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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농학자 배용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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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8,1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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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물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어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마루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창세기 1:9~13, 29》

이렇게 일찍이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식물이 있어야 할 것을 점지하셔서 이처럼 양식을 친히 우리에게 마련해 주셨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식물들이 잘 자랄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태초 이래 이날까지 한결같은 어머니의 손길처럼 우리에게 태양빛을 비춰 주시고 단비를 부어 주셨으며 바람을 보내 주셨다. 그런데 어찌하여 《밥은 하늘이다》 시인 김지하는 노기어린 선언을 했으며 《쌀은 공산주의다》 북한의 법으로 공포하는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한 1서 3:14》

사랑은 곧 생명, 생명은 곧 사랑 그리고 생명은 하늘에 속한 것 쌀은 곧 생명, 생명은 곧 쌀 그리고 생명은 하늘에 속한 것, 생명은 사람의 권한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쌀은 사람의 권한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쌀을 탈취하는 자는 생명을 탈취하는 자다. 그리고 신의 권한을 탈취하는 자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내 남편 되는 사람이 그의 모친을 만나고자 미지의 나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마치 지구상에 처음보는 신기한 나라, 새로운 저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를 다녀온 기분이라고.
그들 노래의 주제가 하나같이 《조국애》아니면 《수령님 찬가》였다던가, 휘항한 샨데리야, 대리석으로 꾸며진 지하 궁전 평양의 지하철, 뛰어난 꼬마들의 음악 수준, 우리네 인식과는 달리 서커스가 최고급 예술로써 인정되고 사랑을 받는다든가.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같은 뜻밖에도 너무나 기독교적인 구호라던가 등등 그의 북한 고향 방문은 온갖것이 그처럼 신기롭고 또 충격적이었음을 아내인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가 그처럼 경이와 함께 목격하고 온 것 중에서도 그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에 하나가 그 나라의 놀랍도록 발전 개발된 이른바 《주체농법》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땅 어디를 가나 분수처럼 무지개를 그리며 뿜어 나오는 물살을 볼 수 있었고 한치도 노는 땅이란 없이 가는 곳마다 산을 개간해 일구어 놓은 다락밭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주체농법을 배우기 위해 해외에서 많은 유학생들이 들어와 있다는 것. 때마침 평양에서 국제 농법 세미나가 개최되고 있어 세계 각국으로부터 숱한 농학자들이 몰려와 있었던 것, 그는 그의 첫 조국 방문에서 얻은 온갖 체험, 정보 가운데서도 그 중 이 사실을 가장 기뻐했고 감동스러워했다.
북한의 농학 박사, 배용석 씨.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잠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민망해 했다. 그는 한쪽 팔을 잃어 버린 불구의 몸이 아닌가. 그러나 내가 다시 그와 마주했을 때 나는 금시 마음이 편안해 질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지금까지 접견해 온 그 어느 누구보다도 오히려 자신과 패기에 넘쳐 있었기에….
나는 먼저 무슨 신성조서(?)라도 꾸미듯 기계적으로 그의 생년월일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실은 금년도가 환갑일 뿐 아니라 환갑 잔치와 동시에 김정일로부터 영예로운 훈장까지 받았다는 자랑부터 서슴없이 했다. 그리고 약 80여 명이 모인 회갑연이자 수상식인 그 자리에서 그는 그의 감개무량한 소감을 피력함과 동시에 자신의 지나 온 한생을 잠시 회고해 보기도 했다고….

1929년생인 배용식 씨, 그의 본적은 북한이 아니었다. 그는 전라북도 부완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났고 가문 대대로 그 곳에서 살아온 이남 출신의 월북자였다. 그가 자라난 호남평야, 그것은 사방 2백 리가 산이 없는 무연한 벌이었다. 5형제와 부모님이 구마모도라고 하는 일본놈 지주 땅을 경작하며 어려운 살림을 근근히 이어나갔다. 죽도록 경작하여 지주놈에게 다 바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는 살림, 겨우 소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북중학교에 가서 응시를 했는데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이 되었다. 그러나 입학금, 월사금 등등 거창한 7가지 항목의 돈을 내라 하여 결국 입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엔 중학생 모자 한 번 써 보면 죽어도 한이 없을 듯 했다. 하지만 황금만능 사회에서는 배우고자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집에서 농사를 거드는 일은 더 이상 싫었다. 도시로 나가고 싶었다.
