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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 《보현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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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11,8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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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했다.

《비구들이여, 나는 괴로움도 없었고 조금도 괴로움이 없었고 필경 괴로움이 없이 살았노라. 비구들이여 나의 부왕의 저택에는 연못이 지어져 있었다. 오직 나를 위하여 한 곳에는 청련이 심어지고 한 곳에는 홍련이 심어지고 또 한 곳에는 백련이 심어졌느니라. 비구들이요, 나는 카아시산 전단향이 아니면 쓰지를 않았고 옷도 카아시산 비단이었다. 그리고 추위와 더위와 먼지와 풀과 이슬이 몸에 닿지 않도록 흰 천개가 항상 내 머리위에 받쳐져 있었다.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또 세 궁전이 있었다. 하나는 겨울을 위해서, 하나는 여름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는 장마철을 위해서 있었다. 장마철이면 나는 4개월 동안 장마철에 지나기 좋은 그 궁전에 악기를 타는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한걸음도 밖에 나가지 않고 지냈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렇게 부유했고 자상한 배려 속에서 지라났다. 그리고 필경 괴로움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하기를 참으로 이 세상은 괴로움에 빠져 있다. 태어나고 늙고 괘해지고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 생은 고다, 노느 고다, 사는 고다, 시름, 슬픔, 불행, 근심, 번민은 고다, 미워하는 자와 구하다가 얻지 못하는 것은 고다, 진실로 인생은 슬픔과 고뇌에 가득차 있다.》

오직 그를 위하여 심어 놓은 홍련도 카아시산 비단도 그리고 호화로운 여름 궁전도 저 젊고 수려한 귀공자님 우수를 덜어 주지는 못했다. 저 부귀영화, 부모님의 통곡소리를 뒤로한 채 어느 날 홀연히 먼먼 수도의 길을 떠나 버린 왕자님, 그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한다.

《비구들이여, 일체는 타느니라, 일체는 타느니라, 번뇌의 불꽃, 욕망의 불꽃, 노여움의 불꽃이… 세상은 모두 타고 세상은 모두 불붙고 세상은 모두 불꽃에 싸이고 세상은 모두 뒤흔들리나니…》

오직 고행을 벗삼아 일엽편주 방랑의 길을 헤매이시던 왕자님, 어느 날 보리수나무 그는 아래 좌정하시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에게서 저 새벽을 밝히는 여명 같은 빛이 찬란히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녕 황홀하고 우아했으며 그리고 감미한 빛이었다. 그가 고요히 설법을 시작했다.

《비구들이여, 제 행은 실로 무상하나니, 제 행은 실로 무상하나니 생멸의 성질을 가진 것이다. 낳아서는 다시 멸하나니 그러한 제 행의 적멸은 낙이다. 무상한 색을 무상하다고 관하라. 그리하면 정견에 이르리라.》

《유마경》은 말한다.

《이 몸은 무상합니다. 이 몸은 물보라 같아서 손으로 잡을 수가 없습니다. 물거품과 같아서 오래도록 지탱할 수 없습니다. 아지랑이와 같아서 갈애의 열기에서 생긴 것입니다. 파초의 줄기와 같아서 속에 견실성이 없습니다. 환영과 같아서 전도된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꿈과 같아서 허망한 것이 진실인 양 보일 뿐입니다. 그림자와 같아서 업연으로 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메아리와 같아서 온갖 인연에 따르는 것입니다. 뜬구름과 같아서 잠깐 사이에 변하고 소멸합니다. 번개와 같아서 한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 《생·노·병·사》…. 저 생명의 덧없음에 그 뉘라서 오만할 수 있으며 우리 뭇 중생들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이 무상의 운명 앞에 그 뉘라서 피해 갈 수 있다던가. 하기 때문에 우리는 문득 길섶에 한송이 가련한 풀꽃을 보고도 이른 아침 한 방울 이슬 앞에서 이름 모를 풀벌레 울음소리에도 그 생명의 신비를 감격해 하고 그 목숨의 소중함을 눈물겨워 한다.
