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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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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길]<고향가기 운동도 통일운동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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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01-23 18:27 조회3,5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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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길 선생은 미국동부 워싱턴 디씨 근교 엘리코트 시티에 거주하는 동포이다. 그는 10대에 고향을 떠나
남녘에서 살았고, 그리고 미국에 이민와서 산지도 오래되었다. 그는 벌써 6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말한다.
지난 해 10월 김정일 위원장이 제2차남북정상회담을 맞아 노무현 대통령과 역사적인 상봉모임을 가졌을 때
그는 벅찬 가슴을 안고 글을 썼다. 이것이 <고향가기 운동도 통일운동이다>라는 글이다. 3번에 걸친 연재물
가운데 첫번 째를 여기에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고향 가기운동도 통일운동이다(1)>

*글:최장길(워싱턴 디씨 근교 일리코트 시티 거주)


<##IMAGE##> 두고온 조국의 산하가 그립고 조국의 안녕에 관심을 기울이지않을 도리가 없다. <10.4 정상선언>을 멀리서 지켜본 나는 선언 8항의 [해외동포 권익옹호]에 대해 특히 지대한 관심을 갖게되고, 이를 적극 지지환영하는 바이다.

겨우 12살 어린나이에 강원도 신고산, 내고향을 떠난지가 어언 60년이 훌딱 넘어갔다. 고향을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이야 어찌 나 뿐이겠는가만은, 이번 정상선언은 왠지 나도 모르게 고향 떠난 나에겐 커다란 기대와 희망을 갖게한다.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의 정착은 필연코 민족화합을 이끌어낼 것이고, 나아가서는 민족통일로 연결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편, 혈육과 고향을 북녘에 두고온 사람들일수록 민족통일이란 남다른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과는 뗄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따라서, 해어진 혈육을 더 자주 만날수가 있고, 고향나들이를 더 자주 하리라는 기대가 한층 높아지게 됨은 하나도 이상할게
없다.

1). 내고향 신고산


강원도에 속하는 내공향 신고산은 해방 직후, 내가 떠날 때만 해도 천여호가 넘는 아름다운 도시로서 광활한 농토가 있어 살기가 좋았고, 원산이 겨우 백리길에다 기차가 자주 다녀서 해산물도 많았다. 원래 구고산이라는 작은 마을이 옆에 있었으나 기차길을 놓기가 어렵고 도시로 꾸리기가 적합치않아 새로 <신고산>이라는 도시가 만들어젔다고 한다. 이곳의 명물이라면 큰 저수지가 있고, 불과 두 정거장 지나면 <석왕사>라 불리는 절이 있다. 이성계가 여기서 꿈을 꾸었다하여 그가 왕위에 오른 다음 이곳에 <석왕사>라는 이름이 붙게됐다고 한다. 또한, 이 고장의 이름을 따서 유명한 "신고산타령"이라는 민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나는 아내와 함께 고향반문을 했을때 <석왕사>를 찾아가아내에게 여기에 얽힌 어린날의 옛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었다.


고향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일수록 고향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 더 강하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 말이 진리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아버지의 두 형제분이 이곳에 함께 살아서 4촌들이 무척 많았으며 그들은 부랄친구들이자 핏줄로 연결된 형제들이라 싸움 한번 없이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아버지가 자신의 천직인 철도국 검차기사의 자리를 찾아 월남하면서 4촌들과의 이별이 오고야 말았다. 부친은 국민학교 출신이었으나 천직인 기사생활을 도합 37년이나 했으니 얼마나 근면 성실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어머니는 원산의 루시여학교를 나와 자신이 인테리라는 생각을 해서인지 가끔 학교자랑을 하기도 했고, 모윤숙과 김자경도 루시를 나왔다고 했다. 이따금씩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싸움을 할때면 언제나 어머니는 아버지를 "벽창호"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지적 차이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도 생각이 든다.

2). 배우인 형이 맺어준 혈육상봉


(1) 기적적인 혈육상봉 학교에 다니는 나는 자주 우리 집에서 형님이 악극단원들과 대사를 놓고 연기를 하는 것을 보곤했다. 전쟁이 막 끝난 당시의 형편으로는 연습할 장소가 마땅치못해 집이 꽤 큰 우리집에서 연습을 했으리라 짐작이 간다. 우리 형은 나와는 정 반대로 1m 88cm의 훤칠한 키에 미남이어서 큰 일을 할 사람이라고들 했으며 부모님의 기대도 대단했으나 겨우 연극 베우생활
10여년을 마지막 출세로 일찍 타계하고 말았다.

<##IMAGE##>형님의 본명은 최장원이었으나 이름을 날리면서 예명인 "최영일"을 사용했다. "은향악극단" (단장 박호)에 몸을 담은 형은 언제나 단장 다음에 나오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장안의 젊은 여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류 미남 배우였다.

선전물에는 단골로 얼굴이 맨위에 나오곤 했으며, 우리집으로는 젊은 아가씨들이 인기 절정 미남 배우의 얼굴이라도 직접 보겠다며 발길이 끊어지질 않았다.

