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05-18 00:00
[대담]노력영웅 이화순
 글쓴이 : minjok
조회 : 5,216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였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누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하니라. 《누가복음 1:46~55》

내가 북조선의 노력영웅 《최고훈장》이며 현재 조선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 이화순 씨를 만나 보았을 때 그야말로 9살 맨발의 고아로 하여금 오늘날의 그녀가 존재하도록 키워 온 당과 조국에 대하여 마치 저 마리아가 이렇게 하나님의 정의와 그 사랑을 찬양하듯 파란곡절 많은 자신의 생애에 대하여 송가를 부르는 듯 했다.
내가 북한 노력영웅이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 이화순 여사를 두 번째 만난 것은 평양 고려호텔 2층 로비, 안내 선생으로부터 전갈을 받고 내려와 보니 그녀는 황송하게도 나에게 줄 선물을 마련해 가지고 호텔까지 몸소 찾아주었다. 내가 그보다 앞서 수일 전 그녀를 만나기 위해 평양 방직 공장을 찾았을 때 나와 동행했던 당 간부 모 참사가 그녀에게 몇 번이나 최경례를 하던 것으로 보아 그리고 나 또한 그녀를 만나기 위해 공장 접대실에서 꽤 긴 사간을 기다려야 했던 것으로 보아 그녀는 상당히 높은 위치에 분망한 분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나는 너무나 황송하여 몸둘 바를 몰라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누구에게 최경례를 받을 때나 내가 그처럼 죄스러워 몸을 조아릴 때난 시종일관 자애로운 미소를 담뿍 머금은 채 그 겸손, 소박한 몸가짐이라니…. 그녀의 높은 위치, 빛나는 훈장을 전혀 의식할 수 없을 만치 그녀는 다만 어느 일개 조그만 방직 공장 합숙소사감 정도의 위치를 지나지 않는 듯한 그런 인상을 주었다.
《내가 아무래도 홍 선생 한 번 더 보고 싶어 왔소. 이렇게 통일을 위해 애를 쓰고 다니는데 이거 별 것은 아니지만 선물이라도 주고 싶고 손이라도 한번 더 잡아 보고 싶어서…》
그녀는 평양 방직공장 제품인 옷감 두어 벌과 갑돌이와 갑순이(?) 조선 인형 그리고 하이얀 보석 목걸이 등 가지가지 정성을 담아 싸가지고 왔다. 나는 다시금 그녀 가슴속에 사모쳐 있는 통일에 대한 염원과 그한을 읽어 볼 수 있었다.

출생은 1943년도이고, 고향은 서울시 서대문구 정도로 대략 자신의 출생과 본적을 기억하는 이화순 씨. 그녀의 아명은 이화자이다. 그녀가 5~6세 되던 해 서울서 충청북도 괴산군 장하면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부모님과 함께 새 살림이 시작되는가 했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아버지가 온다간다 말없이 집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두 모녀만이 집에 남아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 했다. 지금도 때때로 어머니와 함께 밭에 나가 깡통을 두드리며 새를 쫓던 것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추억되곤 한다.
그녀가 7세 나던 해, 어느 날 밤 갑자기 대문 종소리가 나더니 사라졌던 아버지가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대체 어델 갔었나》하는 가족들의 물음에 아버지는 다만 이렇게 무표정하게 답하셨다.
《산에 가 있었다. 더 묻지 마라 앞으로 알게 된다.》
불과 며칠 후 그 아버지는 다시 사라졌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마루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요란한 대문 소리가 나서 깨어 보니 칼찬 순사들이 들이닥치질 않는가. 《아버지 어딨어. 내놔!》 순사가 《아버지 없다》고 답하는 어머니를 다자고짜 끌고갔다. 어머니는 한숨을 새우고 다음날에야 집에 돌아왔다. 돌아돈 어머니는 딸에게 분풀이를 하듯 이렇세 한차례 퍼부으시는 것이었다.
《이 빌어먹을 년! 아버지가 잡혀간 것도 모르고 마룻바닥에 잠이나 자고!》
다시 어머니와 함께 나물을 캐고 농사를 지어 근근이 연명해 가고 있는데 어느 날 파출소 호출령이 내렸다.
