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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7]강산 방북기-춘원 이광수의 월북사실에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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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5-07-19 13:06 조회7,805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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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동포 강산 방북기는 57편에서 우연히 만난 홍명희, 정인보 선생의 자손들을 만난 이야기를 소개했다. 강산 동포는 특히 재북인사 묘에서 발견한 춘원 이광수의 묘지를 발견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폐렴을 심하게 앓고 있던 춘원을 이미 넘어왔던 정치인들과 함께 머물 수 있도록 전쟁중인데도 김 주석이 배려하여 특별열차를 보냈다고 한다.  홍명희 선생이 춘원을 직접 찾아가서 치료를 받도록 하는 등 춘원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있었지만 애석하게 만포로 가는 도중에 양덕고개에서  춘원은 사망하고 말았다.그의 57번째 글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25 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57.

우연히 만난 홍명희, 정인보 선생의 자손들


재북인사묘에 묻힌 65명의 재북인사들 가운데 춘원의 묘비가 가장 쓸쓸하다.  거기 아무런 직함이 없이 ‘리광수 선생’이라고 적혀있고 그 아래로 1892년 3월 4일생, 1950년 10월 25일 서거로 적혀있다.  다른 재북인사들처럼 북에서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지 못하고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돌아가신 것이다.


춘원에 대하여 북에서 어떤 평가를 하는지 궁금하였는데 현영애 지도원이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이광수가 한때 친일을 하였고 친일분자로 인민들 가운데 낙인이 찍혔지만 생의 마지막에 공화국으로 넘어온 것을 북에서는 귀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북에서 그동안 수많은 친일경력이 있는 사람이나 반공으로 평생을 살아왔던 사람들까지도 스스로 뉘우치는 사람들을 따스하게 맞이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이광수에 대하여 너그러웠던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기도 하다.  북부조국은 사람을 판단할 때 지난날의 잘못만 생각하고 돌을 던지지 않고,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참회하는 자들을 따스하게 받아들이는 나라란 것을 춘원의 묘를 보고 다시금 느낄 수 있다.




김일성장군 노래를 작사한 리찬 선생이 춘원의 후배인데  북으로 가기로 결심한 춘원을 그가 인민군과 함께 데려올 때는 춘원의 병세가 아주 심했다고 한다.   폐렴을 심하게 앓고 있던 춘원을 이미 넘어왔던 정치인들과 함께 머물 수 있도록 전쟁중인데도 김 주석이 배려하여 특별열차를 보냈다고 한다.  홍명희 선생이 춘원을 직접 찾아가서 치료를 받도록 하는 등 춘원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있었지만 애석하게 만포로 가는 도중에 양덕고개에서  춘원은 사망하고 말았다.


몇 몇 고인들에 대하여서도 설명을 들었다.  안재홍 선생은 미군정청 시절에 민정장관으로 일했었고, 백상규 선생은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지냈다.  송호성 선생은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이었고, 정인보 선생은 서울국학대학학장을 지낸 분이다.  




남한에서 우리는 이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납북되었다고 배웠다.  반공정권차원에서 그렇게 우리들을 세뇌시켜서 북이 나쁘다는 것을 알리려고 한 일이지만 한편 가족들을 포함하여  친지들은 그들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이 월북했다고 하는 것보다 납북되었다고 하는 것이 남한에서 살아남는데 도움이 된 시절이기도 하였으니 그걸 굳이 아무도 따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을 전환하여, 당시반공정권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도록 하였던 사람들을 비롯하여 전쟁 동안에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던 시절에 북에 호의적이던 이들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을 그대로 서울에 남겨두었다면 과연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북에 부역하였다는 명목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시절이던가.  그들 모두 다 죽었거나 엄청난 고통을 당하였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래 그들 스스로 후퇴때 북으로 가길 원하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백번 양보하여 북에서 일부 필요에 의하여, 혹은 그런 것을 미리 내다보고 일부 인사들을 반강제로 북으로 데려갔다고 치자.  그걸 남한이 비난할 수 있는 입장인가?  사상이 다르다하여 수십만의 애국자들을 죽이고 가두고 고통을 준 정권에서 양심이 있다면 절대로 이들의 월북을 강제납북이니 어쩌니 하고 북을 비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재북인사묘의 관리를 맡은 두 분.  이렇게 해외에서 찾아준 것이 고맙다면서 주변에 나무도 좀 더 심고 묘소 관리에 더욱 정성을 들이겠노라고 말씀하셨다.



곁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이곳 관리인이 부연설명을 해준다.  이곳 주소는 평양시 룡성구역 룡궁1동인데 칠성봉이라 불린 명당자리에다 2003년 6월에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이곳재북인사묘를 건설하게 되었다.  원래 3군데에 흩어져 있던 묘들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일부 묘소들은 주변에 고압선이 지나가게 되어서 그들 고인들이 편히 쉴 수 없다면서 이곳으로 옮기도록 지시하였다고 한다.  


