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05-18 00:00
조국평와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전금철박사
 글쓴이 : minjok
조회 : 4,869  
1985년 음악의 도시 비엔나의 겨울은 줄곧 회색빛을 띤 채 살을 에이는 매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영화 《사랑은 오직 한길》에서 요한슈트라우스의 생애를 그린 《그레이트 왈츠》에서 그처럼 아름답게 비쳐졌던 비엔나…. 이 거리에 가면 모짜르타가 서 있고 저 공원에 가면 요한슈트라우스가 왈츠를 연주하고 있고 번화가에 들어가면 수세기 묵은 오페라 하우스가 거기 우람하게 서 있고 거리마다 기둥마다 골목마다 서 있는 조각, 조각들 해묵은 포석들 마로니에 가로수 그리고 고색 창연한 고딕 양식의 사원들과 거리의 가로등. 온통 금으로 장식된 바로크풍의 궁전들, 하이얗게 눈이 내려쌓인 비엔나 교외의 풍경은 크리스마스 카드 속에 그림이었다. 장사를 하러 나온 것이 아니고 심심해서 나와 서 있는 듯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싱들벙글 웃고만 서 있던 거리의 군밤장수들. 수백 년 묵었다는 저 뒷골목 민속 레스토랑의 에이프런을 예쁘게 두른 금발의 아기씨들을 그리고 악사들을 잊을 수 없다. 그나마도 가까스로 얻어 들어간 3류 싸구려 여관의 그 삼각형 조그만 방 아침상의 그 돌처럼 빵조각 커피 한 잔을 잊을 수 없다.
그때가 미침 북에서 수해 구호 물자가 남으로 내려온 다음해였다. 《북과 해외동포기독자간의 대화》 회의 중 휴계 시간에 미국에서 간 우리 일행이 선물로 가져간 캘리포니아의 싱싱한 오렌지를 한 박스 내놓았다. 이것은 남에서 가져온 《구호 물자》라고 하면서. 그러자 북측의 누군가 하는 말이 《우리가 가장 품질 좋은 쌀을 보냈는데도 판문점 검열이 대단하던데 이거 먹어도 되는 겁니까? 이 속에 혹시 수류탄 들어 있는 거 아닙니까?》 회의장에 폭소가 터졌던 일. 또한 무시론 사회에서 온 그들 북측 대표천湧 대화 기간 중 아침마다 내 남편 홍동근 목사가 집례하던 조찬 기도회에 함께 참례하여 묵묵히 예배 순서를 따라 주었던 일, 그리고 《북과 해외기독자간의 대화》 합의서 성명 발표가 있기 전날 밤 결코 그들 북측 대표단에게 우리의 주장을 양보할 수 없다며 심야의 비상 소집령(?)에 의해 있었던 우리측 해외 대표단들의 철야토론회.
4일간의 《대화》가 끝나고 마지막 연회석상에서 파티가 절정에 오르자 마지막 장식하며 벌어진 신의주 부산, 부산 신의주간의 기차 놀이 한마당. 그것이 울분을 터트리는 잔치, 분노와 설움의 잔치인 줄도 모르고 그 것이 40년 별거 가족의 만남인 줄도 모르고 그 흥겨운 자리가 덩달아 신이 나는데 그냥 구경만 할 수 없았다. 어엿차 나도 한몫 마치 토끼 잔치에 기린이 끼어든 듯 가다가다 하나씩 끼어서 멋없이 껑충껑충 뛰놀던 그 꺽다리 비엔나 호텔의 요리사 아저씨들, 그들을 내가 통일이 될 때까지 잊을 수는 없으리라.
우리가 비엔나에 도착해 《북과 해외동포기독자의 대화》 회의 장소인 교외의 어느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호텔로 향하던 날 이미 며칠째 눈이 퍼부은 듯 비엔나 시가를 조금 벗어나자 거리는온통 눈 속에 파묻힌 듯 백설의 천지였고 그날도 진누깨비 눈비바람이 몹시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눈 속을 헤치며 달리던 승용차 앞자리에 동승하여 우리를 안내해 주시던 그 분, 그리고 회의 기간 동안에도 어쩐지 우리 주변을 가까이 하며 내 남편 홍동근 목사와 친숙해 하던 그 분, 또한 《대화》가 끝난 뒤 우리 일행의 비엠나 관광을 도우려 거리에 나설 땐 두툼한 코트 차림에 마후라를 두르고 저 《닥터 지바고의 털모자》를 자연스럽게 멋지게 쓰고 다니던 그 분, 그분이 바로 저 북한을 대변하는 판문점의 외교관, 점금철 박사라는 것이 내 인식 속에 들어와 자리잡게 된 것은 실은 그후에도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 일이다. 그리고 수년이 흘러간 지금 비로소 나는 때때로 회상케 된다.
