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세곤-②]재미구국 향군 창설(1973.7.15) > 인물탐방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4년 3월 28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인물탐방

[고세곤-②]재미구국 향군 창설(1973.7.15)

페이지 정보

작성자 minjok 작성일06-01-14 00:00 조회12,293회 댓글0건

본문

재미 구국 향군 창설(1973.7.15)

군정과 특권 세력은 민주자유를 빼았고 민중을 허탈 속 에 빠뜨렸다. 군정과 특권층의 유착으로 민중은 생존에 위기에 봉착하였다. 군사 팟쑈 는 정치에는 무능해서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민중과 양심 세력은 하나로 결집되고 학생과 종교계의 선각자 들 까지 전방으로 나왔다. 유신은 종교도 통제했다.

<##IMAGE##> 나치가 만능의 권력을 휘둘렀을 때 종교지도자와 신도들은 조용했고 나라가 망했든 역사의 교훈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한국 판 히틀러 정권은 자신을 고립하는 왕조체제를 한국에서 재현하고 있었다. 유신체제는 무소불위로 권력을 남용 독재자 개인의만족을 허용했다. 정치냉소 주의는 일반 사회를 뒤덮어 갔다.

손 바닥으로 하늘을 가릴수 없다. 이 악의 권세에 소수 민주 구국 향군은 일어났다. 유신 체제의 한국 군부대는 민주양심의 소리를 완전 봉쇄 해놓고서 하나의 인간 우상에 절하고 있었다. 주종관계로 계급사회를 만들고 군은 충성파 만 양성했다. 망국적인 처사로 군은 완전 분열되었고 하나회의 태동은 이 때 시작 되었다.

군의 요직은 지역을 전적으로 고려하는 지역 군대화 로 되어갔다. 특정인과의 친근 관계는 군의 요직을 갖는데 일차적인 관문이었다. 민주 군인이나 특정지역의 출신들은 능력의 대소를 불문코 제거 대상이거나 좌천 대상이었다. 군의 구성원은 그 나라 민중이다. 그 나라 자녀들의 결합체이다. 군대야말로 공평해야 하고 인권이 있어야 하고 지역을 초월해야하고 초당적이어야 한다. 국가 위기에 지역별로 동원령을 한다면 그것은 지역 방위군이지 국가의 군대라 할 수는 없다.

군을 신뢰하는 이유란 국민 전체를 위해 몸을 바치기 때문 일 것이다. 특정지역을 위해 군에 온 사람은 없다. 조국이란 공동체엔 자기 민족이니 보호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선진제국의 군대는 정치로부터 자유를 행사 한다. 군 과 정치는 동일 선상에서 상호보완이 관례가 되어있다. 군이 민중을 배신할 때 민중의 자녀들이 독재권력을 타도할 의무를 갖게 된다. 군이 민주주의를 말살 한다면 그것은 민중타살로 보고 적에 대한 개념을 재 검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역사의 큰 부분은 군인의 발걸음 이 꼭 남아 있다. 그들은 자기민족을 위해 꼭 피 흘려 싸웠다. 남과 민족을 위한 역사 창조 의 희생이었다. 근대 민주주의 초석이 되고 져 민주군인들의 힘을 모았다.

1972년 유신선포에 분노한 소수의 군인들은 뉴욕의 삼복정에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주로 미 동부의 예비역 장교들이고 참전 경험자가 많았다. 20명의예비역장교가 참가해서 재미구국향군을 창립하게 된다. 누구한 사람도 강권에 나온 사람은 없었고 자원해서 온 것이다. 교포사회는 독재에 항쟁하는데는 약했다. 거의 회피적이고 무관심이라 동지규합이란은 생각할 수 없었다. 오래 동안 군사문화에 젖어서 옛정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 또 민주주의를 포기한 사람 서방식 민주주의가 체질이 아니라는 사람, 무서움에 떠는 사람, 가지 가지 이었다.

