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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red>내가 본 김정일 총비서-문명자(1)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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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rohkilnam 작성일00-12-27 00:00 조회2,5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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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최고지도자인 그는 어떤 인물인가

문 명자(재미언론인)

 나는 지난 90년 2차 고위급회담 취재차 최초로 방북한후 지난 10년 간 꾸준히 북을 취재해 왔다.그간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라면 아마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북의 최고 지도자 김정일은 어떤 인물입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미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그다지 정확한 답은 아니었다.

 지금 누구도 더 이상 ‘북한 붕괴론’이나 ‘김정일 건강 이상설’을 얘기하지 않는다.미국 대북정책의 최종판이라 할 ‘패리 보고서’도 북의 체제가 안정되어 있음을 인정했다.거기에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까지 예정되어 있다.



 "내성적’이 아니라 대단히 남성적




 이제 김정일 총비서에 대한 그간 의문에 나름대로 답변해 보고자 한다.북의 과거·현재·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김 총비서라는 인물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나는 김정일 총비서와의 면담을 포함해 김일성 주석의 언급,측근들의 증언,주변 취재,북한 인민들과의 대화 등을 통해 그의 진면모에 다가서 보고자 했다.

 김 총비서와의 첫 만남은 1994년 7월 14일 김일성 주석의 장례식 시기였다.

 부록 국장의 마당이었지만 나는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그를 세밀하게 관찰했다.나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렇게 멀리서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몸가짐은 정중했고 목소리에는 무게가 있었다.최은희·신상옥 부부의 주장과는 달리 말을 더듬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얼굴은 여위고 눈자위가 붉어져 있었지만 손은 따뜻하고 손아귀에 힘이 있었다.전혀 건강에 이상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나는 92년 4월 김일성 주석을 인터뷰했다.오찬을 겸한 인터뷰였는데 식탁 가운데에 김정일화가 장식되어 있었다.김 주석은 그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꽃을 개발한 일본 사람의 요청에 따라 ‘김정일화’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했는데 사실 저 꽃이 너무 고와서 조직비서 성격하고는 맞지 않는단 말이오.우리 조직비서는 통이 크고 사나이답거든.”

 김 주석은 아들을 꼭 ‘조직비서’라고 불렀다.나는 내심 갸우뚱했다.서방에 알려진 ‘내성적인 영화광’이라는 평과는 다른 얘기였기 때문이다.그러나 자식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부모다.계속 연구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나는 김정일 총비서의 생일 명절인 2·16기간에 북을 방문한 일이 있다.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되었지만 본인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전에도 자신의 생일 행사에 나타난 적이 없다는 얘기였다.그 시기 그는 어디로 갔을까.나는 그 점이 궁금했는데 뒤에 알게 되었다.그는 매해 그 무렵이면 백두산을 찾는 듯했다.

 특히 99년 2월에는 백두산 천지를 등반한 후 2월 16일 갑무(갑산-무산)경비도로를 달리다 차에서 내려 10리를 걸었다고 한다.갑무 경비도로는 길 양편으로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한대림이 끝없이 이어진 풍치 좋은 길이다.그러나 이 무렵의 백두산 지역은 영하 40도를 오르내린다.혹한속에서 무릎까지 눈길을 걸으며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그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며 특히 백두산의 겨울을 좋아한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의 급서 후 나는 당시 북미 회담의 북측 대표이던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국가원수가 서거하셨는데 회담에 차질이 없겠습니까"



 “물론 회담은 수령님의 결재로 진행되어 왔지만 장군님께서 직접 지도해 오신 사업이기 때문에 차질없이 계소될 것입니다.”

 지금은 상식으로 되어 있지만 그 때만 해도 김정일 비서가 북미 회담을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은 뉴스였다.다시 그 점을 확인하자 강 부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에는 두 태양이 없다고 하시면서 (김정일 비서가)절대 표면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그런 사실을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 사후에도 김 총비서는 외교 의전 일선에 나서는 시기를 계속 미루어 왔다.서방의 과늑통들은 그 이유를 그의 ‘내성적인 성격’때문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의 측은 인사인 김용순 비서는 그를 “박력 있고 한 번 한다면 하는”성격의 소유자라 평했다.나의 인식도 그에 가깝다.어쨌든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세계의 평자들은 그의 진면목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 획득한 카리스마




 김일성 주석 사후 대부분의 평자들은 김정일 정권의 앞날을 비관적으로 점쳤다.짧으면 3개월,길어야 3년 안에 붕괴한다는 것이다.그 유력한 논거 중 하나가 북의 새 지도자 김정일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후계자가 되었을 뿐 아버지만큼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페리 보고서조차 ‘김정일 정권의 안정성’을 공언하는 것을 보면 이 같은 문제는 해소되었다는 얘기가 된다.지난 95∼97년 사이의 ‘고난의 행군’시기에 김정일 총비서는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지도력을 입증한 것이다.