그 비엔나 교외의 호텔 식당에서 혹시 로비에서 내 남편 홍동근 목사와 전금철 박사, 두 남자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자, 전 선생 이젠 평양에 교회 하나 지읍시다. 그리고 십자가 하나 세웁시다.》
《좋습니다. 홍 선생. 조국에 돌아가면 토의해 보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평양에 교회를 세우면 홍 선생은 서울에 우리 노동당 당사 하나 짓고 그리고 빨간기 하나 내걸읍시다. 하하.》
《자, 전 선생 우리 기독교를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지 마십시오. 여기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고 앉아서 경건만 찾지 않고 몸소 행동으로 나서는 《해방신학》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자, 제가 여기 전 선생님께 선물로 드릴려고 해방신학 책 몇 권 가져왔수다.》
《고맙소, 홍 선생, 그럼 제가 돌아가 해방신학 공부를 할 터이니 대신 홍 선생은 돌아가 우리 주체사상 공부 좀 합시다. 하하.》
그리고 그들은 헤어진다. 1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들은 또다시 헬싱키에서 혹은 비엔나에서 재상봉을 하게 된다.
《전 선생, 지난번에 제가 드린 숙제 어떻게 됐소?》
《아, 홍 선생 숙제 말이요? 해방신학 공부 많이 했습니다. 자 얼마든지 물어 보시오. 척척 대답할 터이니, 하하.》
《자, 그럼 홍 선생 제가 드린 숙제는 어찌 됐소?》
《주체사상 말씀이죠. 열심히 공부했지요. 그런데 《진리는 하나》라고 주체사상과 해방신학 어딘가 서로 통하는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기독교가 공산당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고 또 어찌보면 공산당이 기독교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하하.》
1981년 《북과 해외동포기독자간의 대화》가 시작된 이래 지나간 10여 년 세월, 철두철미한 반공 사회로부터 모진 돌매 속에서 꾸준히 진행해 온 남과 북의 대화 속에 두 남자 사이에 키워 온 우정은 각별한 바 없지 않다. 때로는 내가 방북할 때마다 그가 친구의 아내에게 베푸는 그 어느 영국 신사에 비할 바 아닌 그 깍듯하고 정중한 예우을 보더라도….
우리 한반도 남북 전인민을 잠시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1970년 7.4공동성명. 그것이 있은 후 남북조절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북측 대변인으로서 판문점에 나와 남측 대표들과 대좌해 오는 몇 사람 북측 외교인들이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유별히 우리에게 낯익은 얼굴이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전금철 박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남북 대화의 문을 트고 분계선을 허물며 마침내 통일을 이루자고 서로 마주해 온 지나간 20여 년 세월. 그는 수없이 판문점을 드나들며 과연 무엇을 생각했으며 무엇을 느끼고 체험했는가. 내가 필기 준비를 해가지고 그의 앞에 마주 앉자 그는 이미 한 나라의 대표적 외교인의 한사람으로서 숱한 접견의 체험이 있는 듯 나의 질문이 필요없이 자문 자답하듯 우리 민족의 숙원이며 지상 과제인 통일에 관련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일사천리로 엮어 나갔다.
그는 먼저 자신의 가정 배경을 들려준다. 1934년생인 그는 함경북도 웅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 함경북도 웅기 선봉군 비파리라는 반농, 반어로 생업을 삼는 곳으로써 군에서 20여 리 떨어진 바닷가이다. 경치가 아름다워 해방이 된 후엔 국가 휴양소로 꾸려지게 되었다. 가문 대대로 농사를 지어 왔고 부모님들은 일자무식이었다. 게다가 5남매를 거느린 집안 사람은 가난하기 그지없다. 해풍으로 인해 흉년에 흉년이 들어도 일제의 공출제는 엄격했다. 정월, 이월의 추위 속에도 어름덩이를 헤치고 들어가 미역을 캐야만이 그나마 입에다 풀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자 김 주석은 토지를 무상으로 받게 해주었고 또한 문맹 퇴치, 사상 교육을 위해 《성인학교》가 설치되면서 배우지 못한 형제들도 비로소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고급중학교 초반에 있을 때 전쟁을 맞이했다. 전쟁의 고통과 그 후과는 막심한 것이었다. 종전이 되면서 그는 수학물리를 전공하여 장차 교수가 되고 싶었으나 스승의 권고에 못이겨 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에 입학을 했다. 그가 대학 입시를 했을 때 부친께서는 너무 기쁜 나머지 온 동네 방네를 다니시며 아들 자랑을 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은 자손의 대학 입시란 문중에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리라.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이미 세계관이 형성되었다. 확고한 반일 사랑, 그리고 이같이 가난을 퇴치해 주고 문맹을 퇴치해 주며 계급을 타파해준 고마운 이 제도, 사회주의 공산주의야말로 인민을 위한 사상이며 제도임을 환신했다. 하기 때문에 그는 다짐했다. 그리고 가슴에 새겼다. 이 고마운 제도를 위해서 무언가 봉사해야 한다. 나라와 민족 앞에 충성해야 한다.
