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12-27 00:00
[대담]통일운동가 서정균 선생
 글쓴이 : minjok
조회 : 9,410  

서 정균 선생은 최근 2~3년 재미민족운동진영의 행사에 거의 참가하지 못했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폐기종으로 호흡이 불편하여 산소호흡기를 사용하는가하면 심한 통증으로 진통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병고 생활로 그는 늘 침대에 누워 집안에서 치료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 이유들로 해서 그의 활동이 제약받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요즘 서 선생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곤 한다. 재미동포들을 포함하여 일본, 유럽 등지의 동포들이 서 선생의 안부를 묻는 이유는 또 한가지 있는 것 같다. 그는 운동의 이론가이며 동시에 통일운동 실천가로서 활동하여 왔기에 그에 대한 관심은 그 누구보다도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 「변혁과 통일」에도 민족철학과 애국열 잘 나타나...

그의 민족철학과 애국열은 그가 지은 책 「변혁과 통일」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336쪽의 도서(1989년 12월10일 발행)에 그의 나라사랑에 대한 마음들이 면면히 수놓아져 있다. 기자는 그 동안 여러 차례 서 선생과 대담시간을 갖고 해외 각지에서 그에 대하여 궁금하게 여기는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서 선생은 언론들과 대담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와의 대담기회가 오랫동안 지연되어 왔다. 간신히 대담약속을 받고 그의 집을 방문했다.

이민생활 33년. 그의 인생 절반을 미국에서 지낸 셈이다. 1937년 5월20일 경북 달성에서 태어나 부친이 교장선생이라 이곳 저곳 전근하는 바람에 6군데의 초등학교를 거처 마지막에 대구 동촌근교에 있는 해안초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경북사대부중을 거쳐 1956년 경 북고등학교 4회 졸업생으로 나와 같은 해 서울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해 1960년에 졸업했다. 대학을 나온 직후 군대생활 3년을 마치고 1964년 처음으로 입사한 곳이 동아일보 기자생활이었다. 언론인 생활 8년째인 1971년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오게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민 오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처음에는 미국에 이민 올 생각이 없었다. 내 처가 간호사 이민으로 신청하여 수속을 밟게 되어서 오게 되었지만 그 당시 동아일보에 재직하면서 개인적으로 미군정 3년에 대해 연구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집사람이 이민 가는 기회를 미군정 3년의 연구 기간으로 이용하자는 심산으로 미국에 오게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민 오기전 동아일보에서 7년 생활-정보부 요원들이 신문사에 상주..."

이민 오기 전 동아일보에서의 7년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자행한 암흑 시기로 그는 회고한다. 3선 개헌으로 얼룩진 격변기였다. 그는 "신문사안에 정보부 요원들이 상주하고 지내던 시절이다"고 말한다. 처음 이민 와서 뉴욕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공부도 하면서 미군정 3년도 연구하며 동아일보 통신원 자격으로 연계도 맺고 있었으나 유신헌법으로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으로 들어가자 모든 걸 집어치우고 뉴욕동포사회에서 <해외한민보>를 창간하면서 민족민주운동에 뛰어 들게 되었다고 그는 자신의 배경에 대해 설명해 준다.

뉴욕서 14년간 해외 민족언론 <해외한민보> 발행

<해외한민보>는 1973년 1월에 창간되어 1985년 6월까지 발행되었다. 그는 14년 동안 뉴욕에서 미주 민족민주언론인으로서 통일운동가로서 활동하다가 1987년 뉴욕에서 로스엔젤레스로 이사를 오면서 북미주조국통일협회(통협)가 발행하는 기관지, <조국>지를 월간으로 발행하며 한반도 정세, 철학, 운동이론 등을 심도 있게 다루는 잡지로 발전시켜 왔다. 최근에는 지난 2년동안 시애틀에서 거주하다가 다시 로스엔젤레스 지역으로 이사를 왔다.

그러나 그는 지난 7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하반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벌여왔다.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도 뉴욕에서는 1974년에 창립된 <재미민주한인협회> 중앙상임위원으로, 그리고 미주민주국민연합(미주민련)의 상임위원 등으로 활약해 왔고 미국 서부지역으로 이사 온 이후에는 조국통일북미주협회 간사, 전민특위 서부지역 위원장, 범민련 재미본부 부의장 등을 역임하여 왔다.

