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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갈퉁:"통일코리아는 세계 중심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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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08-26 04:54 조회4,3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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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 한 독자는 인터네트 사이트들에 올라 온 코리아반도 문제에 대한 자료들을 보냈다. 그 주제는 세계평화학의 창시자인 요한 갈퉁(Johan Galtung) 교수가 이미 40년 전인 1972년 남과 북을 수없이 방문한 이후 "통일 코리아반도는 세계중심 국가"라고 언급한바 있었다. 그의 대한 글과 함께 러시아 고려인과 중국의 조선족에 대한 글들도 함께 여기에 게재한다.코리아 반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자료들이다.[민족통신 편집실]
 

세계 평화학의 창시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 교수는 한반도가 통일되면 “세계의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는 고마운 말씀을 40여년전인 1972년에 이미 하셨다. 그는 남-북한을 수없이 드나든 세계적인 학자로서 그의 말을 경청해 보기로 하자. 그의 지론은 다음과 같다(이하 번역문): 

“이 세상에서 그 어떤 나라도 한반도처럼 네 개의 초강대국(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에 노출된 나라는 없다. 유럽이  냉전의 소용돌이에 한 때 휩싸였다 해도 그곳에는 두 개의 강대국, 즉 미국과 러시아 밖에 없었다. 유럽엔 아시아적 요소, 즉 중국과 일본은 없었다. 

이 세상에 한반도 외엔 그 어떤 나라도, 좋던 궂던 간 에, 그렇게 많은 강대국을 잘 아는 나라는 없다. 한민족은 그들  강대국들의 언어를 알며, 그들의 정치와 문화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있으며, 그들 나라들에 누구보다도 더 많이 거주해 왔고, 또 오랜 거주경험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초강대국 체제의 정 중앙에 위치한 한국인의 입지는 그들에게 엄청난 잠재력과 가능성 그리고 장점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입지는 [8,000만 -역자 삽입] 한인들에게 중요한 세계적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분단의 고초가 비극이라고 하기 보다는 분단국이 향유하고 있는 다양성 때문에 오히려 미래에는 훨신 다행스러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이다. 남북한의 다양성이 보존되고 주민들이 상호교류하며 왕래를 할 수 있다면, 그들 서로 상이한 체제간의 자유경쟁이 그들로 하여금 보다 풍요롭고 부유하게 살 수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분단국은 상대방 체제의 장점으로부터 배울 수 있고 서로 함께 발전하며 변화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때로는 상대방 체제의 강점은 배워 가면서, 때로는 상대방 체제의 약점은 멀리하면서 말이다. (즉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장점은 택하고 단점은 멀리하면서 -번역자 주)....그리하여 자신들의 국경안에,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보다 많은 경험을 향유하는 나라들은 그들의 공동의 미래를 위하여 동원할 수 있는 지적자산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해결책인 통일된 공동의 미래가 (연합국가 단계의-역자삽임) 두 개체이든, 아니면 단일 통일국가인 (연방-역자삽입) 형태이든 간에....”(평화학회지, Journal of Peace Research, 1972년 제 4호- 번역 끝). 

분단국에서 통일로 가는 여정에서 정치 이론은 “당사자 간의 정치에서 이념을 초월”할 것을 요구한다. 즉 남북간의 국내정치와 상호관계에서 “이념의 오염”을 제거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무지몽매한 이 나라 정당(특히 새누리 당)의 지도자 들은 입만 열면 지금이 어느 때인지도 모르고, 좌-우, 하며 뒷북만 치고 있다. 이렇게 해서야 남북통일은 고사하고, 남남통일이 가능하겠는가? 

특히 갈퉁 교수는 오늘날 세계경제의 특징을 “Capi-Communism(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혼합경제)”라고 설파하고 있다. 중국도 이미 혼합경제로 가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위기를 맞고 있는 미국과 유럽도 시장경제에만 집착하는 고집과 오류를 범하지 말고 바야흐로 세계는 혼합경제를 요구하고 있다는 갈퉁 교수의 말을 경청해야 할 것이다.


