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5-11-05 00:00
[논문]혁명전쟁의 관점에서 본 한국(조선)전쟁
 글쓴이 : minj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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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학연구소 한호석 소장은 강정구 교수의 통일전쟁론과 관련하여 남녘에서 일었던 색깔론에 대해 그것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한 소장은 "한국(조선)전쟁의 역사는,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힘과 그 자주성을 짓밟는 힘이 어떻게 대결하였는지를 말해준다. 그 대결이 현재진행형이므로, 혁명전쟁의 역사도 1953년 7월 27일에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하며 "강정구 교수의 통일전쟁론을 놓고 남(한국)에서 벌어지는 논쟁과 정치투쟁은, 그러한 대결이 모든 부문으로 퍼져나가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전문을 소개한다.[민족통신/평화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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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혁명전쟁의 관점에서 본 한국(조선)전쟁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글을 시작하며
2. 전쟁관, 전쟁성격론, 전쟁양식론
3. 한국(조선)전쟁에 관한 학술논쟁
4. 한국(조선)전쟁의 민족적 성격
5. 한국(조선)전쟁의 계급적 성격
6. 조국광복 5주년과 평화통일운동
7. 혁명전쟁의 군사전략
8. 혁명전쟁의 결전
9. 제국주의무력개입과 반제혁명전쟁
10. 글을 맺으며


1. 글을 시작하며

<##IMAGE##>요즘은 달라졌겠지만, 남(한국)에서는 1960년대만 해도 각급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목들 가운데 ‘반공도덕’이니 ‘승공통일의 길’이니 하는 제목이 달린 교과목들이 있었다. 그것이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과 북(조선)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주는 특수교육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해마다 6월 25일이 오면, 각급 학교에서는 반공반북을 주제로 하여 글짓기, 웅변대회, 사진전시회 등이 열렸을 뿐 아니라, 음악수업시간에는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로 끝나는 동족살육 선동가를 불러야 했고, 미술수업시간에는 도화지 위에 북위 38도선을 넘어오는 ‘북괴군’ 탱크의 커다란 포신을 그려야 했다.

이처럼 박정희 정권의 반공반북교육은 광란적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남(한국)사회에 끼친 폐해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그 가운데서도 극심한 폐해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반공반북의식을 주입시켜 정신적 불구자로 만든 것이다. 한국(조선)전쟁 정전 직후에 남(한국)에서 태어난 세대는, 12년 동안이나 박정희 정권의 광란적인 반공반북교육을 받은 피해자들이다.

12년 동안 되풀이되었던 반공반북교육의 중심에는 한국(조선)전쟁에 관한 해설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ㄱ)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으로 일어났다.”

(ㄴ) “북한은 한반도 전역을 공산화하려는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침략전쟁을 도발했다.”

(ㄷ) “패전에 임박한 대한민국은 미군의 즉각적인 참전으로 구원되었다.”

(ㄹ) “자유대한을 적화위기에서 건져준 미국은 한국 국민들에게 혈맹의 은인국이다.”

한국(조선)전쟁의 원인, 경과, 결과를 집약한 위의 내용은, 광란적인 반공반북교육을 받아온 불행한 세대의 머리 속에 의심할 수 없고, 의심해서도 안 되는 역사적 사실로 침투각인되었다.

아래에서 논하겠지만, 한국(조선)전쟁에 관한 반공반북교육의 내용은 워싱턴의 제국주의전략가들이 1950년 6월에 조작한 제국주의전쟁신화이다. 제국주의전쟁신화가 역사적 사실로 조작됨으로써 그 신화는 한미관계를 ‘혈맹관계’로 보는 친미예속의식의 근원으로, 그리고 북(조선)을 적으로 보는 반북의식의 근원으로 되었다.

한국(조선)전쟁에 관한 미국의 조작물을 거짓선전이 아니라 제국주의전쟁신화라고 표현하는 까닭은, 그 조작물이 대중의 이성적 판단기능을 마비시켜 맹신으로 이끌며, 자주적 정치의식의 싹을 잘라버리고, 대중을 정신적 폐쇄공간에 가두어버리는 파괴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 조작물에서 흘러나오는 반동적 선전선동의 내용을 살펴보면,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가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은 멸망위기에 빠진 남(한국)을 건져낸 ‘구출작전’으로 묘사되고, 맥아더 자신은 ‘자유대한을 지켜준 혈맹의 은인국’을 대표하는 ‘전쟁영웅’으로 우상화된다.

미국 역사가가 맥아더 전기에서 밝혔듯이, 맥아더는 1950년 12월 24일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에 제출한 자신의 건의서에서 한국(조선)전쟁에 핵폭탄 26개를 사용하려는 핵전쟁작전구상을 내놓는 바람에 유엔군총사령관 자리에서 쫓겨났다. (『프레시안』 2004년 10월 9일자)

지구 위에 제국주의가 출현한 이래 100년 동안 수천만에 이르는 약소국 인민들을 대량살육으로 몰아넣고 인류에게 대재앙을 입힌 제국주의전쟁광신자들이 많았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베니토 무쏠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 도죠 히데끼(東條英機, 1884-1948)가 그 무리를 대표한다. 그러나 핵폭탄 26개로 집중공격을 퍼부어 당시 2천만에 이르던 한(조선)민족을 한꺼번에 몰살시키려고 책동한 제국주의전쟁광신자는 맥아더밖에 없었다. 맥아더는 그야말로 극악한 제국주의전쟁광신자였다.

리승만(1875-1965)은 그런 제국주의전쟁광신자에게 국군 작전지휘권을 통째로 바쳤고, 그것도 모자라서 인천상륙작전 7주년이었던 1957년 9월 15일에 인천시 중구에 있는 만국공원 가장 높은 자리에 맥아더 동상을 세우고 공원이름도 자유공원으로 바꿨다.

집중적인 핵폭탄공격으로 한(조선)민족을 몰살하려고 책동했던 제국주의전쟁광신자의 우상은 그 자리에서 올해로 48년째 ‘자유대한’을 굽어보고 있다. 리승만이 제국주의전쟁광신자의 우상을 세운 때로부터 27년이 되던 1984년, 전두환은 인천항 개항 100주년을 맞아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에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을 세움으로써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였다.

맥아더가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라는 말을 남기고 워싱턴의 정치무대에서 물러난 뒤로 근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미국이 ‘자유대한을 피로써 지켜준 혈맹의 은인국’이라고 맹신하는 제국주의전쟁신화, 그리고 제국주의전쟁광신자 맥아더를 ‘전쟁영웅’으로 칭송하는 제국주의우상숭배를 비난공격한 대중운동은 남(한국)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즈음 남(한국)에서는 제국주의전쟁신화와 제국주의우상숭배를 비난공격하는 대중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맥아더 동상 철거투쟁이 그것이다. 맥아더 동상 철거투쟁의 정치적 의의는, 미국이 조작한 제국주의전쟁신화와 남(한국)의 역대 정권들이 조작한 제국주의우상숭배를 전면적으로 거부함으로써 대중을 대미예속의 정신적 불구상태에서 해방시키고 대중 스스로 자주의식으로 무장하게 하는 가장 위력적인 정치투쟁이라는 데 있다.