당시 미국 동부지역의 <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민통)>는 김대중씨가 납치되기 이전 미국에서 그를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로 74년 11월23일 워싱턴 디씨에서 제1차 정기총회를 개최한바 있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그 다음해 총회에서 헌장 제2조에 민주주의 회복을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이라고 수정하고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촉진을 위한 사업을 하는 조직이라고 설명했으나 참가하는 사람들이 박정희 정권을 반대하는 자유민주주의인지 아니면 반공, 반북을 염두에 둔 자유민주주의인지 그 개념이 불분명하여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혼선을 주기도 했다. 여기에서 초기에는 진보계에서 임창영 박사, 보수계에서 김재준 목사로 대표되었으나 그 후 진보계 인사들은 이 단체에서 탈퇴하여 <미주민족국민연합(미주민련>을 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 선생은 "<재미민주한인협회>는 75년 2월22일 뉴욕에서 결성되었는데 이 단체는 민통의 강령과는 달리 자주, 민주, 평화적인 조국통일이 우리 단일민족의 지상명령임을 인식한데 기초하여 설립된 단체로서 임창영 선생이 의장이었고, 중앙상임위원으로 지창보, 로광욱, 강근, 고원, 서정균 등이 활동했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러나 그 후 북미 각지에 있는 한인민주단체들이 같은 산하에 연합되기를 오래 전부터 요망하여 왔기 때문에 민주세력의 강화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대외적으로 대표할 기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민주연합을 위한 세인트 루이스회의가 준비되어 왔다. 1년 가량의 준비기간을 거쳐 1977년 6월24일과 25일 양일 간에 걸쳐 세인트 루이스에서 소위 <한국민주화연합운동(연합운동)>의 북미주 기구가 결성되기에 이르렀으나 대표권 문제를 놓고 하나의 기구로 구성되지 못하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그 결과 별도로 <미주민주국민연합(미주민련)>이 탄생되었다"고 회상해 준다. 김상돈씨 등 보수인물들은 <연합운동>기구에 남았는데 후자 기구인 <미주민련>에 참가한 인물들은 임창영, 로광욱, 강근, 지창보, 최정열, 이용운, 최석남, 강한수, 고원, 서정균 등이었다.

미주운동권 70, 80년대 노선차이로 단일 연합기구 구성 불발탄

하나의 연합기구로 구성되지 못한 것은 겉으로는 대표권 문제로 나타났지만 그 내용은 운동의 노선문제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되었다. <연합운동>측의 성명과 <미주민련>의 창립선언문을 비교하면 그 노선의 차이는 분명하게 나타났다. <연합운동> 측은 주한미군 주둔을 전제로 하는 한편 남과 북 당국자들이 모두 장애물이라고 지적하는 한편 <미주민련>은 민족자주와 조국평화통일을 강조한 내용이 창립선언문에 명시되어 양 조직의 노선 상 차이점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서 선생은 이에 대해 "서로 비판하면서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박정희 1인독재 타도라는 한가지 공통분모를 놓고 피차 보완하는 구실을 해주기 바란다고 당시 해외한민보 논평을 통해 요망한바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상, 이념과 정견이 다를지라도 그것을 초월하여 민족의 대단결로서 평화통일을 이루자는 요망과 같을 것이다"고 설명한다.

"한민련 결성은 해외 민족운동사에서 획기적인 사건..."

그는 특히 해외 민족민주운동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대 사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1977년 8월12일 일본 도꾜에서 "해외한국인 민주운동대표자회의"가 열려 이 자리에서 <민주민족통일 해외한국인연합(한민련)>을 결성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이어 "이 조직은 8.15 해방이후 해외에서 처음 출범한 세계적 연합체로서 국외 조직이긴 하지만, 국내 민주세력과의 연대관계에 각별히 유의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었고 그 명칭 자체가 남한 민주화운동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민주화, 민족의 자주, 조국의 평화통일을 민주운동의 지도이념과 목표로 삼고 있는, 민주국민연합으로서의 국내외 공동체인 것이다. 따라서 이 조직은 사실상 민주, 민족, 통일 세계한국인 연합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특색은 "한민련"의 가장 큰 강점이었다. 이 조직이 태동할 때 박정권은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이의 결성을 방해하고 파괴하려 했으나 그 상황을 극복하고 역사적인 해외연합체를 꾸릴 수 있었다. 나는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으로 이 조직의 결성은 해외 민족민주운동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서 선생의 언론관은 어떨까?

"인간을 떠난, 민중을 떠난, 민족을 떠난 그 어떤 자유나 민주주의도 그것은 구호고 속임수 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언론이 민중을 떠나서 무엇을 말하겠는가. 민족을 외면하고 무엇을 말하겠는가. 언론인은 또 자신의 전공이 무엇이든지 인문, 사회과학 등 광범위한 지식을 토대로 세계관을 가지고 활동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1979년에 "동아투위" 기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도 비슷한 말을 전했다.