[출처: 3/13/14   kookminnews.com ]


기억해야할 역사, '고려인'[친절한 통일씨] 고려인의 역사와 현재
8/17/2014           조정훈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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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에 거주 중인 고려인 동포들이 자동차를 타고 지난 7일 러시아 모스크바를 출발, 16일 MDL을 통과해 남측으로 들어왔다. [사진제공-고려인 이주 15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러시아 등지에 거주 중인 고려인 동포들이 자동차를 타고 16일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서울로 들어왔다. 지난 달 러시아에서 출발, 중앙아시아 지역을 거친 이들은 북한 지역을 거쳤으며, 부산까지 이동해 다양한 행사를 갖고 오는 24일 러시아로 돌아간다.

고려인 이주 150주년을 기념해 자동차 랠리를 하고 있는 고려인들. 우리는 일제 강점기와 분단의 아픔을 지닌 재외동포하면 재일 동포들만 떠오르기 마련이지만, 고려인들의 삶도 그에 못지 않다.

러시아 등지 이주 역사 150년을 간직한 고려인들의 역사와 현재 삶을 들여다보자. 여기서 1937년을 기점으로 이전은 조선인, 이후는 고려인으로 표기한다.

고려인의 이주 역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16세기 러시아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579년 러시아 동진정책으로 스트로가노프 일가가 우랄산맥 동쪽 지역 개발을 위해 동쪽으로 이동해 왔다.

그리고 1581년 예르마크가 시베리아의 시빌칸국을 공격, 1584년 트볼스크시를 건설했으며, 1653년 흑룡강 연안에서 청나라와 맞닥뜨렸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요청, 조선인과 러시아인이 처음 마주했다.

청.러 간 네르친스크조약(1689년)으로 국경선이 확정된 이후, 러시아는 1860년 연해주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했다. 1863년 당시 조선인들이 러시아에 처음 이주, 연해주 포세트지역 조선인 13가구가 최초기록이다. 일각에서는 홍경래 난 당시인 1811년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그러나 1863년 본격적인 이주가 됐다는 점에서 고려인 이주 역사를 150년으로 보고 있다.

가난을 벗고 항일 투쟁을 위한 고려인의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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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0년대에 러시아로 이주한 고려인 가족. 고려인들은 1963년 가난을 탈피해 본격적으로 러시아로 이주했다. [사진출처-동북아평화연대]
1860년 최초로 기록된 고려인 이주 역사의 시작은 1863년 러시아 연해주로의 본격적인 이주로 이어진다. 1867년 당시 기록에 의하면, 러시아 이주 조선인은 185가구, 999명이다.

그러다 1869년 조선 동북지역의 극심한 흉작으로 대기근이 일어나자 러시아로 이주하는 고려인들이 대거 늘어나, 1만여 명으로 기록된다.

여기에 조.러 수교통상조약(1884)은 조선인의 연해주 지역 이주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갑신정변,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 등으로 조선을 둘러싼 정세가 급박하던 시기, 아관파천(1896)으로 친러내각이 조직, 조선인들의 러시아 이주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됐다. 1902년 당시 러시아 이주 조선인은 3만 2천 380명이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조선인들의 러시아행 '디아스포라'가 이어졌다. 또한, 의병들이 러시아를 근거지로 삼고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운동 거점이 되면서 러시아 내 조선인들의 숫자는 꾸준히 늘어갔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사할린 지역으로 강제 징용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 반일 민족해방운동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은 홍범도, 이동휘 등이다.

기록에 의하면, 1908년 총 1천4백 여건의 의병활동에 6만 9천 8백여 명이 동참했다. 1914년 조선인은 6만 3천여 명으로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연해주와 우랄산맥 근처 오바강 유역까지 퍼져나갔다.

그러나 러시아의 반한인법 선포(1909), 일본군의 연해주 점령(1918), 신한촌사건(1920) 등은 러시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 고통을 줬다.

하지만 1922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등으로 이루어진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소련) 설립으로 일본군이 연해주에서 철수, 1923년 공식적으로 10여 만명이 거주했으며, 실제 25만여 명이 살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제이주정책의 슬픔을 안은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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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소련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이동한 고려인들이 생활한 집. [사진출처-고려인돕기운동본부]
일본의 침략전쟁이 본격화되던 1930년대. 소련 정부는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들이 일본의 간첩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이에 소련 정부는 1937년 '명령번호 1428-326'를 발표한다. '1428-326'은 '연해주 극동국경지역 거주 모든 한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아랄해, 발하쉬 호수 및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으로 이주시킨다'는 강제이주정책을 골자로 하고 있다.

