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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시진핑 사상>의 실체를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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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7-11-12 10:03 조회34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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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열린 중국공산당 19차 전국대표대회이후 중국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시진핑 사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자주시보 논평가 <중국시민>이 해석한 시주석 사상이 주목을 모았다. 그는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사상”에 대해서는 왜곡과 곡해가 유달리 심했는데, 도올 김용옥 선생이 그나마 비교적 정확하게 문제를 파악하고 일본언론의 틀을 따르는 한국언론들의 문제점들도 지적했다고 설명하면서 <시진핑 사상>에 대해 진단해 주었다. 자주시보 11월12일자에 논평한 그의 해설을 여기에 전재하여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시진핑-독사진.jpg
▲ 2017년 10월 18일, 시진핑(習近平)주석이 중국공산당 1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연설한 이후 <시주석 사상>거론




[타산지석] 도올도 해석이 틀린 '시진핑 사상'의 실체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7/11/12 [08:08]  최종편집: ⓒ 자주시보



정문일침 358편 “한국언론의 한심한 중국보도 번역”(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6526)에서 필자는 중국관련 무게 있는 글을 한국언론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점을 지적했다. 지난달에 열린 중국공산당 19차 전국대표대회와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사상”에 대해서는 왜곡과 곡해가 유달리 심했는데, 도올 김용옥 선생이 그나마 비교적 정확하게 문제를 파악하고 일본언론의 틀을 따르는 한국언론들의 문제점들도 지적했다.

 

단 시진핑 사상에 대해서는 해석이 틀렸다. 

 

 

♦도올도 해석이 틀린 시진핑 사상과 모순론

 

도올은 모 언론과의 대담에서 시진핑에게 무슨 사상이 있냐고 사람들이 자꾸 묻는데 시진핑은 뚜렷한 사상이 있다고, 세 시간 반의 연설을 치밀하게 분석해보면 놀라운 게 있다면서, 공산주의는 역사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하게 하는 추동력이라고 하는 것이 소위 말해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것이라고 마르크스주의 상식을 전한 뒤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것이 생산양식을 형성하는데 그게 하부구조를 이루고 거기서 상부구조가 놀아난다. 이런 얘기인데 이 사람은 완전히 그런 구태의연한 틀을 깼어요. 그러면 중국의 진정한 주요 모순은 뭐냐? 매일 우리나라도 주요모순 논쟁이 있잖아요. NL, PD, 이런 거. 그런데 이 사람의 중국 사회의 주요 모순은 국민들의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열망. 아주 표현이 절묘해요.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열망과 이 불균형의 엉터리 발전 사이의 모순이 주요 모순이다. 그러면 그 아름다운 생활, 삶을 향한 국민들의 열망이라는 건 뭐냐?"

 

중국혁명사와 중공의 역사, 중국의 역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결코 시진핑 총서기가 “완전히 그런 구태의연한 틀을 깼다.”고 이해하지 않는다. 시진핑 총서기가 지적한 건 어디까지나 시대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19차 당대회 보고에서 “주요모순”을 제일 먼저 언급한 부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는 새 시대에 들어섰다. 우리나라 사회의 주요모순은 이미 인민의 날 따라 늘어나는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수요와 불평형, 불충분한 발전사이의 모순으로 전화했다.(中国特色社会主义进入新时代,我国社会主要矛盾已经转化为人民日益增长的美好生活需要和不平衡不充分的发展之间的矛盾。)” 

 

그 뒤에도 이 점은 두 번에 걸쳐 확인, 강조했는데, 마오쩌둥(모택동) 주석이 1937년 8월에 발표한 유명한 저서 《모순론(矛盾论)》을 제대로 읽은 사람들은 “주요모순”과 “차요(부차적인)모순”이라는 개념들에 굉장히 익숙하고 시대나 시기별로 주요모순을 판단, 파악한 다음 힘을 기울여 해결하는 방법론에도 익숙하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리나 틀을 깬다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항일전쟁이다. 

