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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red>[대담]박순경 교수에 듣는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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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1-03-25 00:00 조회1,9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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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경 교수는 지난해 조선로동당 창건55주년기념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평양에 다녀온 이후 금년 3월초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기독교 학자회의에 다녀왔다. 통일뉴스 취재진이 박교수와의 대담을 다뤘다. 17일자에 보도한 내용의 전문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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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경교수 - 6.15선언 지지하면 누구나 `통일연대`에 참가할 수 있어

4644_4.jpg작년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한때 갈피를 못잡았던 남쪽 민간통일운동이, 올해 예정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위해 최근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올해 희수(稀壽)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 못지 않게 박순경 박사는 통일운동을 위해 현장에서 뛰고 있다. 박순경 박사는 평생을 `기독교, 민족, 이념` 이 세 가지 축들을 가지고 사상적 편력을 쌓아 왔다. 그리고 그 사상에 맞게 실천운동, 특히 통일운동의 중심에 늘 서 있었다. 민간통일운동의 새로운 중심체인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통일연대) 결성식을 이틀 앞둔 13일, `통일연대` 공동 준비위원장인 박순경 박사를 만났다.

일시 : 2001년 3월 13일 오후 2시
장소 : 민주노총 대회의실
대담 : 김치관 기자
정리 : 김명숙 기자
사진 : 조성현 기자


첫 방북시 매일 흥분의 연속

■ 문 : 며칠전 북경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 답 :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지도위원 세 분을 북경에서 만났습니다. 이 분들은 북경에서 다른 사업이 있으신 것 같았는데 추측에는 남쪽 그리스도교의 사랑나누기협의회 인사들이 북쪽 그리스도교연맹 분들을 초청한 것 같습니다. 저도 그 덕에 쉽게 통일원 허락을 받게 된 거죠. 제한된 신학교류라는 취지 아래 제한된 의미에서 북한인사 접촉을 1년간 허락 받았습니다. 다른 데도 갈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지만 매우 설렙니다.

■ 문 : 만나보시니까 어떠셨습니까.

□ 답 : 아 물론 반가웠습니다. 작년 10월 10일에 북한에서도 만났고 12월에 일본 후쿠오까에서 열린 재일 대한 기독교회 주최 연례 세미나에 제가 초청이 되었었는데 거기에 나왔던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분이 이번 북경에도 오셔서 반갑게 만났습니다. 일본 회의 때 참석한 사람은 김현철 지도위원인데 청년으로 신학에도 관심이 많아요.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데 아직 일이 바빠서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하더군요.

■ 문 : 접촉승인도 받았는데 선생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 답 : 그렇지 않아도 제가 타진한 주제가 신학교류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였죠. 그래서 남쪽의 통일신학동지회,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제3세계신학자협의회한국위원회 등 세 단체가 주축이 돼서 신학교류를 어떻게 시도해야되지 않겠는가 하는 제안을 저희 측에서 했습니다.

북측은 어떠한 제안을 받으면 역시 전체적으로 검토해야하기 때문에 그 분들이 즉석에서 답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고려의 여지를 열어 놓은 거지요.

■ 문 : 작년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때 방북이 처음이신가요?

□ 답 : 8.15대회 등 초청을 계속 받았지만 정부가 불허해서 못 갔고 작년에 비로소 놀랍게 갔다 오게 되었습니다.

■ 문 : 소감은 어떠셨는지요.

□ 답 : 아 정신없었죠. 흥분되고. 처음에 가기 전에는 내가 과연 이 흥분을 이겨낼 수 있을까? 쓰러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했지만 비교적 잘 조절을 하고. 그래도 역시 매일 흥분의 날이었죠. 너무 인상이 깊고 강렬했기 때문에 5박 6일을 지나고 돌아와서 한 일주일 이상을 정신을 못 차렸어요. 눈을 감으나 뜨나 그저 의식이 남과 북을 왔다 갔다 했던 거지요.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글을 쓴 거죠. 기록을 남겨야 되니까.

