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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땅에 교회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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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11,9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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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평생을 살면서 그 몇 번인가 감격의 날, 감격의 순간을 맞게 된다. 그리고 그 감격의 날은 우리의 생을 곧잘 그 어떤 기묘한 방향으로 기울게 하고 몰아붙이기도 하는 운명의 새로운 분기점이 되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생에 있어 그 감격의 날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삶은 신성해지고 풍요해 질 런지도 모른다. 또한 그 내용이 때로 국가적, 사회적일 수 있고 때로 민족적일 수 있고 또 개인적일 수 있다. 그것이 나 자신의 노력에 의해 스스로 자초할 수 있고 반대로 외계로부터 수동적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6·25 이후 38년만에 기적처럼 다시 살아난 북한 교회, 그 역사적이고 감격적인 현장에 극히 소시민으로 살아온 이름없는 내가 하객이며 증인으로서 부름을 받아 가게 된 것은 여기에 그 후자에 속하는 경우라 할까.
어린 시절 학교 생활이 회상된다. 가끔 수업 시간에 그런 일이 있었다. 수업에 성의가 없고 무관심하여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학생을 선생님은 별안간 호명해서 불러내어 칠판에 어려운 산수 문제를 풀도록 하여 학생을 당황케 하는가 하면 문제아나 열등생에게 임시 반장 같은 벼락 감투를 씌워 회유, 학업에 마음을 붙이도록 유도하던 일 말이다.
아직은 그 누구나 쉬이 갈 수 없는 그 땅, 그리고 너무도 머나먼 그 땅에 내가 무엇에 쫓기듯 밀리듯 3차에 걸친 연속 방문을 하게 된 기이한 사건(?)은 바로 이와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너희는 항상 깨어 기도하라》(마태 26:41)
《네가 더웁지도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나를 토하여 내치리라》(요한계시록 3:15)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극히 소극적이고 개인적인 삶의 테두리속에서 시원치도 않은 화필을 들고 씨름하고자 하는 나를 수업 태도가 산만하고 무성의한 학생으로 보시고 어느 날 갑자기 내등을 떠밀어 북풍에 실어 보내신 게 아닌가. 북으로 북으로 향해 나르는 기체에 몸을 맡기고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하나님은 때로 짓궂으신 데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무언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명에 따라 그의 꾸지람을 들어가며 어디론가 엉뚱한 곳으로 끌려가는 《요나》의 신세(구약1, 287page)가 된 것 같아 내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나의 제2차 방문은 이산 가족 심부름과 서울에서 있게 될 통일 세미나의 슬라이드쇼를 마련케 위함이었다. 황송하게도 마중을 나와 주신 해외동포 원호위원회 장봉준 선생님을 만나 곧 이산 가족 실무 회의를 마치고 여장을 푼 다음날부터 나는 닥치는대로 사방팔방으로 사지을 찍어댔다. 가보고 싶은 곳, 만나 보고 싶은 사람, 기록해 두고 싶은 일, 내가 하고 싶고 해야할 일은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다른 그 어느 곳보다도 서둘러 가고 싶은 곳은 교회요 성당이었다. 물론 제1차 방문시 기적같이 솟아 오른 새 교회당, 성당의 실물을 대하여 느꼈던 감격이 그 시간에도 사라지지 않은 채 였으나 그사이 더욱 진척된 내부 시설이나 장식을 다시금 한시바삐 보고 싶었다. 어린애 보채듯 안내 선생을 졸라대서 교회로 성당으로 달려간 것이 11월 1일 오후 2시 (1988)경이었다.
고기준 목사님께서 반가이 맞아 주시며 안내해 주셨다. 자난 번에 보지 못한 300여 석의 긴 의자들이 들어섰고 피아노, 강대상,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교회 헌당식에 대해 여쭤 보니 아직 난방 시설이 되지 않아 미정이라 했다. 이미 밝혀진 사실들이지만 북한의 현기도교 상황에 대해서도 다시금 여쭤 보았다. 북한엔 전국적으로 50여 개의 기독교연맹이 있으며 500여 소의 가정예배처소가 전국에 퍼져 있다 했다. 그 중 50여 소의 예배처소가 평양에 있다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나는 다만 이 빈 교회당의 방문자요 이방인으로 그칠 뿐 이 아름다운 교회당에서 찬송도 기도 소리도 들어 보지 맛한 채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것이 서운하기가 그지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다시 흔들리는 차에 실려 떠나오면서 뒤를 돌아다보니 강 건너 언덕에 우뚝 솟아 있는 교회당이 동화 속에 삽화처럼 아름다워 차를 정지시키고 다시 내려 몇 번이고 셔터를 눌렀다. 주택가 어린이 놀이터 옆에 서 있는 평양 장충성당에 도착하자 문찬한(베드로) 회장님께서 나오셔서 친절히 안내해 주셨다.
