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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 방북기-68]"요덕 수용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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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5-12-07 04:21 조회8,00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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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필자인 강산 선생

시애틀 동포, 강산 선생이 25년만에 북부조국을 다시 찿은 소감들을 연재로 써 왔다. 이번에는  북녘의 대법원인 '최고재판소'를 찾아 북녘의 사법제도에 관해 두번째로 쓴 글이다.  남녘 극우보수언론들이 "선전해 온 '요덕수용소'는 일제때 존재했을 뿐 조국해방이후에는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그의 68번째 연재글을 여기에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68


*글:강산(시애틀 동포)

요덕정치범수용소는 존재하는가?


최고재판소의 박수종 참사와의 면담으로 지난 방문기에서 북부조국의 민주적인 사법제도와 피의자의 인권을 위한 공선변호사 혹은 사선변호사를 두게 되는 제도에 대하여 들은대로 설명하였는데 이어서  북부조국의 민법과 노동교화소, 그리고 요덕정치범수용소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면 당연히 개인 사이의 분쟁이 생겨나게 마련이고 그것은 북부조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지만 법으로 해결해야 할 정도의 개인끼리의 분쟁은 아무래도 사회주의 제도보다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몇십 배 혹은 몇백 배로 많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 자체가 복잡하게 얽혀져 있기 때문이고, 또한 각자의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존을 위하여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으로 인하여 타인으로부터 억울하게 당하는 일들도 많기 때문이다.   


박수종 참사가 우리에게 들려준 공화국의 민사소송에 해당하는 사건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비하여 참으로 단순한 사건들이었다.  아래 다섯가지 유형의 문제들이 주로 법정에서 재판으로 판결하게 되는 문제들이라 하였다.  첫째, 재산문제로 그 가운데 돈을 빌려주고는 받지 못한 일.  둘째, 이혼 문제.  세째, 상업질서 위반.  네째, 교통 위반.  다섯째, 교제관리질서 위반이었다.


그 가운데 이혼문제에 관하여 잠깐 대화를 나누었다.  원래 북부조국에선 각 가정의 일은 국가가 개입하지 않았는데 1958년 이후로 국가가 통제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부부가 함께 살다가 서로 갈라지는 것은 자유로웠지만 거기엔 아이들의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런 자녀들과의 관계에 따르는 문제를 법정에서 해결해줄 필요가 생겼기에 개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북부조국에선 결혼을 경솔하게 하였거나 살아가면서 성격문제로 도저히 그 결혼을 지속하기 어려워 이혼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지만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아주 미미하여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라고 하였다.




박수종 최고재판소 참사로부터 북의 교화소와 요덕정치범수용소에 대하여 들었다.


이어서 박수종 참사로부터 재판과정과 교화소 생활에 대하여 설명을 들었다.  형법이나 형사소송법에 인권유린을 방지하는 법이 있어 물론 변호사가 피의자를 적극적으로 돕기도 하지만 피의자에게 재판과정에서 거짓진술을 강요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며, 피의자가 유죄판결을 받게 되면 보통 ‘노동교화형에 처한다’라고 판결하게 된다고 하였다.  


내가 방문기 62회에서 인민군대는 감옥이 없다고 하였는데, 북부조국에선 1957년도에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이 없어졌다고 한다.  북부조국에서 인민들의 인권을 얼마나 존중하면 감옥을 없앴다는 것인가?  우리가 매스컴으로부터 전해 듣던 인권상황과 북부조국의 현실은 이렇게 전혀 딴판인 것이다.  감옥이 없는 세상이 북부조국이라면 그렇다면 죄수들은 어디로 보내지는 것인가?  바로 노동교화소다.  


감옥과 노동교화소는 단어 자체뿐만 아니라 그 상황이 천지 차이라는것이다.  감옥은 그야말로 사람을 철창 속에 가둬두어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죄수의 모든 자유와 인권을 박탈하는 곳이라면 노동교화소는 적당하게 노동을 하면서 교화시켜 자신의 죄를 뉘우치게 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교화를 시키면서 관대하게 지난 일을 용서하게 되며, 지난 방문기에서 밝힌대로 교화소를 나온 후에는 전과기록마저 말소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노길남 박사님이 질문을 하였다.  매스컴에선 북의 교화소에서 쥐가 들끓고 있으며, 창문도 없는 방에 가두어 두거나, 난방도 없는 곳, 혹은  지붕도 없는 곳에 수용하며, 굶주린 죄수들에게 썩은 음식을 주어 먹게 하고 또한 죄수들을 죽도록 고문한다고 하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박수종 참사는 어이없어 하면서 다음과 같이 답변해주었다.  


