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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열사 김양무님에 대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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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4-11-30 00:00 조회7,7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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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gif남편 김양무선생이 암투병으로 사경을 헤메면서도 나라사랑의 열정은 뜨겁기만 하다고 설명하는 부인 양은찬여사, 그는 남편을 위해 방북치료를 호소해 왔다. 세상의 모든 법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한국정부 당국은 김양무선생의 방북치료를 국가보안법을 구실로 거절하고 있어 세계양심인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어금니 악물고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해 투쟁해 온 인물, 김양무선생은 어떤 인물이며 그의 부인 양은찬여사는 누구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지구촌 곳곳에 거주하는 양심인들로부터 요구된 질문이다.

양은찬여사는 김양무선생의 어린시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극진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장손으로서 특별한 임무라는 그 무엇을 국가관으로 진행시켜 남과 다른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듯 합니다. 이 시대에 태어난 자로서 임무는 태어난 해에 일어났던 6.25의 흔적을 없애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때 태어난 사람으로서 임무라고 하였습니다. 어렸을 때 별명을 큰 바위 얼굴이라 불러주었다는 말을 마을 동창에게서 들었습니다. 마을에서는 그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골목집 귀공자로서 이웃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과 기대를 한몸에 받고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 동기는 아들 선호사상과 유교사상이 짙은 민족주의자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어린시절을 지낸 김양무선생이 1950년 9월21일 3남3녀중 장남으로 남원에서 태어났다. 27년전 유신헌법철폐투쟁으로 경찰에 연행되었던 김양무선생은 그후 줄곧 민족문제를 고민하며 통일의 그날을 쟁취하기 위해 생의 대부분을 바쳐왔다. 그의 약력과 경력은 다음과 같다.

69-03-01 전북대철학과 입학
73-06-10 유신헌법철폐투쟁으로 경찰에 연행
73-06-30 유신헌법철폐투쟁으로 전북대 재적
73-08-02 육군 강제 입영
75-06-01 경기도 연천 상무 중학원 설립 야학 운영
76-12-01 육군 만기 제대
77-03-01 전북대철학과 복학
78-02-26 전북대 철학과 졸업
78-03-01 전남완도 군외중 교사
82-04-10 민족통일사상연구소설립
83-05-18 5.18정신과 통일문제의 연결점 찾는 세미나 개최
84-07-10 통일운동의 새로운 모색을 위한 운동 방향. 세미나 개최
85 민족통일사상연구소에 전념
86 민족통일사상연구소에 전념
87 민족통일사상연구소에 전념
88.3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광주전남회의 간사장
89.9 전민련 조국통일위원
90.9 조국통일 범민족연합(준) 준비위원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중앙위원
91.5 광주전남연합조국통일위원장
92.9 조국통일범민족연합(준) 실행위원
93.7 조국통일범민족연합(준) 정책위원장
94-07-05 범민련 광주 전남 결성 사건으로 구속
95-11-29 범민련 남측 본부 결성 사건으로 구속광주 전남 결성 사건 으로 구속
97-05-15 범민련 남측 본부 상임부의장
97-07-19 북녁 동포 돕기 사업으로 구속
98-06-06 제 9차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장
98-08-15 제 9차 범민족대회 주도혐의로 구속
98-10-13 서울구치소에서 혈변증세를 보여 안양병원이송 직장암 진단으로 구속 집행정지 출소
98-11-26 전남대 병원에서 직장암 수술
99-01-05 수술경과와 예후가 좋아 범민련 복귀.
범민련 정신으로 투쟁과 투병을 일치시키는 생활
99-06-03 제 10차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장
99-07-05 제 10차 범민족대회 남.북.해외 공동준비 위원회 남측위원장
99-08-13 제 10차 범민족대회를 걸어 체포영장 발부
99-08-16 명동 성당 농성 투쟁돌입
99-09-11 범국민 투쟁 본부장
99-10-01 건강 상태 극도로 악화
99-10-22 오당한방병원 입원
99-11-09 제 3차 약침 시술. 북 당국에서 보내온 약 "장명"을 복용중
00-01-15 현재 건국대 병원에서 흉부에 찬 물을 2번이나 뽑는 응급치료를 받고 투병중


