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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2]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br><br>뉴욕근교 지창보 박사 회고록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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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4-03 15:27 조회2,6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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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로이드 하버=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뉴욕 시내서 40여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헌팅톤 옆에 있는 로이드 하버시(Lloyd Harbor)에 위치한 지창보 박사댁을 방문했다.2에이커(약 3,500평) 정도 되는 지창보 박사의 주택은 1층과 2층 구석구석에 그림들로 가득차 있었다. 대부분은 그의 그림들이다. 그는 사회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수십년 미국대학에서 강의를 해온 분으로 한국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운동에 참여해 왔던 인물인데 그의 취미로 한 그림공부(수묵화와 동양화=조선화)도 전문화가의 수준으로 인정받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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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2]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뉴욕근교 지창보 박사 회고록 집필




<##IMAGE##> [뉴욕 로이드 하버=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뉴욕 시내서 40여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헌팅톤 옆에 있는 로이드 하버시(Lloyd Harbor)에 위치한 지창보 박사댁을 방문했다.

2에이커(약 3,500평) 정도 되는 지창보 박사의 주택은 1층과 2층 구석구석에 그림들로 가득차 있었다. 대부분은 그의 그림들이다. 그는 사회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수십년 미국대학에서 강의를 해온 분으로 한국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운동에 참여해 왔던 인물인데 그의 취미로 한 그림공부(수묵화와 동양화=조선화)도 전문화가의 수준으로 인정받아 왔다.

지창보 박사는 내년이면 만 90세가 된다. 그런데도 요즘에 일주일에 2~3번 롱아이랜드 대학의 코리아센터(Korea Center)의 소장으로 활약하면서 후진들을 위해 우리나라 문화홍보사업을 해 왔다. 전통음악, 무용, 피아노와 영화 소개, 판소리 등을 미 주류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해 왔다고 근황을 말한다.

지창보 박사는 이 자택에서 산지가 40년이 넘는다. 2층저택에서 혼자살고 있다. 그는 90세가 되는 숫총각이다. 왜냐하면 결혼도 않하고 혼자 살아온 것이 이유이기도 하지만 1945년 11월 북에서 서울로 유학 갈 때 단신으로 왔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은 모두 북녘에 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남녘에서 1953년 2월 미국으로 올때도 그랬지만 미국에 와서도 삶의 모든 것을 혼자 꾸려나가야 했다.

*3년전에 뇌출혈로 1개월이상 병원신세


<##IMAGE##> 3년전에 갑작스런 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던 사실도 아주 뒤늦게 알려졌었다. 2009년 2월에 뇌출혈로 오른쪽 목덜미에 있는 동맥을 수술하느라고 1개월 이상 병원신세를 지느라고 치료하는 시간으로 소일했었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왼쪽 팔이 저리고 약간의 마비증세를 보여왔다고 밝힌다. 그는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다고 하면서 그 이후 생활을 설명해 준다.

금년 2012년 용의 해를 맞아 조그만한 달력을 만들어 다달히 넘기는 한페지 한페지에 자신의 그림들을 넣어 인쇄하여 친지들에게 돌렸다고 말하면서 기자에게 서너부를 선물로 준다.

맨 앞페지에는 “문화는 한 나라와 그 민족의 혼이며, 인간과 인간관계에 있어서나 나라와 나라사이에서나 서로의 혼과 심정의 상호이해, 그리고 존경에서 진정한 연관관계가 가능하다는 신념으로 우리의 문화를 미국내에서 소개 진흥하는 일에 미약하나마 공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적생활에 있어서는 틈틈히 기회있는 대로 취미로 그림창작에도 힘쓰고 있다. 형제중 3남매이므로 <<삼석>>이라는 호를 쓰기도 한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는 1963년 네바다(노스 캐롤라이나)에서 생활할 때 한 미국인 동표가 수목화, 동양화를 한다고 하여 붓으로 나름대로 그리고 쓰고 하는 것을 보면서 습작을 하게 되었고, 그이후 그림관련 도서들을 구해 혼자 공부를 했다. 그러던 과정에서 중국인들의 그림관련 도서도 보며 독학을 하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동안 주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우리 동포들은 모를수도 있다고 돌이켜 보면서 “지금까지 열번 정도 전시회를 했는데 한번 할때마다 약 40여 작품들을 소개했다.”고 밝힌다.