《네 아버지는 죽었다》
《그럼 시신을 내주세요.》
《시체는 달구지에 실어 산에다 내까렸다! 시체같은 건 없다!》
《죽음》이란 말을 처음 들어 본 화자는 사람들을 붙들고 물었다. 《죽는다는 게 무엇이냐》고. 사람들이 답해 주었다. 《눈감고 깨지 못하는 게 죽은 거다》라고. 화자는 비로소 《순사는 나쁜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후에 생각하니 그 순사놈들에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가 필시 《빨치산》이었던 것 같다. 두 모녀는 품팔이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두 모녀가 처음 찾아 나선 집이 어느 무당 집. 어머니는 빨래를 해주고 딸은 아이보기를 하며 밥을 얻어먹었다. 그런데 등에 업힌 아이가 울면 으레껏 화자를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한 번은 두들겨 패는 것으로 성이 안 찬다는 듯 끌고 나가 산밑 벼랑에다 집어 던졌다. 벼랑에 빠져 허우적대며 울며불며 하는데 그나마 행인들이 아이 우는 소리에 달려와 건져 주었다. 그 모양을 본 어머니는 딸을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더니만 부지깽이를 들고 나와 주인에게 달려들었다. 무당 집에서 쫓겨난 후 석달쯤 지난 뒤, 전에 없이 낯모를 사람들이 집에 드나들었다. 그러더니 하루는 어머니가 딸을 불러놓고 이렇게 타이르는 것이었다.
《얘야. 저 아주머니를 따라 서울 친척 집에 가지 않으련. 거기 가면 먹고 꿰진 바지도 입지 않고 그리고 학교도 보내 준다더라.》
서울에 친척이 있다는 말은 난생 처음 듣기 때문에 더러 의심이 가긴 했으나 딸은 어머니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서울을 떠나던 날은 아침부터 눈이 펑펑 쏟아졌다. 전송 나온 어머니는 트럭 위에 실린 딸을 올려다보고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이윽고 트럭이 움직이자 딸은 딸대로 발버둥치며 울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서 화자를 데리고 가는 부잣집 종놈이 수건으로 화자의 눈을 싸매고 말았다. 왜 눈을 싸매는가, 수건을 풀어달라고 울부짖었으나 종놈은 《네 눈에 먼지가 들어가지 말라고 처맸다》고 퉁명스레 한마디 내뱉는 대답뿐, 끝내 풀어 주지 않았다.
서울 친척 집이라고 팔려간 집은 아현동 약수터 부근에 있는 어느 큰 저택이었다. 집 주인은 동대문백화점 사장이었고 부인은 아대 교수라 했다. 그 집에서 다시 마루걸레 치고 아이보기를 하며 한 1년 가량 지냈다. 한데 괄시, 천대는 어딜 가나 한가지였다. 한 번은 입고 간 낡은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힌다고 내준 것이 고작 맨살에 입기엔 너무나 껄껄한 베옷이었다. 그것도 한겨울에…. 그래 도로 낡은 옷을 입게 해달라 한 것이 무슨 큰 죄목인가. 계집아이를 발가벗겨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 치고는 사정없이 매질을 해대는 것이 아닌가. 보다 못한 식모가 달려나와 떠말리고 나꿔체 피신시키지 않았던들 어떻게 되었을까….
9살이 되었다. 별안간 쾅쾅 소리가 나더니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피난 간다고 짐 싸고 떠들썩 야단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식모에게 물었다. 《왜들 그러느냐, 저것이 무슨 소리냐》 식모가 말했다. 《전쟁이 난 것야. 우리도 피난 가야 된다. 하지만 난 다리가 아퍼 갈 수 없으니 너나 피난따라 가라. 어서!》 그러나 이미 모두 다 도망가 버렸다. 누굴 따라 어디로 가란 말인가. 때마침 봇짐을 싸들고 떠나려던 동네 아줌마가 들여다보았다.
