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사제지간 통일이야기를 나눈 박도선생과 진천규 대표/머리 하얘진 제자들에게 한 말 "옥류관서 냉면 먹을 날 기다리네"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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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사제지간 통일이야기를 나눈 박도선생과 진천규 대표/머리 하얘진 제자들에게 한 말 "옥류관서 냉면 먹을 날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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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20-01-10 00:22 조회1,84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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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지간 언론인이 된 오마이뉴스 박도선생과 그의 제자 진천규 통일TV대표가 지난 이야기들과 사진들을 올려 독자들에게 흐뭇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오마이뉴스에 올라온 내용을 여기에 전재하여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머리 하얘진 제자들에게 한 말 
"옥류관서 냉면 먹을 날 기다리네"
김홍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진천규 통일TV대표와 통일 방안을 이야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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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교동 김대중 이희호 사저 대문 앞에서(왼쪽부터 김홍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 기자, 진천규 통일 TV 대표.) ⓒ 김정호(민화협)

  
두 제자의 초대

지난 연말 두 제자가 신년 하례 겸 오찬이나 나누자고 연락이 왔다. 한 제자는 1972년 3월 1일 서울 오산중학교 1학년 신입생 입학식장에서 만나 3년간 국어를 가르쳤던 진천규 통일 TV 대표이다. 또 다른 한 제자는 1979년 3월 2일 이대부고 입학식장에서 만난 이후 2년간 역시 국어를 가르쳤던 김홍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이다.

오랜만에 아주 기쁜 마음으로 오버코트에 중절모를 꺼내 쓰고 지난 6일 원주역에서 오전 9시 34분 청량리행 중앙선 열차를 탔다. 서울로 가는 1시간 남짓 동안 나는 그들과의 이런저런 추억을 되새김질했다.

1971년 6월 30일, 군에서 전역한 나는 곧장 경기도 여주의 한 중학교에서 그해 학년말까지 근무한 뒤 서울로 전근케 됐다.

그때 서울 마포구의 한 여자고등학교와 용산구의 오산(五山)중학교, 두 학교에서 나를 불렀다. 그때 나는 오산중학교로 발길을 돌렸다. 그 까닭은 내가 오산학교 출신 김소월 시인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중고교 시절에는 그의 시를 거의 다 외울 정도로 심취했다. 또 하나 이유는 오산학교 교실마다 붙어 있었던 독립운동가 남강 이승훈 선생의 사진과 유훈 때문이었다.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하여 쓰게 하라. 그리고 서로 돕고 낙심하지 말고 쉼 없이 전진하라."

나는 그 말씀에 시쳇말로 '뿅'갔다. 우리나라에 저런 위대한 선각자가 계셨다니...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그해 나는 신출내기 교사로 중학교 1학년 12반 담임을 맡게 됐다. 그 학교는 별나게도 삼일절 날에 개학식과 입학식을 치렀다. 이는 교조 남강 이승훈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한 후학들의 눈물겨운 정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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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천규 통일 TV 대표 ⓒ 이승렬(민화협)

  
담임 반 학생들을 껴안아 주다

그날 나는 처음 보는 신입생들이 어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꼭 토끼새끼를 보는 듯했다. 그래서 운동장에 정렬한 70명 담임반 학생들을 하나하나 껴안아줬다. 오산중학교가 남학교라 다행이었지, 만일 여학교였더라면 그날로 잘렸을 것이다.

진천규 통일 TV 대표는 그때 내 반 학생이었다. 이후 <한겨레> 사진보도 아래 진천규 기자라는 이름을 보고 혹시 그가 아닐까 싶어 전화로 문의하자 바로 그였다. 대학에서 토목공학과를 전공한 그에게 '왜 사진기자가 됐느냐'고 묻자 뜻밖에도 바로 나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봄가을 소풍이나 체육대회 때 사진을 찍어줬다. 그 모습에 매료돼 부모님을 졸라 카메라를 장만하게 된 게 평생 직업이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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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공항 대합실에서(왼쪽부터 기자, LA 한국일보 진천규 기자, 백범암살범 추적자 권중희 선생). ⓒ 박도

 
2004년 1월 31일. 권중희 선생과 나는 워싱턴D.C. 근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으로 가는 길에 비행기를 환승하고자 로스앤젤레스 공항 대합실로 나왔다. 꺽다린 그가 "선생님!" 하고 손을 치켜 들었다. 그의 주선으로 우리는 LA 동포들로부터 과분한 환대를 받았다.

이즈음 그는 재미 언론인 신분으로 북녘을 제 집 드나들 듯 오가고 있었다. 19차례나 북녘을 방문하여 그곳의 산천과 사람 사는 모습들을 여과 없이 남녘 동포에게 전해 주고 있다.

