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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red>내가 본 김정일 총비서...문명자(2)</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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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rohkilnam 작성일00-12-27 00:00 조회2,8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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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어짐...]



 김정일 총비서가 스타일상 김 주석과 다른 점이라면 표현 방식의 차이를 들 수 있을 것이다.김 주석과 달리 김 총비서는 노기를 표현하는 인물이다.그만큼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북이 공식적으로 ‘고난의 행군’시기가 끝났다고 선언한 98년,김정일 총비서의 한 측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으로 어려웠습니다.인민들은 울고만 있고,큰물이 져서 먹을 것은 없고,미국은 합의를 지키지 않고 우리 목을 조르면서 우리 체제가 무너지는 날만 기다리고 있지요,우방들마저 다 등을 돌렸습니다….”

 북은 그 시기 여러 우방 국가들에 식량지원을 요청했다.북의 고위 관리가 베트남을 방문해 10만톤의 쌀을 요청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베트남은,과거 전쟁 시기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평양에 데려다 공부시켜 주는 등 북으로서는 식량지원을 요청할 만한 나라였다.그러나 베트남은 김영삼 정부의 남북대화-식량지원 연계 정책을 의식해 대규모 식량지원을 거절했다.베트남측은 미안했던지 “우리의 성의이니 1천톤이라도 가져가라”고 했는데 북측은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라 외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고 한다.북측 관리는 울면서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런 때에 참으로 초인간적인 의지로 인민들을 이끝고 우리 체제를 지켜 내신 분이 바로 그 분이십니다.”

 그에게도 인간적 고민이 없었을 리 없다.측근에 따르면 그 시기,그는 종종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고 한다.

 “이렇게 어려울 때 수령님께서 계신다면 얼마나 좋겠소.”


 “신라의 3국 통일은 통일이 아니다”


 김일성종합대학에는 ‘김정일 사적관’이 있다.전국에서 유일한 곳이라 한다.이곳에는 김정일 총비서의 대학시절을 잘 볼 수 있다.

 김정일 총비서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기 한 해 전인 1959년 모스크바대학을 방문했다고 한다.그 때 모스크바대학 관계자는 김정일 학생에게 “역사가 길고 규모가 크며 세계적인 주재들이 유학 온다”면서 모스크바대학에 유학 올 것을 권유했던 모양이다.그때 그는 “나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겠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당시 모스크바대 유학생으로서 김정일 학생을 만났던 한 인사는 “그가 상당한 주순의 러시아어를 구사해 놀랐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사적관에서 필자는 그가 재학 중 쓴 「3국통일 문제를 다시 검토할 데 대하여」라는 논문을 특히 관심 깊게 보았다.핵심내용은 “신라의 3국 통일은 통일이 아니”라는 것이다.동시대 조선반도에 발해라는 다른 주권국가가 존해하고 있었으며,신라는 영토를 넓히려는 야심만 있었을 뿐 통일국가를 세우려는 지향이 없어서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국가를 멸망시켰다는 것이다.따라서 최초의 민족통일은 3국 중 통일 지향이 가장 강했던 고구려를 이어받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라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1961년 9월 조선노동당 4차 당대회는 대대적인 평양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모든 평양시민들은 평양시 곳곳의 구역을 배정받아 건설사업에 동원되었다.오늘날 평양시민들이 거리를 지나다가 “이 곳은 내가 건설했다”고 무용담을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그 때 김일성종합대학은 국제관계대학,농업대,상업대와 함께 평양시 서성구역 와산동에서 룡성구역까지의 도로공사를 맡았다.당시 정치경제학과 2학년 1반 김정일 학생도 이 공사에 참여했다.사적관에는 목고(짐을 매달아 두 사람이 함께 져나르는 통나무 도구)를 지고 가는 김정일 학생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이처럼 역사의 현장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지도자로서의 그의 자산이라 할 것이다.

 사적관에는 김정일 학생과 그의 동료들이 군사강의,사격훈련,점호,야감습격전투훈련,군사야영훈련등 다양한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모습도 전시되어 있다.