맥아더 동상 철거투쟁은 처음에 적은 수의 사람들이 시작하였는데, 그 세가 늘어나자 마침내 워싱턴과 서울의 정치권을 흔들게 되었다. 미국 연방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위원장 헨리 하이드(Henry J. Hyde)를 비롯한 연방하원의원 다섯 명은 2005년 9월 15일 맥아더 동상 철거투쟁을 비난하고 그 동상을 워싱턴으로 가져가겠다는 서한을 당시 유엔총회에 참석하려고 뉴욕에 머물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냈다. 10월 6일에도 헨리 하이드는 남(한국)에서 일어나는 반미운동과 반미여론을 매우 우려한다는 서한을 미국 국무부 대외홍보담당 차관에게 보냈다. 때를 같이하여 주한미국군사령부는 주한미국군 자녀들의 맥아더 동상 견학활동을 시작하였다.

남(한국) 정부의 대통령과 총리는 경찰력과 사법권을 동원해서 제국주의전쟁광신자의 우상을 보호하려는 결의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였다. 2005년 9월 29일 그에 뒤질세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미군 5만4천여 명의 고귀한 피를 바친 데 대한 고마운 은혜를 기리기 위해” 워싱턴에 있는 한국(조선)전쟁 기념탑을 찾아가서, “한미 혈맹관계의 의미를 되새기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다지는 기회를 삼고자 한다”(『연합뉴스』 2005년 9월 30일자)고 말하면서 참배하였다.

남(한국)의 진보세력과 반동세력은 제국주의전쟁광신자의 우상을 철거하려는 투쟁에서 날카롭게 맞섰는데, 강정구 교수의 글을 놓고서도 날카로운 대립관계가 형성되었다. 남(한국)의 반동세력은 강정구 교수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구속하려고 날뛰었다. 극우단체들, 조선일보, 한나라당, 그리고 경찰과 검찰의 이른바 ‘공안세력’은 한국(조선)전쟁을 북(조선)의 통일전쟁으로 본 강정구 교수에게 공세를 퍼붓고 있다.

반동세력은 한국(조선)전쟁을 북(조선)의 ‘적화통일’전쟁으로 믿고 있으며, 북(조선)이 지금도 ‘적화통일’을 노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강정구 교수가 ‘적화통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통일전쟁이라는 말만 쓴 것은 분명하지만, 반동세력의 머리 속에서는 북(조선)의 통일전쟁이 ‘적화통일’전쟁 이외의 다른 전쟁으로 될 수는 없으므로, 내가 보기에는 반동세력이 강정구 교수의 통일전쟁론을 공격하는 소란을 일으킬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강정구 교수를 향해 탄압의 칼을 빼든 반동세력은, 한국(조선)전쟁이 북(조선)의 통일전쟁이라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에 소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맥아더 동상 철거투쟁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소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사실 저들이 비난하는 강정구 교수의 글에서 중심논제는 통일전쟁론이 아니라 맥아더 동상 철거투쟁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반동세력의 소란은, 자기들이 맹신하는 제국주의전쟁신화와 자기들이 숭배하는 제국주의전쟁광신자의 우상을 깨뜨리는 대중운동을 가로막으려는 공격인 것이다.

강정구 교수의 통일전쟁론을 놓고 벌어진 남(한국)의 진보세력과 반동세력의 투쟁에서 볼 때, 한국(조선)전쟁에 관한 학술논쟁과 맥아더 동상 철거투쟁은 맞물려있다. 나는 이 글에서 맥아더 동상 철거투쟁의 정치적 배경으로 된 한국(조선)전쟁의 역사를 전쟁관, 전쟁성격론, 전쟁양식론의 바탕 위에서 다시 검토하였다.

2. 전쟁관, 전쟁성격론, 전쟁양식론

그 동안 남(한국), 미국, 일본에서 한국(조선)전쟁과 관련하여 나온 학술연구성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내 판단으로는 그 수많은 연구성과들에는 전쟁관이 결핍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쟁관이 결핍된 전쟁연구, 이것이 한국(조선)전쟁 연구의 현주소이다. 전쟁관이 결핍되었는데도 한국(조선)전쟁에 관한 저작물들만 자꾸 쌓이는 것을 보면서, 필수영양소를 섭취하지 못해 결핍증에 걸린 거인의 기형적 몰골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희귀한 전쟁사료를 찾아내고 그것을 분석하여 연구성과를 내놓는다해도, 거기에 전쟁관이 결핍되었다면 그런 연구가 오류에 빠지기는 쉬운 일이다.

2-1) 전쟁관이란 전쟁의 본질이 무엇이며, 전쟁이 왜 일어나는가 하는 근본문제를 밝혀주는 인식체계이다. 전쟁관의 명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전쟁이란 어떤 나라가 자기의 정치적 의지를 다른 나라에게 강제로 실현하는 폭력행위라는 명제이며, 다른 하나는 전쟁이란 계급투쟁(class struggle)의 불가피한 계속이고 발전이며 격화라는 명제이다.

앞의 명제는 프러시아의 군사전략가 클라우제비츠(Karl von Clausewitz, 1780-1831)의 전쟁관에서 제시된 것이며, 뒤의 명제는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가 레닌(Vladimir Ilyich Lenin, 1870-1924)의 전쟁관에서 제시된 것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관이 전쟁과 정치의 관계를 파악함으로써 적대적인 국가관계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본질을 밝혀준 인식체계라면, 레닌의 전쟁관은 전쟁과 혁명의 관계를 파악함으로써 적대적인 계급관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본질을 밝혀준 인식체계라고 할 수 있다. 전쟁관에 의해서, 전쟁이란 전쟁주체가 자기의 정치적 의지를 실현하는 폭력행위이자 자기의 계급적 이익을 실현하는 폭력행위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어떤 나라가 정치적 의지를 실현하는 다양한 행위들을 추상화(abstraction)하면, 나라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행위 또는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의 자주성을 짓밟는 행위에 이른다. 또한 사회계급이 계급적 이익을 실현하는 다양한 행위들을 추상화할 경우에도, 사회계급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행위 또는 어떤 사회계급이 다른 사회계급의 자주성을 짓밟는 행위에 이른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전쟁주체의 정치적 의지나 계급적 이익을 실현하는 무력충돌은 자주성을 짓밟는 힘과 자주성을 실현하는 힘 사이에서 벌어지는 물리적 충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쟁이 자주성을 짓밟는 폭력적 수단 또는 그러한 과정일 때, 그 귀결은 침략과 정복, 억압과 착취, 지배와 수탈로 되며, 반면에 전쟁이 자주성을 실현하는 폭력적 수단 또는 그러한 과정일 때, 그 귀결은 해방, 독립, 진보로 된다.

전쟁을 전쟁주체의 정치적 의지나 계급적 이익을 실현하는 무력충돌, 곧 자주성을 짓밟는 힘과 자주성을 실현하는 힘 사이에서 벌어지는 물리적 충돌로 보는 전쟁관에 따르면, 한국(조선)전쟁은 자주성을 짓밟는 힘과 자주성을 실현하는 힘 사이에서 벌어진 물리적 충돌로 보인다.