 

1920년대에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하여 대혁명을 진행하면서 북벌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성과를 거뒀으나, 국민당이 1927년에 혁명을 배반하고 대학살을 감행하는 바람에 국공합작이 깨지고 10년에 이르는 토지혁명전쟁이 진행되었다. 헌데 일본의 침략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국공은 합작의 방도를 모색했고, 1937년 7월 7일 루거우챠오사변(卢沟桥事变, 노구교사변)으로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발발함과 더불어 제2차 합작을 실현했다. 국민당 측에서는 전국의 역량을 항일에 집중시킨다는 명분 하나로 내부와 국민들에게 해석하면 충분했으나, 공산당 측에서는 10년 동안 싸우던 적들과 손을 잡고 10년 동안 투쟁의 대상이던 지주, 자본가들과도 협조한다는 걸 반드시 동지들과 추종자들에게 이론적으로 설득시켜야 했다. 이때 내건 게 민족명분이고 주요모순의 전환논리였다.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을 삼키고 중화민족을 멸종시키려고 달려든 상황에서 중국의 주요모순은 계급모순으로부터 민족모순으로 변했고 계급모순은 부차적인 모순으로 변했다. 때문에 는 반드시 전날의 적수들과도 손을 잡고 우선 민족의 생존을 해결해야 된다. 

 

홍군이 붉은 별이 달린 모자를 벗고 전날의 작전대상이었던 국민당군의 모자를 쓰고 국민당군의 군복을 입을 때 거부감이 강한 관병들이 많아 고위간부들의 설득이 필요했고, 남방의 일부 유격대는 국공합작을 설명하러 온 연락원과 간부들을 모두 변절자라고 단정하고 죽여버렸다. 아무리 당의 결정과 신문보도들을 내놓고 설명해도, 그런 유격대 간부들은 “계급투쟁”이란 말만 들어봤지 “계급합작”이란 말은 듣다 첫소리라면서 네놈은 변절자라고 매도했다. 1937~1938년에 산에서 내려가 신사군(新四军)에 편입된 유격대들은 뒷날 꽤나 크게 발전했으나, 끝내 산에서 내려가지 않고 대국민당 유격전을 견지하던 일부 유격대는 몇 해 뒤 소멸되고 말았다. 그 지도자들은 견정한 혁명자로, 열사로 인정받기는 하지만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는 평가도 받는다.

 

1945년 항일전쟁이 끝난 다음 이듬해 전면적인 내전이 폭발했다. 중공은 국내의 모순이 다시 계급모순으로 변했다 판단하고 쟝제스(장개석)을 대표로 하는 대자산계급과 지주계급들의 통치를 뒤엎는다는 결정을 지었고 그러자면 국민당의 군대를 소멸해야 되는데 5년 동안에 목표를 달성하면 잘 된 셈이라고 내다봤는데 예상보다 속도가 빨라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건국 후 오랫동안 중국사회의 주요모순이 뭐냐에 대한 쟁론이 존재했다. 농민이 80%를 차지하는 국가에서 공산혁명이 승리한 건 마르크스나 레닌의 저서에서 설명한 적 없고, 소련도 관련경험이 부족했다. 


일단 농촌에서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통해 마을들의 사회구조를 바꾸었는데, 언제부터 어떤 속도로 합작화의 길로 나아가겠느냐는 쟁론이 중공 고위층에서 벌어졌다. 한편 도시에서도 사회주의개조를 통해 다수 기업들의 국유화를 실현하겠느냐 마느냐 등 문제들이 존재했다. 전국 각지에서의 시험들은 성공과 좌절이 뒤섞였고 각급 간부들의 인식들에도 차이가 났다. 

 

최고위층에서도 중공의 1인자 마오쩌둥과 2인자 류사오치(유소기)의 판단은 달랐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계급모순이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반면, 류사오치는 중공이 정권을 잡은 이상 사회의 주요모순이 이미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바뀌었다고 판단했다. 


양자의 견해가 각기 발전하여 마오쩌둥은 농촌의 합작화를 지지하고 기업들의 사회주의개조 및 중국식 사회주의기업관리방법의 보급을 강조하다가 나아가서는 자본주의의 복벽을 경계하여 계급투쟁을 강조하기에 이르렀고, 류사오치와 그 일파는 중국의 농촌상황으로는 합작이 불가능하다면서 마을에 트랙터 따위 기계수단들이 얼마얼마 있어야 합작이 현실화된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도시에서는 자본가들의 착취가 공로 있다는 주장을 펴면서 개조를 시원치 않게 보았다. 