■ 문 : 올해 연세가 77세인데 희수(稀壽) 관련한 기념행사는 없습니까?

□ 답 : 아 그런 거 잘 몰랐습니다. 팔순 때 책이 나오면 잔치를 한다거나 혹은 모인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 문 : 무슨 책을 기획하고 계신데요?

□ 답 : 아주 어려운 책을 번역해 놓았습니다. 20세기 신학의 거물인 칼 바르트의 `교회교약`이라는 책인데 모두 13권으로 부피가 굉장합니다. 한 권당 7백~8백 페이지 분량에다가 깨알같은 글자로 매우 어려운 책입니다. 이 책을 13명이 나눠서 번역하기로 했는데 그 중 나는 제1권을 맡았습니다. 76년부터 번역을 시작하여 절반정도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통일신학 작업하느라 중단했다가 다시 94년 재착수해서 97년 여름에 마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96년 말 다리 골절상을 당했습니다. 잘 붙지도 않는 복사뼈가 부러져 엄청 고생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제가 정신력으로 고친 것 같아요. 하루 7천보 8천보를 지팡이 짚고 산이나 평지를 2시간 반정도 걸어서 완치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걷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금강산도 가고 백두산도 가야하는데 걱정을 많이 했죠. 지금은 다소 거북한데 괜찮습니다.

■ 문 : 강단에 오래 서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지금도 강의를 하고 계신지요.

□ 답 : 66년부터 88년까지는 이화여대에 있었고, 정년퇴직하고 목원대 대학원 초빙교수로 88년부터 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91년에 구속되면서 목원대에서 해직이 되어 그때 이후로 강의를 별로 하지 않고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 강의 제안이 들어오고 감리교 신학대에서도 특강을 의뢰해오기도 했었지만 조건들이 불편해서 응하지 못했죠. 강연은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죠.

■ 문 : 학계에 계시면서 어떻게 통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습니까?

□ 답 : 제가 통일신학에 대한 작업을 집중적으로 시작한 것이 75년부터예요. 물론 통일에 대한 관심은 45년부터입니다. 44년에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났고 항일민족운동가 등을 만나면서 기독교와 민족문제, 45년부터는 기독교, 민족, 이념 이 세 가지 축들을 가지고 사상적으로 생각을 해왔습니다.

46년부터는 신학에 몰두하면서 신학영역에 접어들게 되니까 민족문제 이념문제 등은 접어뒀죠. 접어 두었다가 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나왔습니다. 제가 그때 자각이 들었어요. 마음에 묻어 두었던 민족문제, 이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럽으로 갔어요. 유럽으로 가야 이념 서적들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당시 국내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었어요. 물론 금기였구요.

그래서 스위스 바셀대학에 갔습니다. 그 이유는 그 대학이 내가 신학적으로 존경한 칼 바르트가 말년에 강의한 대학이예요. 그리고 독일로 가서 두 학기 정도를 보내고 연구교수로 바셀대학과 남쪽 튀빙겐대학, 베를린의 자유대학에서 연구를 하고 76년 봄에 한국으로 들어 왔습니다. 주로 이념문제, 오늘의 신앙문제 등을 공부하면서 세 학기를 유럽에서 보냈습니다.

통일신학이란 기독교의 반공반북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하는 것

75년 독일에 있을 때 동아시아 선교부 주최로 열린 `독일 한국 세미나`에서 통일문제를 비로소 신학적으로 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통일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76년부터 통일문제를 거론하니 모두가 무반응이었어요. 교회에서도 무반응, 학회에서도 무반응, 모두가 무반응이었어요. 무반응 정도가 아니라 `박순경이 뭘 몰라서 저런다` 이랬어요. 한편으로는 위험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요.

