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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왕청문 가는길 멀고 험해도 우린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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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01-05 08:48 조회5,805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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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일(전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는 "1929년 가을 우익 국민부 우두머리 현묵관과 고이허가 애국 청년 운동가들 6명 최봉, 리태희, 리몽렬, 리광선, 조희연을 등 스물 한 두 살 밖에 안 되는 청년들을 피목 지구(왕청문 사건) 산골에서 살해 한다". " 일제라는 적을 코앞에 두고 같은 피를 가진 애국애족 청년 6명을 몰살한 사건, 우익들의 백색 테러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2015년 새 해 아침에 이 백색 테러 사건을 황선 신은미에 대한 익산 테러 사건을 상기하면서 글을 쓴다".고 밣힌다. 그의글을 싣는다. [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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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청문 가는 길 멀고 험해도 우린 떠나야 한다!

  

 

*글:김상일 박사(전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1929년 여름의 동만 땅의 낭만과 슬픔

 

가도 가도 수수밭 길 간간이 고랑을 메운 콩잎이 가는 바람에 너슬대기도 한다. 밭 구석에서 비둘기가 날아오른다. 넓고 넓은 남만 외길 300리 길 수수밭 길 따라 김성주와 차광수 두 젊은이들이 늦여름 뜨거운 해빛 내려 쪼이는 길을 걷고 있다. 밋미스름히 언덕진 수수밭 머리로 올라선 김성주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김성주 청년이 좀 쉬어 갈가 하니 차광수가 일없소, 오늘 중으로 기어이 한촌에 대야 하지 않겠소하고 대답한다.

 

두 청년이 오늘 중 한촌에 들어 가야할 이유는 한촌에 살고 있는 최봉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두 청년이 가는 길의 목적지는 한촌이 아니고 왕청문이다. 1929년 왕청문에서 열리는 국민부가 주최하는 남만 청총에 참가하기 위해서 가는 길에 한촌에 사는 최봉을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두 청년이 최봉이 머무는 집에 도착했을 때에 이미 최봉은 왕청문을 떠난 뒤였다. 최봉의 어머니와 최봉의 약혼녀만 만났다. 최봉의 어머니는 아들 자랑을 하면서 아들 친구 들이 왔다니 아들 같이 반기면서 며느리 될 수연이를 시켜 음식을 장만케 한다. 예나 지금 이나 이런 풍경은 변함없는 남북민 모두 우리들의 애틋하고 공감 가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최봉은 영원히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와 그를 기다리는 수연이의 한 맺힌 삶은 이 땅의 진보가 가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최봉은 이미 왕청으로 떠나고 없었으며 최봉은 기다리는 약혼녀의 애타는 기다림을 마다 한 채 1929년 가을 왕청문 피모 지구 산골짜기에서 우익 국민부의 백색 테러에 의해 5명의 다름 청년들과 함께 희생이 되고 만다.

 

왕청문 사건이란?

 

왕청문은 길림성 홍경현의 작은 농촌 부락이다. 부락 중심에는 국민부의 거물들이 모여 살았으며 독립 인재 양성 목적으로 세운 화흥 중학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29년 가을 우익 국민부 우두머리 현묵관과 고이허가 애국 청년 운동가들 6명 최봉, 리태희, 리몽렬, 리광선, 조희연을 등 스물 한 두 살 밖에 안 되는 청년들을 피목 지구 산골에서 살해 한다. 몽둥이로 뒷머리를 쳐 잔인하게 쳐 죽인다. 이를 왕청문 사건이라 한다. 일제라는 적을 코앞에 두고 같은 피를 가진 애국애족 청년 6명을 몰살한 사건, 우익들의 백색 테러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2015년 새 해 아침에 이 백색 테러 사건을 황선 신은미에 대한 익산 테러 사건을 상기하면서 글을 쓴다. 익산 우익 집단의 원조는 왕청문 사건이 원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남만청총대회는 국민부가 남만청총과 동만청총을 통합함으로서 조선청년동맹을 무어내어 만주 일대에 있는 모든 조선청년단체들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소집한 대회였다. 예나 지금이나 목숨을 내 걸고 민족주의 운동에 한 몸 내 던지려는 청년 지식인들은 좌파 진보들 청년들이 주류 였다.

