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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통일운동 어른으로 전환한 정보원 출신 박기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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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9-01-23 09:55 조회3,9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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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이남 정부의 정보원 출신인 박기식 선생(80)은 지난 날들을 돌이켜
보며 "분단안보"가 아니라 "민족안보"로 사는 길이 올바른 삶이라고 강조하는 양심인으로 돌아섰다. 그의 발자취,
그의 가치관, 그의 통일관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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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전 정보원 출신 박기식 선생은 말한다

<정보원들은 "분단안보"가 아니라 "민족안보"에 기여하라>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이남 정부의 정보원 출신인 박기식 선생(80)은 지난 날들을 돌이켜 보며 "분단안보"가 아니라 "민족안보"로 사는 길이 올바른 삶이라고 강조하는 양심인으로 돌아섰다. 그의 발자취, 그의 가치관, 그의 통일관은 무엇인가?

그는 김대중 선생이 일본 도꾜에서 중앙정보부원으로부터 납치되던 1973년 8월8일 이후 하바드 대학에서 미국 학자들과 재미동포들이 중심이 되어 그의 구출운동이 시작할 무렵 양심의 세계로 돌아 온 인물이다. 지금은 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으로서 그리고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재미본부의 고문으로서 활약하며 후진들에게 운동에 관하여 여러 가지 자문을 통해 조국의 평화통일과 이남의 민주화 운동을 돕고 있다.

박기식 선생은 “이남의 정보원들도 먹고 살기 위해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중에는 양심적인 사람들도 적지 않다. 대부분 자기들이 하는 일이 뭔지 모르고 그저 분단안보(분단고착화를 위한 일)에 종사하고 있지만 양심 있는 정보원들이라면 우리 민족이 처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분단안보가 아니라 민족안보(통일지향적인 사업)에 관심을 갖고 처신하는 게 올바른 사람의 길이다.”라고 말한다.

박선생은 1929년 4월12일 대구태생으로 코리아 전쟁 전에는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교육계에 몸담고 있었다. 전쟁 후에도 다시 교육계에 종사하다가 1962년부터 1971년까지 중앙정보부에서 주로 언론계를 담당하는 정보원으로 활약했다. 당시에는 이남의 지성인들로 알려진 리영희 교수와 언론인 송건호 선생과도 직업적으로는 서로 앙숙인 관계였지만 지성과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면에서는 때때로 서로 의기 투합하였던 시간들(눈에 안 보이는 상황)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정보부에서 옷벗고 사귀게 된 사람들이 거의 민족문제와 씨름하는 사람들이었다. 여러분이 잘아는 서승이가 내 조카 사위이기도 하다. 언론계 반골이던 리영희 교수는 지금 좋은 친구로 지내 왔고, 내 제자인 학자 박한식 교수도 서로 우의를 가지고 지내고 있다.”

그는 1956년 10월22일 결혼하여 2남2녀를 둔 가장으로서 교육자로 출발한 평범한 사람이었으나 박정희 정권이 들어 선 초기에 중앙정보부에서 일하게 되어 10년 가량 일하다가 1971년에 옷을 벗고 다시 평범한 가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중 1972년 4월19일에 동생인 미국시민권자의 형제자매 초청으로 미국에 이민 오게 되었다고 그는 설명해 준다.