지창보 박사는 “시는 그림이 없는 그림이고, 그림은 문자가 없는 시”라고 정의하면서 양면을 결합하기 위한 작업도 해 왔다고 일가견을 피력한다. 그의 취미생활에 대해 기자는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어 그의 주택 방마다 걸려있는 혹은 놓여있는 그림들을 한바뀌 돌며 감상했다. 지 박사는 사회학자인 동시에 훌륭한 화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최근의 생활상을 물었다. 그는 “요즘에는 대학연구소에 3번가량 나가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집에서 9시쯤 일어나 뉴욕타임스 읽고, 커피한잔과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회고록을 집필중이다. 지금 태어나서 10대소년기를 쓰고 있는 중인데 금년내로 마칠 생각이다. 또 하나는 내가 그린 그림들을 모아서 그리고 시간이 나면 뜰에 있는 땅에 야채도 심어 키우고, 잔뒤도 깎고 그리고 수묵화 등 그림도 그리며 인생 말년을 조용히 보내고 있다”고 말한다.

*90세 된 숫총각...사연은 무엇일까?


<##IMAGE##> 지창보 박사와 대담을 하는 동안 “왜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왔을까?”하는 것이 무척궁금하여 조심스럽게 여쭈어 보았다.

그는 우스며 “공부하고, 혼자 삶을 엮어 나가다 보니 그렇게 세월이 흐르도록 장가를 못갔다.”고 대답하면서 그 동안 두분의 여성과 짧은 만남은 있었으나 그것이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한 사연들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코리아 전쟁시기에 부산으로 피난을 갔을 때 한 여성과 짧은 데이트(연애)를 하였는데 그 여성이 먼저 유학을 갔다. 그래서 미국가서도 켄터키주에서 학교다니던 그분과 전화로 서로 대화관계를 가졌으나 한국으로 들어가 이화여대에서 교수직을 해야할 형편이라 서로 인연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한분은 1994년 문익환 목사가 돌아가신 날이후 100일제가 되어 한국으로 간적이 있는데 그 때 옛날에 교제하던 한 여성을 만나게 되었는데 어떤일로 그분이 장님이 되어버려서 서로 인연이 되지 못한 일이 있었다.”고 서슴없이 고백해 준다.

지창보 박사는 외롭게 미국생활을 하면서도 언제나 북녘의 혈육들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1971년 최초로 방북하여 가족들을 만나고 온 이후 1974년, 1980년대, 2005년, 2006년 다시 방북하여 가족들을 만났다.

기자가 2006년 4월 평양에서 지창보박사 가족 26명이 상봉하는 장면을 취재하여 보도한바 있었다. 그 해 4월 16일 평양에서 여동생 지창도, 지창옥 등 그 배우자들, 손자손녀 등 무려 26명의 혈육들을 한거번에 만났다. 그 동안 몇차례 방북하여 혈육들을 만났지만 이번처럼 조카들을 포함해 모든 가족을 한꺼번에 상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2006년 4월 26명 가족들과 상봉행사에 재미동포들 약간명도 참석


<##IMAGE##> 이날 지창보 박사의 가족행사장에는 재미동포 유태영 목사, 이종천 우리여행사 사장, 우륵교향악단 리준무 단장겸 지휘자, 그리고 필자도 초청받았다. 그 행사장에서는 지박사의 막내 여동생 창도씨가 내일이면 미국으로 다시 떠날 오빠에게 바치는 애틋한 장시를 암송했다.손주뻘인 중학생 진향이와 진애는 깜직한 노래와 춤으로 잠시 숙연해졌던 분위기를 띄웠다.아쉬운 작별에 앞서 지 박사와 가족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며 애써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북녘의 가족들을 모두 만난 이후 지창보 박사는 새로운 인생을 사는 듯 활기에 넘쳐 있었다.