자유의 쟁취는 늘 그 민족의 혁명적 투쟁에서 왔다. 이런 산 역사마저 무시하는 수구주의자는 민주화운동을 혼란이요 또 이적행위라고 남북을 분간조차 못했다. 그들은 군사독재의 쇄뇌 공작에 넘어졌다. 독재의 인간들은 한결같이 선을 향한 투쟁은 기피하고 무관심과 기회주의에 빠져갔다. 한국 정보부 는 외교관으로 가장하고 미국에 침투해서 공포와 협박으로 민주인사를 위협하다 미국법망에 걸려든 일도 많았다. 방대한 재산도피나 권력자들의 도피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군사독재에 반기를 들은 군인들은 솔직함과 담대함으로 단결되고 옛정으로 뭉쳐 이념의 동지로 일사 불란 체제를 갖추었다. 사회운동에서는 중구난방이 문제였지만 군은 위계 질서를 지킬줄 알았고 상대방을 존경했다. 직선적인 성품과 상호 신뢰가 투쟁에는 도움이 되었다. 민주화물결을 차단 하고자 미국까지 정보요원을 침투하고 정보망을 가동하느라 그 예산의 낭비도 많았고 민주운동가에 대한 탄압 방식은 다양하게 접근 해왔다. 민주투사들을 용공으로 매도하는 것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당일의 창립선언문은 군의 민주화로 한국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골자였고 6,3 사태의 주역이든 김 중태가 투쟁선언문을 낭독했다. 김 중태는 서울대학생운동의 첫 주자여서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하다 체포되어 박 정권에서 추방되어 망명 중이었다. 임박사의 축사도 있고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구국향군이란 명칭으로 사령관 최석남 (육사2기) 부사령관 장석윤(육사11기), 본인 참모장 고세곤(육사15기) 로 집행부를 구성하고 각 도시마다 지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상부조직은 쉬웠으나 하부조직이나 지방으로 갈수록 조직은 더 어려웠다. 민주인사는 지방에서는 더 고립 되어 있었다. 미국전역 에 교회가 생겼고 반정부를 조심하라는 정보부의 흑색 선전 은 시골일수록 잘 먹이고 있었다. 당시 정보부는 교회 안에 첩자를 두고 있어 반정부인사를 감시했다. 민주인사는 교회에서는 배척을 받아야만 했다. 우리 민주인사들 은 인권 과 자유 나 민주쟁취는 기독교인의 사명이라고 생각 했다. 큰도시 에서는 정보원도 발각을 두려워 했다.

그러나 워싱톤 은 크게 달랐다. 미국 수도 요 정부가 있어 그 위반자는 형벌을 받기 때문이다. 미국은 인권의 말살이나 고문 도청 구타는 초고 형 에 해당하고 있다. 인권 보장의 나라이다. 평등을 해치는 인종 차별이나 민권 유린은 최고형을 받는다. 미국의 건국 이념이요 자유의 젖줄이다. 구국 향군 사령관 최석남은 사학자로 이순신 장군 연구로 이순신 상하권의 저자요 정치세계와는 전연 관심과 인연이 없는 소탈한 선비 였다. 이순신 연구에서도 이순신의 민중사상에 역점을 두었다.

육군 지휘관을 거친 최석남 은 청빈 락도 하고 민중적 인 삶으로 동지를 사랑 했다. 사학자로써 학문 연구가 그의 큰 락 이 었다. 근대판 선비로 학구파 로 늘 책을 붓들고 투쟁생활 의 고달품을 잊어 갔다. 이순신 연구는 그의 필생의 업적이었다. 육군에서는 통신감을 두 번 역임했고 박정희 대통령과는 육사 동기생이다. 군사혁명 후 군이 권력의 보호장치로 전락하자 그것을 비판하다 동기생의 의리를 끊고서 권력 과 대결하다 독재의 압력에 못 이겨 브라질로 추방당한 것이다. 박 정권은 반대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가차 없이 군에서 축출했다. 당시는 한번 군에서 도태된 사람은 생존의 위험이 따랐다. 민주인사와의 접촉은 제일 큰 죄목을 걸어 바로 예편으로 연결 시켰다. 유신체제는 거대한 권력을 무절제해서 국민을 늘 절망으로 이끌고서 민중 과 민주진영을 계속 압박하고 회유했다.

지성인과 엘리트도 유신권력과 결탁하고 그 이익을 나누는데 동참했다. 교육은 호구지책만을 위한 기술자양성으로 인간교육은 없어 지고 지성이나 과학지식은 정상인의 사고를 버리게 하여 현실과 타협하고 권력의 시녀로 지식을 파는 상인으로 만들어 갔다. 한국사회는 오도된 가치관에 혼란과 비탄에 빠졌고, 인간은 경제동물이 되어 갔다. 우리는 제일차 투쟁목표로 뉴욕 UN빌딩 앞 광장에서 데모로 시작했다. 유신에 정면도전하는 데모로는 너무나 미약한 듯 비록 6명 만 나왔으나 전원 예비역장교들의 참가인고로 상당한 의미를 주었고 군 출신의 최초유신반대운동이라는데 주목을 끌었다. UN이란 세계기구에 유신의 부당함을 알리고 국제적으로 호소 하였고 뉴욕 타임스는 이를 크게 기사화 했다. 동시에 뉴욕한인사회 의 20만 교포들에도 큰 충격이 되었고 동민에서 깨어 나는 기회가 되었다. 당시 뉴욕교포는 20만이나 되었어도 워낙 한국과의 연관자가 많아 이해관계에 민감해서 조국문제에는 등한시했다.