그러다 통일문제를 다루려니까 역사를 알아야겠더라구요. 그래서 근현대 민족사를 알아야 겠다는 생각에 역사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전공과목도 아니고 청소년기를 일제시대에 보내다 보니 국어와 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니 공부가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틈틈이 개별적으로 공부한 게 다지요. 76년부터 역사연구로 접어드니까 이거 정말 감격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어쨌든 민족인사들의 운동, 사상적 표현, 글 등은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없었어요. 통곡하면서 읽었어요.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선생, 그리고 문일평 선생 등 민족인사들의 역사서적을 읽었어요.

그렇게 공부를 어느 정도하고 통일신학 작업을 했지요. 통일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현재까지 나온 책이 「민족통일과 기독교」(한길사, 86), 91년 구속되고 92년 출판한 「민족통일신학의 여정」과 「통일신학의 고통과 승리」, 98년에 「통일신학의 미래」가 출판됐습니다.

통일신학의 작업이 다른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의 반공반북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줄기차게 해낸거죠. 기독교인들이 굉장히 듣기 힘들어 했지요. 제가 하는 것이 대부분이 강연인데 참 듣기 어려워했어요. 그래도 열정을 가지고 토로하다시피 하니까 생각이 열린 분들은 뭔가 있기는 있나보다고들 생각했죠. 기성 지도층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신학계가 무관심하고. 대체로 한국 신학계가 내 통일신학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도외시하는 경향이었어요.

그런데 의외로 북에서 반응이 좋았어요. 북에서 통일신학 책들을 많이 공부하고 청년들이 제 책을 가지고 많이 공부했다고 들었지요. 지난 10월 10일 방북시에도 만난 사람 중에 제 책을 읽었다고 얘기하기도 하더군요.

■ 문 : 91년에 구속된 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죠.

□ 답 : 91년에 재일 대한기독교 주최 `평화통일과 기독교 선교에 관한 동경회의`에서 주제 강의를 맡았는데 강의 제목이 `기독교와 통일의 전망`이었습니다. 거기서 주체사상 일부를 다뤘지요.

그것을 다루게 된 동기는 91년 봄, 5월에 미국에서 북미주 기독학자협의회 통일세미나가 열렸어요. 거기에 북한 인사가 초청되었고 우리도 저를 비롯해 여러분이 가게 되었지요. 북한의 주체사상의 대가로 알려진 박승덕 교수가 주체사상을 강연하면서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했지요. 저는 신학자로서 기독교와 주체사상을 다루어야 하겠다, 더 이상 미루면 안되겠다고 하는 자극이 들었지요.

그래서 그 분이 얘기했던 몇 가지의 주제를 이어받아 일본에서 강연할 때 신학적인 주제들을 가령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원한 삶`, 이것을 주체사상의 집단영생론과 관련지어 설명을 했고 인간개조론 또는 사상혁명을 신학적으로 재조명했고 남한 그리스도인들이 수령 우상 등 별 얘기가 많아 수령론을 다뤘지요. 무슨 용기가 솟구쳤던지 남한내 주사파도 다루지 못한 수령론을 다루게 되었지요. 이렇게 집단영생론, 인간개조론, 수령론의 세 측면들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하고 재조명한 거예요.

어떻게 했느냐하고 설명하기는 지금은 좀 어렵구요. 하여튼 그랬더니 거기 참석한 목사님, 장로님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분위기가 얼어붙고 무서워서 내가 설명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설명을 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힘들게 강의를 마쳤어요. 어떻게 수령이 독재가 아니냐고 지적을 하더군요. 그리고 김일성을 왜 우상이 아니라고 하느냐? 독재자를 왜 독재자라고 하지 않느냐? 등등이었어요. 독재자가 아니라는 설명은 좀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자리에서 설명을 했습니다.

