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갈퉁:"통일코리아는 세계 중심국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08-26 04:54 조회4,314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민족통신 한 독자는 인터네트 사이트들에 올라 온 코리아반도 문제에 대한 자료들을 보냈다. 그 주제는 세계평화학의 창시자인 요한 갈퉁(Johan Galtung) 교수가 이미 40년 전인 1972년 남과 북을 수없이 방문한 이후 "통일 코리아반도는 세계중심 국가"라고 언급한바 있었다. 그의 대한 글과 함께 러시아 고려인과 중국의 조선족에 대한 글들도 함께 여기에 게재한다.코리아 반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자료들이다.[민족통신 편집실]
세계 평화학의 창시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 교수는 한반도가 통일되면 “세계의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는 고마운 말씀을
40여년전인 1972년에 이미 하셨다. 그는 남-북한을 수없이 드나든 세계적인 학자로서 그의 말을 경청해 보기로 하자. 그의 지론은 다음과
같다(이하 번역문):
“이 세상에서 그 어떤 나라도 한반도처럼 네 개의 초강대국(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에 노출된 나라는 없다. 유럽이 냉전의 소용돌이에 한 때 휩싸였다 해도 그곳에는 두 개의 강대국, 즉 미국과 러시아 밖에 없었다. 유럽엔 아시아적 요소, 즉 중국과 일본은 없었다. 이 세상에 한반도 외엔 그 어떤 나라도, 좋던 궂던 간 에, 그렇게 많은 강대국을 잘 아는 나라는 없다. 한민족은 그들 강대국들의 언어를 알며, 그들의 정치와 문화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있으며, 그들 나라들에 누구보다도 더 많이 거주해 왔고, 또 오랜 거주경험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초강대국 체제의 정 중앙에 위치한 한국인의 입지는 그들에게 엄청난 잠재력과 가능성 그리고 장점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입지는 [8,000만 -역자 삽입] 한인들에게 중요한 세계적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분단의 고초가 비극이라고 하기 보다는 분단국이 향유하고 있는 다양성 때문에 오히려 미래에는 훨신 다행스러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이다. 남북한의 다양성이 보존되고 주민들이 상호교류하며 왕래를 할 수 있다면, 그들 서로 상이한 체제간의 자유경쟁이 그들로 하여금 보다 풍요롭고 부유하게 살 수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분단국은 상대방 체제의 장점으로부터 배울 수 있고 서로 함께 발전하며 변화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때로는 상대방 체제의 강점은 배워 가면서, 때로는 상대방 체제의 약점은 멀리하면서 말이다. (즉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장점은 택하고 단점은 멀리하면서 -번역자 주)....그리하여 자신들의 국경안에,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보다 많은 경험을 향유하는 나라들은 그들의 공동의 미래를 위하여 동원할 수 있는 지적자산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해결책인 통일된 공동의 미래가 (연합국가 단계의-역자삽임) 두 개체이든, 아니면 단일 통일국가인 (연방-역자삽입) 형태이든 간에....”(평화학회지, Journal of Peace Research, 1972년 제 4호- 번역 끝). 분단국에서 통일로 가는 여정에서 정치 이론은 “당사자 간의 정치에서 이념을 초월”할 것을 요구한다. 즉 남북간의 국내정치와 상호관계에서 “이념의 오염”을 제거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무지몽매한 이 나라 정당(특히 새누리 당)의 지도자 들은 입만 열면 지금이 어느 때인지도 모르고, 좌-우, 하며 뒷북만 치고 있다. 이렇게 해서야 남북통일은 고사하고, 남남통일이 가능하겠는가? 특히 갈퉁 교수는 오늘날 세계경제의 특징을 “Capi-Communism(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혼합경제)”라고 설파하고 있다. 중국도 이미 혼합경제로 가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위기를 맞고 있는 미국과 유럽도 시장경제에만 집착하는 고집과 오류를 범하지 말고 바야흐로 세계는 혼합경제를 요구하고 있다는 갈퉁 교수의 말을 경청해야 할 것이다. [출처: 3/13/14 kookminnews.com ]
하지만 중국 속에 가장 넓게 존재한 우리나라 사람은 흔히 '조선족'으로 불리는 '중국 동포'들이다. '중국 동포'들의 고향은 만주다. 만주는 고구려 이후 한민족이 거주하기 쉽지 않았다. 강희 7년인 1668년, 이곳이 청나라가 발생한 신성한 지역이라고 해서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는 봉금령이 실시됐다. 청나라가 강성할 때는 출입조차 어려웠지만 대기근이 들었던 1869년 기사년 재해 이후 우리 민족들이 하나둘씩 만주로 생활 영역을 넓혔다. 이후 3년간 이곳에서 건너간 사람이 6만 명이고 그 가운데 함경북도에서 넘어간 사람이 2만6000명으로 전한다. 이후 우리 유민과 중국인들의 마찰을 막기 위해 간도(間島)라는 지명을 만들었다. 한민족의 만주 유입은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더욱 빨라졌다. 수많은 이들이 일제의 치하에 들어간 우리 땅을 벗어나 만주 등 중국에 건너왔다. 당시에 일본은 GDP도 조선의 수십배였고, 치밀한 정보전을 통해 일거에 한반도를 장악했다. 뜻있는 이들은 초반기에 제거의 대상이 됐고, 그것을 아는 많은 이들이 중국을 해방의 근거지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 역시 만주사변(1931년)을 거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중일전쟁(1937년 7월) 이후에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1945년 해방은 만주에서 살아가던 많은 우리 민족에게 변화의 시간이었다. 