노동교화소는 재판소의 관할이 아니므로 판사나 검사가 직접 가볼 수는 없는 곳이지만 변호사는 교화소를 찾아가 죄수들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고 만나서 대화할 수 있다.  박수종 참사가 80년대까지 변호사 일을 하였으므로 당시에 종종 교화소를 찾았다.   교화소에선 죄수들을 교화인 혹은 수형생으로 부른다.  모든 교화인들이 함께 생활하는데 북부조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파트와 구조가 비슷한 건물에서 생활하며 당연히 지붕도 있고 창문도 있다.  교화소 구역 가장자리엔 가시철망이나 낮은 울타리가 쳐져 있는데 아무도 거길 넘어서 도망가지 않지만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되어있지 않다.  교화인들의 방엔 TV도 있으며 라지에타 난방이 되어 있고, 환자의 방은 따로 온수시설과 난방이 되어 있다.  교화소에 독감방은 없으며, 특별히 필요할 때 얼마간의 돈도 주며, 출소할 때는 생활비를 지급한다.


박수종 참사는 지난번 방문기에서 설명한 그의 조카가 사람을 치어서 교화소 생활을 6달 동안 하였을 때 교화소에 면회조차 가지 않았던 자신에 대해서 조카가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여겼는데 출소한 이후에 만난 조카가 전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더라면서 교화소에서 그 조카는 사회에서 생활할 때보다 더 성실하게 보냈으며, 지내는 동안 구두수리 일을 배웠다고 말해주었다.  


교화소에 대하여 노길남 박사의 질문에 답변을 한 후 박수종 참사는 북부조국의 교화소에 대한 그런 악의에 찬 소리는 살인 등의 중죄를 짓고 도망을 한 탈북자들의 악선전을 과장하고 날조한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한편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에 식량부족으로 월경하여 친척집을 찾아갔다가 돌아온 사람 등 다시 북으로 돌아온 인민들은 노동교화형으로 공민권을 박탈하지 않고  사회에 복귀시키는데 조국이 그렇게 관대하게 용서하는 것에 더욱 감격해하고 고마워하게 된다면서 그것이 감옥에 가두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효과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탈북하여 남부조국으로 갔던 우리가 말하는 탈북자에 대하여서는 어떻게 조치하는가의 질문에 박수종 참사는 막상 남조선에 가서 살아보니 자신의 판단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다시 제 3국을 통하여 돌아오는 경우 재생의 길을 열어주고 모두 용서해준다고 말해주었다.  




 

최고재판소 소법정. 재판장과 두 명의 인민참심원이 합의하여 판결한다.



박수종 참사와 대화를 하는 도중 아까 우리를 안내하였던 여직원이 찾아와 지금 재판정을 직접 우리가 방문해도 좋다고 알려준다.  잠깐 휴식할 겸 자리에서 일어나 재판정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먼저 소법정을 찾았다.   이곳은 백여 명이 재판을 지켜볼 수 있는 좌석을 갖춘 곳이다. 노길남 박사가 피고석에 앉아보고는 다시 원고석, 그리고 인민참심원석과  재판장의 의자에 직접 앉아본다. 



이어서 우리는  300명 좌석의 대법정으로 안내되어 둘러볼 수 있었다.  여기서도  노길남 박사는  원고석과 피고석, 그리고 재판장의 의자에 직접 앉기도 하면서 북부조국이 법에 따라 재판을 진행한다는 것을 실제로 확인해본다.  이곳에서 장성택이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하였다.   또한 케네스 배가 15년의 노동교화형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최고재판소 대법정. 장성택은 이곳에서 재판을 거쳐 사형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케네스 배는 2014년 11월 8일에 미국 정부의 노력으로 2년 동안의 교화소 생활 후에 석방되었는데  우리가 방문했을 당시엔 교화소에 있었기에 케네스 배의 죄명에 관하여 박수종 참사에게 질문을 하였는데 당시 박수종 참사는 해외에 출장중이어서 재판과정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석방되어 미국으로 돌아온 케네서 배는 지금도 자신의 죄명과 수감생활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인터넷 위키백과에서 케네스 배에 관하여 찾아보니 그의 죄명과 형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전략) 1968년 8월 1일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며 18세 때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2012년 11월 종교 활동을 통한 정부 전복 혐의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에 체포되었다. 2013년 4월 국가전복음모죄로 노동교화형(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2014년 11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억류에서 풀려나 현재 미국으로 돌아간 상태이다.//


케네스 배가 15년 동안의 노동교화형을 받았고, 직접 교화소에 있을 때 조선신보에서 그를 취재한 것이 언론에 발표되었는데 그 부분을 살펴보는 것으로 북부조국의 노동교화소의 생활에 대하여 내가 박수종 참사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신보는 6시 기상으로 시작해 오후 10시 취침으로 끝나는 배 씨의 하루 일과를 시간대별로 전하고 특별교화소와 배 씨의 감방 분위기까지 구체적으로 전했다.


