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조국반도 종전선언 만이 평화협정 지름길 > 기타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4년 3월 28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기타

[논단]조국반도 종전선언 만이 평화협정 지름길

페이지 정보

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8-08-24 12:45 조회13,447회 댓글0건

본문

재미동포 자주논단 예정웅 대표는 "미국은 종전을 선언하는데서 마땅한 책임과 의무감을 지니고 있다. 미국은 응당《종전선언》채택 등「단계적」이며「동시적인 행동조치」를 통해 상호신뢰를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종전선언이 중요한 이유는 말 그대로 전쟁의 일시중단이 아니라 영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으로 불안정성과 안보상황을 끝장내고 조국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가는 밑거름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조미간의 <종전선언>만이 평화협정의 지름길이라고 설명했다.[민족통신 편집실]




조선반도 종전선언 만이 평화협정 지름길

1, 2차세계대전은 무조건 항복만이 종전


-세계 1차 대전 전쟁 전까지 건재하던 유럽의 왕정군주 정권들도 이 전쟁으로 인해 봉건적인 러시아 제국독일 제국오스만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4개 제국이 군주정권의 종말을 고하고 망해 버리자 잠시 세워졌던 핀란드 왕정이나 독일제국 내부의 수많은 제후국들의 왕정이 폐지되고 10여 개의 신생 공화국이 제국의 폐허 위에 탄생하였다-(본문 중에서)


-미국의 종전선언 회피는 역사적인판문점선언에 명시된 대로종전선언을 채택하고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조선반도에 항구적인 평화가 깃 들게 될 것을 바라는 온 겨레와 국제사회의 한결같은 지향과 요구에 대한 정면도전이 아닐 수 없다-




*글:예정웅대표(재미동포 자주논단)


예정웅01.jpeg
필자인 예정웅대표


◆ 들어가기



「종전」이란 무엇인가? 누가 물었다. 그래서 나온 대답이「베르덩(Verdun)의 악수」같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게 바로「종전」과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베르덩] 이란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도시로, 1916년 1차 세계대전 당시 10개월 동안 71만 명이 사망하고 1백만 명이 부상당한, 세계전쟁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격전지」를 말하는 것이다.


1984년 9월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독일의 콜 총리가 베르덩(Verdun)에서 만났다. 그들은 프랑스와 독일의 무명용사 13만 명이 묻힌「두오몽」납골당에서 손을 잡고, 화해를 다짐하며 고개를 숙여 묵념을 하였다.「베르됭」은 100년이 흐른 세월 동안, 비극의 현장이 화해의 공간으로, 참혹한 전쟁터에서 평화의 수도로 거듭났다. 두 번의 세계대전의 참극을 겪었던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는 물론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국 지도자들이 자주「베르됭」에서 만난 이유는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고, 다시는 비극을 반복하지 말자는 성찰과 반성을 위해서였다. 조선반도에는「베르됭」이 너무나 많다. 판문점에서 남북의 수뇌 분들은 2018년 올해에만 두 번 만났다. 우리민족의 단합과《민족사랑의 악수》를 나누었다. 이후 남북은 고위급 군사회담까지 열어 조국반도의「베르됭」인 비무장지대(DMZ)에서 영구적인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군사적으로 도와주는 사업과 관련해 논의하였다.


이제는「백마고지」와「비무장지대」에 묻힌 이름 모를 전쟁희생자들의 유골을 수습하고, 그들의 넋을 달래 줄 수 있게 되였다.《종전선언》이란 전쟁참극에 대한 기억과 조국반도에서의 반 평화에 대한 성찰이며, 반성이고 화해를 위한《악수》를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미합중국에게 조국반도의「종전」을 위한 선언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평화를 갈구하며 조선반도의 분단의 아픔과 비극을 가시고 평화적 통일을 위해서도 그렇고 양국 간의 관계계선과 국제정치의 올바른 방향을 위해서도 필요하다.《종전선언》은 단지 전쟁은 끝났다는 선언 갖고는 모자란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과 다친 사람, 참혹한 파괴의 기억하기 싫은 과거를 추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쟁의 상처는 살아남은 사람의 영혼도 파괴하였다.


