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7-01-23 00:00
[대담]카나다 통일운동 원로 전순영 여사
 글쓴이 : minjok
조회 : 9,856  

[뉴욕=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카나다 통일운동 원로하면 뉴코리아타임스를 발행하던 전충림 선생이 떠올랐으나 이제는 그의 부인 김순영 여사(79세)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남편 이 지난 1995년 4월17일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사업을 떠맡아야 했다. 부인은 신문을 발행하면서 동시에 북에 가족을 찾아주는 이산가족찾기회 일까지 겸해야 했다. 하여 그는 동분서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순영 여사(카나다에서는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르기 때문에 법적이름이 전순영으로 되어있음)는 여전히 바쁜 생활에 쫒기고 있다.

남편 전충림 선생 따라 활동하다가 사별하고는 혼자 동분서주


<##IMAGE##> 카나다 토론토에 거주하면서 해외동포들의 이산가족 찾기와 함께 이북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주는 사업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지 올해로 12년째를 맞는다. 남편이 1973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했던 신문은 더 이상 발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 신문은 한국민주화운동, 그리고 통일운동과 관련된 자료들을 주로 다뤘던 주간신문으로 "뉴코리아타임스"라는 제호로 30년 가량 발행되어 오다가 중단된 셈이다. 이 신문은 많은 구독자들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카나다는 물론 미주동포들, 남미동포들,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 동포들에 이르기까지 넓은 독자층을 구성하고 있었다. 한국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해 오던 카나다 동포들과 미주동포들은 197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3대신문들에 의존하였다.

그중 하나인 "해외한민보"(고인이 된 서정균 발행인)가 뉴욕에서 1973년 1월에 창간되어 1985년 6월까지 발행되었다. 또 하나는 로스엔젤레스에서 비슷한 시기에 재창간된 "신한민보"(김운하 발행인)가 1990년대 어느날 휴간된 이래 발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뉴코리아타임스"가 전충림 발행인에 의해 운영되다가 타계하는 바람에 부인인 전순영 여사가 최근까지 발행하다가 중단되고 말았다.

전충림 선생을 따라 내조하시느라고 70년대 초반부터 30년이상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참여해 오셨는데 감회는 어떠냐고 묻자, 전순영 여사는 "감회가 새롭습니다. 되돌아 보면 북미주의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것은 3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저의 남편이었던 전충림씨는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여 민주화를 표방하는 뉴코리아타임스라는 주간신문을 1973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작은 주간신문을 인연으로 미주지역에서 계신 많은 분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1976년 캐나다 몬트리얼 올림픽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선수들과 올림픽위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9년 평양에서 개최되었던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계기로 32년만에 북녘을 방문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누님을 만났고, 캐나다로 돌아와서 선우학원 박사님, 김재준 목사님, 이승만 목사님 그리고 일본 계신 정경모 선생님 등과 의논하여 해외이산가족찾기회를 발족하였습니다. 그래서 북미주 각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은 북녘에 살고 있는 가족들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199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엔 가입 당시 고 연형묵 총리를 비롯한 김영남 외무상 등이 뉴욕을 방문했을 때 저와 지금은 고인이 된 저의 남편은 뉴욕에서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해외이산가족찾기회원들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엔가입 환영만찬에 참석하도록 몇일 동안 전화연락을 하였던 기억이 새롭게 생각됩니다. 이번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창립10주년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뉴욕에 와서 그 당시에 만났던 분들을 많이 만나보게되어 기쁩니다."라고 전순영 여사는 반가워한다.

전순영 여사는 1927년 중국 용정에서 출생

<##IMAGE##>전순영 여사는 1927년 5월22일 중국 용정에서 태어났다. 서너달 지나면 8순이 되는 나이인데도 수줍어하는 처녀같은 인상을 풍긴다. 그는 6살 어머니를 잃었고, 9살때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애국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일제때 의병대장이었던 배창근 선생이다. 일제때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용정에서 비교적 부자집 딸로 그리고 기독교의 배경을 가진 가정에서 자라난 환경 때문에 목사의 아들인 전충림 선생과 용정에서 1947년 결혼하게 되었고 부부가 조국 땅으로 돌아가 살다가 1962년에 카나다로 이민을 오게되었다. 이민생활 전이나 그 후에도 전순영 여사의 삶은 전충림 선생의 그림자였다.

이민 생활은 토론토에서 켄달이라고 하는 회사에서 노동치고 사는 일부터 시작하다가 돈을 좀 모아 "멕스 밀크"라고 하는 상호를 가지고 가게를 운영했다. 그러던 중 김재준 목사와 이상철 목사 등과 인연이 되어 김대중 선생 석방구출운동에 가담하다가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남편인 전충림 선생이 발행인으로 신문기자로, 배달원으로 1인 3역을 할때 타이피스트로 "뉴코리아타임스"를 도왔다고 전 여사는 회고한다.