전라북도에서 전주로가 거기서 직업안내소를 찾았다. 원서를 내고 3일을 기다렸으나 그 또한 수수료, 상담비 등 4가지 항목의 돈을 내라혀여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기로 마음을 고쳐 먹고…. 그러나 집에 돌아가 마음의 상처를 달래 볼 사이도 없이 사흘만에 입대 영장이 떨어졌다. 군대에 끌려갔다. 그리고 명령에 따라 총질을 많이 했다. 특별히 아직 나어린 학생들을 향해서…. 그러나 명령에 복종할 때마다 날로 가슴이 아파 오고 회의와 의문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미국놈 쥐어준 총으로 내 동포를 쏘아야 하는가….
그러던 어느 날 보다 더 3·8선 가까이에 나와 북반부 공화국을 향해 총질을 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그는 거기서 또다시 5개월 가량 총질을 했다. 내면의 번민은 날이 갈수록 심해 갔다. 하지만 그 곳에서 피해 나갈 길이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런데 당시 남북한 제 정당 사회단체의 연석회의《1948. 4》가 있었다. 어느 날 그로부터 호소문이 날아들었다. 그 내용인즉슨 남반부군의 그 누구도 과거지사 불문에 부치고 애국, 통일 위해 나서는 자는 누구나 손잡고 힘을 합해 나가겠다는 김일성의 사상이 반영된 그와 같은 내용의 호소문이었다. 고향 친구 10명이 모여 앉아 그 호소문에 대한 토의를 했다. 그 호소문을 믿고 북으로 갈 것인가 아닌가 그리고 그 호소문은 과연 진짠가 가짠가. 동료들은 비장한 결심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침내 거사를 단행키로 결의를 했다. 그날은 8.15광복절로 모두가 위안부들을 데리고 방탕하는 날이었다. 탱크와 수류탄 8개, 작전 문건을 마침내 탈취하는데 성공, 대장으로 선발된 그가 자정을 기해 파란 신호등을 발사함과 동시에 폭파가 실현되었다. 동료 결사대 14명 중 4인이 희생되고 10명이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가 10명의 동료와 함께 월북하자 조국에서는 최대의 환대를 해주었다. 그러나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그에겐 그 환대가 또한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절반 의구심, 절반 두려움을 안고 있는 그에게 조국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물어 왔다. 그는 큰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중학교 정도 졸업시켜 사무원이나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부들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다. 그도 좋지만 지금은 무장 들고 나아가 미국놈 치고 통일해야 한다》라고.
다시 입대를 하고 그리고 이번엔 소대장이 되었다. 남쪽을 향해 진군, 대구 팔공산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또 어디선가 선전 방송이 들려왔다.
《이제 북반부공화국은 다 없어졌다. 월남하라! 월남하라!》고.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번엔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 거기서 고향 옛 집이 불과 70리 거리에 있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생각이 복잡했다. 그리고 망설여졌다. 그는 진중히 모든 사리를 다져 보았다. 왜정 시대도 살아 보고 남도 북도 다 살아 보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북반부가 좋은 세상 좋은 제도 같았다. 그것은 왜인가. 거기에 실업자 거지가 없고 무료 교육, 무료 치료였으며 집마다 쌀독이 차 있었다. 다시말해 기본 문제가 해결돼 있었고 빈부차가 없었으며 평등 사회가 이룩돼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두 번째 월북 후 그는 인민군 중대장이 되어 1중대를 데리고 다시 수원, 안양까지 나갔다가 격투 중 그만 팔을 부상당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전쟁이 끝나기 전에 1952년 제대를 하게 된다. 그는 배운 것 없고 친척도 없었으며 게디가 불구의 몸이었다. 그러나 조국에서 그로 하여금 원산 농업대학 예비과에 입학하도록 온갖 배려를 해주었다. 입학하고 몇 달이 지나자 조국에서는 그와 같은 월북한 무의무탁생들에게 학업에 필요한 일체의 학용품일식, 당시 화폐 가치로 24원에 해당하는 장학금 그리고 철 따라 솜외투, 교복, 신발, 내의, 모자, 세면도구 등 일체 생활 필수품이 무료로 공급되었고 숙식 또한 일체 무료였다. 그런데 국가의 보살핌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불구자가 된 그의 불편한 몸에 대한 특별 배려가 있었다. 그것은 당시 고급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고 결국 후에는 지금의 아내가 되어 준 어느 아릿다운 아가씨로 하여금 그의 비서(?)가 되어 주도록 한 것이다.