전후의 조국반도의 분단체제의 지속은 이를「승복할 수 없는 사람들의 복수심」을 자극하고 전쟁을 재생산하려는 호전적인 사람들,「일시적으로 중단한 전쟁」의 불씨를 되살리려는 미국의 검은 그림자 정부《군산》전쟁상인들의 책동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세대가 달라져도 조국반도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적대와 증오는 결코 저절로 낫지 않는다. 조국반도의《종전선언》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전」의 역사적 사례 


▼제1차 세계대전 독일의 《무조건 항복》에서 종전


제1차 세계 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의 전쟁으로 촉발되어진 전쟁이다. 아주 작은 사건에서 연유된 전쟁이었다.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 유럽에서 전개된 전쟁이다. 유럽인 전 계층이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유럽《전민전쟁(People's War)》이라고도 부른다. 1차대전 기간 동안 발생한 전사자는 약 1990만 명(2천만 명설) 학자에 따라서 사망자 계산이 다르다. 이 전쟁에 참가한 국가들 대부분이 침략과 약탈을 일삼는 제국주의 국가였다는 것을 먼저 상기 해볼 필요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은「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이라는 제국전쟁(Imperial War)이라고도 부른다. 당장 미국(늦게 참전)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 오스만, 이탈리아, 일본, 오스트리아-헝가리 각 제국만 봐도 이미 답은 나온 것이다. 이 전쟁으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몰락하고 나머지 대영제국, 프랑스 식민제국 미국제국들도 역사의 주도권을 사실상 상실하는 등 제국주의가 첫 몰락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인문학적으로도 중요한 시기였는데 (식민지 지역 같은) 야만정치에서 벗어난 서구문명국을 자처하던 유럽 각 제국이 그 어떤 야만인들보다 더 끔찍한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18세기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는 문명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낙관하던 분위기는 문명의 이기심들을 이용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통해 박살이 나고 말았다. 전쟁을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전쟁참전에 자원하던 유럽의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죽음과 생지옥이었다.


1차 대전 이후로 유럽문명은 상당 부분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이런 분위기에 반해 혁명적 이론과 실천이 대단히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왕정이나 군주정치를 끝장낸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에 유럽 바깥의 나라들의 군주정치는 식민지지배나 내부 소요로 왕정과 군주정이 무너지고 있었다.


세계1차대전 전쟁 전까지 건재하던 유럽의 왕정, 군주 정권들도 이 전쟁으로 인해 봉건적인 러시아제국, 독일제국, 오스만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4개의 제국이 군주정권이 종말을 고하고 망해 버리자 잠시 세워졌던 핀란드 왕국이나 독일제국 내부의 수많은 제후국들의 왕정이 폐지되고 10여 개의 신생 공화국이 제국의 폐허 위에 탄생하였으며 20세기 왕정의 몰락의 신호탄을 울린 전쟁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을 거치면서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알바니아의 왕정도 폐지되어 버렸고 유럽의 왕정은 서, 북부유럽 지역의 일부 국가를 제외하곤 다 와해되거나 무너진다. 전쟁 초기 1년 동안에「마른 전투」,「탄넨베르크」전투등 점령과 방어 등이 일어났지만 나머지 3년간은 참호에서 밀고 당기고만 하는 소모전의 연속이었으며, 주전장도 유럽으로 국한되었다고 전쟁격하 분위기가 역력하였다.


