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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18~20] 코리아전쟁,그 진실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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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04-22 16:03 조회3,0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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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18~20]코리아전쟁,그 진실을 알아본다.


유럽거주 동포가 제공한 자료 "코리아 전쟁 진실을 알아본다'라는 18-~20번째 연재글을 종합하여 소개한다림원섭 선생은 이 자료들은 6년전부터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자료들을 오랜동안 사이버 공간에서 활동하며 코리아전쟁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모은 내용들이라고 밝힌다.[민족통신 편집실] 



[18]

내내 비상상황이 이어지다가 전쟁개시 날짜가 잡힌 그날에는 미군 지휘를 받은 육군본부가 병사들을 내보낸 것이다.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국장 장도영, 북한반장 김종필, 문관 박정희)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 

전방부대의 중화기와 차량중 60%가량을 후방으로 보내는 등(일제 점검 목적임) 개별적으로는 이해가나 종합적으로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집중적으로 하여 이형근 장군은 저서 "군번 1번의 외길인생"에서 6.25 초기의 10대 불가사의를 제기하며 군지휘부 (이승만, 채병덕 참모총장, 김백일 참모장, 신성모 국방부장관, 김경근 국방부차관)안에 통적분자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원인이 되며 일각에서는 남침 유도설의 근거가 되었다. 

미국은 이와 같이 공격용 중화기 부대만 남기고 방어목적의 부대들은 모두 철수시켜 놓았다. 그리고 한국군은 23일 밤10시 돌연히 북한 군진지에 맹렬한 포 사격을 시작하여 24일 오전 4시까지 105미리 포와 81미리 포 204발을 발사하였다. 계속하여 24일 오후 12시 25분부터 6시 30분까지 300발을 쏘았으며 세 번째는 25일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사이에 200발을 북한군 진지에 쏘았다. 

남한군 당국은 백선엽 대령의 제 17연대가 1950년 6월 24일 전투를 개시하여 해주까지 북진하여 점령했다고 당시에 공식발표했었다. 

미국도서 《미국과 한국전쟁》(일문판) 99쪽에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다. 6월 24일 토요일 아침 트루먼은 고향 미주리 주에서 처, 딸과 같이 조용히 주말휴가를 지내기 위해 전용기 <인디펜던스>호를 타고 워싱턴을 떠났다. 이는 뜻밖의 일이였다. 트루먼은 1945년 2월부터 그때까지 5년이 넘는 재임기간에 주말휴가를 그렇게 여유작작하게 지낸 때가 없었다. 

트루먼은 백악관의 주인이 되자 《결단은 내 수중에》라는 좌우명을 내걸고 쉴 새 없이 모든 일에 참견 하였다. 그것은 그 자신이 관록 있는 가문의 출신도 아니고 장성급을 지닌 경력도 없고 제1차세계 대전시기에 겨우 포병대위로 복무한 초라한 군 경력과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탓으로 상대방이 깔볼 것이라는 선입견이 언제나 머릿속에 지배하고 있었기에 모든 일을 자기 손에 틀어쥐고 자기의 승인이 없이 처리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백악관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트루먼은 처와 딸까지 데리고 형이 경영하고 있는 자기 농장 개조문제를 토의하러 간다는 소문을 크게 냈다. 그 소문이 퍼지자 누구나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루먼은 고향의 농장으로 가던 도중 프린드씨프 국제공항에 들러 확장공사의 완공 테이프를 끊고 연설 하였는데 그는 앞으로 평화가 계속될 것이라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평화의 화신처럼 생각하도록 연극을 놀았던 것이다. 

대통령뿐 아니라 미 국무장관 애치슨도 한국전쟁 발발전야에 메릴랜드 근처의 자기 농장에 가 있었다. 결국 한국전쟁이 도발되기 전야에 미국에서는 대통령이나 국무장관이 다 자기 농장에 가서 주말휴가를 즐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트루먼이나 애치슨에게는 한국전쟁 발발에 관한 상황이 즉시 전달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며 이상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19]

이에 대하여 미국도서《한국전쟁: 대답 없는 질문》의 필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이상야릇한 일이였다. 미국이 싸운 세 번째로 값비싼 전쟁전야에 미국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대통령과 국무장관 둘 다 외출하였던 것이다. 국무성에 모여온 중간급의 관리들은 정책 작성자들이 아니라 장관급의 명령을 집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야말로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전날 밤(토요일 밤) 미국은 완전히 해이되어 비어 있었다는 것이다. 대통령과 국무장관뿐만 아니라 정책 작성자들 까지도 모두 부재중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서방세계의 학자들까지도 이상야릇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될 줄 모르고 해이되어 미 국무성이 텅 비어있었다는 것인데 한 나라가 절대로 그렇게 되었을 수 없으며 만약 그렇게 되였다면 그것은 의식적으로 연출한 것이 분명하다. 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03.02.24일자 <워싱턴포스 트>에 실린 리차드 코엔의 칼럼 '반전과 비논리(Antiwar and Illogical)'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습니다. 

