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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평양 간 비전향 장기수: 김중종 선생과 손성모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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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6-10-18 00:00 조회51,9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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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민족통신 백승배 특파원]북녘에서 핵무기 실험이 진행되던 그 시간에 평양을 방문중이었다. 10월9일 평양시내의 표정은 전반적으로 조용했고 차분했다. 3년 전 방문했을 때 보다 여러모로 발전한 분위기를 관찰할 수 있었다. 시민들의 활기찬 걸음걸이와 그 표정들, 신축중인 건물들이 늘어났고 옛 건물들도 단장 중에 있었다. 전기 사정도 좋아졌다.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농사가 잘된것 같다. 수해때문에 걱정도 했는데 북녘(조선) 동포들은 어려웠던 복구작업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유엔의 제재결의 때문에도 걱정했는데 의외로 반응들은 밝았다.

<##IMAGE##> 평양 방문중 그곳의 친척들도 만났다. 가족들과 만난 자리에서 ‘좀 걱정이 된다’고 했더니 나의 고종사촌 동생의 부인이 교편을 잡고 있는데 그는 내가 걱정하는 말을 듣고 “문제없습니다. 언제는 봉쇄가 없었습니까. 그리고 미국이 계속 봉쇄를 해서 지금 우리가 이룬 것을 허물려고 하면 이제는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자신감에 넘쳐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가족들만의 반응만이 아니다. 학자들, 간부들과의 만남에서도 비슷한 반응들이었다. 미국의 봉쇄 엄포에도 평양 사람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평양 시민들은 핵실험 때문에 위기에 빠진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핵을 가졌기 때문에 이제는 미국이 함부로 건들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더 느끼고 있는 반응들이었다.

동맹국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 실망하지 않을까라고도 생각하였는데 평양시민들의 반응은 거의 무표정한 반응이었다. 이들은 원래 큰 나라들에게 의존하는 자세가 아니고 “우리 스스로 선다”는 의지를 굳건히 지켜 온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조선의 태도는 한마디로 확고하였다. 미국이 금융제재를 풀고 대북적대시 정책을 거두고 상호존중하는 자세로 나오지 않는다면 대화에 나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해 보였다.

필자는 조선의 태도에 놀랄뿐이었다. 언제나 일관성 있는 자세, 그리고 그 어떤 강대국들에게도 주권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일념, 그것은 조선 동포들의 생명과도 같았다. 지조를 갖고 살아 온 이른바 "비전향장기수"의 삶도 그 기조에서 벗어나지 않고 수십년 옥살이를 하면서 전향하지 않았다. 62명이 이곳에 송환되어 온 세월도 벌써 5년이 넘었다. 이들의 일펀단심의 원천이 무엇때문일까? 나는 이것이 알고 싶었다. 그래서 김중종 선생(△81/평양시 모란봉구역/부인 장성실/29년 복역)과 손성모 선생(△77/평양시 대성구역/부인 방희동19년 복역)과 만나 특별대담 시간을 가졌다.이들의 가슴에 흐르고 있는 신념과 삶의 철학은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질문 1) 북부조국생활을 하신지도 6년이 넘었습니다. 남부 조국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오셨는데 그동안 이곳 생활에 대한 간단한 소감은 무엇입니까?

[대답] 1. 위대한 장군님을 중심으로 한 일심 단결된 공고한 사회라는 것입니다.
위대한 장군님의 인덕정치, 광폭정치는 수천만 인민들의 심장을 하나로 결속시키었으며 수천만군민이 우리 장군님께 심장도 운명도, 미래도 다 맡긴 일심단결의 사회주의제도라는 것을 실지 생활체험을 통하여 절감하였습니다. 많은 이야기 중에서 삼수발전소에 가서 보고 느낀 점 하나를 말하려고 합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발전소 터전을 잡아주시고 건설에 필요한 물질적 수단들을 보내 주시었으며 건설자들에게 주실 수 있는 사랑과 배려를 다 돌려주시었습니다. 이 믿음과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건설자들은 폭풍우에 의해 수십만 공수로 쌓은 언제가 붕괴의 위험에 처했을 때 한 목숨을 내대고 서로 앞을 다투어 언제를 구출함으로써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발전소를 완공하였습니다.