지난해(1987) 6월 바티칸으로부터 장익 신부께서 오셔서 첫 주일 미사를 집례해 주셨고 금년도 10월 2일엔 차성근 회장의 주관으로 60여 명의 신도들이 모여 신공을 드리고 평양 장충성당의 창건을 공포했다고 한다. 또한 지난 6월 30일엔 300여 명 협회원으로 구성된 전국조선천주교인협회를 결정한 사실도 들려주셨다. 성당에 들어서자 그간에 많은 진전을 볼 수 있었다. 제단 정면에 양떼를 거느린 예수님 전신상이 걸려 있고 양편엔 요셉과 어린 예수 그리고 성모상이 노련한 솜씨의 유화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양벽면엔 성화 14처가 가지런히 차례대로 걸려 있었고 본당 출입문 가까이에 하이얀 커텐으로 드리워진 고해성사대도 이채롭게 보였다.
나는 《신부님은 언제쯤…》하고 어려운 질문을 드렸다. 그는 아주 담담한 태도와 어조로 답했다. 《물론 신부님을 모시고 미사를 드리는 게 원칙이겠지요만… 신부님이 안계신다 해서 언제까지나 신도의 할 바를 중지할 수는 없는 것이고 해서… 마땅한 분이 계시면 언제든지 그쁘게 맞이 할 것입니다.》 이같이 겸손하고 순결한 양무리들에게 어서 고대하는 선한 목자를 보내 주시옵기를 천주님께 기도드리며 그만 물러 나왔다.
그후 며칠 동안 나는 여념 없이 뛰면서 돌아오는 주일엔 가정예배처소를 찾아 예배를 드리리라 마음 먹고 있었다. 그런데 주말이 되자 뜻밖에 희소식이 들려왔다. 이번 주부터 입당하여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뛸 듯이 기뻤다. 1988년 11월 6일, 고대하던 주일 아침이 밝았다. 진정 지난 며칠이 아니라 지나간 38년 고대하고 고대하던 그날이 동이 텄왔다. 소풍이라도 가는 어린아이처럼 새벽부터 일어나 서성거리며 카메라, 녹음기 등 준비물을 챙겼다. 그저 감격스럽기만 했다. 이 평양 땅에서 내가 교회당에 들어가 예배를 보게 된다는 게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 아침상을 받는 둥 마는 둥하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교회로 달렸다. 도착하고 보니 아직 예배 30분 전이었다. 고기준 목사님과 함께 차를 들며 환담을 나누었다. 목사님께서는 비록 헌당 예배를 아직 드리지 못했고 난방 시설도 완비되지 못했으나 교우들이 우선 입당하여 예배 드리기를 원하므로 갑작스런 결정을 보았다 했다. 그처럼 훌륭한 성전을 짓고 하루를 천 년같이 입당하기 원하는 성도들의 심정은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오늘의 이날이 오기를 그들이야말로 그 얼마나 꿈꾸며 고대하며 기도했으랴. 길 잃은 어린 양떼처럼 흩어져 지나온 그들의 지난 세울은 광양 40년 바로 그것이 아니었겠는가. 생각만 해도 눈물겨웁다. 그들이야말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로마서 8:35)
그와 같은 신앙과 그리움을 안고 이날까지 견디어 온 순교자적 믿음의 참 용사들이요, 집을 지켜온 《남은 자들》이 아니겠는가. 시간이 되어 교회로 내려가자 교회당 안은 이미 성도들로 가득하여 정좌하고 있었다. 그 시간 가슴 뭉클한 내 감동 때문이었는지 나는 그날 그 시간처럼 경건한 분위기를 일찍이 이 세상 그 어느 교회에서도 본 것 같지 않다. 뿐 아니라 그들의 자세는 참으로 주님의 의전 앞에 머리 조아려 몸둘 바를 모르는 지극히 겸허한 그런 자세들이었다. 회중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거기에 바리새인의 오만한 얼굴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윽고 김운봉 목사님께서 개회 선언을 하시고 찬송이 시작되자 나는 꿈에서 깨어난 듯 깜짝 놀랐다. 그 찬송 소리가 어찌나 힘차고 우렁차던지, 강대를 오려다보니 목사님이 너무 기쁘셔서 두팔을 들어 어깨춤을 추시듯하며 찬송을 인도하신다. 이어서 사도신경 고백 또한 어찌나 유창하게 거침없이 읊어대는지…. 그 또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제 돌아와 회상할 때 그 시간 내가 그들이 하는 신자로서의 당연한 일거일동에 매번 경이의 눈으로, 귀로, 듣고 본 것에 대해 깊은 죄책을 느낀다. 도대체 놀랄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애당초 그들의 존재나 신앙에 대해 그 어떤 의구심이 깔려 있었다는 사실의 증거요, 그것은 곧 바리새인의 눈이요 귀로써 보았다는 증거가 될 터이니 죄스럽기 그지없고 부끄럽기 그지없다.