1973 뉴욕 교포사회는 유신체제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독재의 틀 안에서 꼼짝 못하는 정치의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그 당시 미국 콜 럼비아 대학신문은 유신헌법이 불법임을 세계에 알렸다. 미국의 자유 언론은 유신은 일당체제로 가는 팟쇼 헌법이라고 철페할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유신 선거는 거의 완전하게 독재자 혼자의 깨임 이어서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이 부정 선거는 자유세계에 웃음거리로 비치였고 그런 연고로 홍보는 급한 물살을 탔다. 뉴욕타임스는 한국민주주의 종말이라는 사설로 유신체제를 비판했다. 통일 대의원 선거방식은 서방세계의 기준에는 너무도 어리석은 속임수로 비쳤다. 국제사회의 비난은 빗발쳤다. 반대여론은 세계양심인사의 공감을 얻어갔다. 한국사회는 깊은 잠에 떨어져 갔다. 국내는 정보유출을 완전 밀폐했다. 일반사회는 좌절감이 팽배하여가고 냉소적이요 현실 도피가 급증했다.

민권이나 민주를 봉쇄한 연후 한국사회는 단조로운 군 대 부대 생활로 넋을 잃어 갔다. 그 사회는 죽은 무덤이나 다른 게 없었고 일률적인 행동 양식에 맞추는 규격의 시대가 되어 갔다. 동부 뉴욕에서 봉기한 구국향군은 첫출발부터 박정권의 표적이 되고 방해가 따랏다. 우리가 유엔 앞 데모에서 용기를 얻었고 그 깃발 의 봉화불이 꺼지기 전 이를 들고서 사령관 최석남 과 참모장 고세곤은 LA지부 조직을 향해 갔다 .

이 당시 반정부운동은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서 뛰는 것이 었다.. 정치경험이 전연 없는 군인출신들로는 비행기에서 이리 저리 궁리해도 아무런 묘수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희망을 걸었든 것은 LA는 항일의 후예들이 아직 건재한 때라 좀 기대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망상 이었고 반대로 군사독재의 아성이나 별반 차이를 못 느꼈다. LA는 미국의 동양이라 할 만치 아세아 풍이었고 그 영향이 커 가고 있었다. 한인사회는 그 중대한 본국의 유신 문제 만은 노코멘트 하는 무관심 지역이었다. 유신 독재의 정 보부는 완전 장악 상태라서 이들을 제치는데 엔 역부족 이었다. 미국 최대의 한인 인구 밀집 지역이라 지만 이념과 사상이 같은 동지란 희귀 할뿐 독재에 세뇌된 사람은 부지기수 였다. 발바닥이 아푼줄도 잊고 동분서주하고도 결론은 없었다. 찾다가 지쳐서 돌아 설가 망설이기도 했다. 마치 모래 속을 아무리 찾아도 나오는 것은 빈 껍데기 만 나왔고 민주동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멘 투 멘으로 접근도 해 보았다. 식당도 갔고 주유소까지 각 방면으로 수소문하고 마치 군대 수색작전을 방불케 한 것이다. 우리민족의 저력은 불의를 그대로 넘기지 않는 것과 불의와 싸운 항쟁의 역사는 찬란했다. 그 위대한 선열이 남긴 민족의 정기는 전연 찾아볼 수 없었고 민주화운동은 사면초가로 한국 군사독재의 장벽을 뛰어 넘지 못하고 있었다. 극도로 민주진영에는 인력의 가뭄지대였다.

한국의 어용신문은 정부의 흑색선전 의 앵무새 였다. 민주운동과 친북을 혼용했다. 한국 정부는 거의 행정권을 총동원해서 교포사회를 친 독재로 유도하고 민주화운동을 친북 운동이라는 분열책동을 강행했다. 교포사회는 침묵만이 미덕이라는 공개사회의 자유개념과 정반대되는 구시대의 논리를 펴고 있었다. 한국은 완전 유일 독재화로 굳어 가고 유신정권 의 전횡과 횡포는 천장부지로 커지고 있었다. 민주와 자유 운동에 연민을 보내는 사람까지도 의심을 받게 되었다.