<##IMAGE##> 산중에 대인공호수가 생겨 근 5000세대가 물에 잠기게 되었는데 일군들은 전기 생산부터 생각하면서 이들에게 새집을 지어줄 생각을 못하였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사회주의 기초는 인민입니다. 몇 만 kw시의 전력보다 그곳에 거주한 인민들이 더 귀중하다고 하시면서 철거세대주민들에게 아담한 새집을 지어주어 입사하게 한데 이어 깔고 덮고 잘 이불과 담요를 비롯하여 부엌세간, 옷, 신발을 지어 여성들의 머리띠가지 매 세대들에 보내주시었습니다.

이러한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천만군민이 경애하는 장군님을 어버이로 받들어 모시었으며 어버이 장군님의 안녕을 위해 한목숨 바칠 각오를 안고 살고 있습니다.

건물에 화재가 났을 때, 날바다에서 배가 조난당했을 때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초상화를 구해내고 한목숨을 서슴없이 바친 사실, 항일 선열들의 구호가 새겨져 있는 나무에 불이 달렸을 때 불타는 나무를 부둥켜안고 한목숨을 바친 사실 등 이러한 사실들이 우리 조국에서 예사로운 일로 되고 있습니다.


2.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와 행복의 절정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잃었던 정치적 생명을 되찾아주시고 공화국공민의 최고 영예인 공화국 영웅 칭호와 조국통일상을 수여하여 주시었으며 당창건 55돐, 공화국창건 55돐, 선군시대 영웅대회 등 국가적인 큰 대회에도 참가하도록 해주시고 비전향장기수 매성원들을 원형으로 하는 장편 소설도 창작하도록 해주시고 예술영화, 기록영화도 만들도록 해주시었습니다.

지난 6년간 우리 장군님께서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안겨주신 사랑의 이야기는 수백, 수천 권의 책에도 다 담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버이 장군님의 이러한 사랑 속에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이 세상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행복의 절정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감옥에서 0.75평, 0.5평의 좁은 공간에서 새우잠을 자던 우리들이 그 100배나 되는 궁궐 같은 고대광실에서 추위와 더위를 모르고 ‘신선’같은 생활을 하고 있으며 60대, 70대 노총각 할아버지들이 인물고운 부인들을 맞아 청춘을 되찾고 행복을 노래하면서 삶을 즐기고 있습니다. 매해 여름철이면 백두산, 동해명승지에 가서 휴양을 하고 새로운 책이 나와도 새 영화와 연극이 나와도 비전향장기수들이 먼저 보고 있습니다.

나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 6년간 생활하면서 우리 장군님의 위인상에 한없이 매혹되었습니다. 나는 1960년 9월 김일성 종합대학 재학시절에 위대한 장군님을 처음으로 뵙고 그이의 인품에 완전히 매혹되었는데 조국의 품에 안긴 후에 세월이 흐를수록 그이의 담력과 배짱, 천재적 예지, 위대한 영도풍모에 더 더욱 매혹되었으며, 이러한 위인 중의 위인을 모시고 살며 혁명하는 높은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만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질문 2) 남녘에서 30~40년 옥살이를 하여 세계로부터 관심을 모았습니다. 더군다나 전향을 요구받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그것을 뿌리치고 "비전향장기수"로 형기를 마치셨습니다.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는지요?

[대답]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비전향장기수 63명을 한꺼번에 사지에서 구출하시었습니다. 이것은 세계를 들었다 놓은 역사적 사변이며 우리 장군님께서만이 실현하실 수 있는 대용단이고 위대한 업적입니다.


<##IMAGE##>인류역사 그 어느 시기 그 어디에서도 이러한 수령, 이러한 영도자는 없었습니다. 비전향장기수라는 말은 수령이 하도 위대하고 당이 하도 위대하기 때문에 오직 우리나라만 있는 자랑스런 말입니다. 우리가 30년, 40년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옥고를 이겨내고 혁명적 지조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수령에 대한 절대적 숭배심과 신뢰입니다.


원래 혁명적 신념은 혁명의 령도자에 대한 숭배심과 신뢰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숭배심과 신뢰는 수령의 위대성, 수령의 위업의 정당성에 대한 체험으로부터 위인에게 매혹되었을 때 이루어집니다.