`북한이 남한의 미래`

노동당 독재, 김일성 독재는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면 이 독재자 이론이 막스주의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그것은 막스주의 자체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실현 과정에서 불가피했을 것이다. 레닌 혁명에 나오잖아요. 공산당 독재가 왜 불가피하냐하면 이러한 정치과정은 정치권력을 양당정치다 다당정치다 해서 권력 나눠먹기식은 안 된다. 그래서 어디까지는 공산당 혹은 노동당 독재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독재체제가 언제까지 필요한지는 나도 모른다. 그것은 변화과정에서 생기리라는 예상은 할 수 있지만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이 독재는 우상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생긴 재벌독재, 군사독재 등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죠. 이것은 궁극적인 목표, 인류사회의 새로운 건설, 혁명과 건설을 위해 필요불가불한 그런 의미의 독재요 그런 의미에서 생겨난 독재라고 설명했죠.

그러나 사람들이 못 듣죠. 들을 여지가 없죠. 결국 인터뷰를 했는데 또 설명해도 사람들이 알아듣질 못해요. 3박 4일을 지내고 한국 공항에 들어오자 저를 체포하려고 정보국 사람들이 나와 있더군요. 그들도 만전을 기하기 위해 증언을 받았더군요. 조사 받을 때 증인들의 증언을 들려주더군요. 내용을 보니 전부 반공, 반북이었어요. 내가 듣다 못해 그만 듣겠다고 했지요.

내가 아는 영락교회 목사는 나를 구속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얘기하고 다녔지요. 그때 당시 종로5가 NCC가 재일 대한기독교 주최 통일세미나를 반대했어요. 그래서 나를 돕지 않았죠. 그때 구속이 되었지요. 안기부와 종교계가 제일 강경하게 나의 구속을 주장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불구속 입건하자고 했죠.

구속된 지 106일만에 풀려났어요. 특히 외국에서 탄원서, 항의서들이 수없이 날아들었어요. 대통령 앞으로. 국내에서는 여성들이 석방운동을 굉장히 잘했어요. 여성들이 운동을 그렇게 잘하는 거 처음 봤어요. 굉장히 잘했어요.

공소문을 보니 범민련 남측 준비위 조직 부위원장 직책 그리고 범민족대회 활동 이런 것이 기본조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경강의였죠. 그런데 범민련대회 관계는 조사 자료들이 이미 나와 있었으니 검찰이 별로 조사할 것이 없었어요. 조사할 것은 강연내용인데 그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아나요. 아무 것도 모르지. 그러니까 나더러 진술서를 쓰래요. 허구헌날 아무거나 쓰는 거예요. 검사는 자기 볼일 보느라고 들락거리고 저는 계속 쓰고 있는 거지요.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종말론, 교회론 등 신학적인 얘기였지요. 나중에 집중적으로 조사할 때 검사가 묻더라구요 이건 무얼 의미하냐고.

제가 답변하기 제일 힘들었든 게 있어요. 제가 `북한이 남한의 미래다` 그랬어요. 우리 남한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세계적으로 뻗어 나가려면 북쪽으로 뚫고 나가야 한다고 그랬어요. 북쪽과 통일되고 만주 중국에 퍼져있는 우리 동포들을 규합하고 우리 경제권으로 삼아야 한다. 남북 경제와 중국 만주 일대와 소련, 서아시아 등에 퍼져 있는 사람들을 규합하면서 경제를 재건하고 건설해 나가야 한다고 답변했지요. 사실은 그게 제 의도였지요. 그리고 연방제 외에는 통일의 길이 없다고 끝까지 고집했어요.

재판장에는 제 통일신학 강연을 들으려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왔어요. 재판장에 진술서를 그렇게 썼다고 하니 다 들으러 온 거예요. 그때 제가 몰랐던 분들이 꽤 많았어요. 80년 광주항쟁이 일어나고 그를 계기로 삼민투나 민민운동이 일어났잖아요. 그 여세를 타고 통일지사들이 많이 나타난 거예요. 저는 외국에 많이 나가 살았기 때문에 그 맥을 몰랐지요. 아마 이런 이유로 검찰에서도 무사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감옥에 들어갔더니 못 살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내가 그렇게 못 참나 싶어 1년은 참아야지 하고 다짐을 하기도 했지요. 그래도 제가 보람으로 느낀 것은 그런 인사들이 이런 일이 없었으면 어떻게 제 동경 강의를 읽어요. 누가 아랑곳이나 하겠어요. 이게 나에 대한 보답이다 하고 그때부터 그분들과 어울리게 되었지요. 가장 큰 소득이지요.