'1428-326'은 △1938년 1월 1일까지 추방 작업 종결, △국가철도의 기차편 제공, △이주경로, 출발 이주자 수, 도착 이주자 수, 해외 이주자 수 등 10일마다 보고 등 구체적 이주방안을 담았다.

결국, 17만 여 명의 고려인들은 우즈베키스탄(7만6천여 명), 카자흐스탄(9만5천여 명)으로 한 달 여 동안 추운 겨울 124대의 화물철도를 타고 6천km를 이동해야만 했다.

강제이주정책은 수많은 사망자를 낳기도 했다. 고려인 인텔리와 군 장교 등 민족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2천 8백 여명이 강제이주정책을 반대할 수 있다는 우려로 처형됐다.

그리고 이동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홍역이 번져 60% 이상 사망했으며, 이주 이후에는 추위와 배고픔, 풍토병 등으로 수많은 고려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사망자수는 2만 여명으로,1938년 인구표본조사 결과 1천명 당 42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됐다.



40년 가까이 살던 연해주를 떠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지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의 삶은 궁핍 그 자체로 표현된다. 황무지였던 지역에 버려지다시피한 고려인들은 1953년까지 집단수용소에서 생활해야 했다.

이들에게는 민족교육이 금지됐고, 취학과 국가기관 취업에도 제약이 있었다. 결국, 대다수 고려인들은 황무지를 개간해 농업에 종사했다.

하지만 고려인들의 노력은 가히 놀라웠다. 쌀 생산지역이 아닌 우즈베키스탄이 주요 쌀농사 지역으로 탈바꿈하고, 목화 농장이 늘어나는 등 소련의 대표적 콜호즈(집단농장)로 손꼽혔다. 그리고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 소련에서도 인정받는 땅의 주인으로 자리잡았다.

소련 해체..고려인의 또 다른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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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연해주 한민족문화학교의 고려인 아이들. [사진출처-동북아평화연대]
1991년 소련이 붕괴됐다. 소련 해체로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 독립국가들이 생겨났고 소련 정착에 성공한 고려인들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농업발전과 교육열로 지식인을 대거 배출한 고려인들은 소련 해체 이후 2등 국민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소련 체제 하에서 2등 국민은 고려인과 중앙아시아인들로 동등한 위치였지만, 독립국가 건설 이후 원주민이던 중앙아시아인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특히, 우즈베크, 카자흐, 타지크, 키르기스오, 투르크멘 등 대표적인 민족은 이슬람교도들로 러시아어가 아닌 자국어를 사용하고, 탈러시아 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 이민족 배척 및 추방운동이 펼쳐져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은 러시아 시베리아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언어와 배타적 민족주의에 밀려난 고려인들은 러시아로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3년 러시아 연방정부가 명예회복법안을 통과시켜 고려인들이 러시아로 재이주했다.

1995년 당시 조사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고려인 중 7천 5백여 명이 돌아왔으며, 이중 대다수는 북한과 국경지대인 연해주로 이주했다.

2013년 현재 러시아에 거주 중인 고려인은 7만 8천여 명으로, 연해주에만 2만 9천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고려인의 현재 그리고 기억해야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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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집성촌 '나보이마을'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 [사진출처-고려인돕기운동본부]
러시아에서 중앙아시아로 다시 러시아로 돌아온 고려인들 그리고 현재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의 삶은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중앙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자마자 그들만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공용어이던 러시아어를 자신들의 민족어로 바꿨다. 그리고 러시아 중심의 역사를 자신들만의 역사로 기록했다.

여기에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바뀌면서 물가상승, 실업증가, 부의 분배 등 사회문제가 대두됐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쉽게 중앙아시아인과 동화될 수 없었고,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러시아로 돌아간 고려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러시아의 명예회복법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경제악화로 고려인들의 일자리는 줄어들었고, 극심한 인종차별문화로 고려인들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150년의 이주 역사를 지닌 고려인들, 그리고 2, 3세들에게는 '나는 누구인가', '나의 조국은 어디인가'라는 물음을 안고 살아야 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유대인, 폴란드인 등이 2차 대전 이후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던 것처럼 한반도로 돌아올 수 없었다.