박정권은 민주인사를 교포사회의 반항자로 렛텔을 붙이고 자기 위안을 얻어 갔다. 민족 분열은 깊어만 갔다. 해외의 민주인사는 교포사회의 주류에서 소외시켜 일방 통행식의 군정의 교포 사회가 되어 갔다. 유신독재 하나 만 강요하고 있었다. 73년 초 김상돈 선생 (전 서울 시장)이 동부에서 서부로 이사온 것은 미 서부에 민권 운동의 불길을 올리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김상돈과 이용훈, 차상달 은 초기 LA 민주운동의 리더들이다. 그 당시 김상돈 선생은 우리의 구국 향군 창설을 적극 지원 몇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군의 옛 동지들에게는 옛정으로 호소하고 민주주의 싸움은 결코 후회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주기도 했다. 전방 의 군인동지들 은 자기일 처럼 몇사람씩 대려 나온 것이다. 가장 우리를 실망시켰던 부류는 자기는 정치엔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권력이나 지위엔 관심이 너무 많은 것이다. 자유와 민주, 인권 이런 눈에 안 보이는 민족적인 이익엔 냉정했다.

민중구출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스러운 우리의 최대 과제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참 극소수였다. 5일간 밤낮으로 전력투구해서 지부 창설에 나온 동지가 20명이 되었을 때는 사령관 최석남 과 본인 참모장 고세곤 은 감격의 눈물도 흘렸다. 이날의 감격은 내 인생의 최대보람 이자 기쁨 이었다. 어느 날 밤은 육사 선배 유종호씨가 찾아와 격려를 해준 일은 영원한 기억으로 남았다. 유 선배는 민주화운동에 같이 참여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군의 후배 몇은 옛 정으로 밀어주었다. 군인에는 솔직과 강직이 생명이다. 명령 체제에서 익힌 수직관계로 지휘자엔 그대로 따르는 것이 큰 강점이기도 했다. 군인 동지들 은 의리냐 이념이냐를 저울질이 나 하고 또 공리공론이나 즐기는 말쟁이는 더 아니었다. 민주와 자유라는 대의를 쫓았든 사람들이었다. 구국향군의 서부지부는 민중으로부터 나왔다.

회의는 이정빈 목사의 축도가 있고 임원 선거에서 우리는 김일우(예비역대령)를 지 회장으로 선출했다. 최석남 사령관은 축사에서 이제 구국향군은 두 날개를 갖고 날 수 있게 되었다고 격려했다. 서부조직이 나오면서 군대 내에 소식이 퍼다. 그 날 밤 이 감격은 사라질 뻔했다. 호텔 방에 들어온 도적은 우리 민주운동에 관한 서류 일체와 가방까지 가지고 갔다 . 모든 의심은 LA 한국 정보부가 받아야만 했다.

유신 정부는 LA의 민주화 운동을 막고자 교포 사회 전반을 통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부를 창설하고 그 날밤 동부에 돌아와서 곧바로 뛰어든 사업은 동아 자유 언론을 돕는 운동이었다. 구국향군의 이름으로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기 시작 했다. 동아일보에는 군인의 조직으로는 구국향군 뿐이었다. 본국 신문에 군인들이 군사정부를 반대하는 성명서라서 나올 때마다 나는 감격했다.

군정당국은 신경을 곤두 세웠고 최석남 과 본인을 한국 보안사는 지명수배자로 체포명령을 내린 것이다. 왜냐하면 군인 민주단체의 성명광고는 독재의 아성을 침범했다고 보았고 군의 동요를 가장 두려워 했든 것이다. 당시보안사는 나와 최석남 을 납치하려했다는 비밀을 알게 되었다. 동아일보는 독재 정부의 언론탄압에 항쟁해 나갔다. 민족의 대변지요, 민주 양심을 지키는 신문이라서 유신 독재 유지론자 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정부는 동아 광고주에게 압력을 넣어 자진 광고 철수를 강요했고 동아는 경영난에 허덕이었다. 첩보부대의 난입으로 점령당하고 결국 폐간 조치를 당한 것이다.

인간 생명을 영위하는 것이 양심이라면 사회를 지키는 데는 신문이 있어야 한다. 그런 언론이 일개인의 정치 야욕 앞에 쓰러졌다니, 이런 엄청난 횡포는 민족역사에 최대 죄악으로 남게 되었다. 재미 구국향군은 사령관 최석남과 참모장 고세곤 두 사람의 이름으로 연속 광고를 실었고 독재 정부의 언론정책을 비판했다.

동아를 사수하여 민주화에 보탬이 되자는 우리의 충정이었다. 구국향군의 재정은 너무도 빈약해서 광고비를 오래동안 충당치 못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초기엔 전 민중들의 광고가 쇄도하다 유신독재의 권력의 횡포로 민중 의 의욕을 좌절케 했다. 동아일보의 횡사 는 한국사람의 보고 듣는 자유를 말살한 행위 였다. 독립과 민주 와 자유시민 의 유일한 희망을 봉쇄 하는 것이 었다.