《피난들 안 가고 무얼하고 있어. 여기 있다간 못 살아》 얼결에 아줌마를 따라 나섰다. 단벌옷은 입고 있었지만 신발은 없었다. 맨발로 서대문 근방까지 아줌마를 따라 갔는데 한참 피난 대열 속을 밀려가다 보니 그나마 집도 잃어 버리고 아줌마도 잃어 버리고 말았다. 별안간 혼자라는 생각이 들자 더욱 무섭고 어디가 어딘지 더욱더 방향조차 알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차라리 도로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대문 좌측 산비탈을 따라 가는데 웬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얘야. 너 어디서 왔니? 내가 주먹밥을 하나 줄 터이니 저 집에 순사가 없을 때 저 개구멍에다 집어넣고 오라. 그렇게 해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몰래 전해 주지 않으련. 그러면 내가 돈을 줄 터이니…》
화자는 그가 시키는 대로 임무를 잘 수행했다. 그러나 돌아나오다가 순사에게 들키고 말았다.
《너 왜 들어왔느냐! 여기 다시 오면 죽인다!》
순사는 칼을 빼들고 공갈을 했다. 이상한 아저씨가 칭찬을 해주었다.
《참 잘했다. 넌 아주 착한 아이로구나》
심부름은 해주었으나 그 담장 높은 집이 무엇을 하는 곳이며 그 주먹밥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순간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저기가 뭐하는 덴가요?》
《서대문 형무소다. 우린 어른이 돼서 저길 못 들어간다. 그런데 내가 큰 일을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
그러면서 그는 이상만돈 1원짜리 4개를 손에 쥐어주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이 돈암동 미아리고개쪽으로 나가야 산다고 하면서 다리로 밀려가고 있었다. 무작정 그들을 따라 갔다. 힘이 들고 다리가 아파왔다. 한참을 가다 보니 유리가 깨진 빈 집이 하나 있었다. 거기가 미아리 아니면 의정부 가까운 어떤 벌판이었으리라. 그 빈 집에 들어가 좀 쉬어가려고 들어서는데 별안간 와장창퉁탕 천지가 뒤집히는 듯 B29가 날아와 마구 폭탄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포연 자욱한 수라장 속에 이리 헤매이고 저리 헤매이며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는데 이것이 웬말인가. 거기에 어머니가 계시질 않는가. 두 모녀는 얼싸안고 울며불며 꿈만 같은 현실이 믿기지 않아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두 모녀가 부둥켜안고 마냥 울 수 있는 그런 때가 아니었다. 폭격은 계속 비오듯 하는데 어서 속히 몸을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 온통 불바다에 사방 시체가 널려 있는 논두렁을 두 모녀는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런데 한참 정신없이 뛰다 보니 그것이 꿈이었나 환상이었나. 어머니가 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더 이상 뛸 힘도 없고 어머니를 잃은 슬픔만이 가슴에 미어져 왔다. 여기저기 너즈러히 누워 있는 시체들 사이에 털썩 주저앉아 엄마를 찾으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다 떠나고 시체밖에 없는 허허벌판에서 그렇게 기진맥진하도록 혼자 울고있었던 것이 그 얼마나 되었을까. 그때였다. 한 무리의 인민 군대 아저씨들이 나타난 것이….
《넌 왠 아이냐?》
《엄마를 잃어 버렸어요. 엄마를!》
《네 이름이 무어냐?》
《이화자》
《울지 마라 이 아저씨가 엄마 찾아 줄 터이니. 지금은 전쟁 중이야. 여기 이러고 있으면 죽는다.》
인민군 아저씨는 우선 화자의 옷이 온통 살이 들어나도록 남루한 것을 보고 배낭에서 군복 저고리르 꺼내어 갈아입혔다. 그리곤 무조건 화자를 성큼 안아 배낭에 업었다.
《빨리 3.8선을 넘어야 산다.》
아저씨들은 발길을 재촉했다. 3.8선이 무엇인가. 그 3.8선을 넘으면 거기 어머니가 있을까. 화자가 배낭에 업힌 채 물었다.
《3.8선이 뭔가요?》
《쬐그만 게 묻는 것도 많다》
아저씨들은 핀잔을 주었을 뿐 설명이 없다. 고개를 넘어서자 거기 집 한채가 있어 이승만 돈 하나 주고 달걀 2개를 사 먹고 다시 아저씨 배낭에 업혀 행군을 계속했다. 화자는 점점 조바심이 났다. 왜 찾아 준다는 어머니는 찾지 않고 이렇게 끝없이 마냥 걷기만 하는 건지, 화자는 벌써 몇 번째 물어 본다.