90년, 91년이 통일운동의 열기가 굉장히 일던 시절이었는데 그때의 통일운동을 주도한 그 맥을 다 알고 있고 같이 했고. 그 맥은 전민련 조통위예요. 나는 조통위의 위원으로서 87년부터 서서히 통일운동권으로 접어들어 88년부터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89년 범민족대회 남북실무회담 때 내가 학계 대표였어요. 그리고 90년 범민족대회 때 실무회담 대표였어요. 신창균, 조성우, 이해학, 김희선 등과 함께. 그리고 93년까지 범민련대회에 참석했지요.

■ 문 : 현재 통일운동 진영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 답 : 현재 제가 보는 문제는 통일운동진영이 갈라져 구심점이 없는 점이예요. 지금 현재로서는 통일연대가 무난히 뭘 해 나가는 것 같거든. 그런데 전 그렇게 안 봐요. 앞으로 가령 연방국이 탄생하면 민족연방회의를 할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어요. `통일운동 하던 사람들 당신네들끼리 연방회의 하시오` 할 거예요?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 뭔가에 참여해야 하는데 이렇게 갈라져서...

그래서 통일운동진영의 단일운동진영으로의 통폐합을 작년부터 주장하는데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일단 당면과제가 통일연대인데 한시적이라고 하지만 과제가 한시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단기적으로 생각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공동선언 1. 2항이 어려운데 이것을 도출해 내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래 걸리겠어요.

통일운동진영이 갈라져 구심점이 없는 점이 가장 큰 문제

그런데 현정부에 대한 기대는 평화협정, 평화체제 구축까지는 정부가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끌고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 했어요. 그런데 미 부시정권이 긴장관계가 적절히 유지되어야 무기도 팔아먹고 주한미군도 유지하고, 미국의 패권과 군사복합체 경제 세계전략 등이 지역적인 긴장관계가 필요한 거예요. 이라크 친 것이 그 예이잖아요. 이게 말이 됩니까? 유럽 여러 나라도 그렇고 유엔도 그렇고 이라크에 대한 제재를 해제해야 한다고 그러는데 미국 정부는 고삐를 쥐고 안 놓아요.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듣기로는 우리 남한정부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기 방남을 서둘렀다고 그래요. 그런데 미국이 한미정상회담 할 때까지는 연기하라는 요청 때문에 연기한 거라고 그래요. 우리 정부가 이렇게 미국에 끌려가고 있어요. 그리고 이번에 한미정상회담 결과를 검토해 보니 NMD에 관해 김대중 대통령이 동맹국과 협의해 보겠다고 했답니다. 푸틴하고 만나 NMD에 반대되는 ABM조약을 지키도록 합의했으면 그것을 일관되게 끌고가야 된다고 봅니다. 이것은 우리 정부가 미국에 대해 주도권을 만족스럽게 행사하지 못하는 것 같아 유감스럽습니다.