이들은 남이냐 북이냐는 이데올로기적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고, 또한 이들을 받아줄 곳은 남북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려인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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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 인근 고려영진의 정부 고려군들이 주둔했던 지역에서 이름이 유래한 고려영. 우리 선조의 마을은 동북은 물론이고 푸젠까지 있다


지난 천년 동안 중국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은 나에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역사를 접하면서 나는 시간 차에 따라 중국 땅에 정착한 이들을 만났다. 이제는 아무런 흔적조차 없는 신라방, 지명만으로 남아있는 고려영(高麗營)이나 고려보(高麗堡) 같은 마을들을 만난다. 반면에 우리 말조차 잃었지만 중국에는 없는 성씨라 국적을 회복한 박씨촌(朴氏村)의 주민도 있다. 

하지만 중국 속에 가장 넓게 존재한 우리나라 사람은 흔히 '조선족'으로 불리는 '중국 동포'들이다. '중국 동포'들의 고향은 만주다. 만주는 고구려 이후 한민족이 거주하기 쉽지 않았다. 강희 7년인 1668년, 이곳이 청나라가 발생한 신성한 지역이라고 해서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는 봉금령이 실시됐다. 청나라가 강성할 때는 출입조차 어려웠지만 대기근이 들었던 1869년 기사년 재해 이후 우리 민족들이 하나둘씩 만주로 생활 영역을 넓혔다. 

이후 3년간 이곳에서 건너간 사람이 6만 명이고 그 가운데 함경북도에서 넘어간 사람이 2만6000명으로 전한다. 이후 우리 유민과 중국인들의 마찰을 막기 위해 간도(間島)라는 지명을 만들었다. 한민족의 만주 유입은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더욱 빨라졌다. 수많은 이들이 일제의 치하에 들어간 우리 땅을 벗어나 만주 등 중국에 건너왔다. 

당시에 일본은 GDP도 조선의 수십배였고, 치밀한 정보전을 통해 일거에 한반도를 장악했다. 뜻있는 이들은 초반기에 제거의 대상이 됐고, 그것을 아는 많은 이들이 중국을 해방의 근거지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 역시 만주사변(1931년)을 거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중일전쟁(1937년 7월) 이후에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1945년 해방은 만주에서 살아가던 많은 우리 민족에게 변화의 시간이었다. 많은 이들이 짐을 꾸려 고향에 내려갔지만 그에 못지 않은 이들이 동북에 남았다. 주로 많이 남은 이들은 대기근 이후에 이곳으로 건너온 이북 출신이었다. 이들은 휴경지와 같았던 이곳에 벼농사 등 새로운 생산기반을 만들어 나름대로 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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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조선족 자치주의 작업을 한 주덕해 기념비
 주덕해는 우리 민족의 항일운동 등의 공적을 인정받아 조선족 자치주의 초기 작업을 했다. 문화, 교육의 터전을 닦았다


한반도는 복잡한 정세, 중국도 마찬가지

해방 후 한반도는 복잡한 정세의 연속이었고,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1949년 공산화되기까지 복잡한 형세가 지속됐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 있었다. 초대 연변조선족 자치주 주장을 지낸 주덕해(朱德海)다. 주덕해는 공산화 전부터 우리 민족 예술을 부흥시키는 문공단을 만드는 것을 비롯해 교육·언론·농업 등에서도 독자적인 기구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다. 문공단은 후에 '연변가무단'이 됐고, 동북조선인민대학은 '연변대학'이 됐다. 

당시 인구로 보거나 정치적 지형으로 보거나 자치구의 성립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1921년부터 1982년까지 길림성에서 희생된 3만6천 명의 열사 가운데, 연변 열사가 1만4756명이고, 그 가운데서도 1만3843명이 조선족이었다. 무려 93.8%다. 조선족의 숫자가 당시에 100여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족 자치구의 성립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중국 혁명 열사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인 주덕해 주장이 문화대혁명에 후베이성으로 피신했다가 비극적으로 숨을 거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 현대사도 만신창이였다. 대약진으로 인한 기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포함된 문화대혁명 등은 조선족 사회에도 큰 시련이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총을 들고 무장투쟁을 한 유일한 소수민족이었다. 그만큼 조선족 사회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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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산문 중국은 장백산으로 표시하고 있다. 한자 위에 한글로 표기한 것도 지워버렸다. 사진은 7년여전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해방 당시 100만 명 가량이던 조선족 인구는 200만 명 가량으로 늘었다. 동북 뿐만 아니라 연해지방은 물론이고 네이멍구, 깐수 등 서북부 지역까지 넓게 분포했다. 조선족은 언어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문화를 유지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다. 또한 중국 정협 부주석을 지낸 조남기 장군을 비롯해, 소수민족 사업을 총괄하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이덕수 주임(장관급), 중국 공군을 세운 인물 중에 하나인 이영래 공군 중장, 락스타 최건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이런 동포사회에 가장 큰 격랑은 1992년 한중수교였다. 한중수교로 우리 기업의 중국 진출이 봇물을 이루자 한국어와 중국어가 능숙한 동포들의 쓰임이 많아졌다. 대도시로의 급속한 이주가 시작됐다. 친척 방문 등의 방식으로 한국으로도 급속한 인구 유입이 진행됐다.