그가 미국에 이민 와서 1년이 지난 시기에 김대중 선생 납치사건이 일어났다고 회고하며 그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73년 8월8일 김대중 선생이 도꾜에서 납치되었을 당시 임창영 선생(전 남한 유엔대사)은 김대중 선생을 의장으로 하는 조직인 한민통 결성을 구성하기 위한 준비차 도꾜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사실상 납치사건은 정보요원들이 김대중 선생이 해외조직의 의장으로 되면 망명조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납치한 것이다. 그 당시 김대중 선생을 돕기위해 한민통을 건설하는데 앞장 섰던 주동인물은 김재화, 배동호 선생(민단의 중진 출신), 정경모 선생(민족시보 전 주필), 곽동의 선생(한통련 조직부장)으로 기억된다. 김대중 선생이 납치사건으로 증발하자 임창영 박사가 미국 학자들에게 긴급하게 연락하여 구출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때 태프트 대학교수를 하다가 그 뒤에 하바드 대학 교수가 되었던 그레고리 헨더슨 박사, 김대중 선생을 아끼던 제롬 고헨 박사(하바드 법대교수), 에드윈 라이샤워박사(하바드 대교수 석좌교수), 키신저와 같은 수준의 정치인들, 즉 케네디 집권시절에 주일 미대사 라이샤워(부인 이 일본 귀족 출신) 등 미국의 영향력 있는 학자들과 정치인들도 김대중 선생 구출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이어 “임창영 박사의 급보를 받은 미국 학자들은 당시 프로리다에 휴가 중이던 키신저(대통령 안보보좌괸)에게 조치해서 구명운동이 착수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결과 정보원들은 김대중 선생을 손발까지 묶어 해상으로 납치해 갔지만 죽이지는 못하고 눈을 가린 채 동교동 자택에 옮겨 놓았던 사건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 납치사건이 일본 땅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것을 무마하기 위해 대한항공 조중훈 회장을 시켜 당시 3억 엔이라는 거금을 일본 정계 실세에 넘겨 준 비밀(문명자 기자 폭로 자료)도 이제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김대중 선생이 정보요원들에 의해 납치된 사건 후 한달되던 1973년 9월초에 하바드 대학 대 강당에서 구명운동 행사가 열렸는데 이 시기는 내가 미국에 이민 온지 1년5개월 뒤던 날이었다. 나는 이 행사에 참석(2백여 명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남한 민주화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 당시 임창영, 선우학원, 김상돈 세분과 면식을 가졌고 그 후부터 임창영 박사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뛰어 들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박기식 선생은 지난 시기 남한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잊을 수 없는 행사는 세가지가 있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1974년 미주민협 창립행사가 있었는데 그 때가 남한 민주화 운동이 미국에서 대통하던 시기였다. 그 다음이 1975년 시카고 에반스톤 세라톤 호텔에서 재미 한민통 총회가 있었다. 당시 김재준, 김상돈, 안병국 목사, 송종률 목사(샌후란시스코), 최석남, 이재현(망명 한국문화원장), 이용운(해군제독 출신), 등이 참석하였다. 그 때 나는 보스톤 책임자로 참석하여 초기에 활동한바 있었다. 그리고 1977년 샌트루이스 회의, 뉴욕 한국문제 긴급국제회의 등이 있었다. 그 때 임창영, 윤이상. 시노트 신부, 서정균 등이 활약했다. 이 때가 미국내 한국민주화운동의 전성기로 기억된다."고 말한다.

그는 또 다른 추억들을 더듬으며 남녘사회의 민주화운동을 위한 미국 내 활동들을 열거해 준다. “ 1974년에 <미주민협>이 생겼을 때 활동한 인물들은 임창영 주축, 지창보, 노광욱, 서정균, 박기식, 황규식 등이 함께 참가하였다. 이것이 발전적으로 전환되어 미주민련(임창영 초대 회장)이 만들어졌고, 이 때 시인 고원 박사가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언론들은 <코리아 게이트: 후레지져 커미티>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박동선 로비 정보부…김영욱 증언에 관한 보도들이 경쟁적으로 나왔다. 그 당시에 <해외 한민보>가 기관지 격인 민족언론으로 대두되었고 미국 로스엔젤레스 지역에서는 <신한민보>가 주간신문으로 발행되어 왔다. 그 때 변호사 출신이었던 에드워드 베이커 (고헨 밑에서 공부한 사람)가 <후레이즈 커미티(코리아 게이트)>의 조사관으로 활약하던 시기였다. 그는 하바드 대학교 ‘엔칭연구소’에서 부소장을 하면서 김근태 구출운동도 한바 있었다. 당시에는 재벌가였던 재일동포 정재준 사장이 한민통을 일본 돈으로 수억엔이나 지원해 주어 재정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도왔다. 남한 정보부가 이런 정보들을 입수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던 시기였다. 또한 1980년대 재미동포 출신 한국 국회의원을 지낸 김경재(필라에서 독립신문 발행)사장이 <<김형욱 수기>>를 발표해 당시에 파문을 던졌다. 당시 그 책의 저자는 "박사월’이라는 가명으로 표기되었다. 이 책은 또 1982년 카나다의 뉴코리아 타임스(전충림 발행인)에서 <<권력과 음모>>라는 이름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박기식 선생의 첫 방북과 인생전환


<##IMAGE##> 박기식 선생은 1979년 4월말께 처음으로 방북기회를 갖게 되었다. 평양에서 세계탁구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에 해외동포들이 초청되었다. 박 선생 부부는 김형식 선생, 노의선 목사, 전충림 선생(카나다), 장성환선생(콜롬비아 동기 서대숙), 조동설 선생 내외와 함께 이 대회에 참관인들로 참가하였다. 이것이 그의 첫 방북이었다.