 

이것이 회의를 소집한 현묵관과 고이허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자기들이 생각할 때에는 밥상 차려 놓고 보니 손님들은 거의 모두 좌파 청년들뿐이었고 자기들은 들러리서는 꼴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지금 만약에 애국애족 하자고 청년 단체 회의를 소집한다고 할 때에도 제 발로, 그것도 물집 터진 발에 성냥 딱총 불 질려 가며 걸어 올 청년들은 소위 저들이 종북이라고 하는 좌파 청년들뿐일 것이다. 차광수의 발은 물집 투성이고 김성주의 온 몸은 땀으로 모욕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은 한 시 바쁘게 왕청문에 도착해야 한다. 국민부가 하는 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이다. 서로 사상이 달라도 외세를 이기자면 전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오직 한 생각뿐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앞에서 전 민족 대단결한 다는 것이 죄가 되어

 

김일성 주석은 그의 회고록에서 그 때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아무리 민족주의 교양을 해도 나오는 것은 공산주의자들 뿐이였다. 간판은 민족주의인데 내용은 공산주의였다”(1334) 다시 말해서 김일성 주석은 백산청년대표의 자격으로 차광수와 왕청문 남만청총 대회에 참가하러 와 보니 결국 그들의 성공적인 대회 자체가 국민부의 역린 같이 보였다.

 

비록 국민부가 소집한 대회이기는 하지만 도착한 첫날부터 김성주는 이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루기 위해 민족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성사 시키는 주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믿고 여간 애를 써지 않았다. 대회의 결의안도 공산주의란 이념적인 색채를 제거하고 민족주의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작성하였다.

 

김성주 청년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차광수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고이허를 찾아 갔다. 고이허는 민족주의 진영 가운데서도 소문난 이론가 였다. 고이허는 1929년 여름 삼원포 일대에서 있었던 엠엘파와 백산청년 동맹을 동일시하면서 타협을 거부하였다. 사실 엠엘파들은 몽치단이란 이름으로 김성주의 반제청년동맹까지 습격하는 망동을 부린 적이 있었다. 이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다시 말해 동일한 피해자란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이허는 김성주의 제안을 거부하고 이미 체포한 6명 청년들의 소재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극우와 극좌의 협공 속에서 지낸 날들

 

1930년 대 동만 일대에서 김일성 항일 투쟁 운동은 극좌파와 극우파 모두에게서 협공을 받고 있었다. 특히 전자의 경우가 5.30 폭동으로, 후자의 경우가 왕청문 사건으로 이어진다. 김일성 혁명은 지금도 이런 오해 속에서 진행 중이다. 그리고 남한에서 진보 운동이 겪는 암초와 소용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좌에는 암초가 우에는 소용돌이가 있는 협곡을 지나가는 율리시즈의 배와 같은 것이 우리 진보 좌파의 현주소이다. 억지로 종북으로 몰고 가는 저 극우와 극좌의 소용돌이를 빠져 나가기란 참으로 어렵다.

 

2014년 겨울 통합 진보당 해산과 신은미 백색 테러 사건을 보면서 1929년 왕청문 사건을 연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일성 주석은 이런 비극을 자기 당대의 일어난 사건 가운데 중국의 노동자 농민들을 학살한 장개석의 졸도들의 만행에 비유하고 있다.(회고록 1342) 그가 오늘 살아 다른 비유를 찾는다면 그것은 대한민국 헌법 재판소의 진보당 해산과 이석기 구속을 두고 말 할 것이다.

 

왕청문 사건이 있은 다음 나는 가슴이 아파 며칠 밤 잠을 자지 못하였다. 나라를 찾아보자고 혁명의 길에 뛰어 들었는데 같은 민족한테 피해를 당하는 것이 분하고 억울하였다”(회고록 1343)

 

어찌 왕청문 피목 산골자기에서 죽은 최봉 등 6명의 청년들의 한 뿐이랴? 이 땅에 보수 우익들이 애국애족 일념으로 나선 묻 청년 지식인들을 감옥에 쳐 넣고 고문 학살을 하고 있는 역사는 아직 까지도 진행형이다. 한 솔 밥을 먹던 동지들마저도 종북의 덜미 속에 밀어 넣는 이 상황이 무엇 하나 다르랴?