매체에 따르면 배 씨의 하루 일과는 6시~7시 세면 및 청소, 7시~8시 아침식사, 8시~10시 노동, 10시~10시 30분 휴식, 10시 30분~12시 30분 노동, 12시 30분~13시 30분 점심식사, 13시 30분~15시 30분 노동, 15시 30분~16시 휴식, 16시~18시 노동, 18시~19시 휴식, 19시~20시 저녁식사, 20시~22시 문화시간, 22시 취침으로 이어지며 일요일 및 명절은 휴식이다.


이날 조선신보가 공개한 사진 속 배 씨는 삭발을 한 채 왼쪽 가슴에 '103'이라는 숫자가 적힌 푸른색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조선신보는 교화소에서 노동을 하는 모습과 침대와 책상이 있는 감방도 공개했다.//  (이상 조선신보의 기사를 인용한 언론기사에서)


위의 교화소에서의 생활을 살펴보면 하루 8시간의 노동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루 세끼의 식사를 제공하고, 휴식시간과 문화시간을 갖는데다 주말에 쉬기까지 한다.  일반 사회에서도 누구나 저 정도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니 교화소에서의 생활이 특별히 교화인의 인권을 탄압한다고 보기가 어렵지 않은가? 사람을 감옥에 가둬두는 것보다는 바깥바람을 쐬면서 노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교화인의 인권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


최고재판소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우리는 재판정을 답사한 후 다시 면담실로 돌아와서 대화를 계속하였다.  이곳 최고재판소의 재판정들은 비어 있고 너무도 조용해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어보니 북부조국에선 무엇보다 인민들에게 법에 대한 교육을 잘 하고 있다고 하였다.  공장이나 기업소마다 법률조직이 있어서 사전교육을 통하여 범죄 예방에 노력하며, 법 관계 일군들이 공장과 기업소를 찾아 인민들에게 법에 대한 교육을 잘 하므로 범법행위 자체가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이런 교육은 주로 토요일의 학습시간에 법에 관한 교육이 있음을 국가에서 미리 알려주어서  참여하게 한다.  생각해보니 이것은 참 중요한 일이다.  필요하여 법을 만들어놓아도 그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면 그 법을 어기게 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니 미리 이러이러한 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수많은 인민들이  살아가는 북부조국의 최고재판소지만 우리들이 찾은 시간에 아무 재판일정이 없을 정도였으니 북부조국은 범죄가 발생하는 일이 드물다는 것을 직접 확인한 셈이다.



박수종 참사는 북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면서 북에서 종종 공개적으로 총살하는 경우가 있느냐고 제네바에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탈북한 어떤 사람이 20여년 전에 함남에서 공개적인 총살을 목격했다는 그 질문에 박수종 참사는 그런 경우는 없다면서, 단지 인민들이 특별히 요구할 때만 가능한 일인데 그런 일을 지금 없다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그 탈북자의 이야기는 당시에 함남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을 확장해서 그렇게 말한 것일 거라고 바로잡아주었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던 요덕정치범 수용소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수용소로 알려진 요덕정치범수용소를 노길남 박사님은 이번 여행에서 꼭 방문하겠다고 몇 번이나 요청했던 것이니 이렇게 박수종 참사를 만나 그곳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덕수용소에 대한 질문에 박수종 참사는 한마디로 요덕수용소는 북부조국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함경남도 요덕군에 일제때부터 감옥이 있었고 해방후엔 한때 노동교화소로 쓰여졌는데 그 교화소마저도 없어져서 협동농장이 된 지가 벌써 30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30년 전에 협동농장으로 된 곳이 어떻게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로 불리게 되었을까?  북부조국에 대한 조작과 왜곡이 얼마나 크면 이렇게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만들어내어서 온 세상에다 북부조국을 지옥과 같은 곳으로 만드는 것인가?  요덕수용소가 없다는 것을 나도 이렇게 북부조국의 최고재판소를 방문하여 확인하고서야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매스컴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나의 상황이 이러한데 수많은 우리 민중이 요덕정치범수용소에 대한 조작과 왜곡과 세뇌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오히려 북부조국의 최고재판소 참사가 거짓말을 하였거나 아니면 나의 이 글이 거짓이라고 여길 수도 있으리라.


