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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12~14]코리아전쟁,그 진실을 알아본다(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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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04-06 13:52 조회10,964회 댓글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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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거주 동포가 제공한 자료 "코리아 전쟁 진실을 알아본다'라는 12~14번째 연재글을 종합하여 소개한다림원섭 선생은 이 자료들은 6년전부터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자료들을 오랜동안 사이버 공간에서 활동하며 코리아전쟁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모은 내용들이라고 밝힌다.[민족통신 편집실] 


[12] 

미 정부의 사전 시나리오에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한 계획들이 있었다. 그렇게 세운 계획들 중 하나로 요시찰인에 대한 검거 학살 계획이 있었다. 중국대륙을 목표로 한 군사작전을 수행하는데 조금이라도 차질을 빚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철저히 장해물을 제거 하였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연행과 구금조치는 1950년 6월25일 전쟁 당일 시작되었다고 진실화해위는 밝혔다. 

 그리고 유엔에서 미국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기 위해 6.25 전쟁발발 전에 미리 계획해둔 규탄성명을 발표하고 유엔군을 조직하는 작업을 일사천리 준비대로 신속 완벽하게 진행하였다 “유엔담당 미 국무차 관보 존 D. 히카슨 증언에 의하면 미국은 북침을 감추고 북한이 침략한 것으로 날조시키기 위한 ‘유엔결의 초안’까지 전쟁 전에 제 마음대로 조작해 완비하고 있었다. 

1951년 6월 5일 미 상원세출위원회의 국무성 예산에 관한 실무적인 청문회에서 죤 디 히카슨은 한국전쟁발발과 관련하여 유엔에 제출할 <결의안>이 전쟁 전에 작성되었다 고 증언하였다 이는 ‘NSC-68’에 따라 수립된 계획으로서 UN군의 한국전쟁 참전이 전쟁 전 미국의 ‘NSC-68’에 따라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1950년 4월2일 미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비준된 ‘NSC-68’에는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을 투입하기 위한 계획이 단계 별로 명시되어 있다. ≪1964년 4월 13일자 뉴욕타임스에서≫ 소련이 유엔에 항의하여 불참한 시기를 이용하여 미국은 전쟁발발 날짜를 잡았습니다. 

소련은 중국공산당의 국가수립 선포이후에도 이유 없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는 유엔 결정에 항의하기 위해 1950년 1월부터 유엔을 보이콧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안보리에서 유엔군의 한국전 파병이 쉽게 결정 되었다. 

소련이 거부권 행사를 포기하고 안보리에서 기권하였기 때문에 유엔군이 파병될 수 있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련이 유엔군 파병에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미국은 유엔총회에서 유엔군참전의 결정을 이끌어 냈을 것입니다. 

48년2월26일 한국에서의 선거의 가부를 묻는 표결에서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보이콧으로 부결되자 미국은 유엔 총회에 상정하여 우리민족에게는 발언권을 주지 않고 민족의 뜻과는 배치되는 남한만의 (( 이미 천명한대로 소련과 북한이 유엔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표결이 실시된 것이므로 이 결의안이 남한에만 미친다는 것을 회원국은 이미 알고 통과시킨 것이다. )) 유엔감시하의 단독선거를 결정하였습니다. 
  
우리민족은 스스로 선거를 치를 능력이 부족하다는 전제하에 내려진 이 같은 결정을 우리민중들은 반대하여 항거하였고 많은 사람이 미군의 지령을 받은 친일반역자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자주적으로 감시가 없는 자유스런 축제분위기 속에서 해방된 조국의 첫 선거를 하고 싶었고 친일매국노 가 날뛰는 분단이 확실한 반쪽짜리 선거를 원치 않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유엔한국위원 단(UNCOK)은 북한 남침에 의해 일어난 전쟁이라면서 미국이 제시한 자료를 그대로 유엔에 보고함으로써 유엔군 참전 결정을 이끌어냈다. 

1949년 대륙에서 중국공산당의 국가수립 선포이후에도 이유 없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고 일개 섬에 불과한 국민당의 타이완 정부가 22년 동안이나 유엔에서 중국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대신하여 유엔의 회원국은 물론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의 지휘를 버젓이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엔을 쥐락펴락 제 마음대로 주무르고 전횡을 일삼는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잡지 《라이프》는 50년 8월호에서《전쟁개시에 이르러 이번 전쟁만큼 완전히 준비되었던 전쟁은 우리들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없었던 일이었다.》라고 썼다. 당시 미극동군사령부에서 참모로 근무한 에이다는 《한국전쟁은 일본에 있는 미군총사령부의 직접 명령에 의하여 남한군이 개시하였다》라고 폭로하였다. 