2-2) 전쟁관을 옳게 세움으로써 전쟁의 성격을 인식하게 된다. 전쟁의 성격을 구분하는 두 가지 범주는 혁명전쟁(revolutionary war)의 범주와 침략전쟁(war of aggression)의 범주이다. 전쟁은 수많은 양상으로 일어나지만, 모든 전쟁은 이 두 가지 범주 가운데 어느 한 쪽에 속하게 된다.

혁명전쟁의 범주에는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전쟁이 속한다. 민족적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전쟁은 반제혁명전쟁(anti-imperialist revolutionary war)이다. 반제혁명전쟁은 주권을 빼앗고 영토를 강점하려고 침략하는 제국주의무력에 맞서 싸우는 전쟁, 또는 제국주의나라가 강점한 식민지를 해방하기 위한 전쟁이다.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전쟁은 국내혁명전쟁(internal revolutionary war)이다. 국내혁명전쟁은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의 계급투쟁이 격렬한 무력충돌로 격화된 것이다. 국내혁명전쟁을 내전(internal warfare, civil war)이라고도 부른다.

제국주의나라가 강점한 식민지를 해방하기 위한 반제혁명전쟁, 반혁명세력이 강점한 지역을 해방하기 위한 국내혁명전쟁을 해방전쟁(liberation war)이라고도 부른다.

다른 한편, 침략전쟁의 범주에는 제국주의침략전쟁(imperialist war of aggression)과 제국주의열강전쟁(imperialist war of world powers)이 있다. 제국주의침략전쟁이란 제국주의나라가 약소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예속화하는 전쟁이며, 제국주의열강전쟁이란 제국주의나라들 사이에서 모순이 격화되어 일어나는 세계대전(world war)이다.

전쟁성격론에 따르면, 한국(조선)전쟁은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혁명전쟁의 범주에 속한다. 한국(조선)전쟁이 혁명전쟁의 범주에 속한다는 말은, 그 전쟁이 국내혁명전쟁의 성격과 반제혁명전쟁의 성격을 모두 지녔음을 뜻한다. 그 전쟁이 지닌 두 가지 성격은 그 전쟁이 전개된 역동적 과정에 맞추어 인식될 수 있다.

2-3) 전쟁성격론과 함께 논해야 하는 것은 전쟁양식론이다. 전쟁양식론이란 전쟁이 어떠한 양식으로 수행되는가를 밝혀주는 인식체계이다. 전쟁양식론에 따르면, 모든 전쟁은 제한전쟁과 전면전쟁으로 구분된다.

제한전쟁(limited warfare)이란 공격대상을 완전히 타도정복하지 않고 공격목표를 제한하고, 전쟁피해를 줄이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전쟁양식, 또는 우세한 군사력으로 전면전쟁을 벌이지 않고서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전쟁양식이다. 제한전쟁이 지역적 범위에 한정되는 경우, 국지전쟁(local warfare)이라고 부른다.

전면전쟁(general warfare)이란 공격목표에 제한을 두지 않으며 모든 전쟁수단을 동원하여 공격대상을 완전히 타도정복하는 전쟁양식이다. 전면전쟁의 승패가 그 전쟁을 수행하는 전쟁주체의 존망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그 전쟁을 총력전쟁(total warfare)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3. 한국(조선)전쟁에 관한 학술논쟁

한국(조선)전쟁이 정전상태에 들어간 뒤 50년이 넘도록 그 전쟁에 관한 학술논쟁이 끝없이 이어지는 근본원인은, 미국이 제국주의전쟁신화를 조작해놓았다는 데 있다. 한국(조선)전쟁 연구자들이 조작된 전쟁신화에 물음을 던지고 학술논쟁을 벌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한국(조선)전쟁에 관한 다양한 학술논쟁들을 살펴보면 두 가지 압축된 경향이 드러난다. 하나는 미국이 조작한 제국주의전쟁신화를 벗겨내고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려는 탈신화론화(demythologization)의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탈신화론화의 경향을 비판하면서 제국주의전쟁신화를 정당화하려는 재신화론화(remythologization)의 경향이다.

한국(조선)전쟁에 관한 학술논쟁은 그 두 경향이 맞부딪치면서 여러 갈래로 퍼져나갔는데, 중심적인 논쟁은 한국(조선)전쟁의 기원(origin)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집중되었다. 한국(조선)전쟁에 관한 학술논쟁사에서 가장 주된 논쟁은 전쟁기원론 논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조선)전쟁과 관련한 전쟁기원론은 개전양상론과 개전원인론이라는 두 종류의 이론구성을 가진다.

개전양상론과 관련해서는 그 전쟁이 남침으로 일어났는가 아니면 북침으로 일어났는가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남침설과 북침설 사이에서 벌어진 학술논쟁이 그것이다. 남침유도설을 내놓은 연구자도 있다.

다른 한편, 개전원인론과 관련해서는 그 전쟁이 일어난 원인이 한(조선)민족 내부에 있었는가 아니면 다른 나라에 있었는가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개전내인설과 개전외인설 사이에서 벌어진 학술논쟁이 그것이다. 개전내인설은 한국(조선)전쟁이 내전(internal warfare)으로 일어났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며, 개전외인설은 그 전쟁이 국제전(international warfare)으로 일어났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전이 국제전으로 확전되었다는 확전설도 있다.

한국(조선)전쟁의 기원문제를 놓고서도 이처럼 복잡한 논쟁이 벌어졌으니, 그 밖의 다른 문제에 관한 논쟁까지 더한다면 한국(조선)전쟁에 관한 학술논쟁은 너무 복잡하여 갈피를 잡기 힘들 지경이다.

한국(조선)전쟁에 관한 학술논쟁을 불러일으킨 직접적인 계기는, 연구자의 새로운 자료발굴이다. 미국 정부가 기밀해제하여 공개한 자료, 러시아 정부가 공개한 옛 소련 정부의 자료, 중국에서 찾아낸 자료, 그리고 전쟁관련자들의 회고록이나 증언이 나올 때마다, 기존의 견해를 뒤집는 새로운 견해가 나옴으로써 논쟁에 불이 붙었던 것이다. 연구자들이 그 동안 발굴된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자기 주장을 정교하게 다듬어놓는 바람에, 일반인들은 쌍방의 상반되는 주장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분간하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나는 한국(조선)전쟁에 관한 연구가 복잡한 논쟁을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이 그 연구에 전쟁관이 결핍된 데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관이 결핍되었으므로 전쟁의 기원과 성격이 무엇인지 밝히지 못한 채 지루하게 논쟁만 되풀이되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한국(조선)전쟁을 내전으로 보느냐 아니면 국제전으로 보느냐 하는 개전원인설의 쟁점을 두고 논쟁을 거듭하였는데, 영어권 학계에서 내전론을 주장한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Isidor F. Stone,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1950-1951 [1952 초판, 1988 재판], D. F. Flem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s, 1950-1960, 제2권, [1961], Joyce and Gabriel Kolko, The Limits of Power [1972], Robert R. Simmons, "The Korean Civil War," Frank Baldwin 편, Without Parallel, [1974],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제1권, [1981], 제2권, [1990], Callun MacDonald, Korea: The War Before Vietnam [1986], Burton I. Kaufman, The Korean War [1986], Peter Lowe,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86], John Merrill, Korea: The Peninsula Origins of the War [1989]