그렇다. 실은 우리에겐 그처럼 많은 것이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그처럼 우리를 시달쿠어 온 괴로운 꿈, 꿈….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실은 그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고민 그것이 있어야 했고 저 괴로운 꿈에서 깨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 빈 가슴에 우리는 다만 사랑을 보다 더 많은 사랑을 고이게 했어야 하리라. 저 태고의 호수처럼 맑은 사랑, 옥같이 변함없는 사랑을…. 네가 가고 내가 남기 전에 아니 내가 가고 네가 남기 전에 다만 사랑을 사랑을 했어야 하리라.
하기 때문에 저 봄날에 정처없이 떠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옥토에 떨어져 잘 심겨지도록 도와야 하고 살아야 한다. 내 발등 아래 천 리를 기어가는 한 마리 개미도 제집을 잘 찾아가도록 도와야 하고 여름밤 못가에 밤새워 울고 있는 저 못난 개구리의 설움도 들어 주고 무덤가에 홀로 초초히 피어있는 할미꽃도 찾아봐 줘야 한다. 그 어느 숲속에 상처입고 쓰러진 날새 한 마리 있더냐. 보듬어 싸매 주어야 하고 임자 없는 잡초 한 뿌리, 들꽃 한 송이도 뽑지를 말라. 그 어느 날 저 대해의 일몰처럼, 꿈인 듯 피었다 사라져간 아침 안개처럼 지난해 꽃자리처럼 네가 가고 내가 남기 전에 아니 내가 가고 네가 남기전에 우리는 다만 사랑을 보다 많은 사랑을 했어야 하리라.
1981년 오직 노모님을 만나 볼 일념으로 온갖 공포와 의혹을 무릅쓰고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내 남편 홍동근 목사는 그의 방문 기간 중 숱한 사진을 촬영해 가지고 왔다. 우리는 그 많은 사진들을 경이와 함께 한 장 한 장 감상해 나갔다. 다만 악선전과 편견 속에 우리 멋대로 그려 왔던 북한의 상상도와는 꽤 많은 부분에서 격차가 있었으므로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로웠으며 그리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북한에서 가장 오래된 대표적인 사찰 묘향산, 보현사의 정경이었다. 뜻밖에도 그 나라 그 땅에도 종교가 그처럼 건재해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우리의 귀중한 역사적인 유적을 그처럼 소중히 국보로써 보존해 오고 있다는 사실에도 경탄해 마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나라엔 공산주의 또는 주체사상 이외엔 일체의 사상이나 종교가 있을 수 없고 민족적 전통이나 유산 또한 전혀 도외시되어 온 것으로 우리는 철석같이 믿고 그리도 쉽사리 단정해 버렸던 것이 아닌가. 하기 때문에 실은 그 한두 장 사진 속에 담긴 사찰의 정경만으로 우리의 불신이 쉽사리 씻겨지는 것은 아니었고 반신반의하며 사진을 보는 우리는 여전히 이견이 분분했고 무언가 석연찮은 시비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내 남편 홍동근 목사가 그 나라 종교에 관한 이 같은 법령을 전달해 줌으로써, 갖가지 의문에 대하여 그런대로 대변자 노릇을 해 주는 것이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는 종교를 믿을 자유도 있고 믿지 않을 자유도 있다. 단 18세 이하 미성년자에게 포교, 제도하는 것을 금한다》라고.
당시로써는 그 무슨 신천지로 떠나는 탐험대와도 같은 하나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었던 남편의 방북 이후 8년이라는 세울이 흐른 뒤 비로소 나에게도 마침내 기회가 주어졌다. 1989년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어느 날 하오 나는 평양 김일성 경기장 곁에 자리하고 있는 용호사를 찾아 김정국 스님을 뵙고 불교 전반에 대한 대략의 개요를 들을 수 있었다.
북한 땅에는 원래 해방 전까지 약 400여 개소의 사찰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전란 중 소멸되고 현재 전국적으로 60개 정도의 사찰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전후 복구된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그리고 해방 전까지 1,600여 명의 승려가 있었으나 현재 300여 명의 승려가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고 신도는 약 1만여 명에 달한다고 했다. 또한 종파는 국가 시책에 따라 단일화하여 조계종으로 통일되었고 현재 박태호스님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불교도연맹으로 1945년 12월 26일에 결성되었다. 전국적으로 약 만 명 정도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는데 초파일 같은 때이면 회원뿐 아니고 일반 신도 혹은 시민들까지 모여들어 법회에 참여한다.