당시 미국인 신부 시노트는 동아 언론을 살리는 데 끝까지 항쟁 한 유일한 외국 인이 었다. 그당시 광고 란에서 나란히 맞난 일도 있었다. 구후 우리는 지면에서 맞나고 미주투쟁 동지로 굳어저 갔다. 그후 시노트는 인혁당 사건에서 사형 당한 사람들에 대한 부당한 판결에 도전했다. 어떤 사망자는 시체도 못 찾았다. 왜냐면 시체를 화장했기 때문이다. 박정권 은 너무도 엄청난 살인재판을 했다. 그들이 저지른 고문 흔적을 감추려는 무서운 계략 이 숨어 있었다. 시노트는 한국 대법원 의 판결 은 정치 재판 이고 무효를 선언했다. 유신 시대 법은 독재자의 구미만 마출뿐 이 었다.어용화된 13명의 대법관 은 전원일치라는 사형판결로 국민의 최대분노를 삿다.

인혁당의 판결 은 정치재판 이라서 공정재판의 신빙성을 인정 받지못했다.. 법관 의 양심을 팔아먹은 권력자의 시녀들이 었다. 대법원 앞에서는 두명 의 미국인 시노트 신부 와 마티유 목사가 항쟁했다.데모로 시노트 는 종로 경찰서에 수감 돠었다. 이것으로 그는본국 으로 추방 명령을 받게 된다. 그는 떠날 여비가 없었다. 그는 추방일자 연장 신고를 제출했다. 추방일자를 연장 받고 한참 후에 떠낫다. 우리는 75년 3월 워싱턴에서 지면 동지에서 매일 만나는 동지가 되었다. 그는 한국의 십자가를 진 하나님의 사도 이다. 시노트는 미국 NCC에 Korea Desk에 한국 인권 담당으로 일하면서 푸레이저 위원회에 증언연사로서 활동했고 상원 에서도 증언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미국의 행정부나 백악관 은 한국정부의 조작된 정보에만 의존 했을 것이다.

시 노트는 전국을 순회강연하고 한국인권 실태를 주제로 개몽 운동을 해 나갔다. 시노트는 한국민주주의의 은인이다. 나는 그의 도움으로 국제 인권단체와 만나게 되었고 미국의 행정부나 국회에 Lobby하는 일에도 함께 했다. 비율빈 동지들과도 유대 관계를 맺은 것도 이 때의 일이었고 한,비 연합 데모는 백악관 앞에서 열렸다. 나는 세계은행의 후진국 경제 착취를 비판하는 데모에도 참가했다. 세계은행은 독재자를 도왔다. 미국의 원조 가 독재자의 권력 연장에는 좋은 도구 였다. 그런 나라들은 공통적으로 부패한 정권 이었다.

비율빈 동지들과 독재타도란 공동 관심사를 나누면서 동지적으로 협조해나갔다. 1976년 6월30일 백악관 앞 데모는 국제적으로 이름난 민권투사 제씨 잭슨목사 , 맥나팔스(전 비율빈 외무장관)도 참석했고 아퀴노 비율빈 상원의원과 그의 미망인(그후 대통령이 되었음) 그리고 미국의원출신과 전 구국향군 동지들과 최덕신 장군도 동참시켜 국제적인 민권 데모 였다. 우리는 한국 유신 타도를 주장했고 한국을 대표로 본인은 인사말을 했다. 비율빈 대표는 막나펄스 였다.

막나펄스는 김대중 선생의 2차 망명에서 귀국시 수행했다. 그도 대통령후보에서 낙선 했다. 나는 국제동지들 앞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눈앞에 닥아 온다고 장담 했지만 실제는 비율빈 이 먼저목표를 쟁취했다. 데모가 끝날 때 아퀴노 상원의원의 초청을 받았지만 아깝게도 성사되지 못했다. 아퀴노는 그당시 미국의 보스톤에서 망명중 이었다. 그는 학자풍 의 인상 이었다. 저런 유순 한 사람이 투쟁을 한다는 것 이 외모만 보고는 믿어지지 아니 했다.그는 비율빈 의 최고 갑부집 아들이다 .