내전론과 국제전론의 오랜 논쟁은 결국 내전론의 승리로 끝났다. 내전론의 승리란, 개전외인설에 대한 개전내인설의 승리를 뜻한다. 내전론과 국제전론의 논쟁에서 초점으로 되었던 개전이라는 개념은, 1950년 6월 25일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일어난 교전으로 한국(조선)전쟁이 일어났음을 뜻하는 개념이다. 내전론자들은 개전시기의 한(조선)반도 정세에 소련, 미국, 중국의 정치적, 군사적 영향이 매우 강하게 미치고 있었지만, 그러한 외적 요인이 개전의 주된 원인이 아니었음을 논증함으로써 논쟁에서 이겼다.

그러나 내전론이 한국(조선)전쟁에 관한 학술논쟁에서 이겼다고 해서, 한국(조선)전쟁의 성격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내전론자들은 한(조선)반도에서 혁명과 전쟁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혁명과 전쟁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었는지를 밝히지 못했다. 한국(조선)전쟁을 내전 대 국제전의 논쟁구도에서 바라보는 내전론자의 시각에는 내전을 혁명전쟁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내전론자들은 한국(조선)전쟁의 성격을 혁명전쟁의 관점에서 인식하지 못한다.

민족적 자주성과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전쟁의 역사는 세계사적 보편성을 지닌다. 그 역사는 영국혁명(1640-1660년), 미국혁명(1763-1787년), 18세기 프랑스혁명(1789-1799년), 19세기 프랑스혁명(1830년, 1871년), 19세기 독일혁명(1848-1849년), 19세기 필리핀혁명(1896-1897년), 러시아혁명(1917-1921년), 20세기 독일혁명(1918-1919년), 헝가리혁명(1918년), 멕시코혁명(1910-1940년), 중국혁명(19세기 후반-1957년), 베트남혁명(1945-1975년), 20세기 필리핀혁명(1942년-진행 중), 쿠바혁명(1958-1959년), 이란혁명(1979년) 등으로 이어져왔다.

한국(조선)전쟁은 전쟁이 아니라 혁명전쟁이었다. 다른 나라의 혁명전쟁이 그러한 것처럼, 한국(조선)전쟁도 세계혁명사에 역사적 의의를 남겼는데, 그 의의를 논하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강정구 교수의 통일전쟁론은 한국(조선)전쟁의 민족적 성격을 밝힌 것으로 생각되는 데, 내 판단으로는, 한국(조선)전쟁이 전개된 역동적 과정에 맞춰 민족적 성격과 계급적 성격을 모두 밝혀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혁명전쟁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조선)전쟁이 지닌 민족적 성격과 계급적 성격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4. 한국(조선)전쟁의 민족적 성격

한국(조선)전쟁 시기에 한(조선)반도에는 두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북위 38도선은 국경선이 아니었다. 당시 서울에 세워진 반공주의정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나라로 인정하였고, 평양에 세워진 사회주의정권은 대한민국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나라로 인정하였다.

이 글에서 논하는 반공주의정권(anti-communist regime)이라는 개념은 오늘 남(한국)의 반공주의정권과 다른 개념이므로 구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당시 한(조선)반도 전역에 존재하였던 반공주의세력은 북위 38도선 이북지역에서 거의 소멸되고 이남지역으로 몰려들었다. 그에 따라 미국의 조종과 지원을 받은 반공주의세력은 계급투쟁에서 승리하여 반공주의정권을 세웠다. 남(한국)에서는 리승만 정권을 자유민주주의정권이라고 부르는데, 이 글에서 나는 그 정권이 반공주의를 정치노선으로 삼았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반공주의정권이라는 개념을 쓴다.

또한 이 글에서 논하는 사회주의정권(socialist regime)이라는 개념은 오늘 북(조선)의 사회주의정권과 다른 개념이므로 구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당시 사회주의세력은 한(조선)반도 전역에 존재하였는데,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에 존재한 사회주의세력은 반공주의정권의 탄압에 맞서 투쟁하였다. 한(조선)반도 전역에 존재한 사회주의세력은 계급투쟁에서 승리하여 평양에 사회주의정권을 세웠다. 북(조선)에서는 그 정권을 인민정권(people"s regime)이라고 부르는데, 이 글에서 나는 그 정권이 사회주의세력에 의해 주도되었고, 사회주의를 지향하였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정권이라는 개념을 쓴다.

한국(조선)전쟁이 정전상태로 들어간 뒤 반세기가 지났으나, 오늘도 한(조선)반도에는 여전히 두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조선)반도에 존재하는 정전체제의 군사분계선(military demarcation line)은 나라와 나라 사이를 갈라놓은 국경선(territorial border)이 아니다.

흔히 한(조선)반도에 분단국가가 존재한다고 말하는데, 분단국가라는 개념은 한 나라가 두 나라로 나뉘었다는 뜻이 아니라, 배타적 합법성, 유일한 정통성을 주장하는 두 정권이 한 나라 안에 세워짐으로써 두 정권 사이에서 국가적 정체성을 해결하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한 나라 영토에서 국가주권을 행사하는 정치적 실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가 아니면 대한민국인가 하는 가장 중대한 정치문제를 적대관계에 있는 두 정권이 해결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국(조선)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국(조선)전쟁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다. 한국(조선)전쟁을 “북한이 대한민국을 쳐들어간 침략전쟁”으로 보는 관점에 서면, 그 전쟁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적대적인 국가관계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왜곡하게 된다.

그런데 미국은 한(조선)반도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만 존재한다고 보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나라가 아니라 ‘공산주의침략자’라고 보았다. 미국의 그런 견해는 한국(조선)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취한 태도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1950년 6월 25일 오후 2시, 소련 대표가 참석하지 못한 가운데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서둘러 소집하였다. 그 회의에서 유고슬라비아 대표는 교전쌍방에 화해를 제안하는 안건을 내놓았으나 미국은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의 결의안 초안을 내놓았다. (시성문, 조용전 지음, 윤영무 옮김, 『중국인이 본 한국전쟁』, [1991], 28쪽)

미국이 내놓은 초안에는 북(조선)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침략행위(act of aggression)’라는 용어가 들어있었으나, 다른 나라 대표들이 반대하여 ‘침략행위’라는 말이 빠졌고, 6월 27일에 채택된 결의안에는 ‘평화침해(breach of peace)’라는 용어만 남았다.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제7권, [1983], 155-156쪽, 와다 하루끼, 서동만 옮김, 『한국전쟁』, [1995 일본어판], [1999 번역판], 160쪽) 다른 자료에 따르면,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머리 위에 ‘침략자’라는 모자를 씌우려고 했으나, 반대에 부딪치는 바람에 ‘무력침략’이라는 말을 ‘대한민국에 대한 도발되지 않은 공격(unprovoked attack on the Republic of Korea)’이라는 말로 바꾸어 결의안을 채택하였다고 한다. (시성문, 조용전, 위의 책, 25쪽)