그는 뉴욕, 필라델피아에서 임창영 박사와 함께 활동하며 때로는 유엔 건물 앞에서 남한의ㅣ 민주화를 촉구하는 데모에도 참가해 활동했다. 1980년대 초에는 카나다의 오타와를 오가며 민주화운동을 벌였고, 해외한민보를 발행하던 서정균, 장광성과 함께 장장 700 마일 운전하여 토론토로 가기도 하고, 버스로 오타와에 가서 인근 공항에 도착하는 전두환(1981년도)을 반대하는 시위에도 참가하였다.

박 선생은 그 후 자연스럽게 남한 당국의 군 장성 출신이며 태권도를 발전시킨 최홍희 선생, 남한에서 외무장관을 역임했던 최덕신 선생과 함께 남한 민주화 운동에 참가했다. 그는 “어쩌면 빌어 먹은 사람들(처음부터 재야가 아니라…)이 <동병상린>이라고나 할까…같은 처지처럼 느끼고 반군사독재 운동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전두환 군부가 최홍희 장군을 잡으려고 최홍희 아들 조직집단에 참가해 문제를 일으키려고 한 사건도 있었다. 요즘에 와서도 태권도 문제를 가지고 그 아들이 남녘에 가서 이상한 인터뷰를 했더구먼…”이라고 설명한다.

“나는 해외한민보에 최홍희 아들이 <전두환 살해음모 사건에 대하여…>라는 글을 읽고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입장을 글로 써 투고하여 최홍희 장군을 옹호하기도 했다. 그 때 다른 사람들은 전두환 군부가 겁이 나서 몸을 움 추리고 있었을 때였다.”고 회상한다

그는 “남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방해하는 것은 남한 정보부뿐만 아니라 미국 정보기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970년대 후반 카나다에서 발행하던 뉴코리아 타임스(전충림 발행인)에 기고문을 통하여 <북 외교관이 흑인여성 농락…>이라는 허구적인 보도들에 대하여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글을 썼을 때 미국 연방수사관이 확인하는 연락을 하여 심리적인 압박을 가한 적도 있었다고 술회하면서 “미국 수사관 특징 중 하나가 함정 수사라고 본다. 북의 외교관이 뉴욕에서 25마일 제한된 반경을 정해 놓고 제한하여 왔는데 이들 외교관들이 늘 가는 것이 빤하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대낮에 농락할 정도 외교관들이 아니라는 요지의 글을 썼다. 나는 중요한 때 과감하게 나섰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그렇게 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고 하며 어두웠던 그 시대의 배경을 설명해 준다.

비엔나 회의 참가 그리고 두번 째 방북


1980년대 초에는 비엔나에서 북과 해외 기독자들간의 회의에도 참가해 이북에 대해 많은 감명을받은 것 같다. 그리고 배달신문(장성환 한동안 편집)을 운영하던 최덕신 선생, 토론토 외곽에서 태권도 제자들을 양성하며 활동하던 최홍희 선생과 가깝게 지냈다. 그 당시 최홍희 선생도 통일에 관심이 많았고, 이북에 대해 새로운 관점과 시각을 갖고 도와주려고 애쓰는 모습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박기식 선생은 최홍희 선생이 자신에게 준 선물 중에는 붓글씨의 휘호가 있는데 그것의 글발은 <통일 선구자>라고 쓴 것이라고 말한다. 박 선생은 자신을 <통일 선구자>로 칭해 주는 것에 대해 기쁜 마음을 가진 것 같다. 그는 또 두번 째 방북시기에는 1979년 첫 방북 시기에 비해 평양시가 많이 변했다고 회고한다. 첫 방북 시기에는 인민대학습당이나 주체탑, 개선문 같은 건축물들이 없었는데 두번 째 방북 때에는 그런 건축물들이 우뚝 서 있었다고 회고해 준다. 그는 도 이북의 예술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무대에 5천명이 등장해 작품<행복의 노래>공연을 2.8회관에서 감상하고 놀랬다.”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북의 지식인들에 대해서도 호감을 가졌다고 한다. 특히 려연구 선생, 임동옥 선생 등과 만나 나눈 대화들 속에 가슴에 다가 온 내용들이 많았다는 그날들을 회상해 준다.