남북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시기였던 2004년 5월에 남한에서 ‘민족21’의 대표 이자 애국자 안재구 선생님의 아들인 안영민 기자가 이곳을 상세하게 취재하였고 그것을 ‘용궁으로 가다’라는 제목으로 기사화하여 이곳 재북인사묘가 남한에서도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그 이후로 남한에서 고인들의 연고자들이 20여 회에 걸쳐서 이곳을 방문하였고, 모두200여명의 친척과 후손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관리인이 '민족21'의 대표 안영민 기자의 취재와 '용궁으로 가다' 기사로 이곳 재북인사묘가 남한에 알려진 이후 유족들이 방문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통일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고난과 역경이 그치지 않는 것인가?  이렇게 분단과 전쟁으로 서로 갈라져 살다가 고인이 되어 묻힌 재북인사묘를 기사화하여 널리 알려 수많은 남한의 친지들이 남북관계가 보다 편안한 시절에 북을 방문하여 그 조상을 찾아보도록 한 안영민 기자는 내가 해외에서 사느라 잘 알지 못했지만 이 방문기를 인터넷을 통하여 연재하는 동안에 안영민 기자의 부친이자 애국자인 안재구 선생님과 서로 교류하게 되었다.   안 선생님께선 당신이 지은 저서들을 내게 보내주어서 내가 안재구 선생님의 가정이 대대로 얼마나 애국자 집안이었는지와 안 선생님을 아는 분들이 왜 그렇게 그분을 존경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한때 박정희 정권하에 사형선고까지 받았는데 당시 경북대학교 수학교수였던 안 선생님을 온 세상의 수학 학자들이 탄원하여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미 몇 차례 감옥을 다녀온 안영민 기자와 안재구 선생님이 지금 또 다른 간첩조작사건으로 재판중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팔순이 지난 안재구 선생님은 사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막내 아들인 안영민 기자가 살고 있어 요즘은 총명한 손주들과 종종 시간을 보내는 것이 큰 낙이라고 하는데,  그나마도 저렇게 간첩조작사건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계신 것이다.   애국자들에게 상을 주고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대신에 그들을 간첩사건으로 몰아가는 남한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가 맞은가?   일제때 독립군과 애국자들을 탄압하던 친일 앞잡이들의 행태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안재구 선생님 가문이 몇 대를 이어 그렇게 일제에 복무하던 순사들에게 당하던 고초를 해방 후에 반공정권으로부터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계속해서 고난당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역사의 현주소인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간첩사건들이 모두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는데도 이렇게 계속 국가보안법으로 민중을 얽어매고 통일을 꿈꾸지 못하도록 만드는 저 정권에 대하여 치미는 분노를 걷잡을 수 없다.


남북교류가 활발할 때 20여차례에 걸쳐 이곳 재북인사묘를 방문하던 것이 지금 다시 이명박 정권 이후로 남북관계가 얼어붙어 남쪽에서 이 묘소를 찾는 사람들이 끊어졌다.   누구나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조상의 묘를 찾아보고 남과 북에서 살아온 그 후손들이 서로 상봉하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그것을 막는 권력은 이미 민중을 위한 권력이 아니다.  민중에게 민주주의가 아닌 정권이라면 그런 정권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가?




사진 왼편이 홍석우 선생, 푸른 셔츠를 입은 분은 홍석주 선생이다.  외할아버지 정인보 선생의 묘를 참배하러 왔다가 우연히 우리와 만났다.



재북인사묘를 둘러보고 차에 오르려는데 안내원 김미향 동무가 우릴 입구 오른편으로 부른다. 거기서 뜻밖에도 우연히 귀한 분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바로 벽초 홍명희 선생의 손자 두 사람으로 홍석우 선생과 홍석주 선생이었다.  소설 임꺽정을 쓴 홍명희 선생은 1948년 김구 등과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였다가 되돌아오지 않고 북에 남았다.   북부조국의 내각 부수상 등 요직을 지내다 1968년에 돌아가셨다.   홍명희 선생은 애국열사릉에 묻혔는데 우리가 이곳 재북인사묘에서 이들 손자들을 만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음 행선지였던 애국열사릉의 홍명희 선생의 묘에서 


