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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8]강산 방북기-홍동근 목사 묘소 참배(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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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5-07-23 13:36 조회6,24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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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동포 강산 방북기는 58번째 글에서 자신의 스승으로 여겨온 재미동포 홍동근 목사가 안장된 평양의 애국열사릉을 참배한 이야기를 통해 고인의 저서들을 포함 애국 목사의 생애가운데 추억들을 되새겨 준다.[민족통신 편집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58

나의 스승 홍동근 목사님 묘소에서


내가 이번에 북부조국을 방문하여 처음 안내원과 일정을 의논하면서  특별히 방문하고싶은 곳으로 두 곳을 요청하였다.  하나는 협동농장이었고 또 하나는 나의 스승 홍동근 목사님의 묘소를 찾는 것이었다.  이미 만경대협동농장과 세포등판을 답사하였으니 협동농장과 농촌을 찾는 일은 이미 이뤘고  오늘은 추석을 맞아 홍 목사님의 묘소를 찾게 된 날이다.



                 추석날 오전의 애국열사릉. 이미 이곳을 찾은 많은 인민들로 붐비고 있었다.



내가 25년 전에 북부조국을 방문하였을 때 혁명열사릉을 방문했었다.  각 묘소마다 거기 묻힌 항일혁명 빨찌산 열사들의 생전의 모습을 반신조각상으로 모신 것을 보면서 북부조국이 나라를 찾기 위해 생명을 바쳐 투쟁한 혁명가들을 그렇게 귀하게 모신 것을 보고 감탄했었다.  애국열사릉 또한 주변 환경이 엄숙한 분위기 가운데 아름답게 공원처럼 단장된 곳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큼직한 묘비와 사진으로 생전의 고인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였다.





홍동근 목사님은 이곳 애국열사릉에 묻히셨다.  애국열사릉은 그야말로 북부조국에 기여한 애국자들이 묻힌 곳으로 이미 잘 알려진 곳이라 내가 따로 세세하게 애국열사릉에 대하여 쓰지 않지만   애국열사릉의 안내원에게 질문한 것 가운데 한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내가 이곳에 묻힌 대부분의 애국자들은  북녘 출신이지요하고 안내원에게 물어보았는데 그 대답은 뜻밖에도 아니라는 대답이었다.










해방 당시 북부조국엔 대학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대학이 있는 서울을 비롯한 남녘출신이었고, 그런 지식인 애국자들이 북부조국으로 찾아와 새나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들이 이곳에 많이 묻혔기에 애국열사릉에 묻힌 애국자들은 남녘출신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이곳을 찾는 저 수많은 인민들 또한 남녘이 그 조상들의 고향인 사람들이 많으리라.  


홍동근 목사님의 묘소는 애국열사릉 가장 높은 곳의 오른편에 위치해 있었다.  아, 이렇게 조경이 잘 되어있고, 환하고 양지바른 곳에 스승님께서 묻히셨구나.  이곳 북부조국은 스승님의 고향이 있는 곳인데 통일운동으로 거기서 애국자가 되어 애국열사릉에 묻히셨구나.  내가 평생 동안 존경해온  스승께 꽃을 바치고 참배를 하는데 만감이 교차한다.  







스승님의 돌아가셨을 때 그것을  모르고 지나다가 두어 달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어떤 지인으로부터 내가 들어서 알게 되었는데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렇게도 뜨거운 열정을 지녔고 건강하시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북부조국에 묻힌 스승님의 묘소를 꼭 찾아뵈러 하였는데 그것이 벌써 13년이 되었다.  스승님은 나를 지금의 나로 존재하도록 해주신 분이다.  그분으로 인하여 내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이루는 일에 기여하는 것을 내 삶의 목표로 삼게 되었고, 이제 그 일을 위하여 이곳 북부조국을 두 번째로 찾게 된 것이다.


홍동근 목사님과 나의 인연은 3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하와이에서 생강농장을 하던 시절에 그곳의 소아과 의사 박훈 선생님과의 옛 인연으로 홍동근 목사님이 작은 교회로 방문한 것이었다.   홍 목사님은 평안북도 피현이 고향이다.  그가 80년대 초반에 북의 어머니를 방문하여 만나뵌 지 석달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만일 북부조국 방문을 미루고 그때를 놓쳤더라면 영영 생전의 어머니를 뵙지 못하고 후회하였을 것이다.  홍 목사님은 그렇게 만나뵌 모친과 가족들과의 상봉과 옛 고향의 이야기와 통일을  주제로 나를 포함한 하와이 섬의 동포들에게 참 귀한 설교를 하셨다.  북에 대하여 모두들 너무도 무지했던 그 시절에 홍 목사님의 설교와 그의 방북기 ‘미완의 귀향일기’를 포함한 여러 통일운동의 선구자들의 방문기를 통하여 내가 북부조국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꿈꾸게 되었다.




