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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길]<고향가기 운동도 통일운동이다<font color=red>(2)</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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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01-24 11:10 조회4,0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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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길 선생은 미국동부 워싱턴 디씨 근교 엘리코트 시티에 거주하는 동포이다. 그는 10대에 고향을 떠나
남녘에서 살았고, 그리고 미국에 이민와서 산지도 오래되었다. 그는 벌써 6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말한다.
지난 해 10월 김정일 위원장이 제2차남북정상회담을 맞아 노무현 대통령과 역사적인 상봉모임을 가졌을 때
그는 벅찬 가슴을 안고 글을 썼다. 이것이 <고향가기 운동도 통일운동이다>라는 글이다. 3번에 걸친 연재물
가운데 두번 째를 여기에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최장길]<고향가기 운동도 통일운동이다(2)>


3). 고향과 혈육을 그리며 흘린 눈물


<##IMAGE##> 어려서 부모님과 형님을 잃은 나는 고향의 고모님이 제일 그리워젔고 어릴때 맨발로 딱지를 치던 4촌들도 보고싶었다.

서울에서 고향을 찾겠다는 소리를 했다간 어느 귀신이 잡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렇다고 한번도 고향을 찾는다는 희망 만은 포기한적이 없었다. 1970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면서 고향찾는 일이 가능하리라는 꿈을 갖게됐다. 우선 시민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들어 이를 제빠르게 받아냈다.아직도 서울에는 유신의 총칼과 군화발 소리가 요란했고, 재미동포들도 냉전사고에서 한발자욱도 벗어나질 못해 고향에 다녀왔다는 소문이 나면 주변 사람들이 도망을 치던 시절이었다.

부모님 생각이 날때면 으례히 신고산 고향에 계신 고모님의 얼굴이 떠올라 미칠것만 같았다. 고모님은 다른 여러 4촌들 보다도 나를 유별나게 귀여워했기에 꿈에도 보였다. 달밝은 밤이면 저절로 고향생각이 떠오르고 고모님 생가에 눈물도 많이 흘리기도 했다. 사실, 나는 내고향을 찾아가는 것도 중요했지만, 나의 아내와 장모님의 고통을 덜어줘야겠다는 사명감이 더욱 나를 용감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의 아버지 형제와 이화고녀에 다니던 4촌 언니가 월북했기에 아내도 이산가족이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2중의 이산가족인 셈이다. 70년대 중반과 80년대 중반에 있었던 평양행은 구라파에서 비자를 받았기 때문에 시간과 경제적으로 부담이 크기는 했으나, 나는 보람있는 여행이었다고 늘 자부심을 갖고 자랑을 한다. 친척들이 고향에 그냥들 살고있어 쉽게 그들을 만날수가 있었으므로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뿐더러, 당국에서 나의 가족들을 만나도록 배려를 해줬다는 것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80년대 말에 고향방문을 했을때는 이미 많은 해외동포들이 고향을 찾아왔고, 그들은 벼라별 일화들을 남겼는데, 비극 심파와서도 같은 혈육상봉이 실지로 내가 평양에 체류하는 기간에 벌어젔다. 3일 후면 돌아오겠다며 핀난민의 대열에 섰다가 처자식과 생이별을 한 젋은 청년이 미국 시민으로, 8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되어 피난가서 만난 새부인과 함께 평양에 도착했다.

함경도의 시골에서 꿈에도 그리던 남편을 만나고자 달려온 할머니는 평양호텔에서 전쟁때 해어진 남편과 역사적인 상봉을 했다.

미국에서 찾아온 할아버지와 함경도의 본부인이 첫날밤 신혼방을 꾸미도록 주선한 당국에서는 이렇게 결정하기 까지에 많은 고심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나는 당연했다는 생각과 함께 새부인의 넓은 아량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전에 비해 평양관광이나 가족찾기가 매우 편리하고 수월해젔다. 이제는 제도가 잘 정비되어 마음만 먹으면 평양관광은 물론, 해어진 혈육을 만나는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회장 윤길상 목사)는 벌써 몇년째 관광객이나 사업가들의 방북을 도와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산가족의 상봉도 주선해주고 있다. 나의 금년 초, 방북도 윤목사가 주선해 주었다. 옛날에 비하면 정말 편리하고 쉬운 평양방문이다.

더구나 금년 초에는 뉴욕에 <우리관광> (사장 이종천)이 설립되어 3번째의 관광객이 평양에 들어가게된다. 가족찾기가 아니고 관광목적이라면, 다른 외국 관광과 같이 쉽게 언제나 가능하게 됐다.

최근에 와서는 조.미관계가 호전됨에 더욱 동포 사업가들의 방북 문의가 폭주하고 있다고 한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노력도 않고 문이 닫혀서 못간다는 핑게만 한다. 두드려보지도 않고 문만 열리라고 한다. 자기를 위해 혈육을 만나는 것이지, 남의 눈치나 보고 체제 타령이나 한다면 이미 혈육의 정이 없다는 증거라고 봐야한다. 혈육과 담쌓는 것을 애국이라 생각하고, 혈육에게 집어준 돈이 핵무기를 만들거나, 군대로 들어간다는 구실을 붙여 혈육상봉불가를 합리화하는 것을 보노라면 안타깝고, 할 말이 없어진다.