김양무선생의 암투병과 애국활동 때문에 자녀교육과 생활비까지 조달하며 가정을 돌보면서도 남편의 투병을 보살펴 줘야하는 3중, 4중의 고통을 인내하고 있는 부인 양은찬여사는 어떤 분일까? 이 물음에 부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전남대 사대 음악교육과 출신이며 피아노를 전공하였고, 완도 군외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고, 이태리 산타체칠리아 음대에 진학하려고 하던 참에 김선생과 가까와져서 유학을 포기 하였습니다. 현재 전북대 대학원 음악과에서 논문 심사가 통과된 상태이고, 기득권 세도의 횡포에 시달려 포기 했다가 졸업시험을 두번 통과하여 겨우겨우 졸업을 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난 4월 27일에는 피아노 독주회를 마쳤고 광주에서도 개최하려고 합니다. 김선생이 이대로 무사히 버텨주기만 한다해도 제가 하는 일을 줄기차게 밀고 나가겠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조마조마한 상태에서 재작년 작년 많은 일을 해냈습니다. 분노에 새힘을 얻어 일을 하는데 큰 바퀴를 굴리는 에너지를 얻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큰 딸 진아는 80년 생이며 전남대 사대 피아노과 (저와 같은 학교 같은 전공)에 몇 개월 다니다가 지난 10월 21일에 베를린에 갔습니다. 지금 어학 코스 중이며 베를린 음대에서 입학시험 허가서(줄라숭)를 받아놓은 상태입니다. 콘탁은 되어서 지도 교수에게 피아노 지도를 받고 있으며 입학하기 위해서 열심히 준비하는 중입니다. 둘째 딸 진경이는 고 1이며 막내 기질이 있고 연약합니다. 콤퓨터에 열중이고 장차 프로그래머가 될 소질이 있습니다."

김양무선생 그리고 피아노 전공인 부인 양은찬여사의 만남은 어떤 계기로 이뤄졌을까? 궁금하여 물었더니 부인은 서슴없이 대답해 준다.

"학교에서 근무하던 중에 김선생을 만났습니다. 개가 나보다 잘 달린다고 하여 나도 개처럼 잘 달리고 싶지 않았으며, 벌레가 나비 된다는 것에 신기하여 뽕잎 먹는 벌레를 생각하면서 지내던 나에게 대화를 할 수 있는 폭넓은 지성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완도 바닷가에서 외로운 사색가였던 저에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순수무궁한 영혼을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에 부딪쳐 닥치는 일마다 제가 해결해야 하는 과정에서 그의 영혼을 묵사발로 만드는 일을 하게 될 줄은 모르고 무작정 그의 순수함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쓰기 위해서 학교에 오게 되었다고 하는 그는 학생들과 무척 가깝게 지냈습니다. 담임을 맡고 있던 1학년 3반 아이들이 제 처소와 그의 처소를 오고 가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책 제목을 정해놓고 있었는데, 아직까지 쓰지 못하고 있는 그 책의 제목은 "우리 시대의 임무"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인은 이어 김양무선생의 애국정신은 민족주의자였던 할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설명한다. 부인은 그 줄거리를 간단하게 답해준다.

"할아버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입니다. 민족주의자 할아버지는 김선생의 아버지인 큰 아들을 일본놈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교육의 기회마저 포기하였던 분입니다. 머리자르는 문제였던가? 실정법위반으로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으며, 일본 경찰 서장 부인에게 약을 지어주게 하기 위해서 풀려나 경찰 서장의 존경을 받고 매일 아침 문안 인사를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뭔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큰 포부를 심어준 사람은 할아버지이고, 그의 어머니 입니다. 어머니는 그를 무작정 믿어주고 지지해주었던 분이며 큰 살림살이 중 많은 덕을 베풀어 그의 밥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못 먹고 살았던 시절에 덕을 쌓은 큰 가정의 어머니였습니다. 머슴과 아버지가 한 상에서 쌀밥을 먹게하였으며, 아랫사람들이 전심으로 주인 집을 위해 헌신했던 이야기들을 지금도 듣고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갈라진 사람들을 화해하게 하는 폭넓은 마을의 어머니로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 분이 계시는 곳에는 화해가 있었고, 먹을 것이 있었고, 따뜻한 마음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군요. 머슴이 김양무님을 업어다 학교에 데려다주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새 신을 신고 남다른 귀공자의 대우를 받는 김양무님을 모두가 아껴준 것은 어머니의 덕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김선생님의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한약방에 자주 들러서 학교 일을 상의하고 할아버지는 학교에 큰 지원자가 되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김양무님을 질투하거나 하지 않은 것은 참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아무도 질투하지 않고 큰 사람이 될 것이므로 기다려주고 지지해주었다고 합니다. 세 명의 누님들이 그런 이야기! 를 많이 들려주고 있고, 지금도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리는 마을 친구들이 있습니다."

두분에 얽힌 부부애의 얽힌 이야기도 궁금해서 물었더니 서스름 없이 대답해 준다.

"남편은 로맨스를 표현하는 센스가 우둔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이성으로서 사랑을 느꼈다는 경험은 참 이상합니다. 추운 마루에서 혼자 지낸 날이 많았고, 나는 아이들을 껴안고 잠을 잡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습관이 들어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한 방에서 지내는데, 나의 잔소리를 피해서 저 쪽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의 노래는 혁명 동지가 또는 몇 개의 레파토리가 있는데, 찬송가도 몇 곡 있습니다. 관심 없이 들었었는데, 그의 인생의 표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미안한 생각이 드는군요. 왜 그렇게 추운데서 자느냐고 물었더니 감방에는 장기수 선생님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고 하더군요. "우돈"이라고 불러주었습니다. 속물인 저의 판단으로는 바보스러웠습니다. 그의 몸을 좀 돌봐주지 못해서 이렇게 나쁜 병에 걸리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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