200만 명의 동포 대부분이 동북3성에 거주했는데, 20여년만에 그 인구는 1/3 수준으로 떨어졌다. 부모가 떠난 자리를 조부모가 대신하는 조손가정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한국어를 가르치던 조선족 학교도 급속히 폐교되어 갔다. 중국 내 문맹률이 가장 낮았고, 교육과 과학쪽을 주도하던 동포의 세력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취재 중에 만난 중국 동포 가운데 잊을 수 없는 분이 있다. 중국 공산당학교 교수를 지낸 최용수 교수가 바로 그분이다. 최 교수를 만난 것은 '나를 사로잡은 조선인 혁명가 김산'(KBS 스페셜)의 현지 코디네이션을 맡으면서다. 취재진은 최 교수님을 인터뷰했고, 개인적으로 '한락연'에 관심을 가져보라는 말과 최 교수님이 정리한 '한락연' 회고집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2008년 귀국 후 시간을 두고 연락을 했다가, 최용수 교수의 부음을 들었다. 통화를 하는 사모님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최 교수의 죽음은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고, 평상시 그가 심혈을 모아서 수집했던 자료에 관심을 갖던 한국인이 하나도 찾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장례를 치렀다는 소식 때문이다. 최  교수는 아픈 몸을 이끌고 한국 답사단의 옌안(延安) 답사에 동행해 주었고, 결국 한국에서 강연하다가 쓰러졌다. 거의 저승 문턱까지 다녀온 몸으로 중국에 돌아와 투병했지만, 2008년 8월 끝내 세상을 떠났다. 나 역시 뒤늦게 부음을 듣고, 그를 기리는 기사 한편 쓴 것이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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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양의 한국인 거리 서탑 선양은 동포들이 많이 있는 랴오닝의 중심도시로 일찍부터 한국 문화가 발달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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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교육수준이나 능력에서 탁월한 힘 보여

20여년의 시간은 중국 동포들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들은 한국과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이나 유럽 등 어디를 가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보유하게 됐다. 가사 도우미나 식당, 막노동 판 세계에서 동포들을 만나는 일은 이제 쉽지 않다. 그리고 우리 곁에 당당하게 자리한 젊은이들도 있다. '위대한 탄생'을 통해 부각된 백청강과 축구선수 백자건 등이 그들이다. 200만 밖에 안되는 소수민족 중 하나지만 조선족은 교육수준이나 능력에서도 중국에서 탁월한 힘을 보였다. 

중국 동포들의 삶은 현대판 디아스포라라 할 만큼 역동적이었다. 특히 지난 20년간은 그 변화가 너무 컸다. 200만 명의 중국 동포가 살기에 중국은 너무 크다. 때문에 지금은 모두 섬처럼 살면서 한족 문화에 편입되어 가고 있다. 중국 동포 사회에서 그들을 묶을 수 있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는 분들을 봤다. 중앙민족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공을 들이던 황유복 교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그렇다. 이들은 베이징 등 대도시에서 동포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중국의 각 지역은 물론이고, 세계로 흩어진 그들은 모으기는 쉽지 않다. 만약 한국이 오기전에 중국 정치나 경제, 문화, 과학 등에서 중국 동포들의 역량이 온전히 남아있다면 지금 중국 동포가 차지하는 위상과는 확연하게 다를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한중 수교 이후 중국 동포사회에 들어온 한국이라는 인자가 '독'인지 '약'인지를 섣부르게 판단내리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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