그 과정은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전향장기수들은 누구나 다 수령께 매혹되고 수령께 자기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혁명의 길에 나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으로 죽어갈 때에도 수령을 생각하고, 수령이 영도하는 혁명의 길에서는 살아도 죽어도 영광이라는 신념으로 목숨을 들이대는 결사전으로 수령의 혁명전사의 영예를 지켰습니다.


우리는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자나 깨나 어버이수령님의 안녕을 기원하고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만 계시면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으로 살며 싸웠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1980년 말 동구와 소련 사회주의가 붕괴되었을 때에도 우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감옥 안에서도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탄신 날 아침이 오면 북녘 하늘을 우러러 위인들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면서 경모의 인사를 올리며 혁명의 한 길에 변심 없을 자신들의 맹세를 다지었습니다.

또한 30~40년 옥고를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은 사람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는 필승불패라는 신심을 안고 싸운 데 있습니다. 비전향장기수들이 옥살이를 할 때 동구와 소련 사회주의가 붕괴되자 반동들은 우리 공화국도 3개월, 1년, 길어서 3년을 넘기지 못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마다 비전향장기수들은 우리 공화국은 동구나 소련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무너졌기 때문에 우리 공화국은 붉은기를 더욱 높이 들 것입니다. 우리 공화국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창건하고 영도하시기 때문에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식 사회주의제도는 인민대중이 스스로 선택한 사람중심의 사회주의이며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이룩하지 못한 고도의 정치적 안정을 누리고 있는 일심단결의 사회주의제도입니다. 따라서 망하는 것은 우리 공화국이 아니라 미일제국주의자들과 당신들이라는 것을 역사는 반드시 증명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하였습니다.

1998년 공화국에서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발사하였을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천만번 옳았다는 생각으로 가슴 설레었습니다.

또한 옥고를 이겨낸 힘의 원천은 혁명적 동지애와 의리, 처자에 대한 사랑을 어느 한순간도 잊지 않은 데 있습니다. 비전향장기수들은 우리의 곁을 먼저 떠나간 동지들의 넋을 더럽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형장으로 나가면서도 자기 위업의 정당성과 그 위업의 필승에 대한 신념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동지들에게 미소를 보내며 잘 싸워달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들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 만세!>, <조국통일 만세!>를 외치며 영광스럽게 최후를 마쳤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죽었지 이런 동지들의 고귀한 생을 헛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동지들을 버리고 저 혼자만 살겠다고 전향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옥살이를 한 어느 한 동지는 동지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서슴없이 바쳤습니다. 이 동지의 방에서 소화제 몇 알이 발견되자 간수들이 그 출처를 따졌습니다. 그 출처를 말하면 그것을 준 동지가 피해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절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적들은 이것을 빌미로 그 동지를 고문실에 불러다가 <그 소화제를 누가 주었는가>고 하면서 물고문, 전기고문, 통닭구이고문, 비행기고문, 심지어는 손가락 끝에 바늘을 꼽고 빙빙돌리기 등 고문을 하였습니다. 고문으로 쓰러졌다, 깨어나면 그는 그날 당한 고문에 대하여 타전으로 보고하였습니다.

보통 타전은 밤에만 하였는데 한번은 새벽에 타전을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사리원에 살고 있는 아들을 잘 부탁합니다>>는 것이었고 마지막에 <<어버이 수령님>>의 <<령>>자만 희미하게 벽을 두드리고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 옆방 동지가 발길로 철문을 차서 간수를 불러 알아보도록 하였는데 그는 끝내 운명하였습니다. 처자에 대한 사랑도 우리가 수십년 옥고를 이긴 원천의 하나였습니다. 독거감방에 있으면 자연히 많은 사람들을 회억하게 됩니다.

고향의 벗들과 대학동창생들, 친지들이 그리워지고 그들과의 갖가지 아름다운 추억들을 회고하면서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마음속 다짐도 수없이 다지군 하였습니다.
특히 공화국북반부에서 행복하였던 나날들을 회상할 때면 먼저 처자가 떠오르고 그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잠못이루군 하였습니다.