1959년에서 62년까지 그는 적십자 중앙위원회 일원이며 첫 대표로서 재일동포 귀국 사업을 도우며 나아가다, 청진을 매주 왕래했다. 그러면서 그는 처음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체험해 보았고 또한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비료해 볼 수 도 있었다.

《3년 동안 자본주의 사회를 맛 보았습니다. 자본주의 겉보기 화려하긴 합니다. 하지만 인간 부재, 불평등, 인간 자주성을 유린하는 자, 유린당하는 자가 있는 등 많은 문제성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화려한들 좋은 제도가 못된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린 그때 한참 복구하는 때였지만 우리 제도가 가장 좋다는 것을 느꼈고 그런 생각은 일본 내왕 해보면 더욱 확고해 집니다.》

1961년 4.19 직후 김 조석으로부터 평화통일위원회가 주체가 돼서 통일운동할 때 대한 교시가 있은 후 그 시초부터 지도원으로 사업, 주로 통일 문제를 전담하는 분야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가 정식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 위원이 된 것은 1969년, 그후 남에서 2페이저 정도 북에서 5페이지의 문간이 교환되고 양측 대변인이 파송된 후 1970년 역사적인 7.4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그리고 그는 남북조절위원회 대변이능로서 세차례의 서울 방문을 했다. 그무렵 그가 서울 방문 시 타워호텔에서의 숙박 기간 동안 있었던 웃지 못랄 에피소드을 잠시 들여주었다.

《서울에 갔더니 모두들 어찌나 굳어져 있던지 처음엔 정문에서도 승강이에서도 종업원들께 인사를 해도 받지 않고 악수를 청해도 손을 내밀지 않더군요. 아침마다 청소부들이 방청소를 하러 들어와서도 어찌나 벌벌 떠는지… 그러더니 나중엔 안기부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와서 청소를 하겠지요. 그래 아예 방청소를 우리가 손수 해치우고 검열만 해달라 했지요. 하지만 나중엔 마음들이 풀렸습니다. 돌아올 무렵엔 서로 눈물을 흘리며 뜨겁게 손을 잡았습니다.》

그는 7.4공동성명 때 통일이 다된 듯 기뻐했고 그처럼 서울을 오가며 무언가 이루어지는 듯 소망에 찼었다. 한데 불과 얼마 못가서 박정희 장기 집권을 위한 《유신체제》가 공포되고 남북 영구 분단을 획책하기 위한 UN남북동시 가입안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광주 사태, 팀스프리트의 전쟁 연습 등등 낙심천만케 하는 일들만이 계속 잇달아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통일 투쟁을 멈출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계속되어야 했다.
1984년 9월 남한으로 수해 구호 물자를 보내게 될 때 그리고 그것이 수락이 되었을 때 그는 통일 전선에 나온 이래 두 번째로 크게 기뻐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전인민이 온 나라가 기뻐했습니다. 물자를 싣고가는 운반자들을 영웅처럼 떠받들어 환송해 보냈습니다. 그들을 위해 저마다 경쟁하듯 꽃다발을 안겨주고 있는 정성 다 담아 먹을 것들을 해다주고…. 어머니들은 통일을 위해서는 아까울 것이 없다. 장농 깊이 고이고이 간직해 두었던 예장감까지 구호 물자를 보냈습니다.》

북한에서는 계속 국회 회담, 3자 회담 그리고 지도자급 회담 등 대화를 제기했고 일방적으로 평화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면서 지나온 20여 년 세월, 그가 북한의 대변인으로서 판문점에서 겪은 슬품과 기쁨을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사실대로 말하면 기쁨보다 슬픔이 훨씬 더 많았다. 기쁨이 왔다가도 그것은 곧 슬픔으로 변할 때가 더 많았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대화가 이루어지는 듯 싶다가도 언제나 대화가 파기되곤 했기에…. 이제 그는 통일 문제에 대한 결론에 말을 맺으려 한다. 그리고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 4조항의 문제를 들어 그의 뜻을 밝히고자 했다.