이들 부부는 원앙새로 불리울 정도로 아기자기 하였다고 설명한 전 여사는 "그러나 남편이 1976년 몬트리얼 올림픽에서 이북사람들을 처음 만나는 것이 계기가 되어 북에 있는 누이 소식을 알게되었고, 그 이후에는 유럽 스톡홀름에 누이를 데려 올테니 그리오면 만날수 있게 해주겠다는 북녘 사람들로부터 언질을 받고 내 의사를 물었을때 나는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반대했다. 만나고 싶으면 가라, 그러나 절대로 돌아오지 말라."고 소리치며 차겁게 대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자신도 그 당시에는 반공교육에 흠뻑 젖어있었다는 설명이다.

남편은 나의 만류를 꺾지 못하고 이번에 누님을 만나는 것은 포기하고 말았다. 그후 2년이 지난 1979년 남편은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 북미주 언론인 대표자격으로 이북을 방문하게 되었다. 전 여사는 "이 때에는 말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남편의 꿈은 이뤄졌다. 평양도착 즉시 이북 당국자들은 남편의 누님을 만나도록 알선해 주었다. 이것이 32년만에 이뤄진 이산가족의 극적인 만남이었다.

전 여사는 "남편이 누님을 만나고 돌아와 너무 감격하였고, 이산가족의 아픔이 이런것이 구나라고 생각한 나머지 주위 선배들과 의논하여 "해외이산가족찾기회"를 조직했다. 그 첫 사업을 시작한 것이 1980년 1월 5명의 이산가족 찾기를 신청하여 3명이 가족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이북을 방문하여 역사적 상봉사업이 이뤄졌다."고 설명한다. 이 사업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1995년 4월17일까지 15년 동안 계속되었고, 그 이후에도 전 순영 여사가 남편의 사업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총 27년째 지속하고 있다. 남편이 살아 있을때 수천명의 해외동포들이 북녘의 가족들을 만났다고 했으니 지금쯤은 아마도 1만여명이 훨씬 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IMAGE##>자녀들은 모두 예술방면에서 뛰어난 재량을 보여왔다. 장녀 희성씨는 뉴욕 파슨예술대학을 나온 미술가이고, 작은 딸, 인성씨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이며 교수이고, 아들 문성씨는 기타를 가리키는 선생이다. 손자, 손녀도 7명인데 큰 손자가 벌써 29살이 되어 이번주에 하와이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는 증손자를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특히 둘째 딸 인성씨는 카나다에서 아주 유명한 피아노 연주자로 알려져 있다. 중국 베이징에서 리사이틀하여 격찬을 받은 연주소식이 중국인민일보에 보도되자 이것이 인연이 되어 평양측에서 특별초청하여 평양음악당에서 초청 리사이틀을 하기도 했다. 이때 고 차상달 선생, 양은식 박사 등이 관람한바 있었다. 그는 또 1990년 남북 해외음악가들이 평양에서 역사적인 첫 통일음악회가 열릴때 여기에서도 "조선은 하나다"를 연주했는데 이 소식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에서도 산토니 홀에서 도꾜 심포니와 협연한바도 있었고 그 이후 교토, 히로시마 등지에서 연주한 경력을 갖고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있다.

전 여사는 자녀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예술을 하면서도 아이들이 부모를 극진히 생각해 고맙게 생각한다. 인성이는 제자들을 지도하면서도 동포제자에게 뿌리를 알려주려고 노력한다. 제자 한명이 평양 연주로 간적이 있고 2007년에는 3명정도 보낸다고 하니 가슴이 흐뭇하다. 그리고 큰 딸 희성이와 사위가 고인이 된 남편 전충림씨의 생애를 다루는 기록영화를 만든다고 하니 한층 더 가슴이 뿌듯하다."며 자녀들이 부모들을 생각하는 마음에 감사한다고 말한다.

전 순영 여사는 전충림 선생의 변신이기도 하다. 그와 대담을 하는 동안 자신의 이야기 보다는 주로 남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충림 선생은 목사의 아들로 1923년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나 용정, 연길, 함흥 등지에서 수학하고 1945년 이후 잠시 목단강, 함흥에서 교편을 잡았고 1947년 김순영 여사와 결혼하여 서울로 이주, 금융기관을 거처 한 일간 신문사에서 근무하던 중 1962년 카나다로 이민와서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을 하며 1973년 "뉴코리아타임스"를 만들어 발행하다가 1995년 4월17일 운명했다. 그는 미주에 있던 한민족연구회가 제정한 민족상 수상자로 선정된바 있다. 남녘의 한겨레신문사는 그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남긴 글들 가운데 주요한 내용을 묶어 "세월의 언덕 위에서"라는 제목의 303쪽 두께의 책을 발행(1996년 3월 30일)해 그의 뜻을 남겼다.

*전 순영 여사의 연락처: 카나다 (416)222-0401, 혹은 (416)925-3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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