《왜 아직도 엄마는 안 찾아 주어요?》
《글세, 잔소리 마라, 꼬마가 웬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
그렇게 또 한참 가다 보니 거기가 강원도 철원군 월정리라는 곳이었다. 따콩! 따콩! 총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미국놈하고 싸움도 해야겠는데 요 꼬마놈 때문에》 인문군 아저씨들이 투덜댔다.
《이놈아, 여기가 철원 구막산이야. 이담에 잊지 말도록 기억해 둬. 살아 남아서 미국놈 내쫓고 엄마 찾아 줄 터이니》
그날 밤은 여우굴 속에 들어가거적대기를 깔고 자야 했다.
《화자야, 무서워 말고 혼자 밤에 잘 자라. 우린 이제부터 가서 미국놈하고 싸워서 많이 잡아 가지고 올게》
날이 저물고 어둑해지자 아저씨들은 여우굴 속에 화자를 혼자 놓아두고 모두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 배가 고파 나아가 주먹밥이라도 먹고 싶었지만 무서워 꼼짝할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이 그토록 정적한데 섧게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만이 더 엄마 생각을 그립게 했다. 어둠 속에 혼자 흐느껴 울다가 어느결에 잠이 들고 말았다. 새어든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 깨어보니 숲속 주변에 머루, 달래가 얼마든지 열려 있지 않은가. 그 열매들을 한껏 따먹고는 또다시 망연히 아저씨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화자야》 《화자야》 불러대는 산울림 소리가 났다. 아저씨들이 돌아왔다.
《밤새 잘 잤는냐. 화자야, 무서운 산에서 네가 참 용감하구나. 우리 화자 용타 용해》 아저씨들이 등을 두들겨 주었다.
《미국놈 잡았수?》
《그래, 저 산 밑에 한뭉터기 잡아 놨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나요?》
《이젠 김일성 장군님께 간다》
《김일성 장군님이요? 김일성 장군님이 누군가요?》
《네가 크면 다 알아》
화자는 그 《김일성 장군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분인지 그대로 흘려 버릴 수가 없었다. 거듭해 캐묻는 화자에게 아저씨들은 이렇게 답했다.
《그분은 말이야, 너처럼 부모 없는 아니, 가난한 노동자, 농민의 아이들을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야. 그래서 그분에게 가면 누구나 가난한 집 아이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고 학교 공부도 할 수 있단다.》
강원도 평강복기에 다 달았을 때 그만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써는 도저히 아저씨들을 따라 갈 수가 없었다.
《얘 데려가다 잘못하면 아이 죽이겠다》
아저씨들은 거기서 일단 쉬어 가기로 했다. 그리고 화자를 빈 집에 뉘어 놓고 온 정성을 다해 치료를 했다. 화자가 좀 나아지자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별안간 쑥떡이 먹고 싶어졌다. 아저씨들이 부랴부랴 아랫동네로 내려가 동네 아줌마에게 부탁을 했더니 그 아줌마가 떡을 해 가지고는 열병이 전염될세라 빈 집담장 위에 올려 놓고는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화자에게 지원군 운동화를 신기려 했으나 갑자기 신발을 신자니 그것이 오히려 더 불편했다. 《맨발로 가겠다》고 고집하자 《까짓것 20명이 번갈아 업고가지 뭐》 아저씨들이 결의를 했다.
그렇게해서 아저씨들 등에서 등으로 교대로 업히어 또 간 것이 한 엿새 쯤 되었을 때다. 저만치 조명탄이 쏘아지고 환한 데가 있어 보니 거기에 대동강이 흐르고 있었다. 일행은 그 대동강 쇠사슬 다리를 건넜다. 화자는 거기가 서울인 줄만 알았다.
《여기가 서울인가요? 그럼 우리 엄마 어디 있을까요? 이젠 엄마 찾아 주나요?》
《아니다. 여긴 서울이 아니고 김일성 장군님 계신 곳이다.》
거리엔 전차가 다니고 있는데 때마다 쌕쌕이가 내려와 마구 쏘아대곤 했다. 급히 국밥 한 그릇으로 요기를 하고 옥류교를 가서 배를 타고 건너서 만경대 팔달교를 지나 언덕에 오르니 거기에 어느 지주가 살던 대저택이 있었다. 들어가보니 거기가 아이들로 가득찬 《애육원》이었다.