때마침 카나다에서 이산 가족으로 오신 이회병 장로님의 기도가 시작되자 신도들은 아멘! 아멘!으로 응수한다. 이어서 에레미야 31:31절로 성경봉독이 있는 뒤 다시금 찬송(190장 《예수사랑하심은》) 그리고 김운봉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됐다. 나는 이 흥분과 감격의 순간을 잡기 위해 분주히 사직을 찍고 녹음하는 일로 정좌하여 설교를 경청하지 못했으나 목사님의 설교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극히 정통적인 형식과 내용이셨던 것 같다. 교회당을 쩡쩡 울리는 웅변 같은 그의 설교는 박력이 넘쳤다.

《나 여호와가 말하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새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가 말이니라.》

과연 주님께서는 이제로부터 다시금 이 땅에 십자가를 세워 주시고 지난 세월 우리 한반도에서 흘린 피와 눈물을 닦아 주시며 새 언약을 주시려는가…. 설움이 밀려와 눈물을 흘렸다. 헌금 순서가 되었다. 나는 또 한 번 둥실해졌다. 헌금 주머니가 자기 앞에 오게 되면 누구나 기립하여 먼저 허리 굽혀 절을 한 뒤 두 손으로 공손히 헌금을 자치지 않는가. 이렇듯 겸손한 헌금 광경을 나는 그 어디서도 본 일이 없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감손, 그것은 기독교뿐이 아니라 모든 도의 문을 여는 처음이요, 나중이 아니겠는가. 겸손, 그것이 있으면 그 위에 더 무슨 설법이 필요할까. 세상에는 갖가지 아름다움도 많겠으나 겸손함보다 더 아름다운 것도 드물리라.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희열을 안겨주며 우리의 영혼을 정화해 준다. 나는 그 시간 그 어떤 고명한 도인의 설법을 들었을 때 못잖은 감동과 마음의 정화를 체험했다. 그 같은 은혜를 나에게 끼쳐 준 그들 앞에 나는 영원히 가슴에 새겨 감사하리라.
폐회 찬송 3장 (이 천지간 만물들아)을 부르고 목사님의 축도로 예배는 끝났다. 그런데 이 뜻깊은 날 역사적인 장소에 듯밖에 초대 받게 된 행운의 사람들이 있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그들은 카나다로부터 온 외국인 성직자들이 4인과 이산 가족 교포 두 내외 분이다. 예배가 끝나자 외국인 성직자들이 먼저 강단에 올라가 축하와 격려의 말을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광경이 내게는 무언가 잘못된 긋이 마음에 캥기는가.
나는 그 순간 잠시 한참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과거의 선교사들, 그들은 물론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 준 은인들이요, 뿐만 아니라 서구 문화, 기술, 교육 등을 전달, 원조해 줌으로써 우리의 개화기에 박차를 가해 준 은인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또 한 번 우리가 그들에게서 받은 깊은 상처, 그것을 어찌 잊으랴. 성직자의 도포를 입고 복음을 들고 들어온 그들은 제국주의 식민 정책을 거들었고 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워 우리의 민족 문화를 멸시했으며 순박한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갖가지 인간적 비행들을 우리가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본 북한 땅의 생명은 《주체사상》이었다. 이처럼 뜻 깊은 날 파란 눈의 손님들이 서슴없이 강대에 오르고 내리는 것이 그처럼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면 열강 속에서도 철통 같은 자주 국가로 생존해 남은 또 하나의 조국에 대해 나는 내 나름의 긍지와 기대가 큰 것이다. 이제 새로 탄생된 북한의 교회가 다시는 선교사의 교회가 아닌 진정 우리 민족의 새 교회가 되기를 나는 간절히 기원해 마지 않았다. 내 차례가 되어 성도들 앞에 나아가 섰으나 그들을 대하자 순간 저 로마 시대의 순교자들이 떠오르면서 그들이 지나간 세월 겪어온 고난과 외로움이 일시에 큰 감회로 내 전신을 덮여와 축하와 격려사 대신에 그만 왈칵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온 교회가 눈물 바다로 변했다. 목이 메어 변변한 인사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서는 나에게 그들은 우레 같은 박수를 보내 주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교회문을 나서려는데 그대로 발길을 돌리기엔 너무나 아쉬웠다. 우리를 환송하러 나온 교우들과 작별의 악수를 나누며 나는 한마디 그들의 소원을 듣고 싶었다. 모두가 꼭 같은 대답을 했다.
《오직 한 가지 통일입니다. 어서 통일이 돼야겠습니다. 그래서 남과 북의 교우들이 한자리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그날이 어서 오기만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전도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어서 교인 수를 많이 늘리겠습니다.》
《통일》과 《전도》 이것이 그들의 소원이다. 이 두 마디가 산울림처럼 되풀이 되풀이 내 가슴에 파도쳐 왔다. 총총히 교회 문을 나서는 내 시야에 잠시 환상이 번진다. 해바라기꽃이 태양을 따라 기울 듯 하나님의 태양이 서서히 북쪽으로 기우는 것 같은…. 감격의 그날이여! 그 땅이여! 축복 있으라. 그리해서 다시는 눈물이 없고 유혈이 없는 새 언약, 금수강산 우리 한반도에 이루어지이다.

1992년 2월 출판한 책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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