당의 품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처자에게 절대로 변절자 가족의 오명을 씌우지 않기 위해서도 끝까지 적들과 견결히 싸울 결의를 다지곤 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알면서도 처자를 단한번이라도 죽기 전에 만나고 싶은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감정은 감옥생활 수십년에도 전향하지 않고 신념을 지킬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적들은 그 어떤 교활한 회유나 고문으로도 결코 굴복시키지 못하였으며 우리는 마침내 승리자로서 조국의 품, 우리 장군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질문 3) 이북사회는 지도자-당-인민대중의 3위일체가 되여 일심단결의 대가정을 이루어온 주체 사회주의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대답] 한마디로 그 원동력은 혁명적 동지애라고 생각합니다.
혁명이자 단결이고 단결이자 혁명이라고 말하고있는 것처럼 어떤 어려운 조건에서도 단결만이 혁명을 승리적으로 전진시킬 수 있습니다.

단결중에서도 가장 위력한 단결은 혁명적 동지애에 기초한 수령중심의 통일단결입니다. 우리 사회는 수령, 당, 인민대중이 하나의 운명공동체를 이룬 하나의 대가정입니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도 이 대가정속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난 40여년간 당과 수령을 위하여 목숨을 서슴없이 바친 것은 어떤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니라 단지 당과 수령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지켜온 것뿐인데 내가 없는 40여년간 친부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우리 수령님과 우리 당이 맡아 지켜주고 키워주었습니다.
9살 맏이로 한 4오누이를 다 맡아 키워주고 거두어 모두 대학을 졸업시켜 떳떳한 조선로동당원으로 사회에서 중견일군으로 사업하게 하고 6손자 2손녀들 중 김일성종합대학 3명, 평양의과대학 2명, 음악대학 1명을 졸업시키거나 다니는 집안으로서 우리집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집안입니다.

이렇게 보살펴주고 거두어주는 사랑이 어찌 친부모, 친조부모로써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오직 경애하는 장군님을 어버이로 모시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나라 사회는 옹군 하나의 대가정이기 때문에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은 경애하는 장군님을 <<아버지 장군님>>이라고 말하고 어른들은 <<어버이 장군님>>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며 자기가 맡은 초소, 자기가 지키는 몫에 신명을 다 바치고 있습니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도 30년, 40년, 지어 45년간의 감옥살이 동안 절반이상은 엄중독거란 독방생활 속에서도 수령님의 혁명사상으로 무장한 혁명적 동지애로 가혹하고 악랄한 0.75평 독방살이를 이겨내고 수백명이란 대집단이 하나의 사상으로 똘똘뭉쳐 세계에 류례없는 감옥살이를 극복하고 세계에 있어본 적 없는 <<비전향장기수>>, <<신념의 강자>>, <<의지의 강자>>로 되게 한 것도 수령중심의 혁명적동지애라는 원동력에서 발현된 것이라고 봅니다.

(질문 4) 아시다싶이 남녘 사회는 미국의 지배세력에 의해 60년이라는 세월을 식민지 처지로 머물러 있습니다. 이러한 신세를 면하려면 어떤 입장과 자세가 필요하겠습니까?


[대담]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이 살아온 역사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민족은 영원하고 분열은 한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누구나 영원한 민족주체적 입장에 확고히 서서 외세의존적분렬세력에 대항하여 민족을 지켜야 합니다.

반만년의 오랜 기간 하나의 민족, 하나의 강토에서 살아온 우리 겨레가 부모조상들의 유골이 묻혀있는 우리나라. 우리강토를 지켜가느냐 외세에게 먹히느냐 두입장에서도 우리 겨레, 우리 강토를 지키는 것이 정의이자 진리입니다.

현시기 북과 남, 해외에서 외세와 외세의존적 분렬세력들에 대한 총공세로 외세의 주범인 미제를 몰아내는데 모든 부문, 모든 계층에서 떨쳐나서야 합니다. 동시에 미제에게 기생하는 극소수의 극우보수세력을 분리시켜 인민대중들로부터 고립시켜야 합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제시한 고려민주련방제 기치아래 우리 민족이 이루려는 통일은 자주, 평화, 민주적 방법으로 세계가 칭찬하고 환영하고 있는 통일입니다. 우리 모두 자주통일, 반전평화, 민족대단합의 기치로 조국통일이란 성스러운 과제를 실현하는데 모두가 떨쳐나서야 할 때입니다.

