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문동환목사 2019년 3월9일 서울서 서거,향년98세/3월에 우리 곁을 떠난 해외동포 애국자들-김재화, 최진환, 이보배, 이희세 선생 > 인물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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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문동환목사 2019년 3월9일 서울서 서거,향년98세/3월에 우리 곁을 떠난 해외동포 애국자들-김재화, 최진환, 이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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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9-03-09 22:44 조회1,292회 댓글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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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민족통신 종합]재미동포 문동환목사가  2019년 3월9일 서울서 서거했다. 향년98세. 문목사는 미주에서 생활하면서 6.15미국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비롯하여 조국의 자주적 통일운동을 위해 한생을 바치다가 딸의 초청으로 한국에서 지내시다가 소천했다. 고인은 부인과 딸 문영미(이한열기념관 학예실장)·사위 정의길(<한겨레>기자)와 함께 살았다. 나머지 2남1녀의 유족들은 미국에서 살고있다. 한겨레신문이 관련보도는 상세하게 보도했다. 원문 그대로 여기에 게재하여 소개한다. 장례일정등은 입수하는 대로 보충하여보도할 예정이다.[민족통신 편집실]








문동환영안실.jpg

문동환영안실01.jpg



문동환별세20190309.JPG
[사진]고 문동환 목사



문동환통일운동.jpg
[사진]6.15민족공동위원회 대표들-왼쪽부터 고인이 된 곽동의 해외측 대표, 
고인이 된 안경호 북측대표, 백낙청 남측대표,  고인이 된문동완 해외측공동대표



‘살아있는 근현대 박물관’이 갔다.
 문동환 목사가 9일 별세했다. 향년 98세.


고인은 해사스런 귀공자형의 외모처럼 편하게 한평생을 살 수도 있었지만, 한맺힌 민중들을 놓을 수 없어, 그 자신의 표현대로 ‘떠돌이’를 자청한 삶을 살았다. 또한 그는 일제시대 북간도 한인사와 독립운동사, 교육사, 민중사, 민주화운동사, 기독교사를 온몸으로 겪은 인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100살이 다 되도록 과거에 머물지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혁명하면서 거짓들과 싸운 종교개혁가이자 공동체적 삶을 실천하려는 공동체운동가였다.

고인은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독립신문> 기자이자 목사였던 부친 문재린과 여성운동가였던 모친 김신묵의 3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인은 그곳에서 형 문익환, 윤동주 시인 등과 어린시절을 보냈다. 명동촌은 한국적 개신교의 맹아였을 뿐 아니라 민족교육의 산실로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됐던 곳이다. 명동촌은 문동환의 고조부인 문병규와 김약연 등 네가족 142명이 함경도에서 두만강을 넘어 옛 고구려땅에 정착해 개간했던 한인집단공동체였다. 그곳에 세운 명동학교에서 문익환, 윤동주, 나운규 등이 공부했고,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된 뒤 용정에 연 은진중학교에서 문동환과 안병무, 강원용 등이 수학했다. 은진중 교목이 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 설립자인 김재준이었다.

고인은 어린시절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김약연 같은 이가 되고싶어 목사가 될 꿈을 꿨다고 한다. 평생의 사표였던 김약연은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자 목사였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기 전에 명동촌 뒷산에 권총 연습을 할 은거지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다.

고인은 1938년 은진중학교를 마치고 은사인 김재준의 안내로 일본에 유학해 도쿄신학교와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고향 용정 만보산초등학교와 명신여중고에서 3년간 교사로 재직했다. 해방 후 1946년엔 김재준이 설립한 조선신학교를 1년간 다닌뒤 경기도 장단중학교와 서울 대광중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에 회의가 생겨 7년간 씨름했다고 한다. 그러다 형 문익환과 여행 중 경상도 금오산을 지나면서 너무도 함들게 살아가는 민초들을 보고서 ‘고난받은 민초들의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는 게 구원’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훗날 회고한바 있다. 그는 그 이후 거제도 아양리라는 농촌으로 내려가 1년간 목회했다.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1951년 미국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고 1961년 모교인 한신대 교수로 초빙받아 귀국길에 올랐다. 유학중 만난 평생의 반려자인 미국인 부인 페이문(문혜림)과 함께였다.

부패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박정희 독재가 시작된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고인은 남다른 교육관으로 학교 현장과 학생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특히 번지르르한 말만을 배우지않고, 제대로된 가치관을 심어서 신앙인이기에 앞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이끌었다.

‘아무리 교실에서 그럴 듯한 소리를 하고, 강단에서 감명 깊은 설교를 한다 해도 그의 생이 사람답지 못하면 자신과 남을 위해서 비참한 일이다. 한국에 있어서 비극 중의 비극이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큰소리를 하는 사람일수록 흔히 그 생이 더 냄새가 난다는 것. 대중 앞에 나설 때, 앞에 마이크가 많은 사람일수록 뒤에서는 연막을 더 쳐야 하다는 사실이다.’