그는 당시 “평양에서 난생 처음 본 조카들은 다행히도 의사와 치과의사, 도서관 주임, 광산 연구사, 간호원 등 전문직종에 일하며 잘 지내고 있더군요. 건강이 허락할 때 어서 빨리 통일이 돼 그리운 가족들의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어야 할텐데….”라고 간절한 마음을 피력했다.

당시 팔순을 훌쩍 넘긴 지 박사의 목소리에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 찬 표정이었다. 이날 평양대극장 구내식당 별관에서 열린 가족 모임에는 평남 평원과 순천 웅산 숙현 등지에서 모인 일가족이 모여 노래와 춤을 함께 하며 상봉을 자축했다. 그러면서도 그날 작별할 때는 서로들 너무나 아쉬운 표정이었고, 헤어지기 싫어하는 슬픈 표정들이었다.

지창보 박사, 그의 생애 발자취


<##IMAGE##> 지창보 박사 일가의 슬픈 가족사는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3년 5월23일생(그는 지금 그의 생일이 11월28일이 정확한 것으로 생각)으로 남측 호적에 되어 있는 실제로는 다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평양의 광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청운의 꿈을 안고 194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중앙대 예과를 다니던 중 학도병에 징집되자 청년 지창보는 도주를 결심했고 일본경찰의 수배를 피해 쫓겨 다니게 된다.

1945년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해방이 됐다. 그해 11월 일본에서 진남호를 타고 부산에 내려 이미 38선이 갈린 상황에서 임진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갔다. 가까스로 평양에 도착한 지창보는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가족들을 찾기 위해 매일 평양역전을 어슬렁 거렸다.

"하루는 뒤에서 "창보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돌아보니 고모였습니다. 그 뒤에 어머니가 계셨구요. 어머니도 해방이 되자 고모와 매일같이 이곳에 나와 저를 기다리셨던거죠."

극적으로 어머니와 재회한 지창보는 그러나 못다한 공부를 마치기 위해, 그리고 어머니가 나를 억지로 장가를 보내려고 하여서 그것을 피하는 목적도 있고하여 가족과 만난 날로 계산하면 단 열흘 만에 다시 서울로 내려갔다.

연희전문 재학 중 국대안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주모자로 지목돼 퇴학을 당했고 한성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다가 세브란스 병원서 선교사 일을 도와준 인연으로 코리아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 2월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IMAGE##> 그가 일본-북한-남한-미국으로 인생유전을 겪는 동안 고향에 남았던 어머니와 남동생들은 1951년 전쟁통에 미군의 폭격을 받고 사망했다.다행히 여동생들인 창옥씨와 창도씨는 화를 면했다.

듀크대에서 사회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지창보 박사는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웨이크 포리스트대와 뉴저지주 드루대 교수를 거쳐 1966년부터 롱아일랜드대 사회학과 교수로 30년 넘게 재직했다.

70년대 초반 뉴욕에서 이미 고인이 된 서정균씨와 임창영씨, 시인 고원씨, 치과의사 로광욱 박사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시작한 지창보 박사는 이후 김운하 신한민보 등과 한민련 활동과 양은식 박사등과 범민련 활동에 참여하였고, 선우학원 박사와는 통일심포쥼 등 줄곳 통일운동 진영에 몸을 담아 왔다.

지창보 박사는 최근에는 누구와 주로 소통하느냐고 묻자, 그는 최익환 박사와 강희조 목사 정도이고 주로 롱아이랜드 대학 코리아센터 관계자들과 친교하는 정도라고 말한다.

그는 대담을 마치고 헤어지는 필자와 우리일행(리준무 선생과 그의 부인 전화심 여사)에게 먼곳을 찿아주어서 감사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해주었다.

*지창보 박사의 연락처: 631-423-253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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