유에스뉴스 앤드 리포드」1945년 12월 10일호에서 미10군단장 ‘오르몬드’ 는 『중국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한국처럼 편리한 보급로는 없다. 육, 해, 공군의 동원이 한국보다 더 좋은 지역은 없다. 한국은 제1급의 전략적 지역이다.』라고 하였다. 미 경제원호처 한국과장이었던 존슨은 1950년 5월 미 하원 세출위원회에서 『한국군은 미국무기로 무장하였으며 서울의 미 군사사절단의 지도하에 미국 장교들에 의하여 훈련받은 10만의 한국군이 모든 준비를 끝마쳤으며 언제든지 한국에서 전쟁을 개시할 수 있다』고 보고 하였다.

[13]
 
1949년 11월 미 상원 군사위원회 위원 ‘노랜드’가 이승만이 차린 초대연에서 이렇게 발언 하였다. 『나는 한국에 와서 반공태세가 정립된 것에 대해 만족하게 생각한다. 특히 국군이 잘 정비되고 훈련되어 마음이 든든하다. 이 군대를 가지고 북진 통일하기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내가 미국에 돌아가면 한국에 대한 원조를 더욱 증가하여 북진준비에 만전을 가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전쟁인 만큼 만일을 생각해서 새로 50만~60만 명의 청장년들을 준군사적 조직에 망라하고 더 훈련시키는 것이 좋겠다.』 

 1950년 1월 미 극동군사령부 외교국장 시볼드가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준비가 다 되었으면 북진은 하루라도 속히 하는 것이 유리한데 와서 보니 국군의 준비를 좀 더 빨리 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더 준비하여 개전하면 국군의 승리는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 대처하여 미군이 원조 또는 직접 참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1949년 10월에 있은 국군사단장회의에서 주한 미 군사고문 단장인 로버트는『38선 이북지역에 대한 공격은 나의 명령에 의하여 진행되었으며 금후에도 진행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정세를 악화시켜 전쟁발발을 도모하기 위한 공격이 진행되고 있다는 발언이다, 

 6.25전쟁당시 내무부장관 김효석은 채병덕이 다음과 같이 얘기 했다고 하였다. 『당시 국군참모총장 채병덕의 말에 의하면 1949년 7월부터 1950년 5월까지의 기간에 38선 일대에서 1천 여회 가까이 북한을 공격 하였으며 수백 명에 달하는 이북주민들을 살해하고 수천 호 민가를 소각했다. 이것은 「국군의 강대성을 시위하며 이북주민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라」는 로버트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해군참모총장 이용운은 75년 6월 일본 도쿄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949년 8월 10일에 있은 몽금포기습작전을 계기로 6.25전쟁으로 확대되었 으며 전쟁은 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가 1951년 5월 미 상원 외교군사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 하였다. 

『북한군은 38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배치돼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방어를 위해서 배치돼 있기 때문이다. 공격을 위한 배치는 결코 아니었다. 반면에 한국군은 자기의 모든 물자와 장비를 38선에 집결시켰다.』 50년 6월 19일 미국대사와 주한미군과 이승만 정권 수뇌들과 가졌던 회담에서 덜레스는 다음과 같이 얘기하였다. 

『내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것은 북진준비상황을 직접 보고 미비한 점이 없으면 곧 북진을 단행하자는 트루먼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왔다. 와서 보니 준비는 이만하면 족하다. 전기는 왔다. 우선 남한에서 먼저 개전하라. 개전후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미국을 믿으라. 만일 그 기간에 전국이 불리하게 되면 방어태세로 넘어가 2주일간만 유지하라. 그러면 미국의 참전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1949년 6월 5일부 뉴욕 헤럴드 지에 실린 서울특파원의 보도에 의하면 한국주둔 미 군사사절 단 단장 로버트 장군은 <5백 명 이상의 미국 군사교관들을 가지고 북한을 공격하기 위하여 남한군을 열심히 훈련시키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표현 하였다. 

 ≪1949년 10월 육군사령부에서 열린 사단장회의에서 로버트는 확실히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많은 공격은 나의 명령에 의하여 수행되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더 많은 공격이 수행될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부대는 제 마음대로 공격하고 아무러한 성과도 없이 막대한 양의 탄약을 써버렸으며 게다가 치명적인 손해를 입었다. 앞으로는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국방군의 진공은 오직 미 군사절단의 명령에 의하여서만 수행되어야 한다. 라고 말하였다.≫ 일본도서 ≪미국은 패하였다≫, 14쪽 에서 

 38도선 시찰을 끝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덜레스는 6월 18일 이승만에게 <북조선에게 먼저 침입했다는 선전과 동시에 북조선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라.>고 언명하였다. 일본도서 ≪미국은 패하였다. 16쪽≫ 

 6월 20일 덜레스는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서 남한에 부과된 역할은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르기 위한 일을 조작해 내는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위대한 사건 가운데서 당신의 나라가 맡아야 할 결정적인 역할에 대하여 나는 지극히 중대한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고 하였다. 미국도서 ≪한국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 일문판, 41 

 1950년 6월 26일부 아사히신문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게재되었다. 한국군은 23일 밤10시 돌연히 북조선 군진지에 맹렬한 포 사격을 시작하여 24일 오전 4시까지 105미리 포와 81미리 포 204발을 발사하였다. 계속하여 24일 오후 12시 25분부터 6시 30분까지 300발을 쏘았으며 세 번째는 25일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사이에 200발을 북한군 진지에 쏘았다. 