그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겨레 마음에 잦아진 통일의식을 북돋아주고 있다. 그는 이 시대의 참다운 언론인이요, 통일꾼으로, 겨레의 평화와 통일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겨레의 소중한 자산이요, 올곧은 겨레의 머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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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걸 민화협대표상임의장 ⓒ 이승렬(민화협)

 
사형수의 아들을 만나다

1979년 3월 2일 김홍걸 학생은 이대부고 신입생이었다. 그해 나는 1학년 3반 담임이었는데 그는 2반이었다. 그 이듬해 나는 2-2반 담임을 맡았는데, 그는 2-1반이었다. 하지만 국어는 단위수가 많았기에 거의 매일 만났다. 그때 그의 아버지 '김대중'은 이름 석 자조차 신문지상이나 방송에 오를 수 없었다. 재야 가택연금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서울의 봄'에는 유력 대권주자로 그리고 그 해 5.18 이후에는 내란음모의 우두머리로 사형선고를 받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는 그런 아버지를 둔 탓으로 학교에서 도무지 말이 없었고, 늘 침울해 보였다.

나의 아버지는 경북 구미 태생으로 고향 선배 박정희 대통령보다 당시 김대중 의원을 더 지지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DNA를 조금은 물려받았는지 김홍걸 학생을 예사롭게 보지 않으면서 서로 눈빛으로 대화했다. 한때 그는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었다. 그 포화가 잦아질 즈음 나는 그에게 간곡한 편지를 보냈다.

"나는 자네가 이 땅의 시인으로나 아니면 통일꾼으로 남북을 오가면서 통일을 앞당기는 그런 일을 드러나지 않게 하거나, 현대사 특히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그런 학자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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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 삼일포 쇠다리 위에서(왼쪽부터 님측 민화협 대표상임의장 김홍걸, 기자, 북측 민화협 김영대 회장. 2018. 11.) ⓒ 민화협

   
'조국찬가'를 부르는 시인이 되라

2017년 12월 19일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하고자 마침내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에 취임했다. 그날 그 자리에 옛 훈장을 잊지 않고 초대했다. 나는 그날 만장한 내빈들에게 다음과 같은 건배사를 했다.

"조금 전, 문희상 전 국회부의장님께서 김홍걸 의장의 연설과 인품을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미 38년 전에 김홍걸 학생이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는 재학시절 진리에 대한 탐구욕이 매우 강한 학생으로, 문학과 역사에 특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저는 김홍걸군이 장차 통일운동가나 시인이 되기를 바랐고, 또한 그 길로 가기를 권유했습니다. 이제 그가 통일운동가로 우뚝 섰으니, 나라와 겨레를 위해 큰일을 이룬 다음, '조국찬가'를 부르는 시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저런 추억을 되새김질 하는 동안 열차는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약속한 장소에서 두 제자를 만났다. 그날 김홍걸 의장은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났나 보다. 그래선지 생전에 아버지가 단골로 다녔던 서교동 복어국 집에서 점심을 대접하고, 어머니 손때가 묻은 동교동 사저로 옛 훈장을 안내한 뒤 거실에서 차담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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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 주선으로 선대에 이은 김정은 김홍걸의 만남. ⓒ 민화협

 
두 통일운동가는 차담에서 지난해 판문점 회담 이후 남과 북의 대화가 단절되고, 관계가 경색된 데 대한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훈장 티를 버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두 제자에게 조언을 했다.

"막힌 길은 자네들이 뚫어야 하네. 부모가 타의로 헤어졌으면 그 자식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청춘남녀가 열애 중인데 부모나 친지가 결혼을 반대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나의 문딥식 수업에 두 제자는 금세 답을 했다. 나는 그들의 대답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언젠가 그들이 나에게 약속 말을 상기시켰다.

"나는 자네들과 함께 평양 대동강변 옥류관에서 냉면 먹을 그날을 고대하고 있네."

그러자 진천규 대표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희들이 그날을 앞당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홍걸 의장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긍정의 대답이라는 걸 늙은 훈장은 이심전심으로 읽었다.

그날 밤 원주로 귀가 한 뒤 나는 밤이 깊어지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두 제자가 너무 사랑스럽고, 대견하고, 자랑스러우며, 내 삶의 보람 같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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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손세영님의 댓글

손세영 작성일

진천규 통일TV 대표님

선생님(박도)과  제자(진천규 통일TV대표)님과의 훈훈한 지난 이야기 좋군요.
멀지않는날  꼭 선생님 모시고 평양 옥류관에서 냉면 대접해드리길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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