홍 목사님의 방북기 미완의 귀향일기, 그리고 미주에서 80년대 초기에 출판된 김산의 아리랑.  이 두 권을 비롯하여 수백 권의 민족과 통일에 관한 구하기 어려운 책들을  편지와 함께 내게 보내주셨다.


홍 목사님이 머물던 며칠 동안 나는 참 많은 시간을 홍 목사님과 사모님인 홍정자 여사와 함께 보내게 되었다.   우리집에서 저녁을 초대하여 함께하였나하면 다른 집에서 초대하였을 때도 동행하여 말씀을 들었고, 하루는 지인이 운전하는 차로 하와이 섬을 함께 일주하면서 온종일 대화를 나누었다.   홍 목사님은 참으로 부드럽고 사랑이 많고 따스한 성품을 지니신 분으로 외딴 섬에서 동지가 없이 살아오던 나에게 너무도 큰 애정을 주셨다.


대화 가운데 당시 어용언론에서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노동자들을 의식화하고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준 부분에 대하여 ‘도산이 도산을 부른다’라며 매도하고 있는 것을 내가 거론한 적이 있는데 홍 목사님은 바로 그 도시산업선교회를 자신과 다른 목사님이 함께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 시절 박정희 정권 당시에 일본에서 초대를 받고는 강연을 하고 남부조국으로 돌아가려는데 입국을 가로막아서 귀국할 수가 없게 되어 결국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독재정권을 비판한다해서 외국에 나갔던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자국민의 입국을 금지한 그런 어처구니없는 시절을 겪으신 것이다.


홍 목사님은 로스앤젤레스 인근에서 ‘선한사마리아인 교회’의 목사로 계시면서 통일운동을 펼쳐나갈 터전을 마련하였다.  80년대 초, 남북관계가 얼음같던 그 시절에 ‘북과 해외기독인과의 대화’로 비엔나, 헬싱키 등에서 몇 년동안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지게 되었는데 해외의 기독교 인사들과 북부조국이 서로 터놓고 대화함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폭을 넓혀나갔다.  


전쟁 당시의 폭격으로 북녘의 교회당 또한 모두 무너져버렸는데, 교회당을 다시 짓는 것을 생각조차 않던 북부조국이 그런 대화를 통하여 평양에서 봉수교회, 칠골교회가 세워지는데 큰 기여를 하셨다.  홍 목사님 내외분은 이후에 해외의 이산가족들이 고향의 친지들을 찾아 방문하는 사업에도 힘써 일하셨는데 그렇게 해외동포들과 북이 서로 교류하게 된 것이 이후의 남과 북의 정상회담과 6.15 선언을 가져오는 귀한 디딤돌이 되었다.


1997년에 출간한 홍동근 목사님의 저서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  내가 홍 목사님으로부터 마지막으로 받았던 책으로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발췌하여 홍 목사님의 기독인으로서의 신앙으로 조명하고 해석한 책이다.



내가 홍동근 목사님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은 하와이에서의 만남 이후에 그분이 내게 수많은 편지로 일깨워주면서 그와 함께 귀한 책들을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8억인과의 대화’ ‘김산과 님웨일즈의 아리랑’, 민중신학, 해방신학, 통일신학 등 그분이 보내주신 숱한 책들을 통하여 원래부터 얼마간 진보적이었던 나의 의식이 더욱 깨어났고, 또한 내게 이민으로 중단한 대학을 마치도록 격려해준 것에 힘입어 내가 파트타임으로 몇 년동안 공부하여 학업을 마치게 되었다.  그때 보내주신 김산의 아리랑은 내가 읽고 또 읽기를 몇 차례나 하였는데 너무도 내게 감명을 준 책이라 수십 권을 따로 구입하여 동포들에게 선물하였다.  나의 닉네임을 오래전에 강산으로 정하게 된 것도 혁명가 김산을 알고 감동을 받은 이유였다. 


1989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늘 동지들이 없어 외로운 하와이 섬에서 살아왔지만 나도 통일을 위한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염원하였는데 그로부터 얼마 후에 홍동근 목사님으로부터 89년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여하려면 초대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내가 북부조국에 간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떨리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반공으로 세뇌된 것은 그렇게 많은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씻어버렸다고 생각하였지만 막상 북녘땅을 방문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북을 방문하는 것은 미국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으로 자유롭다고는 하지만 저 독재정권이 계속되는 남부조국에서 내가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것도 염려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스승님의 연락을 받고는 아무 망설임 없이 그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바로 결정하였다.  신념을 굽히지 않고 내가 옳다고 여기고 믿어온대로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정정당당하지 않은가하는 생각이었고, 통일을 꿈꾸는 사람으로 이 귀한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었으니 그때 북부조국을 처음 방문하는 결심을 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내가 평양축전에 참가하였을 때 홍동근 목사님은 통일운동의 원로들과 함께 따로 머물렀기에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평양축전 개막식날 임수경 학생이 입장한 5.1 경기장에 나와 함께 머물던 미주 동포들이 관람석에 앉았을 때 앞쪽에서 누군가 나를 찾는다고 하여 앞으로 가니 바로 거기서 뜻밖에도 홍동근 목사님이 나를 맞아주셨다.  편지로는 수십 번을 서로 소통하였지만 그렇게 몇 년만에 잠깐 스승님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서신으로 나를 격려하며 수많은 책을 보내주며 나를 이끌어주었지만 내가 선생님을 그렇게 두 번째 뵌 것이 마지막이 될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내가 하와이 외딴 섬에서 살았기에 같은 미국에서 살았지만 스승님을 다시는 뵐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홍동근 목사님의 저서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저자 홍 목사님의 소개를 옮김