'거짓말쟁이'는 워싱턴 정가에서 잘 안 쓰는 말입니다. 그건 워싱턴에 거짓말쟁이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중에 주워 담기 힘든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워싱턴 정가에는 오래 전부터 그 말을 쓰지 말자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습니다. 

트루먼이나 애치슨뿐 아니고 미 정가에는 거짓말이 일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6.25전쟁당시 내무부장관 김효석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행동개시의 시간은 6월 25일 새벽으로 정했다. 그날은 일요일이다. 

일반이 휴일로 생각하고 있는 일요일 새벽을 기해 진격을 개시하면 불의공격의 효과를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그날 서울을 비롯한 전략적 지점들에 예비로 배치한 사단들에서는 하급사관 및 사병들의 외출을 허락했다가 개전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북한에서 공산군이 침입해 왔다고 비상소집을 하라. 그러면 일반시민들도 북한에서 먼저 쳐내려온 것으로 인식할 것이다.』 

 일요일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요일을 이용하여 불의의 무력침공을 감행하는 것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범죄자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수법이다. 

독소전쟁을 도발한 히틀러 도이칠란트군은 1940년 6월 22일 일요일을 이용하여 소련에 대한 불의의 침공을 감행하였으며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41년 12월 8일 일요일을 이용하여 진주만에 대한 불의의 타격을 감행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교를 믿는 미국, 남조선에서 일요일이 안식일이어서 휴식의 한때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려는 틈을 타서 인민군대가 남침 하였다는 것을 널리 선전하기 위하여 전쟁개시날짜를 일요일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당시 한국주재 미 군사고문단 단장이었던 로버트 준장은 전쟁개시날짜를 6월 25일 일요일로 선택하게 된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왜 25일로 택하게 되는가. 여기에는 우리의 심중한 의도가 있다. 25일은 일요일이다. 그리스도 교국가인 미국이나 남조선은 일요일을 안식일로 정하고 있다. 우리가 일요일에 전쟁을 개시하였다는 것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전쟁을 먼저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승만은 국군에 북침공격명령을 하달하고서도 6월 25일은 일요일이어서 태평하게 낚시질을 하였다고 선전하여 세상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였다. 

워싱턴의 휴가와 괴뢰군의 계속되었던 비상상태의 해제 그리고 이승만의 부슬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낚시질 떠난 일 이런 것은 각각 따로따로 생각해봐도 보통 때도 여간해서 일어나기 힘든 상식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것들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은 의도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런 비상식적인 3가지 일이 모두 6.25에 꼭 맞춰서 하나같이 일어났다는 것은 우연히 취한 행동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밖에 갑작스런 대규모 인사이동도 우연으로 생겼을까요. 후퇴 명령에 거역하고 맞섬으로써 유엔군을 끌어오는데 차질이 생기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철저히 예방하는 조치였습니다. 

괴뢰군을 초기에 확실하게 후퇴시키기 위하여 괴뢰군 지휘관들의 갑작스런 대규모 인사이동을 전쟁발발 직전에 단행하였습니다. 새로 부임해서 군 지휘관의 조직 장악력이 떨어진 상태여서 인민군에 대해 자체 방어도 담당하기 곤란한 상태가 되어 미 고문단의 지시대로 무질서하게 후퇴만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두고 보자는 식으로 그렇게 공산군이라면 지옥까지 쫓아갈 듯이 덤비던 괴뢰군이 총 한발 쏘지 않고 물러나기만 했던 것은 후일을 도모 하는 뭐가 있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때 유엔군이 합류하는 것은 문학작품에서 수없이 보아온 바로 그거였다.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는 악당을 물리칠 뛰어난 능력의 초인을 필요하게 만들어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20]

1950년 6월 11일 발령됐던 군부대 비상경계령이 6.25 하루 전인 24일 0시 갑자기 해제됐다. 더구나 병사들에게 외출과 휴가를 허용하였다 이에 따라 전 장병의 절반이 휴가와 외박을 갔고 육군본부 장교들은 전쟁 당일 새벽까지 댄스파티를 즐겼다. 