그는 예비과를 거쳐 4년 과정의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농장 기사가 되었는데 다음 박사 과정인 대학 연구원에 가서 공부를 더 계속하여 학업을 마치도록 하라는 권고가 국가로부터 내려졌다. 그는 너무나 고마웠다. 이 지구상에 이런 제도, 이런 나라가 있었던가. 그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1961년말 연구원을 졸업하고 농업과학원 수의축산학 연구소에 연구사 직책을 받게 되었다. 그가 배치받은 직장으로 떠나려하는데 당 비서가 그를 불렀다.
《자네 결혼해야 되지 않겠는가》
《결혼이라나요. 당치도 않습니다. 내 불구된 몸으로 남 고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 오늘날 수령님과 지도자 동지에 의해 교양된 처녀들은 자네 같은 사람을 더욱 사랑하고 찾는다네. 대학 졸업생 중 마음대로 고르라우!》
《제가 좋다고 되는 일입니까?》
《글세 염려말라니까. 그녀들은 자네 같은 사람을 더 자랑으로 영예롭게 생각한다네. 그리고 복종하게 돼 있어. 팔 하나 그렇게 된 건 장난하다 그렇게 됐는가 돈벌이 하다 그렇게 됐는가. 나라와 인민을 위해 전쟁터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그렇게 된 걸 그걸 왜 자랑으로 여기자 못하고 부끄러워 하는가. 거 졸장부같이 굴지 말라우!》
그러나 그 같은 당 비서의 격려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끝내 청혼의 용기가 없었다. 그가 행복의 보금자리를 마련케 된 것은 결국 신부쪽의 요감한 청혼 덕분이었다고.
연구사로 1년이 되자 연구실장이 되었고 또 1년이 지나자 과학부서장으로 승진되었다. 그리고 그는 1963년 8월 24일 아침을 잊지 못한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정상 근무를 하고 있는데 그날 김일성이 현지 지도를 오니 보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사절하고자 했다.
《내가 엊그제까지 적군이었는데 이 어지러운 손으로 보고할 자격이 없습니다.》
《보고하시오!》
오전 10시 10분이 되자 김 주석이 도착하였다. 그리고 환한 미소와 함께 하차했다. 감동과 흥분의 시간이었다. 사전에 한쪽 불구 손은 포켓에 넣기로 했기에 그렇게 하고 서 있는데 김 주석이,
《이 동무는…?》
《영예 군인입니다》
《수고를 많이 한 동무구만.》 그러면서 팔을 만져 주셨다.
《아프지 않은가?》
《아프지 않습니다.》
《왜 아프지 않겠는가》
그는 그만 왈칵 울음이 터졌다. 북받치는 감정을 더는 누룰 수가 없었다. 마구 흐느껴 울자 《그만하라 그만하라》 김 주석이 달래주었다. 그리고 한 시간나마 김 주석을 곁에 두고서 설명해 드렸다. 김 주석이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차에 오르시려던 김 주석이 다시 돌아와 그에게 다가오더니 《애로되는 것 없는가. 생활에서나 사업에서나 없는가》, 《모든 면에서 애로 없습니다》 김 주석이 어깨 위에 손을 얹으시고 하는 말.
《이 동무 몸도 불편한데 잘들 도와줘라. 내일 이 자료를 가지고 원장 동무와 같이 날 찾아오라》
그날 저녁 퇴근 후 집에 돌아가서는 줄곧 눈물이 쏟아져 울기만 하니 부인이 까닭을 물었다. 그는 말했다.
《이런 세상, 이런 배려가 어디 있겠나. 인류 문화사 어느 나라 역사에 엊그제 같이 적군이었던 자를 한 나라 수령이 이렇게 따뜻이 해준 역사가 있는가. 이건 역시 사람을 가장 중히 여긴다는 주체 정치를 하기 때문이아닌가…》 아내가 남편의 말을 긍정하여 그날밤이 늦도록 함께 울었다.