백선협도 6.25는 6.23일 북을 먼저 침략해서 일어났으니 6.25가 아니고 침략은 6.23이 북침이 맞다고 실토했다. 림씀. 

 한국전쟁은 사실상 남으로부터의 도발로써 시작 되었다. - ≪교도통신≫ 1975년 8월 25일 북한군이 남한군으로부터 대대적인 불의의 공격을 받고 38도선 전선에서 2-3키로미터 후퇴하였다가 반격으로 넘어갔다. 미국도서 ≪아메리카 현대사≫ 일문판, 160 남한이 옹진반도를 먼저 공격하고 북한이 반격할 때 일부러 계속 밀려 국제여론을 환기시킨 다음 만주지역까지 점령하려는 것이 미국의 의도이다. ≪중앙일보≫1989년6월23일 

 북한은 무려 천 회 공격에도 남침을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발발을 위해서는 남한군이 중화기까지 동원해서 대대적인 공격을 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었다.

[14]

대대적인 공격을 하도록 이승만과 일당들에게 단숨에 북한으로 밀고 올라가 통일 하자고 하였다. 이 말이 시나리오에 따른 전쟁발발을 시키는 말인 줄도 모르고 이승만은 말 그대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게 될 줄로 알았다. 미국이 이승만 괴뢰를 어떻게 철저히 속였는지는 이승만이 가지고 있던 미국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이 개시된지 3일만에 인민군대에 의하여 서울이 함락되면서 리승만의 집무실을 비롯한 남조선《정부》와 군부의 기밀실에서 극비자료들이 인민군대에 의하여 압수되게 되었다. 1950년6월20일 면밀한 작전계획에 따라 덜레스가 이남의 외무부장관에게 이북 침공을 지시한 내용의 문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리승만《정부》는 극비문건을 하나도 처리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인민군대한테 압수당하였다. 

 그것은 당시 리승만이 미군을 믿고 허장성세하여 북침전쟁을 개시하면 파죽지세로 북진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 인민군대의 반공격에 의하여 도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예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이 얼마나 급했으면 기밀문서를 책상위에 그냥 놓아둔 채로 방안열쇠도 잠그지 못하고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민군대는 6.25 한국전쟁도발과 관련되는 이승만《정부》와 군부의 극비문건을 몽땅 압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전쟁역사에 드문 일이였다. 인민군대가 서울에서 압수한 이승만정부와 군부의 극비문건에는 6.25전쟁도발과 관련된 자료들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북한정부는 미국의 사주 하에 이승만이 6.25 한국전쟁을 도발하였다는 것을 자료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 아무리 비방중상 하여도 도발자는 남한군입니다. 

 어리석은 이승만은 속아서 미군이 처 올라갈 것으로 굳게 믿었다. 하지만 미국의 시나리오는 그게 아니었다. 북의 38을 넘은 남침반격이 있자 계획적으로 후퇴하였다. 그래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한국은 북한의 도발을 전혀 예상 못 했던 것은 아니다. 50년에 들어서서 비상상황은 여러 번 발령됐다. 특히 적이 쳐들어 온 6월 들어서는 초순부터 비상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적이 남침을 시작한 25일의 전날인 24일에 갑자기 비상이 풀렸다. 병사들에게 외출과 휴가를 허용한 것이다. 당시 부대에 남아 있던 장병의 수는 군의 복무규정과 육본의 요구 범위에도 미치지 못했다. 남아 있던 장병마저 긴장감이 풀어져 있는 상태였다는 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내린 평가다. 

 50년 5월 육본의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이 아군과 적의 병력·장비를 비교한 뒤 상대적으로 부족한 전력을 보완하기 위해 ‘긴급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미국과 남한군은 북한군의 사정은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6월 초 이뤄진 군 고위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 조치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지휘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였다. 

새로 전선 사단에 부임한 지 며칠 안 되는 지휘관들이 전쟁이 터진 뒤 그 사단을 제대로 지휘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기’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미국은 전쟁발발 한 후에 한국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하였었다. 유엔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사전 시나리오가 아니고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인민군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저지하여 시나리오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므로 이렇게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 조치를 단행하였다. 