되돌아보면, 한국(조선)전쟁에 관한 학술논쟁은 그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를 밝히려는 수많은 논쟁으로 이어졌다. 그 논쟁에는 한국(조선)전쟁의 역사에서 전범자, 침략자를 찾아내려는 시도가 들어있다. 그러한 시도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ㄱ) 한(조선)반도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만 존재하는 것처럼 현실을 왜곡하고, 북(조선)을 대한민국을 침략한 전범자, 침략자로 낙인찍으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연구자들이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 역대정부가 한국(조선)전쟁을 북(조선)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으로 왜곡하면서 북(조선)을 ‘침략자’로 규정한 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공산주의반란세력’으로 규정하고 그 세력에게 전쟁범죄를 뒤집어씌우려는 범죄적 책동에 지나지 않는다.

(ㄴ) 연구자들이 한(조선)반도에 두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까닭에 마치 두 나라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착각에 빠져있는 연구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다. 그에 따르면, “1948년 한반도 전역을 자신의 영토라고 선언하는 두 개의 국가가 출현한 이상, 유일한 정통성을 주장하며 서로 상대를 괴뢰정권이라고 간주하는 이들 국가는 평화적인 수단이 아닌 군사적인 수단으로 상대를 타도하여 영토의 완전지배를 성취하는 길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와다 하루끼, 위의 책, 21쪽)

전쟁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와다 하루끼의 지적은 옳지만, 그는 한(조선)반도에 두 나라가 세워진 것으로 보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조선)반도 전역을 자기의 영토라고 선언한 두 나라가 출현하였다는 와다 하루끼의 견해는 오류이며, 한(조선)반도 전역을 자기의 영토라고 선언한 두 정권이 세워졌다고 해야 옳다. 두 나라가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 사회주의세력이 사회주의정권을 세웠고 동시에 반공주의세력이 반공주의정권을 세웠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한국(조선)전쟁 시기의 분단체제는, 반공주의정권의 견지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실지’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으며, 사회주의정권의 견지에서 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반부’를 ‘해방’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분단체제는 50년이 넘는 기간이 지나면서 정세변화에 따라서 일정하게 변화를 겪었지만, 한국(조선)전쟁 시기에 존재하였던 분단체제와 비교하여 본질적 변화를 겪지 않았다.

당시 반공주의정권은 대한민국의 ‘미수복지구’를 ‘수복’하는 것을 정치적 목적으로 삼았다. 그 정권이 대한민국의 ‘미수복지구’를 통치할 지방행정기관인 ‘이북5도청’을 내온 때는 1949년 2월 15일이었다. 반공주의정권에게 대한민국의 ‘실지수복’은 역사적 필연이자 가장 중대한 임무였다. 그래서 리승만은 ‘실지회복’을 강하게 주장하였고(『조선일보』 1949년 10월 2일자), 자신이 지금은 미국의 경고 때문에 참고 있지만, 전쟁을 개시하면 국군이 사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1949년 10월 8일자)

사회주의정권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미해방지구’를 ‘해방’하는 것을 정치적 목적으로 삼았다. 반공주의정권에게 ‘실지수복’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회주의정권에게도 ‘남반부해방’은 역사적 필연이자 가장 중대한 임무였다.

반공주의정권이 대한민국의 ‘실지’를 ‘수복’하면 그 정권이 추구하는 조국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었고, 사회주의정권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반부’를 ‘해방’하면 그 정권이 추구하는 조국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미수복지구’를 ‘수복’하려는 반공주의정권이 동원한 무력은 국군과 경찰이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미해방지구’를 ‘해방’하려는 사회주의정권이 동원한 무력은 인민군이었으며, 북위 38도선 이남에서 그 정권을 지지하는 사회주의세력이 동원한 무력은 ‘남조선인민유격대’였다. 사회주의정권과 반공주의정권이 국가적 정체성을 해결하기 위하여 각자 자기의 무력을 동원하여 벌인 불가피한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한국(조선)전쟁은 민족적 성격을 가진다.

그렇지만 한국(조선)전쟁의 민족적 성격은 국가적 정체성을 해결하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사실에서만 밝혀지는 것이 아니다. 한(조선)반도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분할지배를 반대배격하는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도, 그 전쟁이 민족적 성격을 가졌음이 밝혀진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던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민족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정치과업과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정치과업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연관되었는데, 미군정 3년을 지나면서 미국의 제국주의분할지배를 직접적으로 경험한 한(조선)반도에서 사회주의세력과 그 정권은 민족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정치과업을 매우 중시하게 되었다.

미국은 미군정의 행정권을 반공주의정권에게 넘겨준 1948년 9월 13일 이후에도 반공주의세력과 그 정권을 내세워 자기의 제국주의분할정책을 추진하였으므로, 한국(조선)전쟁은 그 정권의 배후에서 제국주의분할지배정책을 추진하는 미국을 반대배격하는 혁명전쟁으로 되었다. 국내혁명전쟁은 소련군과 미국군이 철군한 뒤에 격화되었는데, 미국은 자기 군대를 빼내간 뒤에도 제국주의분할지배정책을 여전히 추진하였으므로, 그 전쟁이 제국주의분할지배를 반대배격하고 민족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혁명전쟁의 민족적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한국(조선)전쟁의 민족적 성격이 그 전쟁의 성격을 전면적으로 규정하였던 계기는 미국의 무력개입이었다. 미국의 무력개입에 대응하여 반제혁명전쟁이 전개되었다. 한국(조선)전쟁이 제국주의침략전쟁에 맞서 싸운 반제혁명전쟁으로 전면화된 것이다. 반제혁명전쟁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5. 한국(조선)전쟁의 계급적 성격

5-1) 제2차 세계대전이 식민지인민의 민족해방전쟁과 연합군의 반파쇼전쟁의 승리로 끝난 직후, 제국주의강점으로부터 해방된 나라들에서 계급투쟁이 격화되어 혁명전쟁이 일어났다. 멀리는 16세기 후반부터, 가까이는 19세기 후반부터 아시아를 분할강점하였던 일본,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제국주의나라들의 식민지강점체제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무너지자, 그 동안 식민지강점체제에서 억압과 수탈을 당해온 아시아인민들은 자기의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려는 정치적 요구를 폭발적으로 분출시켰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폭발적인 정치적 요구는 인민대중의 계급적 자주성을 짓밟는 반공주의정권과의 물리적 충돌을 불가피하게 수반하였다. 그 물리적 충돌을 국내혁명전쟁이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전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과 반식민지상태였던 중국에서 일어난 항일혁명전쟁,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일어난 항불혁명전쟁,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 일어난 항미혁명전쟁,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일어난 혁명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었다. 각 나라의 실정에 따라 전개양상의 차이를 보였지만, 대체로 그 혁명전쟁은 혁명세력 대 제국주의세력의 무력충돌이 차츰 격화되면서 반제혁명전쟁으로 전면화되었고, 제국주의나라가 강점한 식민지를 무력으로 해방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계급투쟁이 격화되면서 국내혁명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시아 여러 나라의 정치정세가 보여준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중국,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혁명전쟁이 일어났고, 심지어 미국에게 점령당한 일본에서도 혁명운동이 일어났다. 한(조선)반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50년 6월 23일 당시 민족보위상 최용건(1900-1976)이 인민군 사단장들을 통하여 인민군 장교들에게 내려보낸 훈화는 “이 전쟁은 민족 내부에서 되는 계급투쟁인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제1권, [1996], 418쪽)