이는 1차 세계 대전에 대해 주로 전쟁사적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 졌을 뿐이다. 사실 제1차 세계대전은 정치인들의 오판과 우연이 연쇄적으로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경제적 경쟁이 원료와 시장 확보를 위한 영토 확장경쟁으로 이어진 제국주의 서로간의 전쟁이었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며 잠시 물러섰지만, 강대국들 사이의 이 갈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 사이의 평화협정은 근본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학자「에릭 홉스봅」은 이렇게 지적한다.《파리강화회의》가 제국주의자들 간의《종전》의 결과물이고 세계 전쟁이 또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창설된《국제연맹》은「전쟁의 통계자료나 모으는 기구로서의 역할」을 제외하면 거의 완전한 실패작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파리강화회의》에서 체결된 가장 유명한 조약인《베르사유 조약》도 종전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처음부터 파산할 운명이었고, 따라서 전쟁이 또다시 터질 것은 거의 확실」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을 두고 한 프랑스 군총참모장은 냉소적으로 이렇게 말했다「이것은 평화를 영구적으로 만들려는《종전선언》이 아니라 기껏해야 20년짜리《휴전협정》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연속적인 전쟁으로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도 열어놓았다. 제국주의 전쟁이 낳은 위기와 혁명의 불꽃이 동시에 일게 되는 1917년 러시아 볼세비키의 레닌혁명의 촛불은 횃불로 변해 그 여파는 유럽 곳곳으로 번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나라들에서 혁명적 투쟁 물결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승전국들도 이 혁명전쟁의 물결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당시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지배자들의 인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영국 총리「로이드 조지」는 프랑스 총리「조르즈 클레망소」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유럽전역이 혁명의 투쟁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유럽 전역의 인민대중이 정치·사회·경제적 측면에서 기존질서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고 호소하였다. 동북아에서는 일제를 반대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이 탄생하고 반일투쟁이 시작 되였고 혁명의 국제적 확산을 원하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전망과 전략은 전혀 공상이 아니었다.」고 회신을 주고받았다. 1차 세계대전은 한편, 전쟁이 낳은 정치사회적 위기와 정치양극화는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군국주의와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탄생의 토양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히틀러는 천재이지만 인생의「낙오자」로 살다가 전쟁에 참가해 인생의 의미를 재 발견 한 히틀러 같은 사람들이 등장해 극우적 독일 나치즘의 기초를 내 걸었지만 그도 극우적 자본가의 노예였다. 독일에서 히틀러에 의해서 나치즘이 자라나고 있던 시기에 이탈리아에서「무소리니」에 의한 파시즘의 싹을 틔우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종전」과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사이 20년 여정에 관해서「로자 룩셈부르크」가 주창한《로동계급에 의한 공산사회주의냐, 제국주의에 의한 야만의 지배주의의 연속이냐》의 투쟁의 갈림길에 선 고민의 시기였다고 하였다. 외교사와 정치사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그 배경과 전후 결과물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이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던 시기였다.


당시 전후질서를 결정하는 주인공은 바로 프랑스의 총리《조르주 클레망소》와 영국의 총리《로이드 조지》가 주도하였다. 국내에 한정하여 전쟁의 결과로 로-일 전쟁에서 제한된 극동지역에서 승전국이 된 일본 또한 1차 대전에 대한 은근한 무관심 조장에 한 몫 하였다. 1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방지하기 위해 조직된《국제연맹》에 일제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차지하다니... 그 때문에 《국제연맹》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한 채 일찍이 해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독일, 일본《무조건 항복》에서 종전 

포츠담 선언(Potsdam Declaration)은 중요한 회담 중에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비판받을 만한 회담이였다.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소련, 중화민국「당시 국공내전에 있던 중국은 장개석이 권력자 였다.」 이 독일의 포츠담에서 발표한 선언이중요한 것이다. 이 회담에서는「일본의 무조건 항복」 권고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본에 대한 전후처리 문제가 논의되었다.


합의 내용은《포츠담 선언》으로 공포되었다. 쏘련공산당 총서기 「조새프 스탈린」, 미국의 대통령「트루먼」, 영국의 수상「처칠」경, 중화민국의 총통인 「장제스」(장개석)가 회담에 참여하여 선언에 동참하였다. 선언의 요지는「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한 것이며 그 내용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1945년 7월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의 포츠담에서《윌헤름 (Wilhelm)왕세자의 저택(Cecilienhof)》에서 개최되었다.


참여국은 쏘련, 미국, 영국, 중국의 수뇌들이었다. 쏘비에트련방공화국 총서기「조세프 스탈린」과 영국총리「윈스턴 처칠」경, 그리고 미국의「트루먼」대통령, 중국의 장개석 등 4국 수뇌회담이 열렸다. 이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의《무조건 항복》이 합의 되었다. 이후 포츠담 협정에 따라, 독일의 전후처리 미, 쏘 간의 정치흥정에 따라 동독과 서독으로 분리된다. 일본에는 미군이 진주하는 등 국제적인 전후 처리 절차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1차 세계 대전이나 2차 세계대전은 한마디로《종전선언》이 아니라 패자의《무조건 항복》이라는 문서에 서명함으로써「종전」이 이루어 진 것이다. 나치 독일은 5월 8일 (VE Day)를 개최하였다. 회의의 목적은 전후질서, 평화조약 문제의 수립, 전쟁의 영향에 대한 평가와 대응책 등을 포함하였다. 1945년 8월 9일, 미국은 「히로시마」에 이어 3일 후 「나가사키「에 두 번째의 원자폭탄이 투하된 같은 날이였다.