그리고 제네바 북미 합의서를 미국이 깨려고 하는데 국제적으로 약속한 것을 미국의 횡포로 자기 멋대로 갈아치우고 변경을 시킬 수 있나요? 우리 남쪽이 좀 강경했어야 하는데 미국정부가 남한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원칙적으로 동조한다고 그랬거든요. 또 남북관계는 남한이 주도한다 등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것에만 합의한 것처럼 해서 김대중 대통령의 비위나 맞춰준 것처럼 해준 것 같거든요. 미국의 셀릭 헤리슨의 글에서는 미국 부시 정권이 김대중 대통령을 면전에서 빰을 친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김대중 정부가 어떤 의미에서는 주체적인 외교를 하느라고 해왔고 6.15공동선언을 성립시켰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주체성을 발휘한 것이나 역시 미국에 대해서는 종속적인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 문 : 통일연대가 출범하기까지 어려운 점들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 답 : 통일연대를 발의하고 많은 단체를 포괄하려는 노력에는 제가 별로 한 게 없습니다. 중진들이 많은 수고들을 했습니다. 그런데 진척이 쉽지는 않더군요. 최근에 참여연대와 여연(여성단체연합)이 참가를 하겠다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명칭에 `평화`라는 내용을 여연이 제안해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경실련 통일협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민족회의는 처음부터 참석했어요. 민화협은 자체적으로 들어오기 힘들고 어렵다고 하나 들어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민족회의가 사실은 99년에 민화협을 만들었잖아요. 그때 우리가 탈퇴했죠. 통일운동 진영이 관변 단체 성격을 띄면 안되잖아요. 물론 우리가 정부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통일운동진영이 존립해야 우리 소리를 낼 수 있잖아요. 그래서 대거 탈퇴를 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제 통일연대가 되니까 다시 모이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는 잘 됐다고 봅니다. 우리가 영원히 헤어질 수는 없잖아요. 6.15공동선언 실현은 범국민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안돼요. 정말 `6.15공동선언을 지지하는 단체라면 어떠한 단체라도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이 통일연대의 원칙입니다.

■ 문 : 아무래도 여러 단체가 모여 만들어진 조직이라 어려움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 답 : 각자 하면 문제가 없지만 합쳐서 하는데는 문제가 생길 수가 있는데 잘해주기만 바라고 그저 서로 양보하며 잘해 주길 부탁했었습니다. 어느 단체도 소외시키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젊은 중진들이 알아서 다 잘해나가고 있습니다.

■ 문 : 출범이후 통일연대의 주요 사업이나 방향을 소개해 주십시오.

□ 답 : 통일연대가 15일 결성하면 긴급한 사업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남인데 우려점은 있습니다. 표면화하기는 뭐한데 우선 신변안전이 걱정입니다. 대다수 국민들이 통일연대를 환영하고 정부 정당이 통일연대를 호응해 준다면 그런 위험의 가능성은 불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은 그저 기우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토론회를 거치면서 보니까 경실련 통일협회, 여연, 우리민족서로돕기 등 시민단체들은 환영단을 대대적으로 조직하지 말고 시민들이 앞장서서 하게 했으면 하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안 봐요. 앞에 나서서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라 통일연대 참여단체 모두가 총동원해서 엄호하고, 시민들과 국민들은 앞에서 환영하는 방식이 어떨까 싶어요. 정확하지는 않아요. 이건 혼자 구상하는 거예요. 앞으로 환영단을 구상하면 어떻게 할까? 이런 형식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논의를 하게 될 겁니다.

통일연대, 김정일 위원장 방남시 환영단 구성할 것

그 다음은 5.1절 행사로 노동계가 금강산에서 토론회가 있을 것 같고 6.15부터는 좀 바빠요. 15일 당일에는 남북해외 행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것 같은데 오늘 조직회의에서 제안된 것인데 6.15이전에 남북실무회의를 할 예정입니다.

통일연대 사업은 조금 두고 보셔야 합니다. 우선 급한 것이 환영단, 환영형식 등과 6.15때 큰 행사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7.27행사는 북쪽은 북쪽대로 하고 우리는 고민중입니다.

그리고 반 NMD TMD 등 반미전선이 전개될지 모릅니다. 전 반드시 해야한다고 보는데 통일연대가 이것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통협이 이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미 부시 정권이 자기 멋대로 정책을 펴는 것을 보며 반미전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절실히 했습니다.