그가 1972년 낸 <자아확립>이란 책의 서문에 쓴 글이다. 그는 토론하고 발표해 자기 생각을 가지고 이를 실천케하는 새로운 수업방식을 도입했다. 그의 제자였던 정호진 목사는 “고인의 <세계와 나>라는 수업은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철저하게 학습자가 중심이 되는 혁명적 전환으로 스스로 세계와 역사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이를 실천케 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했다”고 회고했다.


1987년 2월 전국적으로 벌어진, 군부 정권의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군 추모와 규탄 시위에 참가한 문동환 목사(가운데)가 부인 문혜림(왼쪽)·형수인 고 문익환 목사 부인 박용길(오른쪽)씨와 함께 종로 거리에서 입마개를 쓴 채 최루가스를 견디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7년 2월 전국적으로 벌어진, 군부 정권의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군 추모와 규탄 시위에 참가한 문동환 목사(가운데)가 부인 문혜림(왼쪽)·형수인 고 문익환 목사 부인 박용길(오른쪽)씨와 함께 종로 거리에서 입마개를 쓴 채 최루가스를 견디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고인의 특별한 점은 관념에 머무르지않고 늘 실천이 뒤따랐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이 삶을 배우기 원했고, 캠퍼스 자체가 민주적 삶의 체현장이 되도록 했다. 이를 위해 그가 학생과장으로 재직 때 학생, 교수, 직원, 교수부인들까지 동원해 만든게 캠퍼스생활위원회였다. 이 생활공동체를 통해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평등의식과 참여의식을 배우고 실천케 한 것이다.

그가 주도적으로 만든게 선교신학학대학원이었데, 이곳에서는 세가지를 통해 배우도록 했다. 첫째 선각자의 글과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둘째 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배우고, 세째 현장에서 일하면서 사회현실과 부딪친 것을 다시 대화하면서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가 교수로 있으면서 1972년 만든 ‘새벽의집’ 공동체도 실천의 장이었다. 새벽의집에서는 6가정 50여명이 개인 집들을 처분하고 가족연합체를 만들어 살았다.

그러나 전태일의 분신과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 파동과 유신헌법 공포는 그를 더욱 세상으로 이끌어냈다. 삭발을 하며 투쟁을 하다 1975년 해직됐던 그는 동료 해직교수인 서남동, 안병무, 이문영 등과 갈릴리교회를 설립해 민중교회의 모태가 되게 했다. 1976년 3월1일엔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이문영, 서남동, 문익환, 이우정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해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22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와이에이치(YH)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가 유신정권의 몰락 시점에 출옥해 복직했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폭압이 시작되자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풀려나 미국에 온 김대중을 만나 도움을 준 인연으로, 1988년 평화민주당에 수석부총재로 참여하고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3당합당에 반대해 정계에 은퇴한뒤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2013년 귀국했다.

그는 90대 중반까지도 집필 작업을 하면서 끊임없이 예수정신을 드러내려 애썼다. 그 대표적인 것이 4년전 출간한 <예수냐 바울이냐>다. 그는 책에서 바울이 예수의 본정신을 망친 인물로 질타했다. 예수를 메시아로 만든 바울의 영향을 받은 콘스탄티누스의 황제신학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권력과 야해 식민지 쟁탈과 이방인 살육에 앞장서면서 메시아와 왕조, 절대권력, 권위주의, 선민의식을 거부한 예수의 정신과는 다른 종교제국주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진보 개신교계에도 쓴소리를 아끼지않았다. 그는 “80살이 지나면서 민중신학에도 회의가 생겼다”면서 “한자리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민중을 민중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화 <변호인>을 본뒤 “우리가 있는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우리 주변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 노무현이 거기에 응한 것처럼 우리도 응해야 이 험악한 세상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했다.

고인은 마지막까지 공동체적 삶에 대한 열정을 잊지않았다. 그는 공동체를 이루려했던 자신의 꿈을 실현해가는 서울 수유동 밝은누리를 방문해 최철호 목사 등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들끼리만 멋있게 사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기존의 잘못된 삶을 단호히 끊은 젊은이들이 집단적 예수, 집단적 모세가 되어 새로운 문화권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그의 한신대 제자였던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는 “안으로는 동병상련의 따뜻한 심성을 지닌 분이었다”며 “밖으로는 대형교회의 성장 축복 신앙을 맘몬 숭배로 규정하고 현대사회 악의 본질을 분명히 깨닫고 이를 끊어내기 위해 개인과 집단의 단호한 회개를 주창하며 새벽을 열었던 분”이라고 추모했다.

고인은 부인과 딸 문영미(이한열기념관 학예실장)·사위 정의길(<한겨레>기자)와 함께 살았다. 나머지 2남1녀의 유족들은 미국에서 살고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885240.html?_fr=mt2#csidxc06133eefb98304bd6362a9e75a2cc6 


 

3월에 우리 곁을 떠난 해외동포 애국자들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종합]39 재미동포 문동환목사가 서울에서 서거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달에 세상을 떠난 해외동포 애국자들을 떠올려본다. 