그후 한달후 그는 비율빈 마닐라 공항에 내리었으나 숨어서 기다리든 비밀경찰의 저격으로 생명을 잃었다. 그는 독재와 끝까지 항쟁한 아세아의 민주 투사였다. 비율빈 동지들과는 민주회복의 선후를 놓고 경쟁 관계였는데 그 이유는 군사 독재란 상황이 유사했고 장기 독재와 정보정치도 흡사하였다. 나는 우리의 민주화가 먼저 올 것이라 장담했다. 그러나 비 율빈은 국민의 총력전으로 우리보다 먼저 민주화를 쟁취한 것이다. 비율빈의 민주화는 그 사회 지식인이 솔선 수범으로 민중과 합류했고 천주교의 강력한 지지가 큰힘이 였다. 말코스의 정보정치는 좀 서툴 럿다. 그가 서울 남산에서 교육 받 앗다면 달라 젓을 지도 모른다. 나의 활동은 개인생활에도 영향이 컸다.

또 나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도 부담이 되었다. 나의 처가 미 연방정부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구국향군 창설부터 뉴욕 출입을 시작해서 자주 갓다. 이번은 뉴욕에 사업 목적으로 올라갔다가 새로운 민주 동지 한 사람을 찾앗다. 사업상 거둔 것은 없었으나 민주동지 한사람을 얻은 것이 큰 소득이었다.

그는 유남근 의사 이며 후엔 뉴욕 구국항군 지부장도 맡았다. 그는 유신 반대 운동이 있는 날이면 병원 문을 닫고서 나오는 열성가 였다. 나는 그를 워싱톤 미국국회 후 레이저 청문회에 초청했고 그날 우리는 힘을 합해 유신 주구 김종필의 특사 김경원을 혼낸 일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다음에는 1974년의 한민통 총회-워싱턴]

................................................................................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대에 전개한 군출신들의 미주 민주화운동 역사는 오늘의 6.15시대를 조명하는데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였던 고세곤 선생(70.육사15기)이 지난 시기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선생은 소령으로 전역한 1969년 이듬해 도미하여 미 카톨릭 대학원 도시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에서 출범한 구국향군 단체에서 사무총장으로 일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기여해 오신 인물이다. 선생은 현재 한국서 출범중인 평화향군에도 참여하고 있다.아래에 소개한 순서대로 차례로 소개한다.[민족통신/평화통신 편집실]

군인의 한국 민주화 운동 고찰

1. 군인과 민족의 길 고찰

-머릿말
-재미 구국 향군 창설(1973.7.15)
-한민통 총회 워싱톤(1974)
-김지하 구출 운동(75년 7월 10일)
-유엔광장 데모(1977년 7월29일)
-한국 인권과 군사차관(1976.7.15)
-구국향군 텍사스 출발(1974.6.20)
-최덕신 망명(1976.12.5)
-워싱턴의 민주 장군 회의(1979.7.30)
-구국향군의 국내 동지 이세규 장군(1975.12.20)
-광주의거(1980년 5월 18일)
-김재규 구출 운동(1980년 12월 15일)
-구국향군과 오타와 캐나다(1982년 8월 28일)
-기독학자대회 참석-유럽(1982.11.22)

<##IMAGE##>과거 유신 체제이래 군사독재는 긴급조치란 편법을 이용하여 인간 의 기본권을 제한 하고 억압 과 위협으로 통치했다. 근대의회 정치는 살아지고 대신 강력한 안보란 명분을 내세워 민주세력의 전진을 차단했다.

자유나 민주란 민주주의 핵심은 빠지고 요식만 갖춘 유일 체제의 권력구조는 일인 군사독재의 음모 가 있었다. 권력 분산은 곧 정치혼란으로 보고 민중과의 통로는 굳게 닫았고 민주나 자유는 사치라는 것과 시기상조 라는 허위조작의 술수로 일반 계층을 좌절로 밀어 부치고 특권층에는 무제한 의 기회를 허용했다. 박정권은 민족분열로 가는 지역 분할정책의 활용도 불사했다.

이런 각본 에 의거한 정치는 사회계층간에 알륵 을 깊게 하였고 지역간 에는 적대감정을 유발했다. 군대는 단순성이나 체질로 보아 전투임무를 위한 특수한 상황을 념 두 에 둔 조직이다. 이런 군사의 사고 방식만으로 는 다양한 과학사회의 적성과는 너무도 거리감 이 있어 이를 정치사회 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요 부적절했다.

군사 혁명정부는 군인들을 이용 신문사를 습격했고 법원 난입으로 법관의 재판권 에 압력을 가한 일은 폭력 에 의존하는 정치는 잔인 했다. 군 과 민중은 대적해 갔다. 유신시대의 횡포는 더 교활했다. 민주원칙이 정면으로 부정되고 모든 정치발언 은 못하게 언론 통제로 인간은 동물화 했다. 암흑시대의 개막 이 었다.

