해서 이분들이 원하시는 것을 함성으로/ 읊고/ 기도 해야한다 (합장)
그래야만이 이분들의 원혼이 고통에서 풀려나
은은한 달빛아래
허밍새가 부르는 고요한 노래에 들떠
무궁화 꽃닢처럼 춤을 출 것입니다.

--2007년2월 3일, California, Oakland
*
이 부분은 1992년, 7월 15일, 심미자, 강덕경 할머님들과의 대담. 정대협과 같이 일하는 한국여성학 연구소의 남 연주 번역. 비데오는 벨빈 루이 작. 할머님들의 데모하시는 이유를 설명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당시11살이던 우리 아들 룽산.

**
강덕경 할머니의 이야기는 키드 하워드씨가 편집하고 정대협에서 발행한 책, 한국 정신대의 사실 이야기에 실린, “정신대에서 위안부대 까지” 에서 뽑음. (런던과 뉴욕, 카셀 출판사, 1995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 http://www.womenandwar.net/menu_01.php
House of Sharing — http://www.nanum.org/eng/menu01/index.html
Puri Project — www.puriproject.com

미리엄 칭 윤 루이(윤미란)은 미주중한인 3세이며 땀공장 전사들: 세계화 공장에서의 여성이민노동자들Sweatshop Warriors: Immigrant Women Workers Take on the Global Factory (South End Press), 세계 경제안의 여성 교육 Women’s Education in the Global Economy: A Workbook (with Linda Burnham, Women of Color Resource Center), and 다리: 이민/망명 지역사회를 위한 대중교육 자원 BRIDGE: A Popular Education Resource for Immigrant & Refugee Community Organizers (with Eunice Cho, Francisco Arguelles, and Sasha Khokha, National Network for Immigrant & Refugee Rights) 등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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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Mi Ran/Miriam Ching Yoon Louie

July 1992— Sei woli hulryo. Time and tide like a river flows.
Where were you then? Where are you now?
Then? Daughter Yo Young, seventeen, Son Yong San, eleven
In land of Uri Halmoni’s tongue
Listen to Seo-ul summer sounds cicadas sing traffic sweats
Watch Uri Halmonim-dul outside Japanese consulate
Don sun hats tie aprons kiss bullhorns punch fists
Reparations now! Reparations now!
Baesang haera! Baesang haera!

See Uri Halmonim-dul, Shim Mi Ja and Kang Tok Kyong, head the weekly Wednesday demo at the Japanese consulate?* Then talk story in a dim basement restaurant? Their sisters Kim Hak Sun and Mun Ok Ju had just stepped out of the shadows. Shattering half a century of silent shame, secret slavery. Sending a tsunami across that ocean of tears, mighty enough to wake the dead and a conqueror nation from amnesia.

Shim Mi Ja Halmoni’s hair has gone all white. She wears her hanbok to protests and says:

When I was in elementary school my teacher asked me to embroider a map of Japan. Because I added our mugunghwa flower, a few days later a policeman came and demanded to know why I had not embroidered a cherry blossom instead. He accused me of being unpatriotic to Japan. He beat me so hard I passed out.

At sixteen, they drafted me into the Comfort Troops/ Chong Shin Dae and sent me to Fukuoka. I served for six years, moving from Fukuoka, to Kobe, to Osaka with the troops. I never met a single Japanese Chong Shin Dae. Everyone was Korean except for three Chinese women.

After the war I couldn’t return to my native town Bong San in Hwanghae-Do. We never got paid, so I had no money for passage home. I worked two years in a Japanese shoe factory for room and board without pay. It took me another three after that to save enough money to come home.

When I heard the Japanese government liars say that Comfort Troops was organized by some punks and gangsters, not by the government, my blood boiled! I decided to register my name with the Korean Council for Women Drafted for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I joined this movement to tell the truth to the new generations.

Kang Tok Kyong Halmoni was born in Chinju, South Kyongsang Province. She was fifteen when she joined the “Women’s Volunteer Corp” at the urging of a Japanese school teacher, who promised her good wages and training. But she ended up slaving for nothing in an airplane factory in Hujiko. When she tried to escape the hunger and hardship, she got caught by a soldier and fell into an even deeper pit. She says:

My captor wore three stars on his red lapel. Later I found out his name was Corporal Kobayashi Tadeo. After he caught me, he sat with the driver, but half-way through the trip, he had him stop the vehicle, and told me, “get out!” Then, he raped me. I had no experience of sex, so I was too scared even to try resisting. If such a thing happened now, I would kill myself by biting off my tongue. But at that time I was scared and helpless. We got back on the truck and rode further until we arrived at an army unit. He told me to “stay put!” There were already five women there, who looked at me in a daze and said nothing. Three days later, Kobayashi came and raped me again. Then, other soldiers began to come. I served about ten a day. They called me Harue. We had to serve countless soldiers on the wild mountainside. My abdomen and womb throbbed with pain. I had to serve so many men. Afterwards, I would be unable to walk back to the tent, and the soldiers would have to drag me off the mountainside. I can’t describe in words the misery I endured.

I only learned of Japan’s surrender when the guards disappeared one day. We girls stumbled into the street and found other Korean draftees shouting in joy and waving flags. A Korean man Pang and his Japanese wife befriended me.

When the military police first kidnapped me, I had never had a period. I began to bleed a little when I was at the second comfort station; I must have become pregnant after that. I tried to throw myself off the ship as we crossed the sea back to Korea, but this woman sensed what was going on and followed me everywhere, making it impossible for me to take my life. Pang had come from Cholla Province, and so we went to Namwon [City] when we got to Korea. I gave birth in January 1946 and Pang’s woman helped with the birth.