1945년 조국광복 직후 한(조선)반도에서 일어난 계급투쟁은 초기단계에서 사회주의세력, 민족주의세력, 반공주의세력 사이에서 벌어진 삼파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사회주의세력은 계급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혁명에 나섰고, 반공주의세력은 계급적 자주성을 짓밟는 탄압에 나섰다. 민족주의세력은 계급투쟁이 혁명전쟁으로 격화되자 양대 세력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분열되었는데, 그 일부는 사회주의세력과 통일전선을 형성하였고 다른 일부는 반공주의세력과 결탁하였으며, 나머지는 반공주의세력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계급투쟁에서 패한 민족주의세력은 소멸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5-2) 1945년 조국광복 이후 한(조선)반도에서 일어난 계급투쟁이 차츰 혁명전쟁으로 격화되었으므로, 해방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었지만, 혁명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이 혁명전쟁으로 격화된 과정에서 보면, 6월 25일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일어난 교전은 그 이전부터 격화되어온 혁명전쟁에 속하는 교전이었다.

다른 한편, 미국의 제국주의분할지배가 무력개입으로 격화된 과정에서 보면, 6월 25일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일어난 교전은 미국의 제국주의분할지배를 반대배격하는 해방전쟁의 시작이었다.

조국광복 이후 한(조선)반도에서 일어난 계급투쟁이 혁명전쟁으로 격화된 시점은 1949년이었다. 국군 고위지휘관 출신자의 회고에 따르면, 전쟁은 1949년 5월의 하계공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백선엽, 『군과 나』, [1989], 29쪽)

1949년 이전의 계급투쟁은 총파업투쟁, 대중봉기, 소규모 유격투쟁으로 전개되었는데 1949년 1월말부터 사회주의정권 및 사회주의세력 대 미국의 조종과 지원을 받는 반공주의정권의 교전으로 확대격화되었다. 그처럼 확대격화된 교전을 혁명전쟁이라고 한다. 계급투쟁이 혁명전쟁으로 확대격화된 양상은 다음과 같다.

(ㄱ)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에서 1948년부터 ‘야산대’라는 이름으로 전개된 유격투쟁은,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10월 20일 여수와 순천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본격적인 유격전으로 확대되었다.

1949년 5월 현재,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의 133개 군 가운데 118개 군에 유격전구가 형성되었고, 7월에는 각지의 유격대가 통합한 ‘남조선인민유격대’가 편성되었으며, 오대산, 지리산, 태백산을 중심으로 하는 3개 지구에 3개 병단이 배치되었다. ‘남조선인민유격대’는 1949년 5월에 502차례 교전하여 군경 1천1백40명을 사살하였고, 6월에 594차례 교전하여 군경 1천59명을 사살하였고, 7월에 6백57차례 교전하여 군경 1천3백2명을 사살하였고, 8월에 7백59차례 교전하여 군경 8백10명을 사살하였고, 9월에 1천7백76차례 교전하여 군경 1천2백72명을 사살하였고, 10월에 1천3백30차례 교전하여 군경 1천5백12명을 사살하였고, 11월에 1천2백60차례 교전하여 군경 1천8백명을 사살하였다. (김점곤, 『한국전쟁과 노동당전략』, [1973], 244쪽)

일곱 달 동안 매일 평균 32차례씩 일어난 6천8백78차례 교전에서 국군과 경찰이 8천8백95명의 사망자를 냈으므로 ‘남조선인민유격대’도 그에 못지 않은 사망자를 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처럼 치열한 교전은 곧 전쟁이었다. 당시 반공주의정권은 그 전쟁을 ‘무장공비의 반란’이라고 불렀지만, 혁명전쟁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명실상부한 혁명전쟁이었다.

(ㄴ) 1949년 1월말부터 북위 38도선 일대에서도 일진일퇴를 벌이는 교전이 일어났다. 북(조선)의 역사기록에 따르면, 1949년 한 해 동안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일어난 교전은 2천617차례에 이르렀다. (과학백과사전출판사, 『조선전사』, 제25권, [1981], 33쪽) 황해남도 벽성군 태탄지구의 은파산, 개성시의 송악산, 양양지구의 고산봉에서 일어난 교전이 규모가 가장 컸다. (『조선전사』, 제25권, 34쪽)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교전이 일어난 까닭은, 한(조선)반도에 주둔하였던 소련군 제25군이 1948년 12월 철군을 완료하고, 미국군 제24군단도 1949년 6월 철군을 완료하자 군사적 공백이 생겼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미국군보다 먼저 철군하면서 군사적 공백이 생기는 바람에 1949년 1월말부터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일어난 교전은 국군이 줄곧 선제공격을 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슈찌코프가 몰로또프에게 보낸 암호전보, 1949년 1월 27일, 러시아연방 문서관, 3-5쪽. 와다 하루끼, 위의 책, 357쪽에서 다시 옮김) 주한미국대사관 삼등서기관이었던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이 국군 대령 김백일(육군참모본부 참모부장)과 대화한 내용을 정리한 1949년 8월 26일자 비망록은 “대체로 우리 군대(국군을 말함-옮긴이)는 먼저 공격을 하고 있으며, 더 강하게 공격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Channing Liem, The Korean War: An Unanswered Question, [1992], 85쪽)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국군이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었던 또 다른 까닭은, 소련군이 철군한 북위 38도선 이북의 최전방에 배치된 무력이 열세였기 때문이다. 북위 38도선 이북의 최전방에 배치된 무력은 인민군이 아니라 내무성 소속의 경찰병력인 경비대였다. 인민군은 경비대 뒤에 배치되어 있었다. (제임스 하우스만, 정일화 공저,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대위: 하우스만 증언』, [1995], 242쪽) 경비대는 그 나마 2개 여단밖에 없었는데, 그들은 3-10발 정도의 총탄밖에 지급 받지 못한 일본제 소총으로 빈약하게 무장하고 있었다. (슈찌코프가 몰로또프에게 보낸 암호전보, 1949년 2월 3일, 러시아연방 문서관, 6-7쪽, 와다 하루끼, 위의 책, 357쪽에서 다시 옮김)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교전이 가장 많이 일어난 곳은 황해남도 옹진지구이다. 그 곳에서는 1949년 5월부터 12월까지 수 천 명의 연대급 병력과 포병부대를 동원한 교전이 일어났다. 옹진지구의 교전 가운데서도 5월 28일, 8월 4일, 10월 14일에 일어난 교전이 가장 큰 규모였다. 특히 인민군은 1949년 8월 4일에 일어난 교전에 두 개 연대와 포병부대를 동원하였다. 이에 맞서 국군은 8월 5일에 후방병력을 실은 상륙함정을 옹진반도에 급파하여 겨우 방어하였다. 그 전투에서 국군 53명이 사망하고 121명이 부상했다.

