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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9.15탁아소》 소장 김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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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8,2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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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움 이른 아침에 어찌 그런 비보와 같은 긴급 전화가 걸려올 수 있는가. 다음날로 KAL기에 몸을 실은 나는 몇 번이고 천지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공포로 숨이 멎으려 했고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또 흘렀다.
어머니는 병상머리에 아들이 오면 줘야 한다며 성경책을 곱게 싸놓고 당신의 손목시계를 풀어 놓으셨다. 그리곤 분마다 초마다 시간을 물으시며 아들을 불러댔다. 마침내 몽매에도 그리던 아들이 달려와 병실에 들어서자 어머니의 혈압은 단숨에 50을 뛰었다. 어머니는 끝내 말씀이 없으셨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언제까지나 그 어미를 기다림 속에 버려 두었던 그 아들, 이 지산에서 그처럼 볼 수 없었던 그 아들의 그립고 그리운 모습 그나마 마지막으로 가슴에 간직하고 떠날 수 있도록 단 한 번 만나게 해주신 그 시간, 그 기회를 어머니는 그 무슨 크나큰 신의 배려요 은혜이며 행운이라고 생각하신 듯 그것으로 족하신 듯 단 한마디 말씀도 없이 눈을 감으셨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이미 숨을 거두신 어머니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질 않는가. 그 무엇이 어머니를 저토록 슬프게 했는가. 그 무엇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끌어안고 통곡하며 몸부림친다.
《이 불쌍한 것아, 가난한 예술가에게 와서 고생만하다 갔구나! 고생만하다 갔구나!》
그렇게 별빛이 낭자하던 여름밤, 봉선화물을 들여 주시던 어머니, 봄비를 맞아도 즐겁기만 한 소풍 가던 날, 미처 룩사크에 넣어 주지 못한 삶은 달걀 몇 개 그것을 안고 헐레벌레 동구 밖까지 뒤따라오신 어머니, 치통 때문에 밤새도록 칭칭대며 울어대는 나를 업고 꼬박 밤을 새우시던 어머니. 우리 남매 먹을 것, 입힐 것을 사실 땐 단 한 번도 값을 깎아 본 일이 없으셨다는 어머니 그 사랑은 도를 넘어 자식을 신성시했다. 그 어머니가 영영 우리 곁을 떠나가신 거다. 어찌 생각하면 그 어머니는 내 어머니가 아니었고 저 하늘 나라에 천사가 잠시 성육신하여 지상에 계시다 떠나가신 듯한 어머니….
어머님이 운명하시자 그날 그 시각으로 온 세상이 변했다. 별안간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꺼지는 것만 같았다. 온 세상도 내 육신도 영혼도 일시에 붕괴해 떨어져 나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거기엔 이미 빛도 그늘도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결코 이름 지을 수 없는 그것은 연옥도 아니며 이승도 저승도 아닌 세계였다. 그것은 철저히 《무》이며 《공허》일 뿐 전우주가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감이었다. 그렇다면 어머니, 내 어머니가 곧 전우주였더란 말인가. 전우주가 사라진 그때 그 현장엔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슬퍼할 한 방울의 눈물도 없었다. 세상이 없고 내 자신의 존재가 없으니 나에게 의식이 있을 리 없다. 하늘이 맺어 준 나의 형제, 순덕이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주섬주섬 밥상을 차려다 놓고,
《언니, 언니 여기 죽 끓여 왔어. 언니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을래.》 한다.
유치원 선생들이 또 나를 흔들어 깨운다.
《언니, 언니 정신차려요. 유치원 졸업식 어떡하면 좋아요. 어서 언니가 정신차리고 수습해 주셔야죠.》
그렇다. 그래야 한다. 이것이 고작 내가 자식으로서 어머님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드릴 수 있는 자식의 도리이며 의무일 게다. 어머님께서 그 평생을 바쳐오신 보육 사업 50여 년의 마무리를 해드려야 한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몸매무새를 가다듬고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조그마한 유치원 졸업식을 준비하는 데에도 그 또한 처리해야 할 어지간히 번잡한 문제들과 막중한 작업이 있어야 했다. 어머님 생전 주변에 정을 나누어 오고 그처럼 어머님께 존경을 바쳐오던 교회와 친지들이 서로 다투어 그 어려운 일들을 거들어 도와주었다. 당시 내가 그들에게 받은 사랑과 위로와 도움은 내 생애를 두고 가슴 아픈 추억이자 더할 수 없는 인간애의 절절한 체엄이리라.