홍동근 목사님은 90년부터 2001년 평양에서 갑자기 돌아가실 때까지 김일성대학에서 기독교와 종교학 강좌를 하셨다.   북부조국이 서방세계와 서로 대화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홍 목사님의 뜻을 북부조국에서 선뜻 받아들여서 그렇게 강좌를 이어가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 상대방이 바로 홍동근 목사님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홍동근 목사님은 다른 여타 개신교 목사님과는 크게 다른 분이며 참 선지자로 사셨던 분임을 북부조국에서도 잘 아셨기 때문이리라.


홍동근 스승님의 신학은 신을 위한 신학이 아니다.  바로 민중을 위한 신학이고 민중의 해방을 위한 신학이다.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 해방을 이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듯이 신은 민중의 해방을 원한다.   우리민족도 진정으로 해방을 이뤄야 한다.   창과 칼을 쳐서 낫과 보습을 만드는 세상, 지구상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넘쳐흐르는 세상, 온 세상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  바로 그것이 하느님이 원하는 세상이다.  


우리의 조국은 분단으로 인하여 불의가 판을 치며, 민중은 자유를 구속당하고 감옥에 갇히며 박해를 받고 있다.  진정한 민중의 해방은 통일로서만 가능하다.  통일을 이루어야만 민중이 진정한 해방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통일을 이루는 일에  기독교인들이 행동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신의 뜻이다.  그래 홍동근 목사님은 반공으로 절어 있는 기독교계에 민중신학, 해방신학에 이어 통일신학을 설파하셨다.   


스승님의 이런 신학을 북부조국에서 거절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그런 신학이라면 주체사상과도 서로 상통한다.  주체사상과 기독교는 서로가 반대될 이유가 없다.  그것이 성경을 관통한 참 사상이고 진리라면 북부조국이 그런 기독교를 배척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세속화되고 상업화된 폐기처분해야할 그런 기독교가 아니라, 가난한 자를 위하고 정의를 위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참 기독교의 정신을 홍동근 목사님은 밝혀주셨고 그것을 북부조국에서도 민족의 대단결과 통일을 위하여 큰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리라.  


우리가 홍동근 목사님의 묘소를 찾았을 때, 누군가 거기 일찌감치 다녀갔는지 꽃다발 하나가 먼저 놓여 있었다.  북부조국 어딘가에 살고 있는 친지가 왔던 것일까 아니면 이곳에서 강좌를 하는 동안 홍 목사님에게서 배운 다른 제자가 찾았던 것일까.  


큰절을 하는 노길남 박사. 박사님도 홍동근 목사님을 스승으로 모셨다.


홍 목사님 묘소를 떠나기 전에 안내원과 함께.


노길남 박사님 또한 홍동근 목사님을 스승으로 모시며 같은 교회에서 오랫동안 함께 활동하셨다는 것을 몇 년 전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들은 모두 같은 스승을 두었던 것이다.  내가 먼저 참배하도록 배려하신 후에야 노 박사님은 묘소 앞에서 우리식으로 엎드려서 절을 올리신다.  


내 평생의 가장 귀한 스승 홍동근 목사님이시여,  멀리서 선생님께서 지극히 사랑해주셨던 제자가 찾아왔으니 위로 받으소서.  선생님께서 평생을 소원하던 통일까지는 아직 그 길이 멀고 험란하지만 우리들이 힘차게 통일의 길을 열어갈 것이니 홍동근 스승님이시여, 이제 조국땅에서 편히 잠드소서.  참 기독교인이자 통일운동의 선구자이신 선생님, 주체사상과 기독교가 그 본질이 서로 다르지 않고 바로 사람이 이땅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 남과 북이 서로 원수된 것을 풀고 화해하고 통일을 이루자고 설파하신 선생님, 이곳 조국땅 애국열사릉에서 수많은 애국자들과 함께 편히 잠드소서.  

 페이스북 통일그룹 '우리는하나'로 통일을 꿈꾸는 민중을 초대합니다.

https://www.facebook.com/groups/Koreais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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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jytlQs3m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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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나도 해외동포였다면 저런곳도 갈수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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