대한민국이 방어에 얼마나 준비가 없이 북한의 남침을 맞았는지 잘 보여준다. 38선을 넘은 적이 미군의 본격적인 개입이 있기 전까지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내려온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미국은 괴뢰군에게 이와 같은 계획적인 사전조치를 취함으로써 제대로 대항을 못하게 하고 후퇴하도록 명령까지 내렸다, 이렇게 하여 낙동강에 방어선을 치도록 하여 많은 인민군을 남쪽 끝에 묶어두고 인천 상륙을 함으로써 남으로 유인한 다수의 인민군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23일 밤10시부터 중화기를 동원하여 무수히 많은 포탄 세례를 퍼붓는 공격에만 집중하였고 정작 중요한 방어에는 얼마나 준비를 안 했는가를 알 수 있다. 24일에는 38선을 넘어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입체적으로 공격하였었다. 또한 다음의 사실들을 통하여 국군이 장비가 없어 총 한발 쏘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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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통신 테레비죤 보도(2015.4.4 그리고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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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장준호님의 댓글

장준호 작성일

우리가 한국있었을때 학교서 배두고 들은 역사하고는 딴판이구려~
이게 진짜 같은데 이걸 말하면 100% 종북파 아니면 빨갱이라고 할꺼외다.

이넘의 세상 진실말하면 죄자 빨갱이 종북...ㅠㅠㅠ
차라리 전무 빨갱이되는 길이 진리를 찾는거 아니오리까요?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장준호 선생님의 말씀을 주야로 적극 지지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쑤기님의 댓글

오쑤기 작성일

사실을 말하면 빨갱이, 이거 참 모순이네

거짓을 말하면 사기꾼이되어야 하는데 그런사람이 출세? ....이것도 참 모순이네

그럴바에야 빨강을 택하는게 상책이네

허 허 허 이말이 진짜래두!

노갈남님의 댓글

노갈남 작성일

코리아전쟁 우끼고 있네 6.25 남침전쟁을 왜이리 무식하게 쓰는지?
코리아전쟁으로 이름 바꾼다고 김일성이 소령과 중공의 도움으로 남침해서 300만명의 동족을 학살한 대역죄의
력사는 바뀌지 않는다.

미 연방수사국(FBI)이 재미 종북인사 노길남 씨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고 한국의 한 종편 방송이 16일 재미 우파단체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채널 A의 보도에 따르면 노길남 씨와 재미 종북세력에 대해 FBI가 우파 한인단체인 ‘애국동지회’ 관계자에게 명단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션 리 애국동지회 회장은 FBI에 자료를 제공하면서 “이 명단에 있는 종북세력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제2, 제3의 김기종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고 채널A에 전했다.
인터넷매체 ‘민족통신’을 운영해온 노길남 씨는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를 테러한 ‘우리마당’ 대표 김기종 씨의 행위를 옹호하는 글을 올려 물의를 빚었다.
71세로 LA에 거주하는 미 시민권자인 노길남 씨는 1999년부터 웹 사이트 ‘민족통신’을 운영해오며 공공연하게 북한 체제 찬양을 해왔다. 그동안 북한을 60여 차례 방문하면서 김일성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북한이 주체사상 보급에 공헌한 외국인들에게 주는 ‘국제 김일성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노갈남님의 댓글

노갈남 작성일

길남아! 칠성판 탈 준비해라!!!
골로 갈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뉴욕동포님의 댓글

뉴욕동포 작성일

노갈남이라고 매도하며 쓴 놈은 안기부놈으로 자손만대에 역적놈으로 남을 것이다.

ㅎㅎ님의 댓글

ㅎㅎ 작성일

요즘 조까치가 즘즉하다 했더니 궁금이가 본색을 드러내는가??? 나쁜 쪽바리 개자식!!!!

국정원님의 댓글

국정원 작성일

미 연방수사국(FBI)이 재미 종북인사 노길남 씨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고 한국의 한 종편 방송이 16일 재미 우파단체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채널 A의 보도에 따르면 노길남 씨와 재미 종북세력에 대해 FBI가 우파 한인단체인 ‘애국동지회’ 관계자에게 명단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션 리 애국동지회 회장은 FBI에 자료를 제공하면서 “이 명단에 있는 종북세력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제2, 제3의 김기종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고 채널A에 전했다.
인터넷매체 ‘민족통신’을 운영해온 노길남 씨는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를 테러한 ‘우리마당’ 대표 김기종 씨의 행위를 옹호하는 글을 올려 물의를 빚었다.
71세로 LA에 거주하는 미 시민권자인 노길남 씨는 1999년부터 웹 사이트 ‘민족통신’을 운영해오며 공공연하게 북한 체제 찬양을 해왔다. 그동안 북한을 60여 차례 방문하면서 김일성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북한이 주체사상 보급에 공헌한 외국인들에게 주는 ‘국제 김일성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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