쏘련은〈일, 쏘간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선전을 선포하면서 쏘련의 붉은 군대가 만주를 거처 진격하고 조선방향으로 남진하고 일본열도 섬들을 점령하자. 일본은 8월 14일 어전회의(御前會議)를 긴급히 소집 해《포츠담선언》의 수락할 것을 결정하였다. 포츠담선언은「전 일본 군국주의 군대의 무조건 항복과 해체」(동 선언 13조)의 조항에 의거해《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소화천황(昭和天皇)의 조서(詔書, 항복문서)가 중립국인 스위스를 통해 연합국 측 미국에 전달되었 제2차 세계대전《종전》의 대표적인 사례는 ∇ 1945년 5월 7일과 8일 유럽 전선에서 선언된 포츠담 회담 결과는 조선반도의 분리문제가 핵심의제 였다. 독일군의《무조건 항복》선언과 아시아에서 ∇ 1945년 8월 15일 일본 쇼와 왕의 《무조선 항복》선언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은「종전」될 수 있었다.


독일은 패전을 스스로 인정하고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한 후, 6월 5일 연합군이《승리 선언》을 하면서 유럽 전역에서 종전이 이루어졌다. 그 후 2개월 후 일본은 8월 15일의《무조선 항복》에 두 손에 힌 깃발을 들었다. 이어 9월 2일 미국 전함「미주리」함 선상에서 일본 대표가《항복문서》에 서명을 하면서「종전」이 이루어졌다. 이후 포츠담 협정에 따라 독일은 승전국의 협상에 의해 동독과 서독으로 분리되었다.


일본에는 미군이 진주하는 등 국제적인 전후 처리 절차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1차세계대전이이나 2차 세계대전은 한마디로《종전선언》없이 패자의《무조선 항복》이라는 문서에 서명함으로써「종전」이 이루어 진 것이다. 그러나 조선반도는 다르다. 1925년 10월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 7개국이 스위스「로카르노」에서 체결한 국지적인《안전보장조약》이 있다.


이를「로카르노조약」이라고 한다. 이 조약은 스위스의 영세중립, 벨기에의 중립, 독일과 프랑스의 불가침 협약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독일이 1936년 벨기에와 프랑스를 기습적으로 침공하면서 조약은 깨져버렸다.「뮌헨협정」도 마찬가지다. 영국 챔벌린 총리는 1938년의 9월 독일 히틀러와「뮌헨협정」을 맺은 뒤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Peace for our time)를 달성하였다》고 자축하였다.


일반적으로 재래전쟁은「정전협정」즉,「휴전협정」은 양국 군 사령관들이 전쟁을 중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협정은 속임수였고 지켜지지 않았고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1973년 1월 베트남의 전쟁종결과 평화회복을 위한「파리협정」도 실패한 경우의 하나이다. 파리협정은 정전,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 평화적·단계적 통일실현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협정 체결된 후 2년 뒤 남베트남은 베트남민족해방 전선과 북베트남에 의해 무력으로 정복당해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승리해《종전》을 맞게 되었다.


이를 정치적으로 결말 짓는 방식이「평화협정」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독일과 연합군이 파리 북동쪽 「콩피에뉴」숲 속에 정차된 열차에서「정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이 중지 되였다. 이어 이듬해 6월 파리《베르사유조약》으로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다.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도 1945년 9월2일「미주리」함상에서 일본군이 「무조건항복」한 뒤 1951년 8월「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체결해 끝냈다.


그러나 「종전선언」없이도 전쟁을 종결한 케이스도 있다. 유럽의 경우 1945년 5월 독일군 참모총장이 무조건 항복서에 서명한 것으로 오늘까지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걸프전(1991)과 이라크전쟁(2003)도 어떤 정치적 협정이 없이 승자독식에 의한 종전이 되였다. 미국의 일방적이었다. 국제법학자들도 협정보다는 실질적인 평화 상태를 더 중요시하고 있다.


모호하게 전쟁이 종전되어 불안과 불안정했던 질서가 유지되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전 기간과 달리 제2차 세계 대전은 누가 봐도 대립구도가 명확했고 결정적으로 확실하게 승패가 갈렸기 때문에 앞으로의 역사와 세계질서를 완전히 결정 짓게 되어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미친 영향은 워낙 커서 영향을 안 받은 곳이 없다. 그나마 아메리카 대륙은 별 일 없었지만 다른 온갖 대륙은 전쟁과 시위 테러와 전장의 연속이었다.