그 첫째가 외세에 대한 문제이다. 미국이 남한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북한의 남침을 방어해 주기 위함이 아니고 그들의 안보를 위하여 중국과 소련을 겨냥한 군사 기지로 삼고 있는 것이며 그들의 잉여 상품 판매 시장으로 전력 자원의 공급 기지로 삼고 있음을 남한은 알아야 한다. 북한의 남침이란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애당초 남침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 전쟁 의도가 없음으로 우리는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온갖 인력과 지력을 바쳐 줄곧 나라를 건설하는 힘을 모아 왔다. 하지만 남침의 의도가 있다면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다. 4.19, 광주 사태, 4월항쟁 정책 공백기 등등. 그러나 왜 남침하지 않았는가. 남침 안하는 것이 우리 정책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반공 정책이 물러나고 연공하는 정책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이란 북한을 적대국으로 보는 것이다. 북한을 방문한 문 목사, 문 신부, 임수경양 같은 통일 투사들을 족쇄를 채워 투옥하는 것 또한 북한을 적으로 보는 것이며 통일 의사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이제는 반공의 허구성을 깨달을 대가 되지 않았는가. 그것은 다만 정권 유지를 위한 통치 수단임을 알아야 한다.
세째, 평화 추구의 문제다. 통일이 되자면 남북간의 긴장 완화가 선행되어야 하고 실은 그것이 남북나의 본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군축을 안하겠다면 그것은 평화 통일에 관심이 없다는 결론이 된다. 군축없이 대화를 하자는 것은 한 손에 계속 권총을 들이대며 대화를 하자는 격이니 그것은 모순이며 역시 허구성을 들어내는 일이다. 우리는 그동안 일방적으로 군축을 주장해 왔고 일방적으로 실제 군축을 해오기도 했다. 1987년 군대 10만을 감축했고 15만 군대를 평화 건설에 돌렸다. 그리고 1988년 거듭 단계적 군축을 진지하게 제안했다.
네째, 통일의 주체가 문제다. 통일의 주체가 정부 당국인 줄로 안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통일 문제는 남죽 7천만 동포를 발동시켜 해결해야 할 민족 문제이다. 통일을 위해서는 민족의 화합 마당이 마련되어야 하고 제정당 대표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남북 인민들끼리 마주앉게 하여 인민들간의 접촉, 교류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들로 하여금 민간 접촉을 일제 차단하는 것이 역시 통일을 원치 않는다는 뜻으로 본다.
끝으로 그러면 북한의 공식적인 통일 방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한결같이 주장해 온 바와 같이 ①자주적 ②평화적 ③민족 대단결의 방법으로 통일하자는 7.4공동성명의 규약대로 그리고 누가 누구를 먹고 먹히는 것이 아닌 상호 현체제, 이념을 존중 유지하며 하나의 연방 국가로 공존하기를 제안해 온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이라며 접견을 매듭해 주었다.
판문점 통일 대화 20여 년, 이제는 남과 북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전금철 박사에 대하여 몇 마디 서술을 나는 여기서 사양치 않겠다. 언젠가 그와 더불어 대좌하여 남북회담에 임하였던 남측의 한 외교관이 말했다 한다.
《전 선생, 당신에 대하여 얘기는 많이 들었소만 과연 만나 보니 미남자에 고상한 풍모가 느껴지는 참 신사군요.》
나는 그것이 결코 정치적 공치사가 아님을 잘 안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전금철을 만나 본 사람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꼭 같은 소감이며 누가나 말하는 그의 평판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공산당에 대한 악몽을 씻겨 주고 공산당에 대한 이미지를 다시금 곰곰 생각케 하며 뭔가 의문을 던져 주는 그런 품격의 소유자이다. 또는 우리 민족의 남성 이상형 혹은 우리 민족의 군자상이란 바로 저런 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는지. 우리로 하여금 그는 생각게 한다. 한 나라의 외교관으로서 《완전하다》는 평을 곧잘 듣곤하는 그는 꾸밈이 없으나 위엄이 있고 이념에 철저한 듯하면서도 노래와 눈물이 잦은 인간미 넘치는 로맨티스트이기도 했다.
그와의 접견을 마치고 돌아서는 내 가슴에 새벽의 여명 같은 다사로운 빛이 살며시 비쳐드는 것 같았다. 전금철 씨, 그는 자신의 고상한 인품 하나만으로도 우리에게 공산당과의 대화가, 통일이 그리 먼 것만도 아니고 그처럼 언제까지나 비관적인 것도 아니며 얼마든지 소망찬 것임을 확신케하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을 느껴 오게 해주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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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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