마오쩌둥파의 이론은 줄여서 “계급투쟁론”이라 불리고, 류사오치파의 주장들은 “계급투쟁식멸론”, “유생산력론(唯生产力论, 생산력유일론)” 등으로 불린다. 차차 류사오치와 덩샤오핑(등소평)이 비슷한 소리들을 하면서 “유등노선”이라고도 불리는데, 그들의 기본적인 판단은 중국의 당시 주요모순이 선진적인 생산관계와 후진적인 생산력 사이의 모순이라는 것이다.

 

마오쩌둥 사후인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에 중국공산당은 사업중점을 경제건설로 돌린다는 결정을 짓고 실시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마오쩌둥 시대 후기의 “계급투쟁을 기본고리로 한다(以阶级斗争为纲)”라는 노선을 바꾼 것이다. 또한 마오쩌둥 시대 후기에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초대강국에 대응하여 전쟁준비를 하면서 “일찍 싸우고 크게 싸우고 핵전쟁을 치른다(早打, 大打, 打核战争)”는 원칙을 버리고 국방예산을 대폭 삭감하여 경제건설에 돌렸다. 덩샤오핑의 새로운 판단인즉 수십 년 내에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는 마오쩌둥 시대에 확보한 핵무기, 미사일 위성에 이어 1980년에 시험발사성공한 대륙간 미사일의 보유가 큰 소리를 치는 밑천으로 된 것이다. 덩샤오핑의 결정인즉 그 시간을 잘 활용해 경제를 춰세워야 한다는 것으로서, 군대에 대해서는 좀 참으라고 설득했고, 그로 하여 수많은 군사연구종목들이 잘라졌다. 


전당이 경제건설로 사업방향을 바꾸면서 시대에 대한 인식과 사업의 방식, 처사의 원칙에 대한 쟁의가 많았는데, 자오즈양(조자양)이 어느 대회 보고에서 중국이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처했다고 한 말이 유달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수십 년 건설했는데 고작 초급단계냐는 의문이 폭증했고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이론과 실천에 대한 회의도 늘어났던 것이다. 

 

한편 “자력갱생”을 강조하던 마오쩌둥 시대와 달리 해외자본인입이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시장경제문제가 점점 복잡해졌는바, 사회주의사회에서도 시장경제를 일부 허용할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오다가, “사회주의시장경제”라는 개념이 만들어졌고 계획경제와의 모순과 충돌이 일어나면서 사회적인 사건들도 많이 생겨났다. 1980년대의 수많은 사건들을 돌이켜보면 합법인지 불법인지 가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1989년 봄과 여름에 크게 터진 톈안먼사태(천안문사태)도 따져보면 이해하기 어렵고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들 특히 부정부패에 대한 반발이 중요한 원인으로 된다. 이게 도대체 사회주의방식이냐 자본주의방식이냐는 쟁론은 상당히 오래 끌었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

 

류사오치의 주장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던 덩샤오핑이 확실하게 자기의 색깔을 드러낸 건 1992년 초의 그 유명한 남방순시강화(南巡讲话)에서이다. 그 번에 상하이시(상해시)에서 생겨났다는 일화가 널리 퍼졌는데, 외국에서 들여온 어느 첨단기기를 가리키면서 덩샤오핑이 저게 성(姓)이 사(社, 사회주의)냐 자(资, 자본주의)냐고 물으니, 상하이의 책임간부인 우방궈(오방국)가 전에는 성이 자였는데 지금은 성이 사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일화의 진실성 여부를 젖혀놓고 남방순시강화 이후 중국은 최고위층으로부터 기층에 이르기까지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바람이 불었다. 이른바 “흑묘백묘론”이 현실화 된 것이다. 류사오치는 낙후한 생산력과 선진적인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큰 틀을 유지했던 반면, 덩샤오핑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이 해체되거나 정권색깔이 변한 뒤에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실질적으로 부정했던 것이다. 

 

덩샤오핑과 우방궈의 문답이 교묘해보이지만 이론적으로는 맞지 않는다. 기기나 기계는 생산수단이지 생산관계가 아니므로 성씨가 사회주의의 사냐 자본주의의 자냐와 상관없기 때문이다. 전쟁시기 적들의 총과 대포를 노획한 중공군대의 관병들이 결코 자본주의 국가와 자본주의기업들이 만든 무기라 해서 성씨가 자본주의의 자라면서 배척한 적 없거늘, 어찌 기계 하나를 놓고 성씨를 따지겠는가? 좌파들의 비판논리에 따르면 덩, 우의 문답은 기기, 기계와 제품의 선진성을 사회제도의 선진성에 끌어붙이는 것이고, 결국에는 “양누철학(洋奴哲学, 양노쳘학, 외국과 외국인들을 우러러보면서 노예처럼 굽신거린다는 뜻)”의 발현이다.