유치원 졸업식 날은 아무일 없다는 듯 청명한 날씨에 꽃샘바람이 무심히 불고 있었다. 아기들을 데리고 온 학부모들은 벌써부터 눈시울들이 젖어 있었다. 나는 어머님 유품 중 연노랑 비단 옷감을 골라 한복을 해입고 원장 대리로서 단에 섰다. 식이 시작되었다. 학부모 형제들의 축하 박수 속에 이 어인 명문 대학 졸업생(?)들인가. 장난감 같은 꼬마 학사모에 가운까지 갖춰 입은 꼬마 학박사님들이 아장아장 아니 당당히 줄지어 입장해 들어오지 않는가. 장내는 웃음과 눈물의 범벅이 되었다. 나는 그들 앞에 나아가 섰다. 그러나 대체 아무 것도 모르는 이 천사들 앞에 나는 이 시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어머니가, 어머니가 어찌하여 이토록 잔혹한 고문대에 나를 세워 두고 떠나셨단 말인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그처럼 여러분들을 아끼고 사랑해 주셨던 원장님은 안계십니다. 하지만 이처럼 기쁜날 원장 선생님께서도 저 하늘 나라에서 내려다보시며 우리와 함께 기뻐하고 계실 겁니다. 여러 어린이 동무들 그리고 학부모님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를테면 원장 대리로서의 나의 졸업 훈시(?), 그후 무슨 말을 어떻게 주워대어 맺음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나는 어머님의 유골함을 품에 안고 영원한 유랑의 길을 떠나고 싶었다. 어머님의 영혼을 가슴에 품고 이 지상 끝에까지라도 헤매이고 싶었다. 저 멀리 피안의 섬이 보이는 곳까지라도…. 그후 나는 울급불긋 오색으로 페인트칠한 어린이 놀이터나 유치원 앞을 지나지 못한다. 피치못해 그 앞을 지나치려면 시선을 돌려 외면하거나 길을 돌아가기 일쑤다. 실은 이 죄 많고 고통 많은 세상에서 어린 것들이 봄날에 병아리떼 노니듯 뛰놀며 춤추고 노래하는 그들의 꽃밭이며 낙원인 유치원보다 더 순결하고 아름다운 평화로운 그리고 자유한 특수 지대가 또 어디 있으랴. 그런데 그 유치원이 내게는 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고난의 장소 골고다 언덕처럼 내 가슴엔 칼질을 해오는 그런 장소로 보이니 말이다. 지나간 수년의 기피(?)해 온 유치원이라는 특별한 장소. 평양 9.15 탁아소를 향해가는 내 걸음은 무겁고 착찹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전에서 기다렸다는 듯 반가이 나를 맞이해 준 《평양 9.15주탁아소》 원장 김명순 여사. 그녀는 국가로부터 노력훈장, 국기훈장 그리고 김일성훈장을 수여받은 국가적 영예로운 모범 교사이며 교육자라했다. 그러나 그녀의 밝고 유연한 몸가짐, 맑은 피부, 계란형의 고상한 외모에서 전혀 권위적인 분위기 같은 걸 느낄 수 없었다. 줄곧 어린 것들 속에 몸 담아 살아온 탓일까. 오히려 그녀에게서 느껴 오는 것은 따습고 소녀적인 순수함 같은 것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우선 9.15주탁아소의 창설 이야기부터 들려주었다.