독일은 유럽에서, 일본은 아시아(+오세아니아)에서,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에 전장을 만들었고, 대서양이나 태평양 역시 전쟁터가 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여러 가지 일들이 전후 세계를 많이 바꿔놓았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때문에 국가 자체가 잠깐 멸망해버린 경험을 한 국가도 많고, 아예 새로운 나라, 새로운 정권이 세워지거나 혹은 세계 각국의 정치, 사회 부분에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났다.긍정적인 영향도 없지는 않다.


총력전을 겪고 난 사람들은 더 이상 전쟁이 군인들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겪는 생사의 고통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전쟁이란 게 인류 전쟁사의 온갖 신기록을 다 갈아치울 만한 거대한 전쟁이었기에, 전 세계 사람들에게「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반전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인식은 1953년 조선전쟁이 휴전협정을 맺게 됨으로써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쏘련의 냉전체제와 이념적 대립구도가 전면전으로 발전하는 역할을 억제하기도 하였다.


또한 세계를 전쟁으로 이끈 미 제국주의와 쏘련은 과거에 비해 견제 당하게 되었고 전쟁 발발의 과정이 된「뮌헨 협정」이 재조명되어 국제관계에서 제국주의자들의 약탈과 수탈, 무리한 요구를 하면 거절해야 하였고 자신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는 인식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조선의 반만년 역사에서 보듯 나라에 힘이 없어 백성이 당한 고초는 끝이 없다.


나라에 힘이 없어 강대국에 매년 조공을 바쳐야 했고 심지어 왕자가 인질로 잡혀가고, 나라의 임금이 적장 앞에 무릎을 꿇고 빌어야 했으며, 어린 여성까지 조공 물로 받쳐야 했던 지나 날의 쓰라린 역사 속에 그 여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자《화냥년》으로 낙인찍혀 비극적 수모를 당해 왔던 역사적 교훈을 우리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나라 잃은 서름은 개만도 못하다 하였다.


1950년 3년간 조미전쟁은 세계최고 전쟁의 제목들이 붙어 다녔다. 이것은 조선전쟁(코리아전쟁)이 얼마나 격렬하고 참혹했는가를 알 수 있다. 베트남 전쟁 10년사에 미군은 5만여 명이 죽었다. 그런데 조선전쟁 3년사에 미군 5만4천여 명이 죽어나갔다. 미군이 조선에서 3~4배 이상 더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계산이다. 이런 표현들이 있다. 조선전쟁은《지상최대의 폭탄투하》.《세계 최대의 미국군 사망자》,《세계 최대의 양민학살》.《세계 최대의 공격작전》.《세계 전쟁사에 기록될 최악의 지상전》《조선에 핵 선제공격 작전》등이 그렇다.


그리고 이 기록들은「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깨지지 않을 것이다. 제발 신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깨지지 않는 것 보다 낳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록이 깨지면 어차피 이제부터의 전장 터는 조선 땅에서가 아니라 미국 본토에서 불바다가 시작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멸망해 지구상에 생명체가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해 질 터이니 말이다. 미국이여 조선과 그래도 전쟁하겠는가?



◆ 조국반도《종전선언》채택은 시대적 요구


2018년 8월 17일자 로동신문《종전선언》채택은 미국의 의무라며 연일 압박 론리를 전개하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국의 대북 제재에 대해 「강도적인 제재 봉쇄」라고 원색적으로 백악관의 태도를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조선은 《종전선언 채택은 시대의 요구》라며 미국에 거듭 촉구하고 나섰다.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재방북을 앞두고 핵시설 명단 제출과《종전선언》을 둘러싼 조, 미간 기 싸움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로동신문은 7월 17일자 1면 머리기사로 김정은 위원장이 영부인 리설주 여사와 함께 「원산갈마 해안관광지구」시찰을 한 현지지도 사업을 보도하였다. 김 위원장은 3개월 만에 다시 공사 현장을 찾아 내년 10월 10일까지는 완공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하면서 공사 진척을 독려하였다. 그러면서 김 위원장은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건설과 같은 방대한 창조대전은 강도적인 제재봉쇄로 우리 인민을 질식시켜보려는 적대세력들과의 첨예한 대결전》이라고 지적하였다.


