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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9~11]코리아전쟁, 그 진실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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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03-30 13:30 조회4,512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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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거주 동포가 제공한 자료 "코리아 전쟁 진실을 알아본다'라는 9~11번째 연재글을 종합하여 소개한다림원섭 선생은 이 자료들은 6년전부터 오랜동안 사이버 공간에서 활동하며 코리아전쟁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며 모은 내용들이라고 밝힌다.[민족통신 편집실] 


[9]


통영에서는 죄 없는 양민 수십 명을 창고에 가두어 놓고 강제로 정교를 맺게 하고는 수장시켜 죽였고(김삼웅, 1996:108), 필자와의 면담에서 어느 육군상사는 시숙과 제수를 옷을 벗겨 강제로 정교를 맺게 하고는 덮석에 말아 굴리는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다는 전언을 해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가공스런 야수적 행위는 이미 제주에서부터 알려졌다. 처녀와 총각을 불러내어 서로 정교를 강요하였고(황상익, 2000:153 재인용),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 정조를 맺게 하고는 쏘아 죽이기도 하였다(김종민, 1998:33). 

완도 경찰은 완도읍 두암리에 살던 좌익아들을 둔 할머니의 이야기다. 경찰이 그 아들을 죽이고는 아들의 간을 꺼내 할머니 입에 물리고는 마을을 돌아다니게 하였던 일이다. 그 할머니는 반 미친 상태에서 경찰이 시키는 대로 하였고 13년형을 받아 7-8년 복역 후 석방되었으나 몇 달 후 죽었다고 한다(김삼웅, 1996:119). 국민의 뜻은 무시하고 위와 같이 한민족에게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미국에 빌붙어서 사는 이명박은 괴뢰도당 에 지나지 않고 이명박 정권은 괴뢰정권 이다. 

직접 만행을 저지른 친일세력들은 하수인에 불과하고 주범은 무기를 공급하고 지시를 내린 미군입니다. 더구나 미군은 사람을 많이 죽인 친일매국노를 높이 평가해 주고 진급을 시켜 고무하였습니다. 

 이러한 반인륜적 행위가 단지 6.25 때문에 발생한 것만은 아니다. 이미 일본군국주의의 악랄한 인권 말살주의에 물들어 있던 친일파, 곧 민족반역자들이 반공제일주의를 걸었던 미군정과 결합하여 그들의 생사를 걸고 남한사회의 권력을 장악하면서부터 구조적으로 잉태되었다. 실제로 미군정 당시에도 Mark Gain의 Japan Diary 에 서술되어 있듯이 경찰이 유사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물론 6.25이전에도 4.3항쟁과 여수항쟁에서 보듯이 토벌대의 이러한 만행은 다반사였다. 단지 6.25이후 보다 대규모와 빈번히 일어났을 따름이다. 

신불산 공비는 여수, 순천반란사건 때의 공비들이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가 그 일부가 울산으로 이동 해오면서 활동이 시작됐다. 공비를 토벌하기 위한 군, 경과 민간 의용대의 작전은 1949년 말∼1954 년 초까지 4년 넘게 계속됐다. 감옥은 좌익분자로 넘치는데도 반정부 기운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반정부 집단의 배후에는 북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좌익세력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은 한국전쟁의 발발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은 공비들을 지원하는 북한과 그리고 북한을 지원 하는 중공까지 점령 할 수 있는 기회로 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전쟁만이 모든 것을 해소할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고 마국은 전쟁을 하기위한 시나리오를 착착 준비했습니다.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한국전쟁 전 1949년 6월에 좌익계 인물들을 관리하려는 목적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의 단체이다. 흔히 보도연맹으로 지칭한다. 

한국정부가 제주 4·3 사건,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등 각종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감시할 목적이었다. 1950년 초에 집계된 회원 수는 30만 명이 넘는다. 보도연맹에는 전향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되어 있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들은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학살되었다 이를 보도연맹 사건이라 한다. 