그는 특히 이북 지식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뉴욕 토론회서 나누며 강조했던 이야기를 표현하였을 때 이북 지식인들이 호의적으로 반응했다고 말한다. 그는 “아무리 좋은 분단상태라도 어떠한 역경에 있는 통일상태에 비길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이 말에 이북 지식인들도 동감이었다고 한다.

박기식 선생은 또 북부조국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북이 조국통일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 사회를 올바로 알아야 된다는 뜻이다. 그는 또 문명자 선생이 소학교 1년 후배(대구 남산학교)이고 박한식 교수가 또한 후배이며 제자(대구 남산학교 후배) 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들의 활동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그는 미국 정치인들이나 일본 정치인들 중에도 북을 폭넓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북부조국에 대해 우호적이라고 말한다. 특히 일본의 우쯔노미아 도꾸마 참의원 같은 인물은 일본의 한통련을 지원해 준 인물로서 그는 비록 일본 자민당 계통이지만 일본정치인으로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북부조국에 대한 이해가 깊어 진 정치인이라고 설명하는 한편 김대중 선생에 대해서도 우호적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문명자 선생이 가깝게 사귀었던 미국 교수들과 정치인들도 북부조국에 대해 이해가 깊었다고 말한다.

박기식 선생은 보스턴 지역이 남한의 민주화 운동과 조국통일운동의 무풍지대였지만 그의 꾸준한 노력으로 이 지역이 우리 민족의 통일운동과 연계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그래서 지난 70년대, 80년대 남한 민주화 운동이 이곳에 씨를 뿌리게 되었고, 그 후 이곳에 재미동포전국연합회 보스턴 지회가 건설되어 통일운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는 “1982년 방북 시 북에서 며느리를 구해 보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고 고백하면서 “그 때 넌지시 그 이야기 끄집어 내보았다.”고 말한다. 그 결과 성사는 안되었지만 박 선생이 이북 며느리를 구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깊은 뜻을 쉽게 간파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자주연합. 재미동포전국연합회을 비롯하여 자주연합, 범민련 재미본부 고문으로 지내 왔다고 밝히면서 뼈있는 말을 건넨다.



<<통일운동은 이론의 운동이 아니고 체현의 운동이다.
몸으로 나타내는 운동이다.>>


<##IMAGE##>박기식 선생은 대담 중에 건강문제 관리와 금강산 사건문제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나는 누가 장수비법을 물으면 통일 운동하면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해외에 살지만 살찐 돼지처럼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람답게 사는 것,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바란다. 그리고 <오래 살려면 통일운동 하라>고 충고해 준다. 통일운동 하면 집중력이 늘고 두뇌도 활성화된다. 치매에 걸릴 확률도 적다. 정신 건강과 육체건강도 일반 사람들에 비해 좋다고 생각한다.”라고 강조한다.

박 선생은 자신이 80평생을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도 통일운동을 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장수의 비결 중 하나가 통일운동>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표정이다.

그는 또 금강산 관광이 막혀 있는 사실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이름 모를 여인이 어둠이 깔려 있는 시간에 경계선을 넘어 혼자 산책하다가 변을 당했는데…죽음을 당한 건 유감스럽지만 나는 이 사건을 예사롭게 보지 않는다.”라며 정보원 경험의 시각을 귀띔해 준다. 소련 영공에 들어간 비행기가 보잉사 제작인데 이것과 관련하여 남한 정보부와 미국 정보부와의 연관관계는 없는지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진단의 잣대를 일깨워 주기도 한다. 그는 이어 금강산 사건을 그냥 볼 것이 아니라 “남한 사회는 돈만 주면 뭐도 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관점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며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박선생은 또 최근에 남한에서 이북에 풍선 날리기 등의 대북공작들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대북공작들을 설명해 주면서 첩보영화 <미션 임파시블>에서 보듯이 첩보훈련을 시켜 아무도 모르게 사건을 일으키는 것들도 적지 않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기도 한다. 안국동 모처의 <인물 존안실>을 연상시키며 뉴라이트, 국정원 원격조정 가능성, 금강산 여인사건도 북부조국의 경계자세를 시험 해 보기 위한 공작적 차원의 사건으로도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정치적 사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시사해 준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지적>