조선은 언론매체를 통해 미국의 대조선 제재를 강도 높게 비판해오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강도같다.》는 거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례적이다.「풍계리 핵 시험장 폐기」와「동창리 우주센터 발사대 해체」「간첩혐의로 구속된 3명의 석방」「미군 유골 55구 인도」등의 조선의 선제적이며 선의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비핵화 이전에는 대조선 압박 강도를 유지해야 한다며 제재 대상을 계속 추가 발표하는 미국의 조치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조선은《종전선언》에 나서라고 미국을 계속 압박하고 있다. 로동신문은 이날 기명 칼럼을 통해 "종전선언의 채택은 역사적인 판문점 수뇌상봉(정상회담)과 싱가포르 조미(북미)수뇌회담에서 합의되고 내외에 공표한 문제"라며 「미국은 종전을 선언하는 데서 마땅한 책임과 의무감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어 「미국은 응당 종전선언 채택 등 단계적이며 동시적인 행동조치를 통해 호상신뢰를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자신들의 선제적 조치에 대해 미국도 대조선 제재완화와 《종전선언》등의 단계적‧《동시적》행동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세종연구소 정성장 연구기획본부장은「조선으로서는 핵을 포기할 때까지 제재를 완화할 수 없다거나 처음부터 핵 프로그램 전체를 신고해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은 강도 같은 요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해석하였다.


정성장 본부장은 「폼페이오 장관이 다시 방북하더라도 「비핵화 일정표를 제시해야 종전선언을 할 수 있다」는 기존 입장을 반복한다면 조선과 타협은 불가능하다」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포기하면 경제 나 민생분야 관련 제재를 완화하고《종전선언》을 한다는 점진적인 접근을 해야 진전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역사적인「판문점선언」에 명시된 대로《종전선언》을 채택하고《평화체제》를 구축하여 조국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이 깃들게 될 것을 바라는 온 겨레와 국제사회의 한결같은 지향과 요구에 대한 정면도전이 아닐 수 없다」고 미국의 태도를 비판하였다. 일각에서는 상황에 따라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는「선언」이 《종전선언》이 될 수도 있다. 《종전선언》의 회의론도 제기되지만 그럼에도 의미는 있다.

 
조국반도《종전선언》은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즉각적으로 선언됐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은 휴전협정에 서명을 하고 나서 도망가듯 판문점을 떠났다. 장장 65년 간 이어져온 조선전쟁의 휴전체제의 많은 부분들에 제대로 작동되지도 않았다, 많은 변화를 불러올 것으로 예상되였던 지장이 돼 그 의미를 상실하였다. 정전협정은 이제는 의미가 없다. 우선《종전선언》이 이뤄지면 「휴전관리체제」에서「종전관리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휴전관리의 주체는 형식적으로 유엔군사령부이고, 실질적인 관리행위는 미국군이 한다. 그래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관리 업무도 유엔군사령부가 맡고 있다. 그러나《종전선언》되면 휴전관리체제의 법적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에 유엔군사령부의 지위와 역할이 근본적으로 바뀌어 져야 한다. 이에 따라 유엔군사령관이 겸직하는 주한미군사령관의 지위도 달라진다.


조국반도의《종전선언》은 남·북·미·중 4자 정상 간 합의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지만, 종전관리체제는 조국반도에 실질적으로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북·미·중·남 4자 구도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비무장지대 관리를 비롯한 실질적인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는 남북 간에 논의하고 미국이 종전을 보장하는 형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비무장지대(DMZ) 초소」에서의 중무기 철수 등 실질적인 조치들이 남북 간 주도로 진행될 수 있다.


물론 이런 전망에 대해 남북군사 당국자들의 의지가 관건이다.《종전선언》이 선포될 경우「유엔군사령부 해체」등 상당한 현상 변화를 동반한다. 정부 당국자도「정상 차원에선 남북 간 군사적 적대행위를 안한다는 선언적 확인이 필요」하고 후속 조치로 남북 국방장관 회담이나 기타 다른 형식의 군사 당국 회담을 열어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방식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조국반도《종전선언》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는 점에서 조·미·중·남 4국이 종전선언을 선포 한 후 곧바로 조미평화협정으로 가는 길이 트게 된다. 사실《종전선언》이 선포되면《조미평화협정체결》루트가 보이게 된다. 그때에 주한미군은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전쟁이 없는 남조선에 주둔할 명분이 상실하게 된다.