 

원통한 최후 순간

 

최봉등 6명의 청년들은 최후의 순간에 우리는 로력자 대중의 입장에서 자신의 희생을 이미 각오한 바 있다. 그러나 너희들 손에 죽기는 너무 원통하다고 하면서 최후를 마쳤다. 국민부는 이들 청년들을 살해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가족들 까지 찾아다니면서 학살을 서슴치 않았다. 국민부는 김성주를 묵게 한 집 주인의 여인 오신애 마저 살해를 하고 말았다. 물론 주 표적은 김성주였다. 김성주는 동지들의 희생을 피하기 위해 왕청문의 철수를 명할 수밖에 없었고 남만 청총 대회는 무산 되고 말았다. 이렇게 좌우 합작이란 항상 우익들의 테러로 무산 되는 역사를 반복한다.

 

신은미 선생은 나의 모든 것이 파탄 나고 말았다고 했다. 보수 우익들의 광기와 백색 테러는 종편이라는 어마 어마한 무기를 들고 지금 백주를 활보하고 있다. 이들도 애국애족과 국가 안보를 짖거리고 있다. 그러나 오직 한 몸 내던져 저 일제와 미제와 싸울 인재 풀은 항상 좌파 진보뿐이라는 데 저들의 고민이 있다.

 

김일성 주석은 .를 결성하던 첫 날부터 항상 민족주의자들과의 공동 투쟁을 모색해 왔었다. 안창호를 보수 개량주의자로 비판은 하면서도 그가 체포당했을 때에 주저 없이 그의 석방을 위해 투쟁한 인물도 김성주 청년과 그의 사람들이었다.

 

테러한 자 테러 당하고 만다.

 

현묵관도 그 후 장사에서 테러 분자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그 자신도 테러의 희생제물이 되고 말았다. 그의 딸 현숙자가 북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가 당력사박물관에 보관돼 있고, 그의 다른 자녀들이 지금 북에서 대우 받으며 잘 살고 있다.

 

북은 남에서 대화 제의가 올 때 마다 언제나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반겨하고 있다. “오늘 국토가 분렬 되어있고 외세의 간섭이 심한 조건에서 민족단합이 첫째가는 생명이라는 것을 절감할 때 마다 나는 왕청문의 비극을 생각하군 한다”(1344)고 김일성 주석은 회고 하고 있다.

 

오늘도 남한 정부는 북핵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한.일 내지, ..일 공조를 취하기로 했다고 한다. 못난 송아지에 왜 이렇게 엉덩이에서 뿔만 돋는 것인지. 신년 아침 가장 기분 상하게 하는 보도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 보도는 김정은 제1위원장의 신년사이다.

 



  
우리 민족을 둘로 갈라놓고 장장 70년간 민족분렬의 고통을 들씌워온 기본장본인인 미국은 시대착오적인 대조선적대시정책과 무분별한 침략책동에 매달리지 말고 대담하게 정책전환을 하여야 할것입니다.


북과 남은 자기의 사상과 제도를 절대시하면서 체제대결을 추구하지 말며 우리 민족끼리리념에 따라 민족의 대단합,대단결을 이룩하여 조국통일문제를 민족공동의 리익에 맞게 순조롭게 풀어나가야 합니다.


  자기의 사상과 제도를 상대방에게 강요하려 하여서는 언제 가도 조국통일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수 없으며 대결과 전쟁밖에 가져올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인민대중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제도가 가장 우월하지만 결코 그것을 남조선에 강요하지 않으며 강요한적도 없습니다.