(질문 5) 마지막으로 우리 북남 해외동포들이 6.15시대를 맞이하여 민족공조로 자주적 평화통일을 향해 노력하고 있으나 미제와 이에 편승한 사대주의 세력이 방해하여 왔습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어떤 방도를 제안하여 주시겠습니까?

[대답] 지금의 정세는 일찍이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전민항쟁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조국광복의 성업을 이룩한 것처럼 전민족이 떨쳐나 미제를 몰아내는 항전을 벌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북과 남, 해외를 막론하고 남쪽에서도 모든 부문, 모든 계층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미제국주의세력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민중의 생존권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서 있는 위치에서 미제침략세력의 각을 뜯어내는 방식으로 전민이 떨쳐나서야 할 때라고 봅니다. 미군주둔비부담반대, 미군기지 평택이전이 아니라 미군을 제소굴로 철수시키는 투쟁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여러 각도에서 미제의 침략세력을 약화시키고 몰아내는 데로 초점을 맞추어 각지의 군사기지철폐투쟁, 직도미군폭격장배격, 이라크에 파견된 자이툰부대의 철수투쟁, 도시와 농촌에서 <<한미자유무역협정>>체결을 반대하는 투쟁도 반미투쟁으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그밖에 <<국가보안법>> 철폐투쟁과 역사바로세우기투쟁 등으로 극우보수세력의 입지를 말살, 차단하는 투쟁으로 외세와 사대의존세력을 각개 격파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날 북과 남 해외동포 7천만겨레의 운동은 조선민족 대 미국과의 대결입니다. 민족주체적 력량은 날이 갈수록 확대강화되고 외세와 사대의존세력은 그 처지와 입지가 갈수록 한쪽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면 그 어디서나 모두가 힘을 모아 떨쳐나서 미제와 그 주구세력을 고립시켜 각을 뜯어내여 우리 나라, 우리 강토에서 몰아낼 것을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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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모 선생에 관한 보도(1999년 월간 말 10월호) 대구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손성모(70)씨의 이름도 사면대상에 들어 있지 않았다. 손씨는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무엇을 하던 일등을 놓쳐본 일이 없었던 그는 배움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아 전라북도 이리 등지에서 고용살이를 하면서도 어렵게 고학해 서울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듬해 발생한 전쟁은 손씨와 그의 가족들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고학하며 모은 돈으로 출가한 누님에게 논 서 마지기를 사주면서 "어머니 환갑준비는 돌아와서 내가 할께"라는 말을 남기고 의용군에 입대한 신씨는 그 길로 가족들과 생이별을 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김일성 대학에 입학해 역사를 전공했다. 이후 함흥공과대학 군정대학에서 역사선생으로 교편을 잡았던 그는 80년 전남 해남을 통해 남파돼 30년만에 이남 땅을 밟았다. 하지만 이듬해에 체포되어 87년 10월까지 무려 6년 8개월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동생이 전쟁통에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누님 손성례씨는 정보과 형사를 통해 동생의 생존소식을 알게됐다. 손씨가 간첩혐의로 체포돼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과 함께.

남매는 노인이 된 모습으로 교도소 면회실에서 다시 만났다. 손씨의 누님과 조카들이 면회도가고 편지왕래를 통해 뒤늦게나마 혈육의 정을 나눴지만 가족과 친척들에 대한 수사기관의 감시는 이러한 가족애마저 오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손씨는 자신 때문에 친척들마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했다.

아흔이 다돼 가는 누님의 손을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잡아보고 싶어했던 그의 바람은 이번에도 좌절되고 말았다.