《자, 화자야 이젠 평양에 왔다. 김일성 원수님이 계신 조국에 왔다. 넌 인젠 여기서 밥 많이 먹고 공부 잘 해야 된다. 우린 또 가야하기 때문에 여기서 헤어져야겠다.》
화자는 그렇게 말을 하고 떠나려는 아저씨들을 붙들고 울며불며 매달렸다.
《아니에요, 난 아저씨 따라 갈 거예요》
《아니다 우린 또 갈 길이 있다. 걱정 말아라. 어서 밥이나 먹어》
화자가 밥을 다 먹고나니 아저씨들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미친 듯 달려나가 아저씨들을 찾으며 울부짖었으나 허사였다. 애육원 아주머니가 애써 화자를 달랬다.
《넌 인제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사는 거야. 아저씨들은 할 일이 있어 떠났다.》
그날 밤, 온 집안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만히 들어 보니 《중국에 간다(고아들의 중국 유학을 의미함)》는 얘기였다.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에 나라에 가다니…. 더욱이 중국에 따라가면 어머니를 영원히 못만날 것이다. 사태가 위급하게 느껴졌다. 그 길로 애육원을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다시 어떻게든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찾아야 한다. 왔던 길을 다시 찾아 돌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또 이 집 저 집에 매이며 아이 봐주고 나무해 주며 밥을 얻어 먹은 것이 한 1년 세월 지났다. 그러는 동안 평양 대폭격을 겪었다. 폭격 속에 이리저리 쫓겨다니고 피신하던 중 김주석의 말에 따라 고아들을 모두 《평북남신의주 초등학원》으로 보내게 되는데 거기에 끼게 되어 평양에서 남신의주로 가게 되었다. 거기서 난생 처음 제 이름자 쓰는 것을 배우고 책읽기를 배웠고 참으로 오랜만에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 걱정을 하지 않게 되어 생의 처음으로 마음에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
정전이 되었다. 온나라에 재건 사업이 시작되었는데 화자는 평양 방직공장 소녀공으로 가겠다고 지원했다. 그것은 왜, 너무도 지난날 헐벗고 춥게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천을 짜서 한 번 맘껏 옷을 입고 싶어서였다. 평양방직공장 직포공으로서의 화자의 생활은 그녀의 새삶의 탄생을 의미하며 제2의 인생을 의미한다고나 할까. 더는 굶주림, 헐벗음이 없고 더는 천대, 괄시 없고 그리고 더는 외로움이 없는 전혀 새 인생인 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바꾼 것일까. 이제는 이화자가 아닌 이화순으로 그녀의 이름이 바뀌어졌다.
순이의 직공 생활은 하루하루가 마냥 즐겁고 보람되고 소망찬 것이었다. 처음 1년간 기술 공부를 마치고 2대의 직포기를 맡아 짜기 시작했다. 《혁신언니》《노력언니》들이 친절히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순이는 자기도 어서 그 혁신언니, 노력언니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보다 배나 더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면서 처음 2대에서 9대, 9대에서 16대 그리고 마침내 48대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그것은 1964년도 최고의 기록일뿐 아니라 그해 연간 계획을 4.15(김 주석 생일) 이전에 이미 초과 달성한 것이 된다. 순이는 소위 《다기대공》으로 추대되었다.
그해 10월 25일 일이다. 언제나 마음속에 그려보고 그처럼 꼭 만나 뵈옵기를 소원했던 김 주석 아니 저 인민군 아저씨들 등에 업혀 수없이 들어온 부모 잃은 아이, 가난한 아이들을 가장 사랑하신다는 김 주석이 마침내 방직 공장을 찾아 왔다. 순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직포공들 사이에 둘러싸여 만면에 미소를 담고 있었다. 과연 그의 미소는 친어버이의 그것과도 같은 너무도 따습고 자애로운 그런 것이었다. 김주석은 직공들에게 둘러싸여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동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가장 기쁩니다.》라고.
