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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기 만든이는 신해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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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1-01-17 00:00 조회2,0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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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기 도안자 신해균 파란만장한 인생 >

(서울=연합뉴스) 최선영기자 = 북한의 국기(인공기)와 국장, `공화국 영웅" 메달 등 각종 훈장을 도안한 독립운동가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의 조카 신해균 화백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북한 예술전문잡지 조선예술과 대중잡지 천리마 최근호(2000.11)는 신 화백의 가정환경, 그리고 중국 동북지방과 북한에서 활동 등에 대해 상세히 소개했다.

이들 잡지에 따르면 신 화백은 1913년 10월 24일 경기도 광주군 평산 신씨의 몰락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신 화백의 형제는 여럿이었으나 모두 단명하고 그만 살아 남았다.

그는 1929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병약한 아버지와 함께 삼촌인 해공이 있는 중국 동북지방으로 건너갔다. 중국에 간 것은 해공이 상해임시정부에서 내무부장관(내무총장)을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공이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는 형과 조카를 돌보지 않고 파쟁만 일삼아 결국 신 화백의 아버지는 이국땅에서 한 많은 세상을 떠났으며 그도 아버지의 사망을 해공의 탓으로 여겼다고 이들 잡지는 주장했다.

아버지의 사망을 삼촌 탓으로 돌리는 조카를 향해 해공은 총을 쏘았으나 다행히 탄알이 빗나갔으며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신 화백은 삼촌과 결별하고 본명 대신 `정창파"로 이름을 바꿨다고 이들 잡지는 말했다.

작은 가슴속에 푸른 물결 출렁이는 넓은 바다를 안고 싶었던 그는 정의로운 창파만리를 찾아 운명의 쪽배에 몸을 싣고 싶은 뜻에서 정창파란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다.

당시 그는 중국공산당의 영향하에 있던 `남경대중미술연구원"에서 미술을 공부했으며 이곳에서 공산주의 서적과 진보적인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 좌익사상에 물들게 됐다.

신 화백은 16세에 상하이(上海)제모공장에서 직조공으로 일하다가 우연히 이 미술원과 인연이 닿았는 데 핏줄을 속일 수 없는 듯 그는 어려서부터 누구에게서도 그림을 배운 적이 없지만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평산 신씨의 시조 신숭겸은 고려건국 공신이고 평산 신씨 중에는 신사임당, 신세린, 신익성, 신 위, 신명준 등 이름난 화가들이 많았으며 신 화백의 조부 신 단 역시 서화에 능했다고 이들 잡지는 전했다.

미술원을 졸업한 뒤 중국의 제2차 국내혁명전쟁과 2만5천리 장정, 그후 8년간의 항일전에 참가했던 그는 팔로군 군정대학을 거쳐 팔로군 지휘관으로 성장했으며 총과 함께 붓으로 중국혁명에 심신을 바쳤다.

일제가 패망한 직후인 1945년 9월 귀국한 그는 약 1년간 평안북도 창성군 당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초여름 평양으로 올라가 `조선인민군신문사" 미술가로 본격적인 미술창작에 들어갔다.

그는 김일성 주석의 직접적인 지시에 따라 1947년부터 북한 국장과 국기, 화폐, 인민군 군기, 공화국 영웅 메달과 국기훈장 등 각종 훈장의 도안을 맡아 성공적으로 완성했다.

또 김 주석의 첫 부인이자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의 생모인 김정숙의 지도를 받으면서 항일투쟁시기 김 주석의 양강도 보천군 습격사건을 소재로 한 출판화 `보천보의 불길"을 제작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와함께 6.25전쟁때 김 주석의 모습을 담은 북한의 대표적 선전화 `조국의 독립과 자유와 영예를 위하여"를 제작했으며, 이 선전화는 그가 그린 수십점의 정치선전화와 만화그림과 함께 1953년 헝가리에서 열린 `싸우는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크게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신 화백은 지난 50년대 말 김 주석의 일인체제에 도전한 종파사건에 연루돼 숙청되고 말았다.

조선예술은 이에 대해 "전후에 당의 신임속에서 공화국의 여러 출판기관들에서 책임일꾼으로 사업하던 정창파의 정치적 운명이 `종파 여독청산"이라는 본의 아닌 어지러움을 당하게 된 것은 1950년대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모른다. 적으나마 좀 알던 사람들도 그를 잊은 지 퍼그나(꽤 오래)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신 화백이 복권된 것은 김 총비서의 최근 지시에 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김 총비서는 지난해 4월 간부들에게 "우리 나라 국기훈장과 영웅메달 도안이 참 잘됐다. 그 어느 나라에도 이런 훈장이 없으며 영웅메달도 영웅의 품위를 살려 잘 만들었다. 국기훈장과 영웅메달 도안을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보라"고 말했다.

신 화백에 대해 상세한 보고를 받은 뒤에는 언론에서 그를 널리 소개하라고 지시했다.

북한 잡지들은 복권된 신 화백에 대해 "우리 화단에 등장해 자기의 생애를 빛내인 연한은 10년도 되나마나 하지만 이 기간 김일성 주석의 품속에서 푸른 물결처럼 깨끗하고 기세차게 살아온 현대 조선화단의 공로있는 미술가의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신 화백은 "꾸준한 노력과 정열적인 탐구 속에서 예술가로서의 창조적 능력을 높인 열정가"였으며 "시대를 상징해 후세에 길이 전해지는 기념비적 창조물을 남긴 것으로 인해 조선미술사에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잊을 수 없는 미술가"라고 이들 잡지는 소개했다.

신 화백에 대한 이같은 구체적인 자료는 그와 가까운 친척으로 남한출신(경기도 이천군)인 신진순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의 외동딸인 김자유 화백을 취재하면서 나온 것이라고 이들 잡지는 밝혔다.

chsy@yna.co.kr (끝)

2001/01/09 10:2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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