불교도연맹의 활동이라면 ①전국 사원들을 유지, 관리 사업 ②포교 ③신도 집단과 힘을 모아 민족 번영을 위한 국가 사업에 제기된 문제 수행하는데 참가 ④조국 통일 사업 기원법회 ⑤해외 교포 교도들과 교류 ⑥반핵, 평화 운동에 참가하는 등 국제 평화를 위해 사업 참여 ⑦한문이 많은 《경전》을 번역, 대중화 하며 민족 문화 유산을 계승, 시대에 맞게 활용하는데 힘을 쓰고 있다. 경전은 경남 합천 해인사에 팔만대장경에서 찍은 것으로 사용 연감형의 전25권으로 번역했다.
스님 양성을 위하여는 전국적으로 단 하나 양강도에 불교학원이 있는데 현재 약 20~30명 정도의 생도들의 수강을 받고 있다.
평북도 묘향산 보현사에서 4킬로 떨어진 곳에 극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진학을 할 수 없었던 불행한 환경이 그로 하여금 무료 불교전문학원이 설치되어 있는 보현사의 문을 두드리고 그의 전생애를 바쳐 수행의 길을 걷게 했다는 김정국 스님. 그는 일본 경도불교학교 출신으로 해방 후 결혼, 슬하에 4자녀를 둔 대처승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듣고 싶은 몇 가지 일들이 있었다. 먼저 한생애를 통해 주체의 나라, 공산주의 사회에 몸을 담은 종교인으로서 그 어떤 제약이나 어려움 같은 것이 없었는가… 하는 나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생애의 괴로움이 있었다면 식민지 민족으로서 기막힌 처지에 놓였을 때 그리고 전란을 당했을 때 참으로 쓰라린 민족적 설움을 겪은 것입니다. 종교인으로서는 전혀 고충이란 없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돼 있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종교인에 대한 일체 차별이 없습니다. 한 예로 수령님께서는 우리 종교인들에게 남북교류 접촉, 세계 평화에 헌신하도록 기대하시면서 국제 무대에도 진출케 하시는 등 많은 배려를 해주십니다.
그리고 때때로 스님들에게도 국가훈장이 수여되기도 하고 현재 불교도연맹 위원장이신 박태호 스님 같은 분은 국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서 국가적 중책을 맡아 인민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하기 때문에 종교인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체사상과 불교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이같이 답한다.
《먼저 주체사상이란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 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 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입니다. 다시말해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민들이 자주권을 완전히 실현할 것을 과제로 제기한 것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 조선인이 나아갈 길을 밝혀 주는 지도 사상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불교의 기본 이념은 무엇이겠습니까. 만민평등사상이며 결국 불교가 해결하자는 최종 문제는 인생 문제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모든 사람의 운명을 점지하는 그 어떤 신이 아니고 다만 자신이 도를 닦아 깨달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선각자로서 길 안내자로서 가르쳐 주신 역사적 인물이라고 봅니다. 하여간 주체사상이나 불교의 이념이나 인생 문제를 풀자는 근본 뜻에 있어서는 공통성이 없잖아 있습니다. 다만 주체사상으로 말하면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결정하는 존재로서 자주적, 창조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불도로 말하자면 이 땅 위에 평화를 누리자는 그와 같은 방법상의 차이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불교와 주체사상을 동일시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둘 다 신봉한다 해서 모순이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주체사상을 실현하는데 불교 신앙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선 불교는 애국주의 교양을 특징으로 합니다.》
팔순 노스님의 아주 담담하면서도 친절한 답변과 응대에 감사드리면서 방문을 나섰다. 스님께서는 잠시 용화사에 어린 몇 가지 사적 일화들을 들려주었다. 고구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국보 7층 석탑과 고려 시대의 석사리탑을 자랑스럽게 보유하고 있는 용화사는 원래 왜정 말기 1935년 승려 공락문이 건설했는데 6.25당시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것을 1954년, 85년 두 차례에 걸쳐 복구 재건된 것이라고. 그런데 그 보람도 없이 수년 전 용화사의 운명이 큰변을 당할 뻔했는데 그것은 도시 계획 중 대성산 구역 공원 곁에 사찰이 있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파괴해 버리도록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으신 김 주석은 오히려 민족의 유산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말고 함께 용화사를 그대로 보존할 뿐 아니라 더욱 보완 증축하도록 특별 배려를 보냈다는 것이다.