***김중종 선생에 관한 보도자료(조선중앙통신 2003년 8월13일) 비전향장기수 김중종에게 언어학박사학위 수여

 (평양 8월 13일발 조선중앙통신)불굴의 통일애국투사 비전향장기수 김중종에게 그가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긴 후 자기의 연구성과를 공고히 하면서 한자이름으로 된 지난 시기 우리 나라의 인명,지명,관직명 등을 연구분석하고 고유한 조선말로 표기한 론문 <력사의 이끼를 벗겨 본 옛 우리 이름말>을 완성하여 내놓음으로써 우리 말의 주체성과 민족성을 살리는데 기여한것으로 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언어학박사학위가 수여되였다.
 12일 만수대의사당에서 진행된 수여식에서는 곽범기부총리,비전향장기수 홍경선 등이 축하연설을 하였다.
 김중종은 어머니당의 품에 안기여 인간의 참된 삶을 누리는것만도 더 없는 행복인데 오늘은 꿈에도 바랄수 없었던 박사의 학위까지 받아 안은 영광에 대하여 격정에 넘쳐 말하면서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이시야말로 우리모두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며 위대한 스승이시라고 강조하였다.(끝)

[김중종 선생에 관해 조선신보가 평양서 보도]

【평양발 김지영, 강종석기자】 감옥생활 29년, 출옥후 《보안관찰법》에 의하여 통제된 생활이 11년. 김중종선생(74살)은 남조선에서 살던 40년을 《좁은 감방》과 《넓은 감방》에 비유하여 말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 가는지 몰랐거든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정보를 입수하는데 제한을 받잖아요. 그런데 장기수들뿐 아니죠. 일반시민들도 큰 차이없이 비슷비슷해요.》

 특히 북의 정책로선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였다. 변화되는 조선반도정세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수 없었다.

 《봉남통미란 말을 쓰면서 북이 남과의 관계를 막아 놓고 미국과만 일을 추진한다고 불만을 터뜨리는데 그 진뜻을 정확히 리해 못했거든요. 례컨대 북의 대미정책을 운운하지만 그렇다면 자신들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당당했던가. 우물안에 있으면 하늘을 쳐다 보기전엔 모르는거예요.》

 북남공동선언의 내용을 보고 깨달았다.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선언이 자신의 힘과 지혜에 대한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지각변동이 일어 났어요. 분단의 장벽에 금이 간거예요. 미국의 힘이 아무리 강대하다 해도 이제는 돌이킬수 없어요.》

 비전향장기수의 송환을 앞두고 김중종선생은 국회의원, 기업가 등 사회의 지배층이라 불리우는 사람들과 접하는 기회가 있었다. 국가정보기관에 종사한바 있는 《큰 인물》의 저녁대접을 받은적도 있다.

 《지배층이라 해도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그래요. 어떻게 하면 북측 사람들과 손 잡고 가깝게 지내느냐. 그걸 생각해요. 민족사의 전환국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보자는거예요. 일반시민이야 두말할것 없지요. 예속경제로 인한 생활불안에서 벗어 나는 길은 민족단합이고 통일이지요. 그들의 집에 가보세요. 김정일장군님의 초상이 모셔 져 있어요. 평양상봉의 신문을 그대로 붙여 놓으면 그렇지, 그걸 누가 막을수 있어요.》

 날로 고조되는 자주통일의 기운. 오늘의 정세는 8.15광복후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온 겨레가 떨쳐 나선 그때를 방불케 한다고 그는 지적한다.

 《이번에는 미국도 제동을 걸지 못할거예요. 만전쟁을 일으키고 유고폭격을 강행한 미국이 왜 북을 건드리지 못할가요. 우리에게는 자주로선을 안받침하는 막강한 힘이 있는거예요.》

 1961년 김중종선생이 체포되였을 때 그의 부친이 서대문감옥을 찾아 와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내 나이 17세에 아버지가 항일투쟁을 벌리다가 체포되여 38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 비운을 겪더니 60세 못미쳐 〈36세의 아들〉이 〈간첩죄〉로 사형을 맞는 력사의 액운은 이다지도 나를 괴롭히나.》 지금은 지하에 계시는 부친의 영상이 오늘의 김중종선생을 사로잡고 있다.