1949년 1월에 일어난 혁명전쟁은 1950년에도 계속되었다. ‘남조선인민유격대’는 1950년 4월 한 달 동안 교전회수 2천9백48회, 참가인원 6만5천 명에 이르는 전투를 벌였다. (『한국근현대사사전』, 309쪽) 그와 더불어 북위 38도선 일대에서는 1950년 5월 18일부터 25일 사이에 일곱 차례, 6월 1일부터 15일 사이에 여덟 차례 교전이 일어났다. (와다 하루끼, 위의 책, 69쪽) 1950년 6월 옹진반도에 배치된 국군 제17연대와 제7포병대가 은파산을 포격하였고, 인민군이 반격에 나서 옹진반도의 두락산을 공격하였는데, 당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정치보위부 책임장교였던 경험자의 회고에 따르면, 그런 규모의 전투는 당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던 소규모 전투로 생각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한다. (최태환, 박혜강 지음, 『젊은 혁명가의 초상』, [1989], 121쪽)

그처럼 치열한 교전은 곧 전쟁이었다. 당시 반공주의정권은 그 전쟁을 ‘국군의 반공전투’라고 불렀지만, 혁명전쟁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명실상부한 혁명전쟁이었다. 그러한 혁명전쟁 중에 1950년 6월 25일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또 다시 교전이 일어났다.

그런데 사람들은 혁명전쟁 중에 일어난 6월 25일의 교전을 ‘북한의 전면남침’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여기서 착각을 불러일으킨 원인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ㄱ) 6월 25일의 교전을 ‘북한의 전면남침’으로 착각하게 된 원인은,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북한’이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느닷없이 ‘침략’하였다고 조작한 미국의 제국주의전쟁신화가 전세계에 퍼지면서 사람들이 그 전쟁신화를 맹신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당시 그 전쟁신화를 퍼뜨린 국제언론은 평양의 사회주의정권이 아니라 제국주의 미국이 좌우하고 있었다.

(ㄴ) 혁명전쟁은 1949년 1월부터 계속되었지만, 사람들에게는 6월 25일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일어난 교전이 크게 돋보이면서 마치 그 날 새벽에 최초의 교전이 일어난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 까닭은 6월 25일의 교전이 1949년 1월 이후 계속된 혁명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전이었기 때문이다. 혁명전쟁의 결전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6. 조국광복 5주년과 평화통일운동

조국광복 5주년이었던 1950년에 분단의 장기화를 막고 나라의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것은, 사회주의세력과 그 정권이 썼던 표현을 빌리면 “한 줌도 안 되는 민족반역자들”을 제외한 한(조선)민족 구성원 전체에게 나선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과제였다.

위에서 논한 대로, 미국은 계급투쟁이 혁명전쟁으로 격화되고 있었던 한(조선)반도에서 제국주의분단체제를 영구화하려는 분할지배정책을 추진하였고, 반공주의정권은 그 정책을 추종하면서 민족분열주의로 나아갔다. 그런 뜻에서 친미예속성과 민족분열주의는 동일한 실체의 양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분단의 장기화를 막고 나라를 통일하려는 전민족적인 평화통일운동은 계급투쟁이 혁명전쟁으로 격화되고 있었던 혁명정세 속에서 추진되었다. 전민족적인 평화통일운동은 1948년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서 사회주의세력과 민족주의세력이 정치적으로 연대하는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48년 4월부터 민족통일전선의 기반 위에 올라선 전민족적인 평화통일운동이 조국광복 5주년이 되는 1950년 8월 15일을 조국통일의 날로 맞이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더욱 힘있게 추진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전민족적인 평화통일운동의 추진주체는 1949년 6월에 결성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약칭 조국전선)이었다. 조국전선 중앙위원회는 지금도 평양에 있다. 조국전선이 추진한 평화통일운동이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고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그리고 무력이 아니라 정치협상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조국통일위업을 이루기 위한 민족통일전선운동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조국전선은 결성된 지 사흘 뒤인 1949년 6월 28일에 발표한 선언서에서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12개 방안을 제시하였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선언서, 김남식 편, 『남로당연구 자료집』 제1집, [1974], 493-494쪽 참조)

그러나 북침선동구호를 외치던 반공주의정권은 평화통일운동을 악착스럽게 짓누르고 있었다. 반공주의정권은 1949년 5월 3일 민족주의 성향의 『서울신문』에 정간조치를 내렸으며, 5월 17일부터 8월 14일까지 민족주의계열의 소장파 국회의원 15명을 구속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6월 6일 경찰력을 동원한 습격과 테러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무너뜨렸고, 6월 26일 민족주의세력을 대표하는 김구를 암살하였으며, 8월 22일 민족주의세력이 주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마저 없애버렸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제2권, [1996], 205-257쪽 참조)

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민족주의세력의 정치활동이 반공주의정권의 탄압으로 좌절하였음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사회주의세력과 민족주의세력이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추진해온 평화통일운동이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러한 시련 속에서도 조국광복 5주년은 다가오고 있었다. 사회주의세력과 민족주의세력이 결집된 조국전선은 민족통일전선역량을 보존강화하면서 평화통일운동을 밀고 나갔다. 1950년 6월 7일 조국전선은 남북(북남)의 정당 및 사회단체들에게 평화통일 제안을 내놓았다.

지금은 분단체제가 세워진 뒤로 오랜 세월이 흘러서 조국전선이 마치 북(조선)의 통일전선체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분단체제가 오늘처럼 굳어지기 이전이었던 당시에 조국전선은 남측의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북측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이 통합하고 거기에 더하여 남측의 민족주의성향의 정당 및 사회단체들까지 결집한 명실상부한 민족통일전선체이었으므로 당연히 전민족적인 평화통일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로 기능하였다. 그래서 남측의 정당 및 사회단체들만이 아니라 남북(북남)의 정당 및 사회단체들에게 제안하는 형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국전선이 1950년 6월에 내놓은 제안은 1948년의 남북연석회의에서 합의한 자주적 평화통일의 기본원칙을 이어받은 정당한 제안이었다. 그 내용을 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ㄱ) 1950년 8월 5-8일 사이에 한(조선)반도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고 통일적 최고입법기관을 창설하며 조국광복 5주년 기념일에 수도 서울에서 최고입법기관회의를 소집한다.

(ㄴ) 이를 위하여 6월 15-17일에 해주 또는 개성에서 평화통일을 바라는 남북(북남)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자협의회를 소집하며 거기서 평화통일을 위한 조건과 총선거 실시절차, 중앙선거지도위원회 창설문제를 토의결정한다.