평양에서 약 4시간 거리에 8년 전 사진에서 보았던 향산, 보현사를 찾아 가는 길 연도엔 코스모스 무리들이 줄곧 꽃사열을 해주었고 절반쯤 가까이 갔을 때 거기에서 나는 뜻밖에 저 유서 깊은 청천강을 만났다. 나는 감개무량했다.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천재 소녀 화가로 오해(?)되었던 나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곧잘 선생님들로부터 교재용 그림을 청탁(?)받아 그림을 그리던 때가 많았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은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 장군을 그려 달라 했다. 방과 후 홀로 빈 교실에 남은 나는 우리 조선의 남아 중에남아 그의 용맹을 조금이라도더 강조 표현하기 위해 부릅뜬 두 눈 위에 숯덩이 같은 굵은 눈섭을 그리고 지금으로 말하면 카이쟈 콧수염을 덥수룩히 그려 넣어 선생님들게 칭찬을 받고 미술인도 아닌 그들로부터 또 한 번 천재 소녀의 인정(?)을 받은 바 있다. 지루한 공부 시간이었지만 또 한 번 천재 소녀의 인정(?)을 받은 바 있다. 지루한 공부 시간이었지만 지금으로부터 1,400년전 저 청천강에서 그처럼 용감히 수나라 30만 대군을 쳐부수었다는 을지문덕 장군의 이야기만은 언제나 동화를 듣는 것 같아 그처럼 재미있게 듣곤 했는데…. 과연 그 어떤 수난에도 끝내는 살아남곤 하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도 같이 저 청천강 또한 우리의 슬픈 역사와 더불어 스쳐갔을 천 년 풍상에도 불구하고 마름이 없이 거기 그렇게 쉬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차를 멈추고 달려 내려가 그 푸르디 푸른 물에 발을 담그고 한나절 천렵이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바쁜 일정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목적지인 보현사에 닿기 전에 우리는 약수터를 만나 잠시 휴식을 취했다. 샘터에서 안내 선생이 받아다 준 한 컵의 물을 마셨다. 깜짝 놀랄 정도로 물이 차고 찡하지 않는가. 내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에선 저 멀리 구라파 알프스 근방에서 수입해다 먹어야 하는 미네랄 생수, 바로 그 맛이었다. 청량한 물맛이 가까워오는 명산, 묘향산의 경계가 그 얼마나 아름답고 수려할 것인가 벌써부터 짐작케 했다.
우리가 숲속 오솔길을 달려 마침내 보현사에 이르렀을 때 먼저 우리를 맞이해 준 것은 3미터 높이의 보현사 석비였다. 1,200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는 천 년 묵은 석비를 우리는 읽어 낼 수 없었지만 코스모스처럼 가련하게 생긴 예쁜 강사 아가씨가 비에 새겨진 보현사의 내력을 줄줄이 소근대듯 풀이해 주는 것이었다.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이 내려오셨다는 태백산에 탐밀이라는 스님이 처음 안심사를 세운 것이 1028년의 일이고 그의 제가 굉학이라는 스님이 1041년 안심사를 다시 보현사로 바꾸어 240간으로 증축, 3천여 스님들이 수도 안거하였다 한다. 그리고 천 년 세월의 풍상을 겪어오는 동안 보현사는 6차례의 증건을 거쳐야 했다 보현사가 거립된 후 태백산 또는 묘향산 혹은 향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조계문과 해탈문 그리고 천왕문을 거쳐 비로소 대웅전 뜰안으로 들어섰다. 먼지 하나 티끌 하나 없이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는 뜰안은 정적하기 이를데 없었다. 뜰 한가운데 서 있는 8각13층 석탑의 추녀 끝마다 숱하게 달려 있는 앙징스럽도록 작은 풍경들이 서늘한 가을바람을 타고 낭낭히 울려퍼지고 있었다.