보도연맹은 북한이나 추종세력들이 조직을 이용해 반정부 활동을 취할 수 있는 항시적 사회 불안 요인 이었다. 이런 우려로 인하여 한국 전쟁 발발과 때를 맞춰 보도연맹원의 대량학살이 있었다.  한국 전쟁은 미국민 특히 군산복합체 집단들의 요구에 의하여 대륙 탈환을 목표 삼아 일으킨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대륙 진군의 전진 기지가 되는 한반도를 완전히 평정 하고 평온 상태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전쟁이 개시되자 수감자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시행되었다.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에 대한 경찰의 연행과 구금조치는 1950년 6월25일 전쟁 당일 시작되었고, 인민군에게 점령된 서울에서는 보도연맹원의 희생이 없었으며 인민군에 점령되지 않은 경남과 경북 일부 지역의 희생자가 가장 많았다. 살해 형태로는 경찰이 트럭을 이용하여 창고 등에 갇혀 있던 보도연맹원을 외딴 곳으로 데려가 구덩이를 파게하고 총살한 사례가 많았다. 심지어는 전투가 전혀 있지 않은 제주도에서도 25일 당일에 검거되어 218명이 해병대에 의해 집단 총살당했다. 

 미군 군사고문관 롤린스 에머리히(Rollins S. Emmerich-1986년 사망)는 부산 교도소에 있는 수감자 3,500명을 모두 사살한 것으로 보고하였다. 또 미 공군 정보장교였던 도널드 니콜스(Donald Nichols-1981년 사망)도 50년 7월 1일 경기도 수원에서 1,800명이 집단 처형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사진을 찍었다.



[10]



당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도 그 해 7월 1일부터 사흘 동안 대전지역에서도 집단처형이 이뤄졌으며 지프에 탄 미군 장교들이 '살육을 감독했다'고 밝혔다. AP통신은 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단 처형은 1950년 7월부터 10월까지 그 해 여름과 가을에 집중적으로 이뤄져 최소 10만 여명이 아무런 재판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총살을 당했다고 전했다. 

 한국 전쟁 때 처형된 보도연맹원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은 없지만, 최소 20만 명이 처형되었으리라는 추산이 나오고 있다. 당시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극단적인 반공산주의)과 무관한 일이 아니다. 1946년에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조지프 매카시(1908-1957) 의원은 1949년부터 상원에서 상원 행정운영위 소속 상설 반미조사위원회를 이끌며 공산주의자 적발 추방의 선풍을 일으켰다. 

미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매카시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 주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의 정치집회에서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연설을 하게 된다. 그의 이같은 폭탄적인 발언으로 적색분자 적발 소동이 일어나 미국전역이 반공산주의 극단적인 광풍에 휩쓸렸다. 

이러한 매카시즘 광풍은 중국이 공산화되어 미국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상실한 후 공산세력의 급격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미국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로 인해 위세를 떨쳤습니다. 당시의 국무장관 J.F.덜레스를 비롯하여 대통령 H.S.트루먼(1945~53년 재임)까지 공격당하여 매카시즘의 공포에 미 국민들이 떨었습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일을 하다 말고 조사위원회에 소환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고. 미국에서 추방 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거나 훼손된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미국인들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로 몰릴까봐 반공에 앞장서야 했습니다. 설령 이 시기에는 한국전쟁과 대량학살 시나리오에 대하여 반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누구도 감히 반론을 제기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950년6월경에는 민간인들을 대량학살 함으로서 반정부 무장공비들의 활동은 수그러드는 추세였다. 1949년 8월부터 시작된 학살만행에 항거한  김달삼부대의 준동은 지역 곳곳에서 무장전투를 가져와 무장공비측과 토벌대 상방간에 많은 피해를 가져 왔으며, 