두 손자는 홍명희 선생의 둘째 아들인 홍기무의 자제들인데 이곳 재북인사묘에 묻혀있는 정인보 선생의 둘째 딸인 정경완이 이들의 모친으로 정인보 선생은 바로 외할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홍명희 선생과 정인보 선생은 서로 사돈간이었던 것이다.  이들 형제들은 추석날 아침에 함께 외할아버지 묘를 먼저 찾은 후에 애국열사릉의 홍명희 선생의 묘를 찾기로 하고 이곳에 왔다가 우연히 우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홍명희 선생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이 홍기문, 둘째 아들이 홍기무, 세 딸로 수경과 무경 (쌍둥이), 그리고 개경을 두었다고 한다.   홍기문 선생은 북에서 역사학부 강좌를 하였다고 한다.  한국전쟁 동안에 전주고본에 보관되어 있던 이조실록을 북으로 가져온 것을 홍기문에게 번역하도록 과업을 주었는데 제자들과 함께 1993년도에 번역을 완수하였다고 한다.  이조실록은 현재 3대혁명전시관 사회과학부문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홍기문 선생의 아들 홍석중의 소설 ‘황진이’는 2000년대 초 남한에서 출판되었고 제19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만난 홍명희 선생의 2남 홍기무의 장남인 홍석우 선생은 북에서 19세 때 종합대학 핵물리학부에 추천을 받아 대학에 들어갔는데  69년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져 군대로 나가겠다고 결심하였다고 한다.  평소에 홍명희 선생이 ‘나라가 있고서야 우리가 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조국통일을 이뤄야한다’라고 늘 말씀하셨는데 그런 말씀에 힘입어 자원하여 입대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리라 결심하고는 평생을 인민군대에서 복무하고 작년에 상좌(대령)로 제대하여 지금은 연로보장을 받고 있다고 한다.  군대에서 어떤 훈장을 받았는가고 물어보니 영웅칭호 외 국가기본훈장은 모두 다 받았다고 한다.


홍기무의 차남 홍석주 선생은 김책공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였는데 1982년에 졸업하여 지금도 일하는 중이라고 하였다.  전기기계분야에서 노력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두 사람에게 남한의 고모들이나 사촌들과 만난 적이 있는지 물어보니 한 번도 만날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그동안 남북 이산가족들이 수차례 만났는데도 이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이 방문기와 사진들이 남한에서 살고있는 그들의 여러 친지들에게 전달되어 사진으로나마 서로 상봉하게 되길 바란다.




두 형제들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들의 여동생 홍석매 선생이 막 도착하여 합류한다.  아주 쾌활하고 말을 재치있게 하는 여성으로 나이는 58세인데 그 이름도 할아버지가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홍석매 선생은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귀염을 많이 받고 자랐다고 한다.  홍명희 선생은 늘 ‘지덕체’를 강조하였고 또한 애국은 가정에서 출발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수령님이 태양이라면 우린 지구, 위성이다라면서 늘 태양과 함께해야만 한다고 말해주었고, 자신이 13세때 돌아가시기까지 고향의 이야기도 종종 들려주었다고 한다.   


김 주석은 홍명희 선생을 많이 배려하였는데 그 일화로 1950년대 후반에 김 주석이 대동강에서 배에 태워 노를 저으면서 통일의 그날까지 건강하게 오래 사시라며 직접 사진도 찍어주었다고 한다.  국가부주석으로 지낼때도 홍명희 선생은 연세가 많아 사양하였는데 김 주석은 그 자리에 앉아만 계셔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좌로부터 홍석우, 홍석주, 홍석매 선생.


홍석매 선생은 교양원(선생)으로 일하고 있는데, 삼흥대학에서 유치원교육을 전공하다가 대학 졸업반 때 스스로 인민군대로 갔다고 한다.  자신이 봉건가문 출신인데 왜 군대로 갔느냐하면 ‘나는 자유주의자’라서 집에서 달아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여성이지만 군복을 입고 통일에 기여하겠다는 마음으로 군대로 갔다고 하는데 북의 인민으로부터 자유주의라는 말을 들으니 조금 이상해서 그가 사용한 자유주의자라는 말의 뜻을 물어보니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와는 달리 ‘제일 버릇이 없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좀 보수적인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가르침을 많이 받았는데 오히려 그것에 반발하여 보다 적극적인 삶을 살아보기로 선택하였고 그러기 위해서 군대로 갔다는 뜻이었다.  북부조국 여성들이 현숙하고 가정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보다 평등하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일면을 홍석매 선생은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홍석매 선생은 아들 둘이 있는데 모두 인민군대를 복무한 후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하였다.


홍명희, 정인보, 그리고 역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의 3재사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우리가 이곳 재북인사묘를 찾았다가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의 후손을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은 참 다행한 일이었다.  월북을 한 사람들의 묘소만 둘러본 것이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이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후손들이 모두 북부조국에서 각자 나라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오면서 또한 평등한 사회주의 제도 아래서 특별하지 않고 아주 평범한 인민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에 더욱 정감이 갔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남한이나 해외에서 온 동포들과의 만남은 우리가 처음이라는데도 우리들의 마구잡이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해준 홍석우, 홍석주, 홍석매 형제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페이스북 통일그룹 '우리는하나'로 통일을 꿈꾸는 민중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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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춘원 이광수선생의 묘지가 북녘에 있다니....!!!!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역쉬 북녘은 독립운동가들을 하늘만큼 땅만큼 우대해주니 맘편하게 가실수 있다는것을 똑똑히 깨닫게 되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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