(ㄷ) 대표자협의회에는 평화통일을 계속 반대하는 민족반역자들을 참가시키지 말 것이며, 조국통일사업에 유엔조선위원단이 간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원자료 본 북한, 1945-1988』, [1989], 75쪽)

그러나 반공주의정권은 남북(북남) 대표자협의회에 참가하는 사람을 ‘매국노’로 인정한다고 윽박지르는 성명을 내고, 조국전선의 정당한 제안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6월 9일부터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특별시찰경비’를 실시하였다.

6월 9일 조국전선은 남북(북남) 대표자협의회를 소집하기 위한 준비위원회를 내왔고, 6월 10일에는 남측 정당 및 사회단체들에게 관련문건을 전달하기 위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인 리인규, 김태홍, 그리고 조국전선 기관지 ‘조국전선’ 기자 김재창을 대표로 선정하고 그들을 서울로 보낸다고 발표하였다. 그들 세 사람은 그날로 평양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

그러나 국군과 경찰은 그들 세 사람이 북위 38도선에 있는 여현역에서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으며,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은 북의 공작에 동요하지 말라고 하면서 북의 제안에 호응하는 사람을 ‘반역분자’로 취급하겠다고 말하였다. (『경향신문』, 1950년 6월 13일자, 박명림, 위의 책, 380쪽에서 다시 옮김)

이처럼 반공주의정권은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서 형성되고 강화발전된, 사회주의세력과 민족주의세력의 통일전선을 무너뜨리고 평화통일운동을 가로막으려고 하였다. 당시 통일정세와 혁명정세의 연관관계를 살펴보면, 반공주의정권이 평화통일운동을 탄압할수록 사회주의세력과 반공주의세력의 적대관계는 더 날카로운 물리적 충돌로 치닫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평화통일운동이 시련을 겪을수록 계급투쟁이 혁명전쟁으로 격화될 수밖에 없었음을 말해준다.

1950년 6월 1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소집한 회의에서는 ‘평화적 조국통일 추진에 관하여’라는 결정서가 채택되었다. 결정서에서 최고인민회의는 국회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ㄱ) 최고인민회의와 국회를 통합하여 통일입법기관을 세우는 방법으로 평화통일을 실현한다.

(ㄴ) 통일입법기관에서 통일헌법을 채택하고 통일정부를 구성하고 총선거를 실시한다.

(ㄷ) 조국광복 5주년이 되는 8월 15일까지 평화통일에 관련된 모든 대책들을 실천한다.

(ㄹ) 평화통일을 방해하는 리승만, 김성수, 리범석 등 민족반역자를 체포한다. (박명림, 위의 책, 382쪽)

최고인민회의 결정서에서 주목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조국광복 5주년이 되는 1950년 8월 15일까지 최고인민회의와 국회를 통합하여 통일입법기관을 세우는 방식으로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의지이다. 다른 하나는 평화통일을 방해하는 반공주의정권을 제거하려는 의지이다.

사회주의정권과 반공주의정권의 적대관계가 혁명전쟁으로 격화된 정세에서,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문제와 반공주의정권을 제거하는 문제는 상호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회주의정권이 내린 정치적 판단이었다. 더 나아가 평화통일을 가로막은 반공주의정권을 제거해야 시련에 처한 평화통일운동의 앞길에 전진의 돌파구를 열어놓을 수 있으며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사회주의정권이 내린 정치적 판단이었다.

사회주의정권이 반공주의정권을 제거하는 문제는, 반공주의정권이 장악하고 있는 ‘남반부’를 ‘해방’하는 해방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한(조선)반도에서 해방전쟁은 임박하였던 것이다.

7. 혁명전쟁의 군사전략

당시 사회주의정권의 견지에서 보면, 혁명전쟁은 ‘남반부’를 ‘해방’하는 해방전쟁이었다. ‘남반부해방’이 혁명전쟁의 전략목표였던 것이다. 사회주의정권이 전략목표를 ‘남반부해방’으로 정한 까닭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7-1) 조국광복 5주년을 앞둔 당시 사회주의정권의 수도는 서울이었다. 지금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는 평양이고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지만, 1950년 당시 수도는 서울밖에 없었다. 1948년 9월 9일에 선포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제103조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는 서울시”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1972년 12월 27일에 개정선포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제149조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는 평양”이라고 규정하였다. 수도를 평양으로 공식화한 것은, 평양과 서울이라는 두 개의 수도를 인정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헌법상 수도를 옮겼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지리적으로 볼 때, 서울은 북위 38도선 아래에 있으므로 수도는 자연히 반공주의정권이 장악관할하게 되었다. 그런 현실을 사회주의정권의 견지에서 보면, 그들이 ‘괴뢰정권’이라고 부른 반공주의정권이 자기 수도를 장악관할하는 것이다.

반공주의정권과 맞붙은 교전에서 패하여 수도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분할지배정책에 의하여 북위 38도선이 분계선으로 바뀐 것 때문에 자기 수도를 반공주의정권의 ‘점령지역’에 남겨둔 것은 사회주의정권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정권은 무엇보다도 수도를 해방하는 혁명과업을 수행하여야 하였다. 사회주의정권에게 있어서 ‘수도해방’은 혁명전쟁에서 승리하여 ‘남반부해방’과 조국통일을 한꺼번에 성취하는 지름길이었다.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두봉(1889-1961)이 조선인민군 제6사단을 찾아가 “서울은 남조선의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심장을 장악하게 되면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하면서, “이제 부득이 해방전쟁을 개시하게 되는데, 일주일 동안만 서울을 해방시킬 것”(최태환, 박혜강, 위의 책, 111쪽)이라고 했던 말은, ‘남반부’를 ‘해방’하려는 혁명전쟁에서 ‘수도해방’이 지닌 전략적 의미를 드러낸 것이었다.

모든 혁명전쟁의 승리는 혁명무력이 반혁명무력의 저항을 격파하고 수도를 해방하는 것으로 성취된다. 모든 혁명전쟁에서 혁명무력의 군사전략목표는 수도를 해방하고 반혁명세력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에 집중된다. 그리하여 혁명전쟁은 대체로 수도를 무력으로 해방하거나 방어하려는 치열한 공방전 형태로 진행되는 법이다. 한(조선)반도의 혁명전쟁도 그러하였다.

당시 반공주의정권은 자기의 무력을 수도방어선을 중심으로 배치하였고, 자기의 통치체제 역시 수도를 중심으로 세워놓았다. 그러므로 혁명전쟁의 군사전략에서 볼 때, 수도를 ‘해방’하는 것이야말로 ‘남반부’를 ‘해방’하는 혁명전쟁에서 승리하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혁명전쟁의 군사작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ㄱ) 서울과 수원 사이에 국군 주력부대를 몰아넣고 포위공격을 가함으로써 국군의 전투력을 재빨리 마비시킨다는 작전계획이었다. 이러한 작전계획에 따라, 동부전선에서 인민군 제2사단과 제7사단으로 구성된 제2군단은 춘천에서 홍천을 거쳐 서쪽으로 진격하여 수도 남부의 수원지구를 ‘해방’하는 작전계획을 수행하였다. 당시 전투현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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