 

단 당년의 중국사회에서 덩샤오핑의 경제발전주장은 나름대로 먹혀들었고 20여 년 째 성과들도 거두었고 부정부패와 양극화 현상 또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시행착오를 바로잡고 평형을 이루려는 노력과 시도는 드물지 않았다. 약 10년 전에 베이징(북경)에서는 재부의 재분배를 놓고 현임 총서기 후진타오(호금도)가 전임 총서기 쟝저민(강택민)과 의견상이가 생겼다는 설이 떠돌았다. 조화로운 사회(和谐社会)를 강조하는 후진타오는 재부의 재분배를 바랐으나, 쟝저민은 케이크가 아직 충분히 커지지 않았으므로 나눠먹기는 시기상조라고 반대했다는 것이다. 결과 70살 이상 노인들의 무임승차와 공원무료입장 등 가벼운 복지조치들을 통과하는데 그쳤다. 

 

공산주의이론이 중국에 들어와서부터 100년 동안에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중국공산당의 창당 멤버들은 여러 가지 사조들을 두루 접한 다음 공산주의를 고른 경우가 많고, 1949년 전에 혁명에 참가한 당원들 중 부잣집 출신의 수많은 사람들 또한 국가의 멸망과 민족의 궤멸을 피하고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려면 사회주의, 공산주의 길로 가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런 경력 및 생각들과 뒷날의 국제, 국내 정세변화를 놓고 농담조로 만들어진 말이 있다. 

 

“예전에는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했는데, 

(1991년 소련 해체)후에는 중국만이 사회주의를 구할 수 있게 됐고 

(남방순시 강화와 그에 따른 실천이 한동안 진행된) 후에는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게 됐다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후) 지금은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게 됐다.

(从前说只有社会主义才能救中国,后来说只有中国才能救社会主义,再后来只有资本主义才能救中国,如今只有中国才能救资本主义)“ 

 

사회구조가 바뀌면서 중국공산당의 합법성, 중국혁명의 합리성에 대한 질의가 많아졌고 “난팡씨(南方系, 남방계)”로 불리는 광둥성(광동성)의 신문그룹은 중공이 혁명당이 아니라 집정당(执政党 집권당)으로 바뀌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남방일보》, 《남방도시보》, 《남방주말》 등 남방계의 신문들은 형식상으로는 중국공산당 광둥성 위원회 선전부 산하에 있으나 우익편향이 심한 주장들을 내세우고 퍼뜨려 좌파들의 미움깨를 많이 샀다. 

 

한편 재부획득의 타당성과 재분배의 필요성, 가능성에 대한 쟁론도 치열했다. 덩샤오핑이론 하면 한국에서는 일부 사람들의 치부를 허용해야 된다는 이른바 “선부론(先富论)”이 잘 알려졌지만 사실 덩은 먼저 부유해진 사람들이 뒤따라 부유해질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것을 “센푸따이허우푸(先富带后富)”라고 부른다. 문제는 개혁개방 30여 년 동안 부자가 부자들을 만들어낸 사례가 너무나도 적다는 데 있다. 오히려 빈부차이가 심해짐에 따라 가난한 사람은 게을러서 부자로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 퍼지다가 21세기에 들어와 일본계 미국인이 쓴 《富爸爸, 穷爸爸(부유한 아빠, 가난한 아빠)》가 베스터셀러로 되면서부터는 아예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유전자를 물려받았기에 가난하다는 설이 나오기까지 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우리의 개혁이 백만장자들을 만들어낸다면 실패라고 예언했는데, 백만장자는 고사하고 억만장자들이 수두룩한 반면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억 단위로 집계되는 현상이 생겨났다. 덩샤오핑이 많은 말을 했으므로 어떤 사람들이 그의 이 말을 근거로 삼아 개혁개방의 성공을 찬미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의 저 말을 내들고 개혁개방이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시진핑 사상의 핵심은 공산주의이지만 구체적 실체는 아직?

 

아무튼 중국공산당의 정체성, 사명, 중국의 발전방향 등을 놓고 많은 쟁론이 진행된 끝에 새로운 시기의 전당 지도사상으로 나온 게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이다. 글자가 너무 많아 “시스샹(习思想, 시사상)“이라고 줄여서 부르는 사람도 적잖은데, 솔직히 말해 아직까지 권위적인 해석은 나오지 않았다.