마침내 공장 지배인이 순이를 가리키며 48대를 혼자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김주석은 《조그만 동무가 일 잘하누만, 용기 잃지 말고 더 잘 하라구》하면서 순이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그리고 동행해 온 외국 귀빈들에게 《이 소녀가 모범 노동자입니다》라고 소개하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리곤 다시 《어디 아픈 데는 없는가, 일이 너무 힘들지 않는가》하고 물으시었다. 그리곤 공장을 두루살피시고 직포공들의 합숙까지 들려서 구석구석 살펴보곤 현장 안의 공기가 나쁘지 않은가, 합숙이 춥지 않은가, 고기와 기름은 얼마나 공급되는가 그리고 월동 준비는 되어 있는가 조목조목 세세히 점검을 하고 염려를 해주었다.
그날 밤 순이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순이의 등을 쓰다듬어 준 그 따뜻한 손길이 그냥 그대로 머물러 있는 듯 했다. 그렇게 수없이 부자놈들에게 메를 맞는 등, 어린애의 오줌내가 가실날 없던 등허리, 언제나 헤어진 옷으로 속살을 들어내야 했던 그 등덜미가 아닌가. 그 등덜미에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어린애 오줌내를 씻기어 새 학생복을 입혀준 것이 그 누구인가. 바로 그를 오늘 비로소 만난 것이다. 진정 오랜만에 끝없는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다. 순이는 결심을 했다. 그것에 보답기 위하여 다음날부터 7대를 더하여 55대를 혼자 담당하리라고….
1965년 8월 27일, 한 해가 지난 후 김 주석은 또다시 공장을 방문했다. 이미 순이가 55대 직기를 담당하고 있으며 그해 계획을 5월 4일에 끝낸 것을 알고 온 김 주석이 다시 순이의 기대쪽으로 다가왔다.
《이 동무가 이 많은 기계를 혼자서 보는데 벌써 5월 4일에 연간 계획을 완료했답니다.》
김 주석은 동반해온 간부들에게 이렇게 순이를 치하를 하며 기뻐했다. 그리곤 순이에게 물었다.
《고향은 어뎁니까?》
《서울입니다》
《그럼 부모님들은 어디 계신가?》
《어머님 한 분이 남조선에 계십니다.》
그러자 김 주석은 잠시 말이 없었다. 순이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잠시 수심 어린 침묵이 흐른 뒤 이렇게 등을 쓰다듬어 주며 말하였다.
《어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도록 통일이 돼야 하오. 그리고 통일은 반드시 우리 세대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 우리 더 열심히 일하고 몸도 더욱더 건강해 지도록 힘써야 하오.》
순이는 그의 온정어린 말에 다만 목이 메여 왔다. 순이는 생각했다. 그렇다. 고연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 어서 통일이 되야 한다. 그리고 통일이 되자면 더욱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그러면 나의 일은 무엇인가. 나에게 맡겨진 일은 직포기이다. 그후로 순이에게 있어서 직포기와 직포기 사이를 달리는 길은 곧 통일의 길이요,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길에 잇닿은 길이었다. 순이가 66대의 직포기를 담당키로 결심한 것은 김 주석과 두 번째 만남이 있은 직후의 일이다. 그 당시에 있어서 순이에겐 세상 모든 만물이 직포기로 환간해 보여졌다. 마침내 순이는 8자형 순회 방법에서 보다 능률적인 《ㄷ》자형 순회 방법으로 갱신할 것을 창안해낸 것은 바로 그 시기였다.
1968년 5월 9일, 평양대극장에서 제2차 전국천리마작업반운동 선구자대회가 열렸다. 순이는 여기에 직포기 72대를 돌파한 실적을 가지고 토론단상에 오르게 된 영예를 받았다. 순이는 기쁜 마음에 이른 아침부터 극장에 출두해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먼저 와 있던 김 주석이 순이를 찾는다는 것이다. 순이는 설레이는 가슴을 가누며 그가 있는 방으로 찾아갔다. 그는 순이가 들어서자 곧 자리에서 일어나며 순이의 손을 잡아 반가이 맞아 주었다.
《아, 화순 동무가 왔구만, 어서 여기와 앉소.》
하시면서 그의 곁에 앉히었다. 김 주석은 그간의 안부를 묻고 지금은 몇대나 직기를 보는가 물었다.