 그의 정책 결정의 특징 중 하나는 ‘의외성’이라 할 수 있다.김일성 주석의 장지가 금수산기념궁전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현재 금수산기념궁전은 북의 사회통합의 구심이 되고 있다.

 권력 승계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필자는 지난 95년 봄 “오는 10월 10일에 주석직 승계”라는 기사를 썼다.그것은 당시 북의 지도급 인사들을 취재한 결과 필자가 내린 판단이었다.그들은 연내 권력 승계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본인의 결심에 달린 문제”라고 했다.한 나라의 대통령직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1년 이상 비워둘 수 있겠는가.필자는 그같은 ‘상식적’판단에 따라 ‘연내 권력 승계’를 예상했다.그러나 기사는 여지없이 오보가 되었다.1년은 3년이 되었으며 그나마 주석직은 폐지되고 김일성 주석은 유일무이한 주석으로 남았다.

 98년 8월 북이 발사한 물체는 우리를 놀라게 했다.며칠후 북이 그것을 인공위성이라 발표했을 때 세계는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결국 문제의 인공위성은 한반도의 정세를 뒤바꾸어 놓았다.미국에게 북은 ‘붕괴시켜야’하거나 ‘변화를 유도해야’하는 대상에서 ‘있는 그대로의 체제를 인정해야 한다’하는 대상으로 변화했다.

 물론 심각한 식량난 속여서 막대한 외화를 들여 인공위성을 개발했어야 하는가라는 비판도 있다.이에 대해 북의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우리에게 그 같은 능력이 없었다면 미국은 우리를 이라크나 유고처럼 대했을 것이다.그것은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이었다.”

 북의 인민들은 김 총비서의 정책적 의외성을 ‘누구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들을 해 나가는’감정으로 인식하지만 서방에서는 ‘예측불가’라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내가 아는 김 총비서는 다양한 방면에 대해 화제가 풍부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이 같은 측면이 성격적 대담성과 맞물려 정책의 ‘의외성’을 빚어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지와 아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나는 종종 두 인물을 비교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물론 차이가 있다.

 소년 김정일은 대단히 영리했던 것 같다.해방 직후 월북해 소련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김일성 수상의 집에서 기거했던 몽양 여운형의 딸 려원구 조국전선 의장은 “김정일 소년이 다섯 살 때 글을 깨우쳐 북조선 기관지들을 읽었다”고 증언했다.

 김일성 수상은 어린 아들을 몹시 사랑했던 것 같다.려원구 의장에 의하면 그는 출근할 때마다 아들을 안아서 위로 높이 세 번 올려 주었고 저녁 늦게 돌아와서도 이미 잠든 아들을 똑 같이 위로 세 번 올려 주었다고 한다.

 김정일 비서는 아버지를 꼭 ‘수령님’이라고 불렀다.그런데 김정일 비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라 외친 일이 있었다고 한다.바로 94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였다.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고무된 김일성 주석은 김영삼 대통령을 맞을 준비로 분주했다.7월 한여름 더위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대통령이 들르게 될 묘향산 특각을 직접 돌아보기 위해 평안북도로 떠났다.묘향산 인근 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고 묘향산 특각에 도착한 김 주석은 김영삼 대통령 부처가 묵게 될 방의 냉장고 문까지 열어 보았다고 한다.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에 노인의 건강을 염려한 김정일 비서는 김일성 주석에게 전화를 걸어 평양으로 돌아올 것을 계속 권유했다.그러나 남북정상회담 성공의 일념에 가득 차 있던 김 주석은 말을 듣지 않았다.계속 설득하던 김 비서가 마침내 전화통에 대고 소리쳤다.

 
“아버지!제발 돌아오십시오.”


(...아래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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