조선이 주한미군철군을 선제적 조건으로 내 세우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주한미군은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 때문이 아니라 《한·미 어호방위조약》을 근거로 남한에 주둔할 명분을 내세울 수 있다. 한미동맹 상호방위조약 제4조는「상호 합의에 의해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허여(許與)한다」며 주둔 근거를 명시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철저히 남한에 주한미군 존속을 원치 않으며 미군주둔을「비즈니스」차원에서 바라보고 있어 조선과 정치적 거래, 흥정대상으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군을 철수할 것을 내심 바라고 있다. 그는 미국이 남한과의 관계에서 「무역에서 돈 잃고 군사에서도 돈 잃는다」사업적 관점을 갖고 있어 기회가 되면 주한미군을 감축하거나 철수하고 싶어 하는 입장인 강하다.


때문에《종전선언》이 이뤄진 뒤《평화협정체결》이 본격화 될 경우 현재까지 미 정부의 공식 부인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철군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평화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지금 우리민족이 살고 있는 그 어디서나 역사적인 「판문점선언」에 밝혀진 대로《종전선언》을 채택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이 울려 나오고 있다.


지금 해내외 각계에서는 정전협정체결 65 주년이 되는 올해를《종전선언》선포의 해로 만들기 위한 정당 및 사회단체의 투쟁들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남한의「평화협정체결운동본부」를 비롯한 각 계층 시민사회단체들은 집회와 시위, 기자회견, 성명서발표 등 다양한 형식의 활동들을 적극 전개하고 있다. 투쟁 현장들의「구호는 미국은《종전선언》을 채택하라」는 것이다.


《종전선언》을 외면하는 미국의 부당한 처사에 격분을 표시하면서 조선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구축을 위해 미국은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일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울려 나오고 있다. 지난 14일에도 남조선의 각 종교단체가 조국해방 73 돌을 맞으며《종전선언채택》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성명에서 단체는 조선반도에 공고한 평화가 깃 들게 하기위한「판문점선언」이 성실하게 이행 되여야 하며 《종전선언》선포와 《조, 미간 평화협정체결》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한과 해외의 모든 단체는 미국이 평화보장을 위한 조선의 성의 있는 노력에 부합되는 조치를 취할 것도 요구하였다. 《종전선언》채택은 조국반도의 「평화체제」구축의 첫걸음이며《평화협정체결》은 미국과 전쟁대결상태를 끝장내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줄 수 있다. 해외교포들은 《종전선언》을 지지하는 각계 층 동포들의 활동이 활발해 지고 있다.


얼마 전 미국의 L.A, 뉴욕, 루이지아나주 등지에서《종전선언 채택》과《평화협정체결》을 요구하는 대규모 재미동포들의 집회가 있었다. 집회에서 조선반도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제 더 이상 전쟁도 평화도 아닌 어정쩡한 비정상적인 정전체제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이미 조선은 선제적 조치로「핵 시험장 페기」「미군유해송환」등을 실행하였으며「조미관계개선」과「평화체제구축」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와는 배치되게「종전선언」채택을 한사코 외면 반대하는 미국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폭로하면서「종전선언」채택을 위한 남과 북 해외동포들의 투쟁은 정당하다.미국이「종전선언」채택을 외면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종전선언」의 채택은 미국을 위해서도 좋고 역사적인 판문점 정상회담과 싱가포르 조미수뇌회담에서 합의된 문제이다.


전 세계적으로 공표한 문제로서 조선반도의 긴장완화와 항구적인 평화체제구축을 위한 선차적이고 필수적인 공정이다. 조선은 조, 미수뇌분들의「싱가포르 조 미공동성명」을 존중하고 성실히 이행하려는 원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조미관계개선을 위해 적극 노력해 왔다. 미국은 상대방의 진정어린 선의와 아량에 상호존중과 신뢰에 기초한 실천적 행동조치로 화답하는 것이 국제 외교적 예의이다.


미국은 종전을 선언하는데서 마땅한 책임과 의무감을 지니고 있다. 미국은 응당《종전선언》채택 등「단계적」이며「동시적인 행동조치」를 통해 상호신뢰를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종전선언이 중요한 이유는 말 그대로 전쟁의 일시중단이 아니라 영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으로 불안정성과 안보상황을 끝장내고 조국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가는 밑거름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끝)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4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