그는 1963년 준박사학위를 받고 1989년 박사증서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농업대회, 과학자대회 같은 학술세미나 외에 최고인민회의를 위시해 농업 문제와 관련된 국사를 논하는 중대한 회의 때마다 참여하도록 초청을 받곤 한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청량 음료를 마시며 휴식을 하기로 했다. 그가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의 형편을 묻기도 하는 등 한담을 나누며 잠시 숨을 돌린 후 다시 본이야기로 돌아갔다. 우리의 만남 제2부(?)로 들어가기 전에 그는 가방에서 무슨 학술 논문이라도 준비해 온 사람처럼 그 나라 농업에 대한 서류 같은 것을 끄집어내 둔다. 그리고 그가 그 문서를 짚어 가며 먼저 나에게 들려준 것은 1944년에서 1984년 사이 그러니까 해방 직전과 그 이후 40년 뒤에 그 나라에서 이룩, 발전된 농업의 발전상과 그 통계였다.
그 중 몇 개만을 들어보면 ①1944년 216만 7천 백64톤밖에 되지 않던 알곡 생산이 1983년 100만 톤으로 ②1944년 2톤 5백 16kg의 논벼가 1982년 7톤 600으로, ③1944년 7월 23kg의 강냉이 생산이 1982년 6톤 500kg으로 증산되었다 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식량을 자급자족하게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처럼 증산이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크게 나누어 ①관개 ②비료시비량 ③기계화 등의 발전이 주요인이라 하겠다. 그 중 오늘날의 기계화 발전상 하나만을 들어 보면 논모내기 95%, 가을걷이 70%, 낟알털기 100%, 수송작업 100%, 김매기 97%가 기계화 되었다고 한다. 또한 증산의 주요인의 하나로써 평지가 많은 남한과는 달리 주로 산악지대가 많은 북한의 악조건을 극복, 산이 15도 아래 되는 것은 평지로 만들고 25도 아래인 것은 다락밭을 갈므로써 부침 땅을 확충한 사실이다.
그러나 증산의 보다 더 주된 이유기 또한 있었다. 그것은 1970년 주석이 창시한 《주체농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적지적작, 적기적작》이라 했다. 즉 농산물 생산간에 있어서 기상, 기후, 토지, 토양 등의 매개체의 조건에 맞게 돌보아주며 경작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주체농법의 한 실례를 들어 주체농법의 우월성을 자랑한다.
즉 화란만 하더라도 간석지 개간 후 8년이 지난 후라야 벼를 심도록 되었고 일본으로 말하면 10년이 지난 후라야 벼심기를 할 수 있는데 북한에서는 주체농법에 따라 간석지 개간 후 1년이면 벼를 심을 수 있다 한다. 하기 때문에 블록 불가담 및 발전도상의 제3세계 나라들은 물론 구라파 각국으로부터 주체농법을 배우기 위해 많은 학자, 유학생들이 평양으로 몰려 오고 있다는 이야기, 또한 김일성은 특별히 식량이 부족한 아프리카 60여개 나라들에 대하여 그들이 식량난으로 인해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계 나라들에 예속되어 있음을 비감히 여기며 그들이 주체농법을 배워 하루속히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해방의 길임을 때때로 역설, 강조한다고.
마지막으로 북한의 농학자, 배용식 씨가 그가 몽매에도 그리는 고향 땅, 남한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그의 소원, 그의 메시지를 들어 보기로 한다.
《언제까지나 절반 땅을 미국놈에게 빼앗기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통일은 반드시 옵니다. 그것은 불보듯 시간도 멀지 않습니다. 통일되는 날 아들들을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고향 가서 농사를 한 번 잘 지어서, 주체 농법 실천해서 고향 사람들 한 번 잘살게 해봤으면, 그리고 남조선 농학자들과 공동연구를 해서 더욱 우리 농법 발전시켜 우리 조구 땅 기름진 옥토로 만들고 세계의 곡창이 되도록 해보고 싶습니다. 남조선 사병들게 외치고 싶습니다. 미국놈 쥐여준 총을 들고 나라 찾고 통일하겠다는 우리 민족 가슴팍에 대지 말고 학생들과 합세하라. 그리고 총부리르 돌려 대라. 그것만이 조선 청년들이 할 일이며 나아갈 길이다.》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1992.2.5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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