《72대를 본다구, 그것 참 대단하구만, 어디 여기 그림을 그려 가면서 설명을 해주오.》
순이는 이 대회가 끝나면 80대를 더 추가할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수첩에 80개의 동그라미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동그라미를 80개나 그리자니 꽤 많은 시간이 걸렸으나 김 주석은 시종일관 대견스럽다는 듯 미소로 지켜 보았다. 그리고 순이의 순회 방법에 대하여 아주 세심히 주의 깊게 들어 주었다.
《흠, 그러면 매일 180리를 걸어야 한단 말이지, 그러면 1년을 300일로 치더라도…, 그러면 얼마를 걷는 셈이 됩니까?》
곁에 있던 한 간부가 답했다.
《6만 리입니다.》
《그러면 신의주, 부산을 몇 번이나 왔다갔다 했구나! 6만 리라!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가 항일유격투재을 해보았지만 그렇게 걷는 것이 간단치 않습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김 주석은 감탄하며 아낌없이 치하를 해주었다. 그러나 뒤에 알려진 일이지만 김 주석은 순이가 그렇게 달려도 건강에 지장이 없는지 의사에게 문의를 하였고 그렇게 해도 아무일 없다는 답변을 들은 후에야 안심을 하였다고 한다. 그날 대회장에서 김 주석은 이 같은 발표를 친히 했다.
《여러분, 여리 리화순 동무는 남에서 인민군 배낭에 업히어 왔는데 우리나라 경공업 부문에서 크게 업적을 이루었기에 우리 당중앙위원회에서 이번에 리화순 동무에게 노력영웅 칭호를 수여하기로 했습니다. 이 동무가 72대직기를 보면서 하루에 180~200리를 뜁니다. 일년에 300일만 일한 것으로 보아도 6만리입니다. 리화순 동무야말로 우리 당이 키워낸 진정한 당의 딸이요, 당이 길러낸 혁명가입니다.》
이날 대회가 화려하게 막을 내리고 김 주석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으려는 시간이었다. 김주석은 또 한 번 순이에 대한 치하를 했다.
《여러분, 리화순 동무가 한해에 짜내는 옷감이 백만 미터입니다. 이 동무야말로 참다운 천리마기수이며 영웅입니다. 누구나 옷을 입을 땐 우리 리화순 동무를 생각하시요.》 그리고 덧붙여 하시는 말씀,
《화순 동무, 이젠 공장에 돌아가서 후비를 서너 명 더 양성하고 학교에 가서 공부도 하고 시집도 가오.》
시집가라는 말씀에 순이는 그만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그러자 김 주석이 《왜?!》하는 바람에 또 한 번 무안했지만 장내엔 《와》하고 웃음꽃이 피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은 김 주석의 진정한 염려이고 배려였다. 얼마 후 김 주석 저택에서는 순이에 대한 혼담이 오고 갔다. 순이의 신랑감으로는 아무래도 인민군 배낭에 엎혀온 몸이니 어디 인민군 가운데 준수한 청년을 골라 짝지어 주는 것이 제격이 아니겠는가 한 것도 김 주석의 뜻이었다고 한다. 마침내 순이가 시집가던 날 김 주석은 신부의 꽃다홍 비단 옷감을 손수 골라 보내주기도 했다. 과연 연분이 닿아 순이가 인민군 신랑감에게 시집가던 날, 순이의 가슴속엔 만감의 감상이 물밀 듯 밀려왔다. 전란의 화염 속에 꿈인 듯 나타났다 사라져 간 어머니, 그처럼 눈발 휘날리던 날 팔려가는 딸이 못내 가슴 아파 그리도 우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는 지금쯤 그 어느 하늘 아래 살아 계시기나 한지, 어찌하여 오늘같이 행복한 날 곁에서 보아 주시지 못하는가. 전란의 혼란 속에 가난의 쓰라림 속에 거리에서 방황하다 그 어느 쓰레기통, 다리 밑에 쓰러져 죽어갔을 이 몸이 이처럼 조국의 품에 안기어 호의호식 성장하여 오늘날 이 영광, 이 행복 맞이했는데 어찌해 그 어머니 내곁에 계셔서 기뻐해 주시지 않는가, 보아 주시지 않는가. 북받쳐오는 설움과 기쁨이 엇갈려 감당치 못해 하는 신부의 눈에 연신 이슬이 고여 왔다.