When I went home to Chinju, my mother told me I couldn’t live at with my son. She felt sorry for me, so asked a distant uncle to take me to Pusan. He went with me to a large Catholic orphanage, and I left my child there. I visited my son every Sunday. But one day when I got there, I noticed another child wearing my son’s clothes, and discovered that [my boy] had died of pneumonia. He was only four. Aiguh! Son! I never saw my dead child with my own eyes, so I found his death difficult to accept. I have never married.

The reason I came forward to report to the Council was to pour out my resentment. I have tried to write down my experiences several times, but because I move so often, I keep losing the notes. I am telling my life story so nobody else will ever have to go through the same things as me. I think we must try to get what we justly deserve from Japan: a proper apology and compensation. There are still some who say that what we did was shameful, but they are indeed ignorant people.**

Sei woli hulryo. Time like a river flows. Where were you then? Where are you now?

Now, my baby girl Yo Young is married and works for Asian Pacific Islander Health Form. Yong San renews library books for Oaktown denizens, and runs programs at Manilatown Community Center.

Then, you see images of Shim and Kang Halmonim-dul that my husband Belvin captured on video. But now, do you—like me—fear for where these two grandmas have gone? And where are their tormentors now?

Sei woli hulryo. Time like a river flows. Now, Abe Shinzo, the grandson of former Prime Minister Kishi Nobusuke—who headed the forced labor program that sent hundreds of thousands of Koreans into slavery—this war criminal’s grandson is Japan’s new prime minister. He vows to be tough on North Korea, where Shim Halmoni was born. But where was he fifteen years ago when she and her sisters carried the comfort women’s lawsuit to Japan?

Half a century ago the Allies put the Nazis on trial in Nuremburg. But Emperor Hirohito and henchmen, like Prime Minister Abe’s grandpa, never saw a day in court.

Half a century ago Germany and Austria paid reparations to Jewish Holocaust survivors. But Japan did not.

Half a century ago the US decided to reward, not punish Japan with handsome military contracts, putting Japanese germ warfare experts on the payroll during the Korean War.

Two decades ago the US government finally bowed to demands of the reparations movement, apologized and paid Japanese American victims of US concentration camps. But Japan never paid Korean sex slaves and mine workers.

Eleven years ago Presidents Chun Do Hwan and Roh Tae Woo were convicted for their military coup and deeds in the 1980 Kwangju Massacre. But Japan never compensated the families of the thousands of Koreans they executed during the March 1, 1919 peaceful protest.

Three months ago Specialist James Barker of the 101st Airborne Division was sentenced to life in prison for the rape, murder and burning of Abeer al-Janabi, a 14-year old girl in Haditha, Iraq. Barker and his fellow soldiers were also accused of killing Abeer’s family to destroy the evidence. But what about Corporal Kobayashi Tadeo? Did the shadow of jail bars ever darken his face for raping and sentencing young Kang Tok Kyong to sexual slavery and torture?

No matter how dazzling its digitals, no matter how touted its technology, Japan will never ever be a world leader. Not until it delivers justice to its former victims.

• Japanese government, write your apology and compensate the victims!
• Tell the truth of Chongshindae in Korean and Japanese—and yeah!—US history books!
• Respect human rights of Korean women, Koreans in Japan, survivors of violence everywhere! No war no more!
• Never forget/ Never forget/ Never forget.
• Ijoh bori ji mal ko: Baesang haera! Baesang haera! Reparations now! Reparations now!

Sei woli hulryo. Time like a river flows.
Even after the last halmoni lies buried in her grave
We, their children, their grandchildren, their great-grandchildren
Must continue to shout/ chant/ pray their demands
So their troubled spirits can be released from suffering
To dance like mugunghwa petals
Tickled by hummingbird breezes
Under luminous moons.

--“Puri 3,” February 3, 2006, Eastside Cultural Center, Oakland, California


*Interviews with Shim Mi Ja and Kang Tok Kyong, July 15, 1992, Seoul, translated by Nam Yunju of the Research Center for Korean Women’s Studies, which worked in solidarity with the Korean Council. Video clips of the halmonim-dul taken by Belvin Louie; that kid’s voice explaining the purpose of the halmonis’ demo is our son Lung San Louie’s at age 11. Thanks to Lee Inhui for translating this piece into Korean for the February 3, 2007 performance at Eastside Cultural Center, Oakland, California.
**Excerpts from Kang Tok Kyong’s story, “From the Women’s Volunteer Labour Corps to a Comfort Station,” in the Korean Council for Women Drafted for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s True Stories of the Korean Comfort Women, Edited by Keith Howard, (London & New York: Cassell, 1995.)

This third generation Korean Chinese American’s books, Sweatshop Warriors: Immigrant Women Workers Take on the Global Factory (South End Press), Women’s Education in the Global Economy: A Workbook (with Linda Burnham, Women of Color Resource Center), and BRIDGE: A Popular Education Resource for Immigrant & Refugee Community Organizers (with Eunice Cho, Francisco Arguelles, and Sasha Khokha, National Network for Immigrant & Refugee Rights) are dedicated to the underdogs among us.


For more information see:

• Korean Council for Women Drafted for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at http://www.womenandwar.net/menu_01.php
• House of Sharing, at http://www.nanum.org/eng/menu01/index.html
• Puri Project, at www.puriproje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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