석탑은 화강암으로 다듬어진 것으로 높이 8.58미터. 선조 37년에 건조된 것이라 하는데 우리 선조들의 예술혼을 다시금 경탄, 찬미케 하는 너무나 정교한 솜씨, 우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또 하나 우리의 국보 중 국보라 할까…. 뜰안 군데군데 가꾸어 논 화단에 빨간 사루비아가 무리져 피어있어 초가을 산사의 정취를 더욱 아름답게 느껴 오도록 채색 해주고 항시 정성껏 손을 보는 듯 오색 찬란한 대웅전의 단청이 조금도 퇴색기란 없이 화려하게 단장돼 있었다.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관음전, 영산전, 그리고 계속 오른쪽으로 돌며 수충사와 박물관의 순서로 지어져 있다.
관음전과 영산전엔 석가상과 보살상, 나한상과 동자장들을 모시고 특별히 서산 대사를 제사하기 위해 지었다는 수충사엔 서산 대사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서산 대사의 초상 앞에 섰을 때 나느 감회도 깊었지만 생각도 많아졌다. 정치와 종교, 폭력과 비폭력, 경건주의 보수파 신학과 해방 신학 이런 등등의 어휘들이 떠올랐다. 일찍이 도를 사모하며 출가하여 입산 수도하였던 서산 대사. 그러나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하고 수난을 겪게 되었을 때 그는 분연히 일어나 하산, 수천의 승병을 모아 투쟁에 나섰고 기어이 왜병을 몰아내고 평양을 탈환했다는 서산 대사. 그는 저 남미 콜롬비아의 혁명 사제 까밀로또레스 신부 (1929~1966)를 상기케 하지 않는가. 그 또한 저 군부 독재로부터 언제까지나 착취, 억업, 살상을 당하고 있는 가난한 민중을, 저 악마의 세력이 백주에 활개를 치고 다니며 횡포, 광란하는 것을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고 참을 수 없어 사제인 그가 도포를 벗고 무장 게릴라로 변신 저 죄악된 세상, 희생의 피비린내나는 광야로 도전해 달려나갔다. 저 남미 콜롬비아에 까밀로또레스 신부가 있으면 우리에게 서산 대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사람들은 흔히 쉽게 말한다.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과연 우리는 무엇을 가리켜 《종교》라 부르고 무엇을 어떻게 정의해 《정치》라 부르는가. 한쪽에서 경건주의를 내세우면 한쪽에선 현실 참여를 부르짖는다. 한쪽에서 《이는 이로…《마태 5:38, 출애굽 21:24》》하녀 한쪽에선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래대며…《마태 5:39》》한다. 그런데 그렇게 교리를 따지고 탁상공론을 하고 있는 이 시간, 이 순간에도 저 악마의 밥이 되고 있는 무죄한 양떼들의 피흘림은, 피흘림을 어찌해야 하는가…. 잠시 복잡해지려는 마음을 가다듬고 발길을 돌려 박물관으로 향했다. 거기엔 후기 신라 시대의 금동석가여래상, 백제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개성 만월대에서 토출된 금속활자, 고려팔만대장경역본 그리고 일본에서 되돌려왔다는 불상, 400년 된 불상 그림 등등 그리 많은 점수는 아니었지만 역사적 귀중한 유품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대웅전 뜰앞으로 향했다. 보현사의 또 하나의 명물 400년생 뽕나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현지 교육을 받기 위해 나온 듯한 여학생들이 운집해 강사 선생의 해설을 듣고 있었다. 뽕나무를 배경으로 발랄한 소녀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우리는 무언가 기념품을 사기 위해 매점을 찾았다. 상냥한 두 아가씨가 묘향산의 특산, 백도라지, 두룹, 오미자차 그 외에도 갖가지 산나물과 약초, 도자기 등속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매점을 찾는 손님들에게 꿀을 넣은 따끈한 오미자차를 대접해 주는 것이 아닌가… 공짜로. 