그런데 김 주석과 당의 배려는 순이의 결혼뿐만이 아니었다. 순이는 신혼살림을 차리자 부엌으로 먼저 들어간 것이 아니라 책가방을 들고 학교로 향하게 되었다. 고아들의 학원인 《평북남신의주 초등학원》에 들어갈 때까지 학교 문간에도 가보지 못한 순이였다. 공화국에서의 각급 학교는 모두 무료 교육일 뿐 아니라 직장인이 공부를 하게 될 땐 본래의 직장 봉급이 계속 지급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공장이나 농촌에서 일하던 노동자, 농민들이 대학 진학을 지망하게 될 땐 또한 속성으로 중등 교육 과정을 밟을 수 있는 속성과 교육 과정이 마련되어 있다.
1964년 4월 순이는 그 속성과를 거쳐 조선인민경제대학 행정과에 입학 4년간의 대학 과정을 기어이 마쳤다. 노력영웅 이화순 씨. 그녀는 1977년 당 비서로 임명되며 같은 해 조선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피택된다. 또한 1982년 김 주석 70돌에 김일성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매듭하고저 했다.

《남반부 인민들이 TV방송 보는대로 반공 사상으로 무장돼 있으니 우리 공화국 조국의 현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 참 아타깝습니다. 내 자신을 본보기로 살아온 체험을 알려주고 또 우리 인민이 얼마나 통일된 해방 조국을 갈망하는가를 만나서 있는대로 보여 주고 싶습니다. 림수경 대표가 13차 축전에 참석해서 우리 인민들의 사랑과 환영을 많이 받았는데 자기 결심대로 3.8선을 디디고간 그 통일의 애국적 일꾼을 두 손에다 철쇄를 채워 감옥에 집어넣었으니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림양은 북조선에 와서 무슨 반공 사상을 말한 것도 없고 오직 세계의 청년 대표들, 세계 기자들 보는 앞에서 다시 전쟁이 없이 통일된 하나의 조선을 이루고자 간절히 전한 것 밖에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반민족 분자처럼 죄인으로 잡아넣을 수 있습니까. 생각하면 어서 이런 반통일적이고 반민족적인 세력을 물리치고 남과 북이 손 잡고 통일된 한나라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신념이 더 굳어졌습니다. 림수경 학생이 감옥에서 고난을 받을 것 생각하니 눈물이 납니다. 그러나 반드시 나라는 통일되고 정의를 믿는 사람들이 승리할 겁니다. 북남 없이 한 민족 한 국토가 통일이 되어 다같이 잘 살 수 있도록 우선 내 자신이 만 명 넘는 이 공장 노동자들과 더 훌륭한 노력영웅으로 살 일념입니다!》

끝으로 그녀의 소원을 들려달라 했다.

《통일이 되는 날 고향에 돌아가 어머님 뵙고 그리고 남조선 인민들이 북조선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도록 나 자신의 생애를 산 증거로써 보여 주고 싶습니다. 때마다 위대한 수령님(북조선엔 상례적으로 붙이는 존칭) 접견해서 그 어르신 머리에 흰 머리가 늘어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녀는 눈물을 보이기 시작한다.

《80평생 농촌, 공장, 학교로 현지 지도 하시면서 어느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고 나를 세우셨는데 우리 노력이 부족해서 나라에 마지막 해방인 통일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것이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픕니다. 수령님과 당의 은혜를 생각하면 아무리 있는 힘 다해 일을 해도 내가 한 일은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언제나 부족하기만 합니다. 그 어떤 비바람 불더라도 위해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상례적으로 붙이는 존칭) 김정일 동지를 한시바삐 통일된 광장에 모셔야 되겠다 하는 생각만이 자나깨나 잊을 수 없습니다.》

내가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던 날은 가을비가 차겁게 내리고 있어 떨어져 누운 황금빛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불리며 촉촉히 젖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나는 거리거리마다 붙어 있는 이런저런 구호들을 본다.
《모두 다 영웅적으로 살자!》, 《200일 속도전으로 해제하자!》

1992.2.5.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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