과거 식민시대의 통용되든 독재의 흑백논리는 사회 전반으로 퍼지고 사회전체가 자유를 상실한 채 민중은 도피주의에 빠 다. 개발 도상이란 핑계는 민중을 얼마든지 유혹하고 억제하기 에 충분 했다. 노동의 기본권은 특정 재벌에 나누어 주고 부의 균등 분배는 깨지고 부익부 빈익빈 했다. 어용 노조를 가동 재벌과 신군벌 은 유착되면서 신흥 재벌에는 황금기를 맞게 된다.

망국적 불신풍조는 인간 사회가 대립과 견재로 인간 도덕성 이나 양심 의 후퇴 현상 이 심각해 저 갔다. 군은 재벌을 옹호 했고 민중이나 민주인사는 극도의 탄압이란 굴레 에 허덕여 갔다. 군이 정치로부터 엄정 중립을 지킬 때만 민주주의의 생존이 가능한데 그런 상식적 양심 은 없고 권력의 시녀로 안주했다.

유신 체제는 권력기반을 강화할 목적으로 유신을 반대하는 유능한 장교는 정치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축출하고 정치군인들만의 만능 시대를 열어 주었다. 이런 무원칙적 인사는 군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안보의 불안 을 가져왔다. 무능 한 장교라도 권력과의 친소관계로 승승 장구 하였다. 군대의 내부 까지 상호 불신사상 은 스며들어 단결의 와해란 위기가 왔다.

정치군인들은 재산을 불리는 일이나 권력과의 결탁이나 귀족사회로의 진입을 최종 목표로 했다. 정치군인 들 은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어 무서운 것 이 없었다. 군을 떠난 장교는 국내에 아무런 생존근거를 갖 을 수 없었고 해외로 떠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미국과는 오랜 한미 관계로 이민정착이 원활하였고 고용의 자유와 기회도 주어졌다 . 미국 독립사상가운데 평등, 자유, 박애 정신은 민주주의의 기조사상이었다. 민주와 인권은 세계도처에서 도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는 자유와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인권을 높이 들고 있어 자유화물결은 쉬지않고 움직이 었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군인들이 본국을 떠나 미주에 새로운 생활 근거를 잡고 인권 의 부활운동 에 참여했다. 미국에 들어온 군인 출신들은 개척자의 자부심을 살려 새로운 생활권 에 도전했다. 자유가 넘치는 미국은 한국의 정치 망명객 이나 민주투사들에는 큰 위안의 은신처였다.

미국 헌법은 속지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어 모든 인종을 초월하여 미국 내 거주자에는 그 누구라도 인권의 보장을 해주고 있다. 민주 와 자유 쟁취란 늘 인류희생의 대가였다. 이런 인류적인 큰 명제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 이 얼마냐는 것은 그 민족의 장래 와 직결 된 문제이다. 미국의 동맹은 대부분 군사독재정권이어서 미국의 대외 정책 수행엔 지장을 초래했다.

미국의 근접국가인 중남미 는 반미 정부가 주종을 이룬 때도 있었다. 70년대 초 모든 군사독재는 빈곤한 나라였다. 본인은 10여개 약소국의 인권단체와 제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워싱톤이 자유진영의 세계센터라는 것 때문에 얻는 자연적인 산물이 었다.

다른 인권단체와도 쉽게 연대가능하고 민주 활동을 상호 협력으로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 란 공통이념 은 이민족간의 차이를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국제연대란 큰 힘 이었다. 약소국들이 하나의 큰 힘으로 뭉처 갔다. 미국의 카토릭과 개신교의 미국 교회 협의회는 미국 조야를 각성케 하고 많은 동조자를 배출하고 성숙된 전략을 세워 나갔다. 그들의 정신적인 지원은 막대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 투쟁의 승리라 불리는 미국의 민권법 개정은 소수민족에게는 금보다도 귀한 기회 가 되었고 미국사회의 일원이 되는 신기원을 이루었고 기회 균등의 출발 이었다. 자기 본국의 고유문화도 보장 해주어 다수의 복합문화 시대도 열렸다. 소수민족의 인권을 보장받는 시대의 개막이란 미국에도 많은 혜택이 왔다. 이런 세계추세에 역으로 한국의 공화당은 정권연장을 시도하고 군정의 중반기인 69년 3선 개헌안을 제출하여 민주화의 세계적인 분위기를 부정하는 군사 파쇼체제를 고집했다. 국내외적으로 민주주의 파괴자로 비쳤다. 국내여론은 찬, 반으로 갈려 대결국면은 깊어지고 국민투표란 최후 수단을 악용하는 후진성까지 노출한 것이다. 3선의 길을 연 공화당 은 강권 발동으로 사회 전체를 조작으로 위협해 나갔다. 공개된 부정선거로 통과시켜 구시대 의 망상 이 살아 나고 정치사회는 혼란과 누란의 위기로 이어졌다. 이것은 헌법을 자파에 유리하게 해서 장기집권을 노렸다는 것 때문에, 모든 양심 있는 한국시민의 분노를 촉발했다.