■ 문 : 지금까지는 주로 정부 주도의 남북관계가 진행되어 왔는데요. 민간 재야 쪽에서 첫 발자국을 떼는 통일연대가 어떤 위상을 갖게 될 것 같습니까?

□ 답 : 정부에도 자극도 되고 힘도 될 듯합니다. 김대중 정권이 이 힘을 빌려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6.15공동선언의 제1, 2항이 실현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밀어야지 정부가 솔선해서 하기 어렵습니다.

■ 문 : 그간 민간 통일운동이 내부 갈등이 많았습니다. 통일연대가 민간 통일운동의 통합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보십니까? 또한 작년부터 주창하신 단일한 통일단체를 만들자는 논의와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겠습니까?

□ 답 : 작년에 심각한 갈등들이 있었는데 통일연대 하면서 해소된다고 봅니다. 통일연대가 좋은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갈라진 통일운동진영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단일한 통일조직은 아직 논의하기가 어렵고 제가 소망하는 정도입니다.

■ 문 : 현재 통일연대 내부에 이견은 없는지요?

박 : 지금까지는 이견이 별로 없었고 설사 있더라도 조율이 잘된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점에서 범민련 남측본부는 다른 시민단체들을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서 뒷전에서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죠. 그러나 범민련이 많은 고초를 겪어왔기 때문에 제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었겠죠. 그래서 어쨌든 그런대로 범민련이 혼자 서면 `이크`하겠지만 여럿이 같이 서면 좋을 듯 합니다. 범민련 합법화 과정에서도 좋을 것 같습니다.

■ 문 : 앞으로 통일연대가 나아가는 길에 가장 우려가 되는 점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인지요.

□ 답 : 우려보다는 몇 가지 보류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가령 정부의 포용정책이라는 말을 원칙적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포용이 아니라 화해정책이나 통일정책이라고 표현해야지 맞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원칙상 신자유주의적인 또 대미예속적인 그런 공조관계를 지속하고 그 물줄기에 입각해 있는데 어디로 누굴 포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원칙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데 그래도 종래의 정권과는 달리 6.15공동선언을 성립시켰다는 점에서 공로를 높이 평가해요. 그러나 원칙적인 개념에서 포용정책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요.

또 하나의 고민은 통일연대가 어떻게 나갈까? 하는 것입니다. 시민단체들을 포괄하다 보면 방향이 다소 흐려질 수 있는 소지가 있으나 이런 문제들은 그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는 예상하고 있는 문제들이 있기는 하지만 현명하게 대처하리라 봅니다.

북쪽에 대해서도 우려점이 많습니다. 북쪽이 내가 우려하는 것보다 원칙적이고 강인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내 우려가 기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가령 연방제 형식으로 통일이 되면 남북의 체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을 보류하고 있습니다. 혹시 글쓸 때 이런 얘기를 쓸지 모르겠지만요.

■ 문 : 현재는 누구와 함께 사시는지요?

□ 답 : 한신대에서 조직신앙, 여성 신학을 강의하는 김애영 교수와 삽니다. 그 사람은 내가 구속되었을 때 석방운동을 조직적으로 굉장히 열심히 했습니다.

■ 문 : 독신으로 사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 답 : 공부하고 일하고 하다보니 결혼할 수 있겠어요? 일은 결혼해서도 할 수 있지만 공부는 결혼해서는 하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북한에서는 독신녀, 독신남이 없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북경에 가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는데 과학분야, 항공분야에 많은 독신녀, 독신남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만난 리춘구 목사도 결혼을 안하려고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것이 가능하냐고 물으니 왜 그게 가능하지 않냐고 하면서 뜻이 있는 사람들은 독신녀, 독신남들이라고 높이 평가하더군요.

남북 청년은 사회정의를 위한 변혁에 기개를 펼쳐야

내가 북한에 가서 또 하나 놀란 것은 뭐든지 봉사라는 거예요. 과학을 통해 봉사, 의료를 통해 봉사, 뭐든지 봉사예요. 감동받은 게 너무 많아요.