평양 9.15주탁아소는 1969년 9월 15일 주로 봉사 부문의 직장 여성들이 집중해 살고 있는 평양 한복판에 김일성이 손수 터를 잡아 건립되었다 한다. 건평 12,000평에 각 500명 수용할 수 있는 2호동으로 돼 있으며 건물마다 25개의 침상이 있는 병동, 500명 수용의 식당 그리고 놀이터와 어린이들의 교양과 설비가 갖춰져 있다. 탁아소에서는 방 하나에 14명 정도의 아기들을 수용하며 유치원에서는 방 하나에 20명 정도의 어린이를 수용한다.
현재 탁아소가 24개 학급, 유치원이 6개 학급으로 총30학급으로써 탁아소는 생후 1년 7개월부터 만4세까지의 아기들을 대상으로 하되 주로 여 기자, 여 우, 여 의사 등 출장이 많이 다니는 여성들의 아기들을 우선으로 받는다고 했다. 교원으로는 교양원 30명, 보육원 70명, 의사 10명 그외 요리사, 청소부 등 총170명의 교육 일꾼들이 종사하고 있다. 탁아소에서는 하루에 1,500~1,600칼로리의 높은 영야가를 보장해 주도록 돼 있으며 아직 글을 가르치지는 않지만 직관 교양, 실물 교육을 하고 있다. 하기 때문에 북한에 탁아소는 다만 아기를 보아 주는 곳이 아니며 이미 국가적 교육 방침에 따라 정서 교육을 실시하는 곳이라 하겠다.
탁아소의 교과목으로는 운동 놀이, 지능 놀이, 노래와 춤, 김 주석과 김 정일의 어린 시절 이야기 등이며 악기 다루기는 신체 발육의 지장을 우려하여 금하고 있으나 모든 프로그램은 일일이 음악으로 신호를 해주도록 한다. 그것은 3~4세 때가 음악적 감수성이 가장 빠른 시기이기 때문에 음악적 기초 지식과 감성을 심어 주기 위함이다. 유치원의 교과목으로는 우리말, 셈세기, 그리고, 만들기, 체육 운동 놀이, 노래, 춤, 악기 다루기 등을 들 수 있다. 그리해서 지, 덕, 체 교육 이념에 준하면서 가능한한 어린이마다 각자 조기 재능을 발견하여 개발토록 하고 있다. 이러한 탁아소와 유치원은 평양시 주민 구획, 동마다 하나씩 있으며 뿐 아니라 기업소별 대소 아파트 구획마다 약 200~300명 수용 규모로 곳곳에 설치돼 있다고 한다. 또한 전국적으로 3만 9천여 개의 탁아소와 2만 1천여 개의 유치원이 설치돼 있는데 유아들에 대한 보육비는 1956년 전반적 초등 의무 교육제가 실시된 이래 일체 국가와 사회 부담으로 무료 교육이라 한다. 이상 평양 9.15탁아소에 대한 개괄적 소개를 마친 김명순 여사는 이어서 탁아소 안내를 참관토록 안내해 주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어린이들이 수업을 받고 있는 혹은 놀이를 하고 있는 교실마다 들러 보았다. 아직 혀도 돌지 않는 어린 것들이 나와서 이야기 발표를 하는가 하면 방으로 어디서 하나 날아든 꽃나비들인가 유희 자랑들을 하고 있고 또 어느 방에 들어서니 이것은 웬일인가. 방으로 하나가득히 들어 앉은 꼬마들이 제 몸체보다도 큰 악기들을 하나씩 둘러메고 왕왕, 요란한 소리를 울려대는 데는 아연, 감탄사가 절로 쏟아졌다. 그뿐인가. 갖가지 놀이 기구와 수영장 등으로 가득찬 거대한 홀에 들어서니 수많은 조무래기들이 저마다 놀이에 취하여 즐거이 뛰놀고 있는데 그 군데군데마다에 여 교사들이 아코디언을 연주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흥을 돋구어 주고 은연 중 음악적 감성을 키워 주기 위함인 듯 싶었다. 그런데 그 홀에는 마치 놀이 기구의 백화점을 연상케 할만치 갖가지 솥한 놀이 기구들로 가득했는데 그 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장내에 진짜 레일을 깔고 어린이들이 승차하여 달리는 기차였다. 그 기차엔 이렇게 큰 글자들이 박혀 있었다. 어느 것은 《조국통일호》 또 어느 것은 《통일열차》라고.