-<해외한민보>를 14년 발행하다가 1985년 그것을 그만 둔지 벌써 20년이 되는데 회상되는 점이 무엇일까?

"그 때 <해외한민보>에서 주장했던 내용들이 20년 30년이 지난 오늘 날 민족민주운동에서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맥이 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당시에는 선구자적 언론인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구독을 끊고 멀리하는 독자들도 많았다고 회고한다. 특히 통일언론으로 역할하면서 독자들중 기독교인들 독자들이 많이 떠났다고 한다.

-서 선생은 많은 책들을 읽었는데 그가 추천하는 책들은 어떤 것일까?

"감명깊게 읽은 책이라면 에드가 스노가 쓴 Red Star Over China,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강정구 교수의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등..." 그는 많은 책들을 읽어 어느 것을 추천할 까 망설이다가 두 권을 꼽아주며 이 책들이 담고 있는 내용들의 줄거리도 설명해 준다.

-언론인이며 통일운동가인 그는 과연 누구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들로 꼽을까?

"주은래, 호지명, 체 게바라를 좋아한다. 이 중에 호지명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를 발견했다. 호지명이가 정약용의 "목심심서"를 읽고서 너무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의 기일(죽은 날자)에 향불을 피워놓고 추모하는 일화 등을 읽으며 흥미를 가진 적이 있다. 우리 역사에도 이들 못지 않게 존경하는 인물들이 많다."

-민족민주운동가로서 갖춰야 할 요건이 있다면 그는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무엇보다 진지하고 순수해야 한다. 공명심이나 사심이 있으면 안 된다. 그리고 지성과 감성을 모두 가져야 한다. 머리만 있어도 안되고 가슴만 있어도 안 된다. 가슴과 머리가 모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하면 속물 운동가가 되기 쉽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얘기하면서 대학시절에 <신진회>에 가담하여 진보활동을 벌인 추억도 더듬어 준다. 동료들이 문리대 신문 <우리의 구상>에 진보적인 글을 썼다가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복잡한 일이 벌어졌던 얘기도 들려준다.

-2005년을 주한미군철수 원년으로 그리고 자주적 평화통일 원년으로 만들자는 결의들이 해 내외 동포사회에서 일고 있는데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려면 무엇이 가장 급선무일까?

"자주통일 역량이 아직 약한 상태이기에 우리 모두의 염원을 쟁취하지 못하고 있다. 주체역량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 농민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통일운동이나 주한미군철수 운동은 그 대상이 대중들이다. 아직도 많은 대중들은 주한미군철수에 대해 보수언론들이 선전하는데 동요되어 불안을 느끼고 있다. 통일방안에서도 연방제통일에 대해 인식이 부족하여 적화통일 공포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에 이런 대중들을 대상으로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운동도 효과적으로 벌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을 상대로 주한미군이 철수되는 것이 평화가 보장되는 길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알려내는 대중운동이 절실하다. 그리고 이북 제대로 알리기 운동을 펼쳐서 일반대중들에게 이북에 대한 의심을 덜어주는 대중운동도 필요하다. 단순히 이북을 찬양하는 식으로는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 이러한 운동을 포괄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지도자 양성훈련들도 필수적으로 전개하여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통일운동에 참여한 일꾼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인것 같다. 마지막으로 송년을 보내며 을유연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해 내외에서 바쁜 일정들을 보내고 있을 민족민주운동 진영에게 새해를 맞아 통일운동을 전개할 때 특별히 참고해야 할 점들이 있는지 그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새해 정세를 전망해 볼 때 해 내외 통일운동권은 운동방식에 있어 좀더 다양성, 유연성, 전문성을 개발하고 높여 나가도록 각별히 바라고 싶다. 이것은 남이나 북, 그리고 해외 통일운동에 모두 적용되는 요구임을 강조하고 싶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의 진지전이라 할 수 있다. 계속해서 진지를 공고히 하고 외곽을 넓혀 나가야 할 것이다. 지배 헤게모니에 대항하여 통일운동 헤게모니가 압도할 수 있는 희망찬 2005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라며 대담의 마지막 질문에 답한다.

그는 오랜동안 병고와 씨름하고 있었지만 그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은 불꽃을 만들며 훨훨 타고 있었다. 불편한 몸으로 민족통신 특별대담에 장시간 시간을 내준 서 선생에게 감사한다. 서 정균 선생의 새 연락처는 (310)915-9946

[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2004년 12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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