그렇잖아도 약간 으스스하던 차에 우리는 인정이 서린 한 잔의 차를 즐길 수 있었다. 그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살까 망설이는데 아가씨가 그 또한 묘향산의 특산이라며 향나무 젓가락을 권한다. 그 젓가락은 향내도 그윽하지만 살균 작용을 해주는 위생 젓가락이라며 제법 상품 선전을 한다. 우리는 신이나서 저마다 한 다스씩 사기로 했는데 이것이 웬일인가. 고르다 보니 몽조리 짝짝이가 아닌가…. 여하튼 이것저것 사다보니 한보따리씩 사들게 되었다. 당연히 그 많은 물건들은 으레히 그 흔한 비닐백에라도 넣어 줄줄 알았는데 아가씨들은 어디선가 쓰다 남은 도배지 같은 막종이를 가져다 그냥 엉성하게 싸주는 것이 아닌가. 짝짝이 젓가락엔 웃음으로 받았지만 그같이 엉성한 포장과 팩킹엔 더러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가운데 제법 툴툴거리며 시작한 불평은 나아가서 북한의 상술을 비판하는 데까지 발전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받아 마신 차 대접의 고마움도 벌써 잊고….
나는 돌아서서 또 다른 의미의 미소를 짓고 혼자 쾌재를 올렸다. 나는 그 엉성한 상술이 오히려 이렇게도(?) 마음에 들고 내 마음의 안식과 그 어떤 쾌감마저 안겨주고 있는데 하면서…. 그것은 왜? 나의 경우로 말하면 금 만능주의, 약육강식 세상에서 《고객은 왕》으로 떠받들리는 척 고도로 발달된 때로 간교하다고 느낄 만큼 빈틈없고 완벽한 그 상술과 문화 속에서 생존해 남는 문제를 두고 늘상 숨이 막히는 위압감을 느끼고 소외감을 느끼며 피로했다. 그런 나였기에 아직도 이 세상 한 끝에 이같이 상술이나 돈 같은 것에 별 관심이 없는 딴 세상이 존재 한다는 것이 그처럼 위안이 되었다. 그 짝짝이 젓가락에 벽지 같은 포장지는 바로 내가 만난 적어도 북녘 사람들처럼 오히려 따스하고 여유 있는 그 어덴가 아직은 어수룩함이 남아 있는 인간미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고 그래서 참으로 오랜만에 사람이 살고 있는 동네에 온 것은 같은 기쁨을 맛보게 해주었다. 그것은 날이면 날마다 우리가 부딪쳐 살아야 하는 돈이 먼저 군림하고 상술이 난무하는 세상 그래서 더욱더 각박하고 번거로운 저쪽 나라에서는 결코 느껴볼 수 없는 그런 값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보현사 뜰안 한모퉁이에 서 있는 범종누각에 이르렀다. 그것은 조선 숙종 때 주조된 것이라했다. 범종, 천근만근 그 묵중한 몸체만 보아도 스스로 경건해지는 마음은 그 어찜이뇨. 저 땅거미지고 노을이 물들어 가는 시간, 들녘 저 멀리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둔탁한 인경 소리, 그보다 더 우리으 영혼을 뒤흐들어 주고 그보다 더 가슴에 스며오는 음악이, 설법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으랴. 그 숭엄한 소리에 이끌리어 우리는 고뇌의 바다에서 애증의 불길에서 한 찰라 티끌 세상에서 저 무량겁 무념무상, 불고불락의 세계, 청정의 세계로 서서히, 서서히 인도된다. 연꽃은 탁류 속에서도 청렴고결하게 피어나고 범종은 천 년을 어지러운 사바 세계 굽어보지만 말이 없다.
나그네는 잠시 머물렀다 떠나며 머잖아 그 육신도 벗고 그 고해 세상을 떠나겠지만 여기 말없는 범종은 세세토록 남아 이 보현사를 지키고 우리의 강토를 지키리라. 송림 우거진 깊은 산간, 나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종루 앞에 서 있고 싶었다.

1992.2.5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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