 

허나 우선 중국공산당의 성씨가 뭐냐는 문제에서는 시진핑은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중공은 공산주의의 “공(共)“씨라고 못박았다. 일부 세력만 대표하는 단순한 집권당이 아님을 지적한 것이다. 


다음으로 공동부유문제에서는 56개 민족이 하나도 빠짐없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시진핑 제1기에서 이미 밝혀졌다시피 경제성장에서 수자지표에 집착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전에 여러 해 중국은 해마다 GDP 8% 장성율을 지키기 위한 캠페인이 벌어졌는데, 그런 운동의 폐단을 시진핑이 꿰뚫어본 것이다. 전에는 GDP만능론이 낳은 “수자에서 벼슬이 나온다(数字出官)”이라는 말 때문에 장성율 수치조작들이 이뤄졌고 환경에 장기적인 영향을 끼치는 오염산업들도 버젓이 발달했으나, 시진핑 시대에는 “청산이 금산, 은산”이라는 말이 유행되면서 종합성적인 지속가능한 발전을 강조하게 되었고, GDP통계도 보다 믿을만 하게 되었다. 하기에 GDP장성율이 줄어들었다 해서 중국경제가 난항한다는 분석은 맞지 않다. 


덩샤오핑식 개혁개방의 초기 본보기는 광둥성의 선전(심천)을 대표로 하는 외자도입, 가공수출 특별구역들이었고, 뒷날 전국 각지의 개발구역들로 발전했다. 큰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환경오염을 비롯한 문제점들도 많이 만들었다. 

 

시진핑식 발전방식의 본보기는 근년에 부쩍 소문난 슝안신구(雄安新区, 웅안신구, http://korean.cri.cn/1740/2017/07/14/1s248648.htm)다. 아직은 시작단계에 있으므로 섣불리 단언하기 어렵다만 19차 당대회에서 밝힌 주장들의 실체는 그 구역의 변화로 현실화되리라고 보인다. 가치와 의의가 확인되면 전국 각지에 비슷한 구역들이 생겨나는 건 시간문제다. 두고 보면 알 일이다. 


시진핑 사상에 대한 권위적인 해석이 아직 보급되지는 않았으나, 일단 전당의 지도사상이라고 확정한 이상 특이한 변수가 없는 한 적어도 수십 년은 그 사상이 가리키는 노선에 따라 전당이 전국을 이끌어나가리라는 건 분명하다. 중국공산당의 당장(党章, 당헌, 당규약)에서 시진핑 사상을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 3개 대표 사상 뒤에 넣고 언론보도들에서 지금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 사상은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 (쟝저민의) 3대 대표 중요한 사상,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해석하기는 한다만,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매체에 등장하는 공산당 간부들의 발언을 들어보면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 뒤에 직접 시진핑 사상을 거론한다. 이는 상당수 간부들이 3개 대표와 과학적 발전관을 무시함을 말해주고, 이런 인식이야말로 시진핑식 사업원칙과 방식이 현실적으로 통하는 기초로 된다. 

 

역시 두고 보면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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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목란꽃님의 댓글

목란꽃 작성일

제가 잘몰라서 그런지 모르겟지만.
한국근대사뿐만아니라 중국 역사도 참 복잡해 보이네요.

그래서그런건지. 다양한 풍습과 문화가 같이있는 다민족이여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중국사람들은 교양이 각자 천차만별인듯 하더군요. 학자부터 깡패까지. 
베이징을 비롯한 북방계쪽은 그래도 좀 성품이나 행동이 일관성이 있어보이는데. 수도라서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홍콩이나 대만쪽에 가까운 남방계로 갈수록 깡패밀수등 아주 별별 인간들이.
그리고 홍콩쪽은 깡패가 많고 대만쪽은 일본처럼 약간 정신적으로 맛이간 똘아이들이 있더군요.

목란꽃님의 댓글

목란꽃 작성일

중국인들 스스로도 북방계쪽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훨씬 낳다고 말하던데요.
뭐 교통이 요즘같이 발달하고 이주가 아주쉬운 시대에 같은나라에서 지역으로 나누어 사람들의 성향을 나눈다는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제 경험으로도 북방계쪽이 전체적으로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이 많아보이긴 하더군요.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보았을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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