 김 총비서의 대학동창이면서 현재 한 공장기업소의 지배인으로 일하는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자신은 아무래도 정치를 해야 할 것 같다면서 나에게는 과학자가 되라고 권유했다.나뿐만 아니라 여러 우수한 동기들에게 여러 전망 있는 분야로 진출할 것을 권하고 했다.그중 많은 사람들이 현재 중요한 위치에서 사업하고 있다.”

 사적관에 전시된 사진들을 보다 보면 재미난 공통점이 발견된다.학급 동료들과 함께 찍은 여러 장의 사진에서 김정일 학생은 사진의 가운데 있는 인물이 아니다.그의 모습은 항상 맨 뒷줄 한켠여서 발견된다.


 가장 좋아하는 꽃은 목화꽃


 김일성종합대학을 17회로 졸업한 그는 64년 6월 19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지도원으로 당 사업을 시작했다.총비서에 이르기까지 37년 간의 당 사업에서 그는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겼다.

 업무스타일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것은 ‘한밤중의 전화’다.나는 북의 여러 고위인사들로부터 이 같은 얘기를 들었다.기 총비서는 “서류를 결재하던 중 의문이 생겨 늦은 시간이지만 부득이 전화했다”면서 낮에 올린 결재 서류에 대해 보다 자세히 묻곤 한다고 한다.그가 반드시 묻는 말 중의 하나가 “인민들이 뭐라고 하겠소?”라는 것이다.

 그러니 부하들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듯하다.김용순 비서 역시 수면부족으로 인해 눈이 충혈되어 있곤 했다.김 총비서는 밤늣게까지 일하고 이동시간을 이용해 쪽잠으로 수면을 보충한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도 김 총비서 업무스타일의 한 특징이라 한다.“새로 작곡된 음악을 틀어 놓고 평가하면서 눈으로는 결재 서류를 검토하는 한편 전화로는 누군가에게 업무 지시를 하는”식이다.

 최근 김 총비서는 일꾼들에게 ‘거친 일뽄새’를 경계하라는 지시를 많이 하고 있다.‘창조적 열정’을 높이 사는 한편 “사색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쓸모 없다”고 강조한다는 것이다.그래서 그런지 요즘 북의 당일꾼들에게서 사업을 “예술적으로 처리해아 한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남쪽식으로 말하자면 합리적이고 모양 좋게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김정일 총비서는 서구식 양복을 입지 않는다.주로 ‘잠바옷’(위는 잠바,아래는 정장 바지 형식의 옷)차림이고 정장을 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닫힌 깃 양복’(끝이 동근 셔츠 칼라에 목선에서부터 단추로 여미게 되어 있는 북의 정장)을 입는다.그가 서구식 양복을 입지 않는 이유를 물었을 때 한 측근 인사는 “화려한 옷차림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라는 말씀이 계셨다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꽃이 목화꽃이라는 점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목화꽃은 화려하지 않으나 유용하다.

 김정일 총비서에 대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일 중 하나는 월북 인사들의 운명에 대한 그의 역할이다.내게는 전쟁 때 북으로 간 여고 동창생이 있다.그녀는 월북 후 시인으로 활동했다.방북취재 초기부터 나는 그 친구를 만나보려 했으나 기회가 닿지 않았다.그런데 우연히도 고려호텔 식당에서 그녀와 마주쳤다.감격적인 재회였다.

 그의 지난 얘기를 들으며 나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70년대 초반 정치보위부가 생기면서 김병하 보위부장의 좌경적 방침으로 여러 남쪽 출신 인사들이 지방으로 쫓겨가는 등 고초를 겪었다는 것이다.

 그후 하는 한 저명한 월북 학자의 자제로부터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당시정치보위부는 남쪽 출신의 유수한 인사들을 변경의 농촌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켜 노동에 종사시키면서 김 주석이 그들을 찾으면 “지방에 출장 갔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는 것이다.그는 “보위부의 좌경적 방침을 비판하면서 지방으로 쫓겨가 있는 남쪽 출신 인사들을 하나하나 찾아 평양으로 불러 올린 것이 김정일 비서였다”고 했다.