우리가 사무실로 돌아오는 도중 나는 문득 복도에 걸려 있는 《주간 어린이 식사 계획표》에 시선이 갔다. 그러자 그녀는 말했다.
《여기 식사 계획표도 수령님께서 일일이 보아 주시고 교시해 주신 겁니다.》
나는 참으로 희안하게 들렸다. 그것은 어느 일개 가정의 아빠들도 거의 하지 못하는 일들이 아닌가. 그런데 하물며 어느 나라 대통령 혹은 수상이 어린이들의 식단을 짜주는 일이 있단 말인가. 내게는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이야기로 들렸다. 나는 잠시 식사표를 들여다 보았다.

월요일 점심 : 밥, 고기볶음, 동태찌개, 김치
수요일 저녁 : 밥, 닭알전, 배추고기 된장국, 김치
목요일 새참 (1일 3회의 간식) : 빵, 우유, 사과, 알사탕

등속류였다. 그리고 식사표 맨 오른쪽에는 그날그날의 식단 열량표가 나와 있었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아이들이 여기에 오면 처음 1~2주는 울지만 대개 1주만 있으면 집보다 탁아소가 좋다 하고 음식도 탁아소 것이 더 맛있다고 한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이들을 맡으면 아주 과학적으로 먹이고 키우고 교육을 하니까 엄마들도 전혀 안심하고 좋아하죠. 그래서 국가에서는 집에 아이들을 돌볼 사람만 있다면 되도록 집에서 키울 것을 권하지만 엄마들도 아이들도 탁아소를 좋아해서 때로는 만원이라 왔다가 되돌아가는 이도 많답니다.》
김 주석은 항상 말하였다 한다.
《우리나라에 왕은 없지만 아이들이 왕이다》라고.
과연 이 나라에서는 장래 나라의 기둥이며 주인이 될 어린 것들에 대하여 전국력을 아낌없이 쏟아붓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접대실로 돌아온 우리는 아이들에게 먹이는 것이라 하며 가져다주는 구기자차와 새끼알밤(?)이라할 그 유명한 평양의 군밤 대접을 받았다.
이제 비로소 나는 그녀 자신에 대한 질문을 시작했다.
1941년 생인 그녀는 평북 동찬군이 고향이라 했다. 불과 나이 9세 때 전란에 의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천지에 의지할 곳 없어진 그녀와 어린 남동생, 두 형제는 손목을 잡고 11촌 친척 집을 찾아갔다. 그 곳에서 자라나 그녀는 인민학교, 중학교를 나오고 순천 사범전문학교를 거쳐 사범대학 교육심리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졸업 후엔 줄곧 교육 부문에 교사 또는 교장으로 복무해 왔다. 교육자가 된 특별한 동기라도 있는가 하는 데 대한 물음에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평소 소설, 영화 많이 보고 책 보기를 좋아해서 일생 동안 공부하는 직업을 택하고 싶었죠. 그럴려면 남을 가르치는 직업을 택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동기는 중학 시절에 담임해 주신 여 선생님이 너무나 아름답고 멋져 보여서 그 선생님한테 반해 가지고 나도 꼭 저렇게 되고 싶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좀 생활적이 못 돼서 지금도 회의 같은 건 싫고 책 보고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을 그려 보곤 하는 것이 재밌고 즐겁습니다.》
가정 생활에 대해서는 이렇게 세 아들에 대한 자랑을 아주 자연스럽게 한다.