이런 해이된 사건들이 워싱턴과 이승만과 한국군이 완벽히 삼위일체를 이루어 일어났다. 이와 같이지금 까지 인내하던 북한의 반격이 있자 미국은 기다리던 것이 왔다. 드디어 미국이 간절히 바라던 대대적인 전쟁이 주어져 미국의 능력을 또 한 번 펼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미국은 박헌영 등을 간첩으로 들여보내서 북한 사정을 알고 있었다. 박헌영이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에 갔을 때 미국으로 암호 전문을 보냈다. 북한은 자신이나 소련이 발송하지 않은 이상한 전파가 어디론가 발송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 풀 수 없는 암호 전신문은 김일성과 함께 간 일행이 발송한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쟁 준비 상황이었으므로 색출 보다는 협력이 필요한 시기이므로 덮는 수밖에 없었다. 소련에게 분열상을 보이면 믿음을 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발신자도 자신을 색출하여 전열을 흩뜨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암호발신을 감행한 것이다. 

 김일성의 회고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전쟁 때 최고사령부주변에 반혁명분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조국의 운명과 직결된 극비자료들이 박헌영과 리승엽을 통해 계속 미국사람들에게로 날아갔습니다.  1952년 여름에 리승엽은 졸개들을 시켜 무전련락으로 최고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던 건지리골안에 미국비행기들을 수십 대나 불러들였습니다. 그 비행기들이 최고사령부주변을 발칵 뒤집어놓았습니다. 

최고사령부 건물 곁에는 큰 시한탄까지 떨구고 달아났습니다. 내가 있던 집에서 그 시한탄까지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습니다. 그때 리을설이 비상회의를 열고 부관들과 호위성원들에게 결사전을 호소한 다음 당원증을 바치고 목도로 그 시한탄을 메다가 골짜기에 내던졌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리을설은 최고사령부주변에 잠복해있던 암해분자들과 반동분자들을 모두 잡아냈습 니다. 1952년 8월 3일 리승엽을 비롯한 13명이 '북한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피체되었다. 박헌영도 그들이 체포당하면서 그들의 '반란'에 대한 후원자로 몰리면서 가택 연금 당하였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3월 '미국의 스파이', '반당 종파분자' 등의 죄목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3월 31일 김일성은 평양 주재 소련 대사를 통해 박헌영과 그 추종자들이 당내에서 종파를 조직하고 정보를 미국에 빼돌렸으며 한국전쟁의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1955년 12월 15일,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북한에서 검사로 일하다가 남파되어 장기수로 복역했던 김중종은 공판을 직접 참관했다고 증언하였다. 김중종에 의하면 문제가 된 것은 박헌영의 집 지하실에 있던 무전기로서 이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국과 직접 접촉했던 증거라고 증언하였다. 

박헌영은 6.25 당시 자기 집 변소에서 미군부대에 무전을 치다가 주세죽(前妻)에게 들켜 체포되었습니다.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은 1953년 박헌영과 리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의 거물 북조선 정치인들이 미국의 간첩으로서 정부 전복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최고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정식 명칭은 미 제국주의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이다. 

이 사건의 피의자 13명 가운데 박헌영을 제외한 12명은 1953년 7월 30일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8월 6일 판결이 내려졌다. 박헌영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재판이 미루어지다가 2년 후인 1955년 12월 3일 기소되어 12월 15일에 판결을 받았다. 

재판 결과는 피의자 전원 유죄 판결로,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원조와 윤순달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피의자들은 간첩 혐의와 반혁명적 모략, 무장 폭동 기도 혐의 등을 법정에서 전부 시인했다. 예를 들어 최후 진술에서 박헌영은 자신을 매국역적이라고 부르면서 그 죄악을 더 널리 알려달라고 말했으며, 리승엽은 생명이 둘이 있어 둘다 바친다 하더라도 사죄에는 모자란다는 표현을 썼다. 

박헌영 공판 마지막 날, 판사가 박헌영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일제 때 변절했던 것에 관해서 솔직히 밝히지 않았느냐?" 그러자 박헌영은 "일제 때 변절한 것을 밝히면 날 총비서 시켜주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박현영이 변절한 것은 '고문'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고, 박헌영이 '미제 간첩'으로 포섭될 수 있었던 것은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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