많은 이들이 짐을 꾸려 고향에 내려갔지만 그에 못지 않은 이들이 동북에 남았다. 주로 많이 남은 이들은 대기근 이후에 이곳으로 건너온 이북 출신이었다. 이들은 휴경지와 같았던 이곳에 벼농사 등 새로운 생산기반을 만들어 나름대로 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해방 후 한반도는 복잡한 정세의 연속이었고,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1949년 공산화되기까지 복잡한 형세가 지속됐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 있었다. 초대 연변조선족 자치주 주장을 지낸 주덕해(朱德海)다. 주덕해는 공산화 전부터 우리 민족 예술을 부흥시키는 문공단을 만드는 것을 비롯해 교육·언론·농업 등에서도 독자적인 기구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다. 문공단은 후에 '연변가무단'이 됐고, 동북조선인민대학은 '연변대학'이 됐다. 당시 인구로 보거나 정치적 지형으로 보거나 자치구의 성립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1921년부터 1982년까지 길림성에서 희생된 3만6천 명의 열사 가운데, 연변 열사가 1만4756명이고, 그 가운데서도 1만3843명이 조선족이었다. 무려 93.8%다. 조선족의 숫자가 당시에 100여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족 자치구의 성립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중국 혁명 열사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인 주덕해 주장이 문화대혁명에 후베이성으로 피신했다가 비극적으로 숨을 거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 현대사도 만신창이였다. 대약진으로 인한 기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포함된 문화대혁명 등은 조선족 사회에도 큰 시련이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총을 들고 무장투쟁을 한 유일한 소수민족이었다. 그만큼 조선족 사회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동포사회에 가장 큰 격랑은 1992년 한중수교였다. 한중수교로 우리 기업의 중국 진출이 봇물을 이루자 한국어와 중국어가 능숙한 동포들의 쓰임이 많아졌다. 대도시로의 급속한 이주가 시작됐다. 친척 방문 등의 방식으로 한국으로도 급속한 인구 유입이 진행됐다. 200만 명의 동포 대부분이 동북3성에 거주했는데, 20여년만에 그 인구는 1/3 수준으로 떨어졌다. 부모가 떠난 자리를 조부모가 대신하는 조손가정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한국어를 가르치던 조선족 학교도 급속히 폐교되어 갔다. 중국 내 문맹률이 가장 낮았고, 교육과 과학쪽을 주도하던 동포의 세력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취재 중에 만난 중국 동포 가운데 잊을 수 없는 분이 있다. 중국 공산당학교 교수를 지낸 최용수 교수가 바로 그분이다. 최 교수를 만난 것은 '나를 사로잡은 조선인 혁명가 김산'(KBS 스페셜)의 현지 코디네이션을 맡으면서다. 취재진은 최 교수님을 인터뷰했고, 개인적으로 '한락연'에 관심을 가져보라는 말과 최 교수님이 정리한 '한락연' 회고집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2008년 귀국 후 시간을 두고 연락을 했다가, 최용수 교수의 부음을 들었다. 통화를 하는 사모님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최 교수의 죽음은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고, 평상시 그가 심혈을 모아서 수집했던 자료에 관심을 갖던 한국인이 하나도 찾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장례를 치렀다는 소식 때문이다. 최 교수는 아픈 몸을 이끌고 한국 답사단의 옌안(延安) 답사에 동행해 주었고, 결국 한국에서 강연하다가 쓰러졌다. 거의 저승 문턱까지 다녀온 몸으로 중국에 돌아와 투병했지만, 2008년 8월 끝내 세상을 떠났다. 나 역시 뒤늦게 부음을 듣고, 그를 기리는 기사 한편 쓴 것이 고작이었다.
조선족, 교육수준이나 능력에서 탁월한 힘 보여 20여년의 시간은 중국 동포들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들은 한국과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이나 유럽 등 어디를 가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보유하게 됐다. 가사 도우미나 식당, 막노동 판 세계에서 동포들을 만나는 일은 이제 쉽지 않다. 그리고 우리 곁에 당당하게 자리한 젊은이들도 있다. '위대한 탄생'을 통해 부각된 백청강과 축구선수 백자건 등이 그들이다. 200만 밖에 안되는 소수민족 중 하나지만 조선족은 교육수준이나 능력에서도 중국에서 탁월한 힘을 보였다. 중국 동포들의 삶은 현대판 디아스포라라 할 만큼 역동적이었다. 특히 지난 20년간은 그 변화가 너무 컸다. 200만 명의 중국 동포가 살기에 중국은 너무 크다. 때문에 지금은 모두 섬처럼 살면서 한족 문화에 편입되어 가고 있다. 중국 동포 사회에서 그들을 묶을 수 있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는 분들을 봤다. 중앙민족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공을 들이던 황유복 교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그렇다. 이들은 베이징 등 대도시에서 동포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중국의 각 지역은 물론이고, 세계로 흩어진 그들은 모으기는 쉽지 않다. 만약 한국이 오기전에 중국 정치나 경제, 문화, 과학 등에서 중국 동포들의 역량이 온전히 남아있다면 지금 중국 동포가 차지하는 위상과는 확연하게 다를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한중 수교 이후 중국 동포사회에 들어온 한국이라는 인자가 '독'인지 '약'인지를 섣부르게 판단내리기 어렵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