《아들 아이만 셋을 두었습니다. 맏이가 외국어대학 프랑스어과 5학년 졸업반이고 둘째는 요리사학교 졸업반이며 셋째는 고등중학 6학년에 다니고 있죠. 세 아이 중 맏이가 제일 인정이 많고 자상합니다. 엄마 아빠가 방금 수저를 놓는 것보고도 자기가 후에 돌아오면 《식사 더 하자요》 그런식으로 계집아이 같이 다정히 굴고 그 아이뿐 아니라 우리집 총각아이들이 모두 커가면서 어머니 옷 참견 시비도 꽤 한답니다. 옷도 신발도 좀 새롭게 변화 있게 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부모 앞에서 제딴에들 아는 척 많이 하죠. 보모들이 세계 정세에 어둡고 낙후해선 안되니 저희들이 부총해 준다나요. 프랑스어과 다니는 맏이는 불문학 이야기를 잘합니다. 《좁은문》, 《으제니그랑데》, 《보봐리부인》 등등 그아이에게서 듣고 또 프랑스 사람들의 생활 이야기도 얻어 듣습니다. 불란서 사람들은 포도주 한 병 놓고 밤새도록 떠들기 좋아한다는 등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면 광장에서 서로 아무나 부둥켜안고 뽀뽀한다는 등 호호…. 그리고 우리 둘째놈은 요리사여서 이 에미가 오히려 배우고 맛있고 희한한 것 많이 얻어 먹기도 합니다. 지난 번 평양축전 때 호텔에 실습 중이었는데 제가 만든 것을 외국인들이 세 번이나 더 시켜 먹더라고 으쓱해 하는군요. 하지만 우린 우리대로 아이들에게 교양 좀 세게 합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서도 샌다》라고 하면서…》
통일에 관련하여 특별히 남한의 동역자인 교육자들에게 보내고 싶은 메시지라도 있는가 했다. 그녀는 정색을 했다.
《남조선에는 통일되면 높은 명예가 차려질 훌륭한 교육자가 많을 것으로 봅니다. 남조선 교육자들이 선각자들일 것입니다. 그처럼 훌륭한 교육자들이 없다면 전대협과 전교조의 투쟁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고 임수경과 같은 학생이 있을 수 없겠죠. 남조선 교육자들의 역할이 막중하게 큰 것이고 교육자들의 그 지조를 끝까지 지켜 나갈 때 통일에 큰몫을 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옳은 것만 지향하는 우리 남과 북의 교육자들의 공통점에서 우리가 하나고 뭉치고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 투쟁해 주시기를 간곡히 바라겠습니다.》
어느새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더니만 이렇게 말을 잇는다.
《선생님 제가 임수경이 오던 날 밤 정말 한잠을 못 잤습니다. 그날 일기를 적으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나는 재빨리 다가 붙었다. 죄스러우나 그 일기를 좀 보여 줄 수 없는가고. 마침 그녀의 일기장이 손 가까이 있었다.

1989년 7월 14일 개인 날씨
축전 분위기로 들끓는 평양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전대협 대표 림수경. 텔리비에서 그의 밝은 얼굴을 계속 보고 싶고 그에 대한 기사를 읽어도 가슴이 뭉클해짐은 아마도 우리 인민이 그토록 념원하는 통일의 사신이기 때문일까. 남조선 학생들의 용감한 투쟁에서 그들의 아름다운 리상을 보았기 때문일까? 사선을 넘어 축전장에로 온 그를 영웅으로 축전의 꽃으로 부르며 사랑하는 우리 인민, 그로하여 평양은 더욱 약동한다. 손이라도 한 번 잡아 보고 싶고 힘껏 껴안아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의 나이 22살, 우리 맏아들과 동갑 나이, 전공한 어학도 프랑스어, 학년도 같은 4학년생….

끝으로 그녀의 소망을 물었다.
《첫째는 수령님 생전에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보다 더 절실한 소원은 없습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으로는 그간에 각양 다양한 경험들을 교육 방법론적 입장에서 글로 남기고 싶습니다. 그리고 계속 읽고 쓰면서 정신적 젊음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나는 장시간의 손님 접대에 감사를 드리며 그녀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내가 《참 미인이십니다!》 그러자 그녀는 서슴없이 《예, 제가 젊었을 땐 다들 괜찮다고 그랬습니다》하며 티없는 미소의 꽃을 환히 피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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