원산은 나의 고모가 살았었고, 나의 아버지가 철도국에 근무를 했기에 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기차로 가곤해던 곳이다.

신고산이 고향이라면, 원산은 내게 제 2의 고향이다. 명사십리 해수욕장도 기억에서 지을수가 없지만, 바다가 있어 온갖 싱싱한 생선들을 언제나 먹을수가 있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원산 가까이만 가도 고모님과 아버지가 일하던 원산백화점과 원산기차역이 내머리를 스처간다. 금년 초, 또다시 원산호텔을 찾게되니 오래전에 일하던 사람들은 한사람도 없고 모두 새사람들이었다. 일본의 관문이라선지 접대원 (안내원)들이 매우 친절하고 손님과는 상냥한 대화를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평양시가 화신백화점 하나를 남겨두고 잿더미가 됐다지만, 미군 폭격은 신고산도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은 전쟁 전에 비해서는 작은 도시가 됐지만, 모든 건물이 전 후에 다시 건설되어 아름답고 깨끗한 도시다. 내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금세 농사관리위원장이었던 동생 집은 이웃들로 가득찼다. 동생은 내가 준 과자상자를 내놓고 찾아온 이웃들에게 하나도 남김없이 죄다 나누어준다. 간부 생활을 오래해서인지, 작은 것이긴 하지만 아낌없이 나누어먹는 동생의 인정에 나는 다시 한번 인간다운 동생을 두었다고 흐뭇했다. 사실,좀 더 많이 과자 종류들을 갖고올 수가 있었으나 그렇게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내 고향의 흙냄새...

아무튼 고향은 마냥 좋기만 했다. 내고향의 흙냄새는 워싱턴의 것과도 다르다. 정말 향기가 난다.

손님들이 모두 떠난다음, 막내 사촌댁에게 "얼굴은 빼어난 미인인데, 양 손은 왜 그렇게 거칩니까?"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나는 "인미군 중령의 부인이었고, 지금은 병원장의 부인인데 고생해서는 아닐테고..."라 좀 듣기가 거북한듯한 말을 했더니 그제서야 선뜻 대답을 했다. 사촌댁은 "계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일을 더 많이 하지요"라고 대답한다.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되서 "아니, 무슨 일을 했기에요?"라 되물었다. "사병들의 빨래를 주로 했지요"라는 대답에 나는 놀라지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미 나는 인민군장교는 반드시 사병을 거처서 장교가 단다는 말에 한번 놀란 일이 있었는데, 다시 한번 더 놀라 4촌댁의 양 손을 만저보았다. 보기가 흉하게 거칠었다.

<장마당> (공설시장에 해당)을 둘러보니 옛날 장터 생각이 절로났다. 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동차 수리소는 자전거 바퀴를 높이 매달아놓았고, 옷가지나, 신발, 이발소, 목공예품, 찐빵집, 사진관, 미장원, 등등 벼라별 상점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자연목을 가지고 만든 공예품들이었다. 실물과 똑같은 나무모양과 정교한 조각은 감탄을 하지않을 도리가 없었다. 동생들의 말에 의하면 재일동포들이 보내온 상품들이 많이 있고 인기가 있다고 했다. 이젠 돈이 없어서 못사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살 수가 있다고 한다.

동생들과 작별을 하기에 앞서, 생활에 보테라며 기백불씩 주었더니 모두 눈이 둥그래지면서 펄적펄적 뛰며 좋아했다.

"형님, 이젠 걱정일랑 마십시요. 이 돈으로 우리 다 같이 장사를 하면 잘 살 수가 있습니다. 다음에 오셔서 보십시요"라고 농사관리위원장으로 은퇴한 동생이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 은퇴한 동생들이 힘을 합해서 장사를 하겠다는 데에 가슴 뿌듯이 자랑스러웠고, 좀 더 집어줄 것을 하면서 아쉬움도 맴돈다. 은퇴 했다고 빈둥거리며 정부의 연금이나 배급에 의지하고 쉽게 살겠다는 것이 아니고, 몸은 늙었지만 열심히 살겠다는 의지에 나도 감탄을 하지않을 수가 없었다. 동생들 보다 몇 살 위인 나는 몇해 전에 은퇴하여 놀고있으니 일을 하겠다는 동생들에게 떳떳칠 못했고 면목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몇푼 안되는 돈을 받아들고 그렇게도 기뻐하며 고마워하던 동생들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절로 뜨거워진다. 장사를 한다더니 돈벌이는 어떤지, 아니면 서로 쌈질을 해서 오히려 원수 지간이나 되질 않았는지, 해가 바뀌니 궁금하기 짝이 없다. 동생들이 꼭 와서보라고 했으니 가고픈 마음 간절하다. 하기야 물주로서 점검도 하고 감사를 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야 없겠지만.

인생의 절반을 미국에 살면서 부자는 못됐으나, 노후를 걱정 없이 살게됐고, 자식들도 하바드, 푸린스톤을 나와서 잘들 살아가건만, 나는 마음 한 구석에 늘 무엇인가 비어있다는 느낌을 갖고산다. 아마도 그 허전함이 바로 고향이 아닌지? 평생에 죄 지은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벌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재수가 없어서인지, 나는 강도와 도적을 끼고 살았다. 죽을 고비도 넘겨봤고, 사경을 해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여건만 갗추어지면 얼마 안남은 여생을 고향에서 보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기도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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