박기식 선생은 이남의 현 당국과 관련하여 “이명박 대통령은 60년대에 한일굴욕외교를 자행한 박정희 정권시기에 시위에 참여한 인물이고 현대기업에 공채에 낙방(신상명세)하고 이낙성 청화대 비서에 진정서를 제출해 현대에 들어가서 기업인으로 활약하다가 오늘에 이르렀는데 지금에 와서 처신하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남북관계에 대해 “이승만 정권시기에도 남북이 대치된 상황이었지만 <만일 일본이 침략해 오면 우리는 북과 손잡고 일본과 싸우겠다.>고 했는데 이명박은 최근에 아소 다로 일본 총리와 만나 정상회담을 하며 6자회담이나 대북관계에서 대북고립정책에 한통속이 될 뜻을 밝혔다고 하는데 이런 정치인은 이승만 정권은 물론 과거 어느 정권보다도 형편없는 고약한 정권이다.”라고 꼬집으며 일본 지배세력이 어떤 진영인데 이 세력과 공조하며 북을 압살하겠다는 의도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정권이라며 이명박 정권의 반 민족성을 비판했다.

그는 또 족벌언론들에 대해 지적하면서 “나도 정보원 담당으로 조선일보에 관계해 보았지만 이 언론도 코리아나 호텔을 갖고 있는데 이 건물도 일본 이도쭈 상사의 돈을 빌려서 지었기 때문에 친일지향에서 탈피하지 못해 왔다. 그리고 이도형이라는 사람이 한국논단 잡지발행하며 극우적인 여론을 펴왔다. 이것도 다 일본과 결탁하였기 때문이다. 이도쑤 상사(중역:세지마 류죠오)에 대해서는 일본의 정경모 선생이 잘 알고 있다. 이 기업주는 소위 일본이 2차 대전 중에 참가했을 때 대 본영의 참모였다. 즉 조선일보는 일본 지배세력과 깊은 연고를 갖고 있다. 특히 세지마 류죠오는 2차대전을 ‘태평양 전쟁’이라고 하지 않고 ‘대동아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을 성전이라고 본다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이들은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해 왔다.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 천황을 만나러 갈 때에도 세지마 류죠오가 와서 의논했다. 그 때 일본제국주의가 우리 민족에 자행한 죄행에 대하여 사과도 아닌 표현으로 그저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는 정도로 천황이 표현할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그 때 정경모 선생은 노발 대발 하여 글을 썼다. <<통석지염>>이라는 말의 뜻은 삼킬 것 못해서 안타깝다는 정도의 이야기이다. 일본이 우리 민족을 이렇게 우습게 알고 있는데 이명박 정권이 취한 태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얼굴을 붉힌다.

<방북 5번하고 느낀 소감>


박기식 선생은 1979년 처음으로 북을 방문하고 그 이후 모두 5차례 이북을 방문했다고 밝힌다. 두번 째가 1982년, 세 번째가 2002년 김일성 주석 90생신, 네 번째가 2005년 6.15선언 기념행사, 다섯 번째가 2007년 4.15 태양절 행사라고 말한다.

그는 “그 동안 다섯 차례 이북을 방문하면서 외형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어 놓았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안정감과 평온함을 갖추고 있는 것에 대하여 놀람을 금치 못했다. 나는 갈 때마다 민족의 정기를 충전 받는 느낌을 가졌다. 이북을 방문할 때 마다 정신적으로 각성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민족 전통성이 강한 것에 감동받았다. 고구려의 기상을 받은 맥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느낌을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들다는 것이 나의 고백이다. 이웃과 오손 도손 다정하게 사는 북녘사회는 이른바 ‘전천후적인 국가소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알다시피 여기 저기 민족허무주의가 팽배하여 있지만 이북사회는 활기에 차 있었다. 이북은 역시 가장 모범적인 사회주의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북과 이남이 연방통일체제로 합치면 세계적으로 자랑 찬 전천후적 국가소양으로 우뚝 서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꼭 그렇게 되고야 말 것이라고 덧붙인다.

박기식 선생은 지난 시기 한 때 분단안보를 위해 존재하는 정보기관에서 일한 경력을 갖고 있지만 오늘 날에 와서는 민족안보를 위한 ‘통일 선구자’, 또는 ‘통일운동 어른’으로 후진들에게 존경 받고 있다.(끝)

*박기식 선생의 연락처:(978)475-3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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