요덕수용소에 관해서는 박수종 참사가 우리가 최고재판소를 방문하는 것을 연락받고 질문할 것을 예상하고 스스로 직접 자세하게 알아보았다고 하였다.  그가 최고재판소의 참사로서 요덕군인민재판소장에게 요덕정치범수용소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고 요덕군인민재판소장이 직접 요덕의 옛 교화소 자리엔 협동농장이 있을뿐이라고 이상과 같은 답변을 하였으니 이것은 확실한 사실이라고 단언한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통하여 요덕정치범수용소를 치니 수많은 자료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가운데 위키백과에서 요덕수용소를 찾아보면 비인권적인 여러가지 사례들이 나오는데 그러면서도 작년부터 그런 사례에 대한 출처가 필요하다고 적혀있다.  그러니까 확실한 증거가 되는 출처도 없이 일부 반민족 반통일 매국노들이 온 민중을 세뇌시키고 북부조국의 존엄을 훼손하는 요덕수용소에 대한 자료들이 워낙 광범위하게 널려있다보니 위키백과에도 요덕수용소에 관하여 서술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위키백과에서 요덕수용소에 대한 자료가 진실이 아니라는 상황을 얼마간 깨달은 것인지 요덕수용소를 기술한 페이지의 맨 위에 아래의 글을 덧붙여놓았다.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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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위키백과에서 요덕정치범수용소에 대하여 올려진 정보를 의심하고 그 올린 사람에게 문서의 출처를 요구한 지 꼭 1년이 지났는데도 여태 그 문서의 진의에 대하여 밝힐 만한 출처를 찾아 올리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요덕수용소는 아무런 증거 없이 조작과 왜곡으로 온 세상을 속이는 것이니 어떻게 요덕수용소가 존재한다는 출처를 댈 수가 있으랴?  만일 출처를 밝힌다해도 그것은 사이비 언론의 기사일뿐 그것으로 요덕수용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요덕정치범수용소와 거기서 벌어지고 있다는 인권탄압에 대한 숱한 이야기는 우리 시대 최악의 사기행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온 세상을 속이는 짓을 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번 방문기로 요덕정치범수용소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인터넷에 공개한 후 그 글의 링크를 걸어서 증거자료로 하여 저 위키백과에 요덕수용소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으로 수정하도록 요청해보려고 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게 될지 궁금하다.



광복거리에 위치한 최고재판소 전경.  범죄가 드물기에 재판소도 한가한 곳이다.



나는 이번 방문기를 통하여 요덕정치범수용소가 북부조국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면서 한편으로 우리 지성인들은 북부조국에 대하여 보다 더 논리적으로 이런 왜곡과 조작에 대하여 바로 생각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북부조국에서 사회주의 제도가 정착한 지 이미 70년이 되었다.  과연 북부조국의 사회제도 안에서 저들 왜곡과 조작을 해온 자들의 주장처럼 정치범수용소를 만들어서 수십만 명의 인민을 수용해야 할만큼 국가의 정책에 반하여 행동한 북의 표현으로라면 반동세력이 생겨났으리라고 여길 수 있겠는가?  북을 몰라도 너무도 모르는 이야기다.  해방 직후의 친일파들이 널려 있던 시절이라면 몰라도 이미 오래전부터 온 인민이 주체사상으로 무장되어 있고, 사회주의 제도 아래 일심동체가 되어 살아가는 북부조국이다. 여기도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니 간혹 일탈하여 특별한 경우가 생겨나더라도 이미 거론한대로 노동교화소에서 교화하는 정도로 충분히 그런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북부조국은 정치범들이 대량으로 생겨날 수 없는 곳이므로 수만 명을 수용한다는 정치범수용소는 전혀 필요 없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요덕정치범수용소는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은가?  정치범이 없는데 정치범수용소가 무엇 때문에 필요할 것인가?  주변에서 북부조국에 대하여 이와 비슷한 어떤 모략과 조작을 하여도 우리는 좀 더 논리적으로 생각해보고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참 민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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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신동혁(본명 신인근)이랑 김혜숙(본명 장인숙) 강철환 정광일(본명 최광일)이 저걸봤으면 아마도 열받아서 날뛰었을듯~!!!!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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