이렇게 지역에서 많은 비극을 가져다 준 제3병단의 대장인 김달삼이 괴뢰군의 강력한 토벌에 밀려 점차 북으로 퇴각하다가 1950년 3월에 강원도 정선군 군북면 전투에서 사살되자 지역에서의 무장공비의 활동은 거의 약화되게 되었다. 그러나 김달삼부대의 중화기 중대를 이끌고 있던 강구면 금진동 출신의 박종화(朴鍾和)가 잔여부대를 모아 강철부대라 명명하고 동대산과 대둔산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벌여 지역에서 또 하나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도 1950년 5월에 생포되어 이후에 이들 무장공비들은 뿔뿔이 흩어져  6.25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는 국내에서 무장공비의 준동은 거의 미미한 수준으 로  되었다. 이는 곧 이어 일어날 민족대재앙인 6.25한국전쟁의 전조를 알려 주는 고요였다. 미국은 반도에서 전쟁을 수행하는데 장해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을 제거하여 마침내 준비한 대륙회복의 야망을 향해 줄달음질 고속도로를 놓을 수 있었습니다. 

매카시광풍을 등에 업은 미국은 중국대륙을 향해 준비된 질주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매카시 광풍이 일어나도록 미 국민들을 선동한 집단은 전쟁에 목말라하는 거대 집단 군산복합체입니다. 전쟁으로 번영을 누리는 집단은 돈이 쏟아져 들어왔던 전쟁이 없어지면 중독자가 마약이 끊긴 것처럼 견디지 못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아무도 전쟁에 응해오지 않을 것이므로 멕시코 전쟁 때 경험한 것처럼 상대에게 전쟁을 하자고 자꾸 자극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정작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갔을 때를 대비해 전쟁 시나리오를 만들어 둬야 합니다. 미국은 강대국인 자신과 전쟁하자면 두려워 안 할 것이므로 미군도 철수. 방위선도 후퇴라는 미끼를 줘가면서 자극의 강도를 높여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전쟁의 시작은 공식적으로 남북 간의 전쟁이 됩니다. 그리고 제3자인 미국은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한 정의의  수호자로서 세계인의 지지와 찬성 속에 등장하여 참전하는 것입니다.


[11]


중국 대륙에서는 1948년 가을 린뱌오가 지휘하는 동북 인민 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민당 군을 격파하는 요심 전투를 시작으로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즉, 미국이 지원하는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과의 내전(1946~1949) 에서 공산군에게 패퇴한 시기이므로 매카시 광풍이 일었던(1949~1954) 시기인데 미 정부는 그 당시의 미 국민의 요구에 역행하는 애치슨 선언을 하였다(1950.1.12). 이런 행위를 한 자들이 이후에 매카시의 색깔론을 면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적을 속이기 위한 기만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애치슨 선언 후 공화당의원을 포함하여 많은 비난이 일었다. 그러나 애치슨을 향해서 쏟아지는 매카시즘 의 화살에도 불구하고 애치슨은 그 당시는 물론 그 후까지도 무사할 수 있었다. 이보다 앞서 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끝나면서 삼상결정에 참여한 미 국무장관 번즈도 공산주의와 내통한 불순분자로 내몰렸다. 

 애치슨 선언은 한국과 대만을 방위선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북한과 중국을 동시에 기만하기 위한 술책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이 뒤에 밝혀졌다. 1947년 터키와 그리스 방위를 선언함으로써 냉전의 깃발을 올린 트루먼 정권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은 극동의 그리스였다. 극동의 그리스인 한반도에 관심을 쏟았던 건 그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었다. 미국의 관심은 지정학적 가치일 뿐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한반도에 관심을 쏟았던 트루먼 정권에서 애치슨 선언이 나왔던 것은 전략적 기만전술에서였다. 

-1948.04.14일은 이스라엘이 창국이 되였다 
1948.12.26일은 전 소련군 철수 
1948. 06.29일은 미군들이 철수를 했으나 미고문관 500명은 남아서 한국군인들에게 사격술, 수류탄투적, 매복, 각개전투를 가르쳤다. -  림씀. 
    
1949년 6월 29일에 주한미군 철수를 완료 했다는 발표 역시 북한이 남침을 단행하여 전쟁에 참전할 명분을 획득하기 위해 사전 시나리오에 따른 발표였다. 북한이 남침하더라도 미군이 개입해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남북이 사이에 발생한 사건으로 세계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것입니다. 