  남조선당국은
 북남사이의 불신과 갈등을 부추기는 《제도통일》을 추구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방의 체제를 모독하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동족을 모해하는 불순한 청탁놀음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북과
 남은 이미 합의한대로 조국통일문제를 사상과 제도를 초월하여 민족공동의 리익에 맞게 풀어나가야 합니다.


  북남사이의 대화와 협상,교류와 접촉을 활발히 하여 끊어진 민족적뉴대와 혈맥을 잇고 북남관계에서의 대전환,대변혁을 가져와야 합니다.


  북과
 남이 싸우지 말고 힘을 합쳐 통일의 새로운 길을 열어나가는것은 겨레의 한결같은 소망입니다북과 남은 더이상 무의미한 언쟁과 별치않은 문제로 시간과 정력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하며 북남관계의 력사를 새롭게 써나가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뜻과 힘을 합친다면 못해낼 일이 없습니다북과 남은 이미 통일의 길에서 7.4공동성명과 력사적인 6.15공동선언,10.4선언과 같은 통일헌장,통일대강을 마련하여 민족의 통일의지와 기개를 온 세상에 과시하였습니다.

 

 

  

왕청문 사건과 2015년 신년사

 

 

이 신년사는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다. 이미 1930년대 항일 유격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이룩된 정신이다. 차광수와 김성주 청년들이 국민부가 소집한 남만총청 대회를 성공시키려 그 머나먼 길을 달려 갈 때부터 이어 온 정신이다.

 

용광로 같이 애국정신에 불타는 청년들 여섯을 잃어 가면서 까지도 보수 우익들을 껴안으려는 정신의 계승이다. 그래서 믿어도 된다. 왜냐하면 아무리 보수 우익 보다는 외세가 더 무서운 적이라고 북의 지도자들은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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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별' 다부작 모두 감상하면 역사의 눈이 뜬다

굴절된 역사가 희망의 역사를 상징하는 태양이 된다 

 

*아래 작품들을 하나씩 짤각하여 감상하세요!



조선의 (1)

http://youtu.be/NMyifcDZTWo 


조선의 (2) 

http://youtu.be/KS1ToN-rWZw

조선의 (3)

http://youtu.be/w7wh_vqzGr8

조선의 (4)

http://youtu.be/YTGJUNI-CiY

조선의 (5)

http://youtu.be/XA_MTXo8sjY

조선의 (6)

http://youtu.be/y-rGmV9vObM

조선의 (7)

http://youtu.be/A7TgPcZwIWU

조선의 (8)

http://youtu.be/AN_4dXCwPzg

조선의 (9)

http://youtu.be/nToh-JkXNjE

조선의 (10-전편)

http://youtu.be/4HE_UYwSvlk

조선의 (10-후편)

http://youtu.be/4AmPgVjHn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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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hello님의 댓글

hello 작성일

수연 아가씨 생각하면
예나 지금이나 동백 아가씨 가 있었군요
가슴 스미는 사영
그 이유 수연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수연 어머니의 삶은
아시는 분 있으면 알려 주세요

김준경님의 댓글

김준경 작성일

김상일 박사님

박사님글을 읽으며 역사공부 많이합니다.
'왕청문사건' 은 들어봤으나 박사님글보고
우익 백색 테러로 국민부의 용서못할짓거리란것을 알게됬습니다.

더욱 미주동포 신은미 아줌마가 북 구경하고온것을 쓴책을 저도봤는데
남쪽에서 잡아간다니 이게무슨놈의 나라인가요.
하기는 멀쩡한 당(통진당)도 제멋대로 없애고 대낮에 신은미선생께도 테러를저릴러도
국민들이 가많이있으니 이게 또 어떻게된 나라인지 답답하군요.

박사님  답답한마음 박사님글로 위로라도하고 지나며
무슨좋은방도있으시면 귀뜸해주십니요.

공부많이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두만님의 댓글

박두만 작성일

신은미 선생은 지금 어떻게됬나요.
못쓸놈들 !!
박근혜가 하루라도 빨리 그자리에서 내려올 방법을
연구들 하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고약한것들!!!

산들바람님의 댓글

산들바람 작성일

오랫만에 뵙습니다.

"더 자주" 좋은 글을 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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