 미국식 영어 구사하는 김정일 총비서


 평양에는 평양제1고등중학교라는 ‘수재교육기관’이 있다.인민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을 뽑아 자연과학기술 분야에서 인재로 양성하는 학교다.이 학교뿐만 아니라 1999년 평양에는 30개의 수재교육 학교가 생겼다.이는 평양 시내 전체 고등중학교의 10%에 달한다.남쪽 식으로 말하자면 북의 ‘영재교육’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 ‘수재교육’정책을 강력히 밀고 있는 것이 바로 김 총비서라고 한다.84년 최초의 ‘수재교육기관’인 평양제1고등중학교의 설립을 주도한 것도 그였다는 것이다.인재양성과 관련한 그의 사고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김 총비서는 지난 92년 청소년 교육과 관련해 흥미 있는 교시를 발표했다.“청소년들에게 코카콜라가 아니라 들쭉 단물을 먹이되,전자오락은 지능과 창의성 개발에 도움이 되므로 장려하라”는 것이다.

 이미 그 무렵 그는 컴뷰터,인터넷의 확산과 관련한 세계적인 추세를 이해하고 있었던 듯하다.그의 측근들은 “김 총비서가 컨퓨터를 잘 다루며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다”고 말한다.2000년 1월 국가과학원을 현지 지도했을 때 김 총비서는 컨퓨터 분야에 대해 전문가들도 놀랄 정도의 이해도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는 현재 여전히 어려운 경제사정 속에서도 정보통신 분야를 투자우선 순위에 올려 정력적으로 육성하고 있다.평양에 있는 조선컨퓨터센터에는 정신노동하는 연구원들의 휴식을 위해 실내 정원까지 만들어져 있을 정도다.이는 다가오는 정보통신 시대에 대한 그의 인식과 대처 태세를 보여 주고 있다.

 서방과의 교류가 많지 않은 북의 지도자 김 총비서가 세계적인 추세를 제때에 파악해 나가는 수단은 무엇일까.

 김 총비서가 서방의 방송,영화를 많이 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이것은 단순히 영화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서방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나는 특히 그가 영어를 이해하는 것으로 느꼈다.그가 구사하는 것은 전통적인 영국식 영어가 아니라 현대 미국어였다.


 “우리 민족의 손으로 통일문제 풀어야”


 남북정상회담이 발표되던 4월 10일 나는 평양에 있었다.4일부터 8일까지 계속된 제9차 조일회담 취재차 방북했다가 역사적인 뉴스에 접하게 됐던 것이다.남북정상회담에 대해 김 총비서의 한 측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단 이후 여러 차례 최고위급 회담 성사를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지지 못했다.특히 94년에는 수령님의 서거로 최고위급 회담이 무산되었는데 이제 드디어 성사되었으니 우리 민족의 손으로 통일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 아닌가.장군님께서는 지금 회담 준비로 대단히 바쁘다.그 분의 건강을 지켜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는 특히 “지난날 조문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며 이번에는 아무런 전제 없이 서로가 일단 부딛쳐 보자”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오는 6월 12일 역사적인 만남을 갖게 될 남북의 두 정상.그 한 당사자인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나는 30년 간의 취재파일을 바탕으로 지난해 책을 한 권 출간한 바 있다.나의 눈에는 두 정상의 성격은 상당히 대조적으로 보인다.단적으로 말해 한 쪽이 원칙론자라면 다른 한 쪽은 타협론자다.오는 정상회담에서 이 두 대조적인 캐릭터가 어떻게 어우러져 분단 50년의 역사를 청산해 나갈지 기대되는 바가 크다.

      문명자(julie Moon)U.S Asian News 주필:『월간 말』지 2000년 6월호에 기고한 글



월간 말지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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