워싱턴은 치과의사인 로광욱 선생이 중심이 되어서 삼선개헌 반대 투쟁 위원회를 결성하고, 개헌을 반대하는 시위를 단행한 것이다 이 데모엔 50명의 교포와 유학생이 주로 나왔고 워싱톤 DC 듀퐁 서클에서 주미 한국 대사관까지 행진하여 워싱톤 포스트는 크게 사진과 더불어 기사화 하였다.

나 자신에도 이것이 첫 데모였다. 해외교포가 본국정치에 항쟁하는 첫 행사였고 워싱톤 교포가 그 선봉이었다. 데모는 민주시민의 솔직한 표현이요 순수한 민주양심의 발로였고 해외의 첫 행사여서 서울의 군사정권은 크게 놀랐으며 그 파급 효과는 본국의 민주동지들을 고무했다. 미국 워싱톤 은 세계여론의 중심지라는 것과 해외에 새로운 민주세력의 출현은 외국이란 통제불가능 지역이라는 것 과 도미노 현상을 우려했다. 이 데모에 나온 동지간엔 동지적인 유대가 생겨 그후 반 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유대는 또 이념의 동지로 결속해서 한 민통 창설의 주역이 되어 해외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 된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야당의 지도자나 민주 인사 중에는 강제추방으로 방랑객으로 워싱턴에 왔다 민주투쟁대열 에 생기를 불어주었다. 투쟁의 지도자는 동지를 결속케 했다. 민주단체는 독재정부의 거대한 권력엔 비교 가 안되지만 투쟁심 과 민중 의 성원 은 대단했다.

우리 민주세력은 너무 미약했다. 오도된 권력층은 민중을 체념과 냉소로 속박했다. 한국의 유신정부는 교포를 지원하는 것보다 정치로 희생 시켰고 심지어 교포사회를 친과 반으로 분열시키고 민주인사에는 격려보다는 야유가 많았고 이간과 모략적인 선동은 워싱톤에서 총지휘한 것이다. 그것은 워싱톤에 는 정보부의 핵심이 와있어 교포 분열이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0월 유신은 미주의 민주대열에도 변화와 도약과 전진의 기회였다. 우리는 지도자를 대망 했다. 당시야당의 대통령후보로 낙선 후 망명해온 김대중 선생이 중심이 되었다. 국내는 언론 통제하에 놓여있어 지뢰밭이나 다를 바 없었다. 유신 달성을 위해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회는 공포분위기가 조성되고 민주인사는 전원 검거된 상태라 민중 불안과 사회활동은 극도로 위축되어갔다. 유신체제의 그 마각이 들어 나면서 체념하는 국민이 늘어 나고 정치지도자는 목전의 이익에 혈안이 되어있고 국내를 군대 의 병사로 만들어 갔다.

국내의 민주화 운동은 좌절과 고난 속에 빠져 갔다. 미주의 조직은 그대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또 신진 인사가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이민자 속에는 민주나 자유의 투쟁가 들도 끼어 있었다. 이들이 이민 와서 자유를 보고 환성을 발하기도 했다. 미국 언론의 공정한 보도로 우리 민주세력은 여론 면에서 힘을 얻어 갔다. 우리는 투쟁의 다른 방식을 찾아내었다. 소수로 강한 기존권세에 대항하는 데엔 군의 민주화로 방향을 세웠다. 순수 민간 만으로의 조직보다는 군 출신의 색다른 조직은 군 정치를 군이 민주정신으로 정예화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작과 술수로 연명하는 정권은 군인들의 횡포가 증가했고 권력남용은 권력상층부의 야욕이나 충족하는 정도로 권력도 내막은 무능해저 가고 있었다. 민중경시는 극에 이르고 국가의 운명을 특정 귀족으로부터 국민에 환원하는 것이 급한 일이었다. 국가 위기를 직시한 미주의 민주군인도 궐기 하여 민중구출의 대장정에 뛰어 들었다. 우리 군인들은 전혀 정치경험이 없는 야전출신이라는 것과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싸워 온 것이 큰 힘의 근원이었다.[다음에는 재미 구국 향군 창설(1973.7.15)에 대하여...]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4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