어느날 형님이 주연 배우로 등장하는 [남모르는 손님] 제목의 포항 공연이 절찬리에 막이 내려지고 배우들은 분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난데없이 분장실에 헐래벌떡 형님을 찾아온 사나이가 있었다. 이게 왠일인가! 형님을 찾아온 사나이는 바로 해방 직후, 신고산에서 해어진 4촌이었다. 관객으로 객석에 앉아있던 그는 금세 먼저 월남한 4촌임을 확인했으나 공연 중이라 아는체를 못했다고 한다.

공연이 끝나자 무대 뒤에 있는 분장실에서 4촌형제들의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젔다. 피난민의 대열에 끼어 남하한 3촌댁 식구들을 극적으로 찾은 것이다. 해방을 맞아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월남한 우리는 3촌댁 식구들이 핀나민이 됐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정말 기적도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됐다. 이제 신고산 고향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모님과 작은 3촌댁들만 남게됐다는 것도 알았다. 형님은 여러 악극단을 오가다가 "이난영 악극단"에서 가장 인기를 날렸다. 당시 키타의 제 1인자로 이름을 날리던 이난영의 오빠인 이봉룡이 있었고 트럼펫으로 명성을 날리던 권오섭도 있었다.

희극 배우로 만인에게 웃음을 선사하던 배삼룡도 형님과 함께 악극단 전속 배우였다. 당시 형님과 쌍벽을 이루던 인기 배우로는 "이향"이었느데, 출연하는 곳마다 늘 울음바다를 만들기로 유명했다. 지금도 생생하게 우리의 귓전을 울려주는 <목포는 항구다>가 이봉룡의 최대 걸작품으로 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할 정도이다. 이봉룡은 배가 고플때면 우리집에 찾아와 밥을 달라곤 했고, 우리 어머니는 아들의 지인들이 찾아오면 얼굴 한번 내색하지않고 반갑게 대접하곤 했다. 아마도 내가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천성으로 그것을 좋아한다.

이들은 주로 시공관, 단성사, 중앙극장에서 공연을 하곤 했으니 형님이 속한 악극단은 수준급에 있던게 아닌가싶다. 당대의 최고 수준급인 "이난영 악극단"도 재정문제를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어서 끝내 문을 닫고만다.

(2) 악극단장으로 미 8군 무대에 서다

아버지를 일찍 잃은 내겐 형님이 절대적인 사람이었고 형님의 인생관에 매우 심취했던 모양이다. 악극단의 자금 사정이 어려울땐, 형님은 우리 가족의 부양은 생각지도 않고 집에 있는 값진 물건들을 팔아 악극단을 지원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제식구도 건사하지 못하는 형편에 어려운 단원들을 먼저 걱정했던 형님의 따뜻한 인정은 이제 나 만이 이해하고 기억하는듯 하다. 형님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술도 심해지더니 끝내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졸지에 큰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형님이 떠난 다음날 영영 딴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이래서 우리집은 두 사람의 장례를 한꺼번에 지내야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돼기도 했다.

어린 나이로 미 8군에 취직을 해 집안의 끼니 걱정을 덜면서 나는 강문고등학교 (지금은 용문고등학교) 야간부를 졸업했다. 형님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나는 형님의 뜻을 따라 가극단을 가지고 성공해야겠다는 신념으로 <영배악극단>을 만들었다.

이 악극단에 물주로 참가했던 분이 만화로 유명한 "신명섭"이었다. 우리는 재정이 미약해서 늘 변두리 극장이나 지방공연을 했는데, 어느날 미 8군 사령부에서 공연을 하게됐다. 단장인 내가 사회를 봤고, 동시에 통역도 내가 맡았다. 영어로 사회를 봤다해서 알아듣지도 못했을 사람들로 부터 칭찬도 받고 부려워하는 것을 보고 우쭐대기도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못난 놈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당시의 내 영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었다면 잔짜 웃음꺼리였을 것임이 분명한데 말이다.

나는 내가 좋아서 형님을 늘 따라다녔기에 본것도 많고, 배운것도 많았으며, 아는 배우들도 수없이 많았다. 지금 내 기억에서 지울수 없는 사람은 국민하교 5학년에 다니던 "안인숙"으로 나를 무척 따랐다. 그의 아버지는 포목장사를 했고, 작달막한 어머니는 어린 딸을 배우로 만들고자 온갖 정성을 다했다. 인숙이의 어머니는 나를 철석같이 믿고 철부지인 딸을 내게 맞기다싶이 했다. 어딜 가든 나는 인숙이를 내 목위에 올려놓고 다녔으니, 지금 같으면 성추행이요, 뭐요 하면서 난리가 나련만. 인숙이의 어머니는 아직 방송국 합창단에 있는 어린 딸이 나중에 대승하리라는 선견지명이 분명히 있었던 모양이다. 엄마의 지극한 정성은 나중에 어린 딸이 성장하여 일류 배우가 되도록 만들었으니 정말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여기에다 두고 한 말인가보다. 물주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흥행도 도시의 대 극장이 아니라 3류 극장이 아니면 지방공연을 하다보니 적자를 볼때가 부지기수였다.

악극단장이라는 명함이야 고귀하지만, 오로지 자금문제로 가극단의 간판을 접을때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죽하면 어머니가 살아생전 재산목록 1호라고 말하며 애지중지하던 재봉틀 까지 팔아 가극단을 꾸려갔으니 당시의 사정이 어땠나를 짐작하고도 남는다.[계속]

*재미동포 이산가족 이북방문 신청문의:
(212)870-2162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중앙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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