 《수난의 민족사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어요. 통일을 위해 감방에서 해방된 내 여생을 깡그리 바칠거예요. 외세를 물리쳐 조국을 옳바로 떠받들려던 우리 가문의 3대에 걸치는 분통한 울분을 기필코 풀어야 말거예요.》(끝)[ 조선신보 00 / 10 / 04 ]


[관련 참고자료]

2000년 6월15일 남북공동선언 합의에 의해 같은 해 9월2일 북으로 송환되는 비전향 장기수 확정 명단 62명은 다음과 같다.(가나다순,이름/나이/북한주소/가족/복역기간)-(나이는 지금 아래 연령에 6세를 합하여 지금 나이로 계산해야 함)

[비전향장기수 송환 확정 명단]

1△강동근/85/군생활로 주소 없음/가족 없음/37년
2△김명수/79/함남 함흥/부인 이순자/37년
3△고광인66/전북 고창/불명/34년
4△김동기/69/평양시 선교구역/부인 김은옥/34년
5△김석형/87/평양시 보통강구역/부인 김옥희/30년
6△김선명/76/경기양평/없음/45년
7△김영달/67/불명/아버지 김중의/30년
8△김영만/72/전남 구례/가족 관계 불명/30년
9△김영태/71/평북 정주/부인 김금옥/34년
10△김용규/평양시 중구/가족 관계 불명/34년
11△김용수/70/자강도 강계시/부인 서종복/27년
12△김우택/81/황해도 봉산/가족 없음/40년
13△김은환/71/평양시 형제산구역/부인 김보배/31년
14△김익진/71/강원도 원산시/부인 한애자/31년
15△김인수/77/황해북도 사리원/부인 한성복/36년
16△김인서/75/평남 덕천/딸 화심/34년
17△김종호/88/평양시 모란봉극장 인근/부인 김경옥/31년
18△김중종/75/평양시 모란봉구역/부인 장성실/29년
19△김창원/67/서울/부인 김복화/31년
20△류한욱/90/평북 철산/부인 차계숙/37년
21△리경찬/66/개성 장풍/부인 박명무/35년
22△리공순/67/함남 함흥시/부인 김덕화/33년
23△박문재/78/평양시 선교리/가족 관계 불명/28년
24△박완규/72/평양시 용정구역 부인 오덕실/33년
25△방재순/84/강원횡성/38년
26△석용화/현재 부산거주
27△손성모/71/평양시 대성구역/부인 방희동19년
28△송상준/70/부산 동래/가족 없음/36년
29△신광수/72/평양시 중구역/부인 리원구/15년
30△신인수/83/함북 김책시 상화동/부인 고목자/30년
31△신인영/72/평양시 순안군/부인 리영화/32년
32△안영기/72/평양시 동대원구역/부인 계용욱/38년
33△양정호/70/함북 청진시/부인 신기자/31년
34△오형식/69/강원도 원산시/부인 리금자/31년
35△우용각/72/평양시 동대원구/부인 한성옥/42년
36△유연철(89/평양시 동성동/부인 김봉희/27년
37△유운형/77/함남 이원/아버지 유영근/34년
38△윤용기/75/강원도 원산시/부인 채규환/40년
39△윤희보/84/황해도 신천군/부인 진순희/25년
40△이경구/71/불명/불명/38년
41△이세균/80/평양/없음/30년
42△이재룡/57/평남 숙청군/형 이재현/30년
43△이 종/90/황해도 안악/부인 김 영/25년
44△이종환/78/경기도 개성/가족 관계 불명/43년
45△임병호/86/평양시 중구/부인 김성녀/32년
46△장병락/67/강원도 고성군/부인 이춘경/38년
47△장 호/81/평양시 모란봉구역/부인 김정희/32년
48△전 진/78/전북 옥구/가족 관계 불명/38년
49△전창기/83/평북 삭주군 삭주면/부인 윤순중/23년
50△조창손/72/강원도 고성군/부인 권순옥/30년
51△최선묵/73/함흥시 중앙동/부인 김서분/38년
52△최수일/62/강원도 통천군/부인 백농녀/35년
53△최하종/74/평양시 외정구역 부인 김재숙/36년
54△한백렬/81/경기광주/25년
55△한장호/78/평남 순안군/가족 관계 불명/39년
56△한종호/84/함북 함흥/딸 두명/15년
57△한춘익/76/함남 함흥/형 춘경/29년
58△함세환/69/황해 옹진/누님 숙녀
59△홍경선/76/함남 단천시/부인 김복실/33년
60△홍명기/72/평양시 순안군/부인 정순녀
61△홍문거/80/평양 선교리/부인 이옥신/37년
62△황용갑/77/경남 하동/가족 관계 불명/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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