소련군의 완전 철수와는 달리 미군은 일부를 잔류시켜 한국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한국군은 사단마다 미 군사고문관들이 배치되어 한국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국군 1사단의 미군 수석고문관은 로이드 로크웰 중령이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전후에 한국에 있었고 한국군을 지휘 감독하였다. 

연대에는 대위급을 고문관으로 배치하였다. 예를 들어 개성 12연대의 미 작전고문관은 다리코 대위 였다. 다리코 대위 역시 1950년 6월 25일 전후에 한국에 있었고 한국군을 지휘 감독 하였다 . 미국이 한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양민 수만 명을 죽이고 세운 괴뢰정부를 결사반대하는 한국국민의 손에 맡기고 미군이 철수했다는 것은 사리에 어긋나는 소리이고 속셈을 감추기 위해 늑대가 내는 양 울음소리입니다. 

-1947년1월부터 1950년 6월25일까지 미군들과 한국군인들은 북을 향하여 도둑, 폭행, 강도, 강간, 매복, 방화, 납치, 살인, 사격, 포사격, 비행기 사격 등등 3200번(북자료 5200번)으로 북을 주야로 괴롭혔다. – 림씀.  

당시 1947년 조선에 급파되였던 웨드마이어가 미국대통령 트루먼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미군이 남조선 에서 철수하면 남조선이 ≪적화≫되어 공산주의의 파급을 도와 주는것으로 되기때문에 미국이 조선에서 도모하려는 문제들을 미영중소 4개국회담에서 풀며 거기에서 성공 못하면 유엔에서, 유엔 에서도 해결 못하면 미국이 단독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조선반도는 지정학적 잇점을 지니고 있어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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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고슴도치님의 댓글

고슴도치 작성일

림원섭 선생님 좋은 자료를 제공하여 Korean War 의 원인들을 폭넓게 알 수 있게 하여준 것을 감사히 느낍니다. 사실은 우리 한반도 전쟁에 대한 왜곡때문에 우리민족간에 얼마나 오해가 쌓여 왔습니까?  일은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이 쳐놓고 우리민족간에 남과 북이 서로 침략했다고 손가락질하며 미워하며 증오하여 온 것이 한국전쟁사가 아닙니까?

이런것이 바로 제국주의자들의 수작이었습니다.

이라크 전쟁도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WMD)가 있다고 사기친 것이 미제국주의자들입니다.

베트남 전쟁도 통킹만 사건을 자작해 놓고 월맹이 했다고 뒤짚어 쒸워 전쟁을 유발시킨거 였습니다.

리비아도 사기치고 끝내는 가다피를 죽였습니다.

오사바 빈 라덴도 미정보기관이 실컷 부려먹고 나중엔 역적으로 몰아 죽였습니다.

천안함 사건도 북의 소행이라고 사기치고 남북을 이간시켰습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이 사기친 사건들이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우리민족 이제는 정신 좀 단단히 차려야 하겠습니다.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민족통신 대단히 감사합니다.
고슴도치님께서 잘 아시듯 6.25는 동족상잔이 절대로 아님이다. 왜 아니가란 글을 간단히 지가 쓸 것입니다. 6.25전에 이미 벌써 1945.8.9일부터 1950.6.25일까지 이 5년 동안에 대한민국 백성들이 약 1백만이 학살되였습니다. 그 대 학살자들은 미군정의 명령에 의해서 이승만 조병옥 장택상 등등의 명령으로 군, 경찰들과 북기독교 쳥년단체인 서북청년단입니다.

그래놓고 모두 북에 들씨웠고요. 또 빨갱이라고 무자비하게 대 학살을 했습니다.  이 엄청난 불의에 분노하지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6.25 미침략 대 살인 강도질의 진실을 구체적으로 파헷처야 하겠다고 작심한 세월이 근10년이 넘어 갑니다. 댓글 대단히 감사합니다.  림원섭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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