■ 문 : 젊은 네티즌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 답 : 통일문제, 민족사회문제가 10년 20년에 끝날 문제가 아니예요. 50년 100년 내다봐야 해요. 내가 염려하는 것은 그 이상을 대를 이어서 후대들이 더 발전시키고 실효있게 해야 해요. 우리 세대는 너무 힘든 싸움을 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힘들겠지만 일관된 사회개혁, 민중해방, 민족평등, 사회평등, 세계평화 등 이런 문제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켠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해서 그런 거대담론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나는 남북이 교류하고 힘을 합치면 위대한 힘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민족을 위해서 새 민족사 창조를 위해서, 통일국가야말로 `인민`과 국민에게 복무하는 그런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권력을 나눠 먹고, 남용하고, 국민의 돈을 다 집어삼키는 국가가 아니라 정말 국민과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국가체계가 되어야 합니다. 남북이 힘을 합치면 그 아름답고 훌륭한 사회를 창출해 낼 수 있는데. 그래서 그런 기대를 후대에 바랍니다.

현재 우리가 최대로 창출할 수 있는 단계는 연방제 이상을 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연방제도 굉장히 어렵지만요. 하여튼 어떤 형식으로든 연방제 형식의 통일국가를 창출해 낸다면 체제들을 연구해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후대들이.

남북이 청년의 기개를 어디에 사용할까? 사회정의를 위한 변혁이 필요합니다. 민족민주통일운동과 민족민주사회운동을 민민운동이라고 통칭하고 이 민민운동은 세계운동이 돼야합니다. 물론 배타적인 것이 아니어야 되겠죠. 민족이 새로워져야 하기 때문에 민족이라는 말을 씁니다. 우리 민족은 미국에 너무 당하니까 우리 민족끼리라고 하지만 우리 민족끼리만 잘 살자 그런 거 아닙니다. 우리 민족이 피억압된 민족이기 때문에 모든 민족을 해방시켜야 하는, 해방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민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주성으로 풀이하는 것이 맞습니다. 지난 6.15공동선언이 얼마나 자주적이었습니까? 저는 굉장히 놀랬어요.

■ 문 : 요즘 생활이나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시죠.

□ 답 : 저 개인적으로 현재는 시간론을 성서적으로 풀이해 나가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두 편이 이미 실렸던 기장신학연구소에서 나오는 `말씀과 교회`라는 신학지가 있는데 여기에 글을 실을 예정입니다. 이번에는 타락설화와 시간의 상실문제, 족장들의 구원의 시간 등 창조와 구원의 시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민족사, 세계사를 다뤄야 하는데 미래의 원리가 혁명의 원리예요. 변혁의 원리. 그것이 총 주제예요. 미래가 하나님의 세계에서 온 거예요. 신적인 차원이라는 거죠. 거기에서 보면 과거 역사가 의미 있게 조명이 되는 거죠.

■ 문 : 북경 회의의 노독이 풀리지도 않으셨을텐데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과 통일연대의 활동에 발전을 기원드립니다.


박순경 박사 주요 약력

1923년 출생
1948년 서울 감리교신학교 졸업
1951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B.A.
1958년 미국 EMORY대 신학 B.A.
1966년 미국 DREW대 대학원 조직신학 PH.D.
1974~76 스위스 BASEL대, 독일 TUBINGEN대, 서 BERLIN 자유대학에서 역사철학 연구
1966~88 이대 기독교학과 조직신학, 역사신학 교수
1980~82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초대회장
1986~90 한국여성신학회 초대회장
1988년 대전 목원대학 대학원 초빙교수
1988년 자주 민주 통일국민회의 통일위원회 위원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
1989년 기독교 평화연구원 이사, 한국통일신학 동지회 부회장
1995년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민족회의) 공동의장
1999~현재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자통협) 상임고문
현재 민주노동당 고문
현재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통일연대) 명예대표

통일뉴스 200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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