해외동포 애국자들이 3월에 타계한 인물들은 재일동포 한통련 고문을 지낸 김재화

선생(1903.1.5 경남 밀양출생~1937.3.1) 타계했고,


재미동포 민족주의자 1호로 알려져 최진환박사(1936.6.19 경북 청도출생~2012 327) 운명했고


임창영박사 사모이며 재미동포 여성운동가였던 이보배 여사(1912 원산에서 출생~2000.3. 29) 운명했고


6.15유럽지역위원회 상임대표였던 이희세 선생(1932 충남 예산출생~2016 329) 서거했다.(끝) 


 


[이 게시물은 편집실님에 의해 2019-04-06 02:39:58 사회, 문화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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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양은식님의 댓글

양은식 작성일

목사님 한국으로 떠나신후 소식이 뜸하더니 이렇게 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바라고 바라시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소천하시어 저희들은 슬픔을 감출수 없습니다. 6.15조직을 통해 서울-평양을 오가며 남북이 하나됨을 위하여 노력하여 주신 그 노고와 업적은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희 함께 할 것입니다.

미국과 한국에 계신 유가족 여러분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미국 캘리포니아 컬버 시티
양은식 삼가 올림

강은홍님의 댓글

강은홍 작성일

목사님 민족통신 통하여 슬픈 소식을 알게되었습니다.
오랜동안 존경하는 PCUSA -미국장로교회 소속 목사님으로서
미국과 한국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신 선배님이십니다.
문혜림 사모님께 위로의 말씀을 올립니다.

뉴욕 오아이에서
목사 강은홍 삼가 올림

노길남님의 댓글

노길남 작성일

목사님 비보를 접하고 많은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6.15미국위원회가 처음 발족하였을때 목사님께서는 상임위원장님으로 그리고 6명의 공동위원장 중 한사람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안건들을 토론하며 통일운동을 위한 해외동포들의 지위와 역할에 대하여서도 주고 받은 이야기들이 무수하게 많았습니다.

2005년 3월1일 중국심양에서 6.15해외측위원회가 발족되는 역사적인 모임에서도 우리들은 목사님과 함께 많은 대화들을 주고받았습니다. 이어서 3월4일 금강산에서 열린 6.15민족공동위원회 결성모임에서도 목사님과 많은 사안들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 때의 주고 받은 사안들이 지금에 와서는 풀렸졌지만 그 과정에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아직도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찬 미주운동진영내부의 어려움이 지금도 상존하고 있습니다. 저 세상에 가시드라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산자들에게 지혜를 줄수 있는 기도를 부탁합니다.

오랜동안 못만났던 문익환 목사님을 비롯하여 김구선생, 장준하 선생, 려운형 선생 등과 만남을 통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기원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사상과 이념은 다르지만 우리민족의 얼을 세상에 과시해 오며 우리민족 자존을 위해 온 세상에 이름 떨쳐주신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 국방위원장님과의 만남에서도 산자들의 단결단합을 위하여 의논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언젠가 뵐날을 기약하면서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로스엔제레스에서
노길남 삼가올림니낟.

손세영님의 댓글

손세영 작성일

민주 통일운동의 선구자
문동환목사님 영전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 에서
손세영

뉴욕동포님의 댓글

뉴욕동포 작성일

죽는다는 것
-위대한 죽음 문동환

김 창 규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는 것
숨을 쉴 수 없다는 것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
모든 지상의 화산이 잠잠해지고
우주의 어느 모퉁이 별이 되는 것
별을 하나 만드는 것
죽음이다

젊은 그대에게 수유리 사월
소나무 나무사이 통곡의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자아확립에 대해 배웠다
우주의 나무가 되어
달빛소리를 창가에 매달아 두고
아침 종소리를 들으며
위대한 신에 대한 묵상을 한다

오, 하나님 독립운동가들이 겪었던
분단 조국의 오늘을 사는 우리
깨달음의 선각자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서울 한신대학
거시서 당신을 보내야 하다니
그게 작별이라는 것이구나
오오 나의 자아여

늦봄이 먼저간 백년의 세월 속에
아흔 아홉해의 달과 별과 바람의 속삭임
당신의 손을 잡아 본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이른 봄 나비를 본 눈에 빛나는 눈물
오늘 당신이 살던 집을 떠났다는
슬프고 슬픈 소식은
갈릴리의 봄 고통
끝이 아니라는 것

사무총국님의 댓글

사무총국 작성일

조국 남녘땅의 민주화를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 싸우다 옥고를 치루셨고,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선구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문동환 목사님은 오늘날 세인들의 지탄을 받는 숱한 기독교 목사들과는 완전히 구분된,  진정한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사셨습니다.  참 애국자 문동환 목사님을 추모합니다.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임춘성 회장과 임원진 올림

현준기님의 댓글

현준기 작성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현 준 기 삼가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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