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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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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ffooff>짧은 북녘방문-놀라운 단결력과 구심력</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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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2-18 00:00 조회3,0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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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북녘방문, 강렬한 인상, 긴 여운
-북녘 동포들의 놀라운 단결력과 구심력-


박 순 경
이화여대 은퇴교수
전 목원대 대학원 초빙교수
자통협 상임고문
민주노동당 고문


parksunkyung.jpg 이 글은 2000년 10월 9∼14일간에 우리 방북단이 북녘땅에서 관찰한 사실들에 대한 해석적 기록으로서 대체로 내 기억에 의존해서 씌어질 수밖에 없다. 돋보기 안경을 가져가지 않아서 그때 그때에 기록할 수가 없었으며, 또 벅찬 광경들과 흥분상태에서 기록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사실묘사에는 불충분하고 부정확한 점들이 있겠으나 그런대로 기록하여 남쪽동포들의 이해를, 이들이 직접 보고 체험하기 전에, 예비적으로 도울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정당단체합동회의가 2000년 10월 10일 조선로동당창건 55돐 경축행사에 남쪽의 제정당과 몇몇 개인들, 사회단체들, 종교단체들, 몇몇 개인들을 초청했으며, 홍근수 목사와 나는 개인자격으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강영섭 목사의 초청을 받았다. 이러한 초청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행의 일환으로서 북쪽의 현실을 남쪽에 알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결정된 것 같으며, 저 공동선언이 정부 대 정부의 관계에서 만이 아니라 정당 사회단체 개인차원의 협력에 의해서 관철되어야 한다는 취지가 간취된다. 그러나 우리정부, 기성 정당들, 몇몇 사회단체들과 종교단체들은 10월 10일 조선로동당 경축행사라는 계기를 부담스러워했다.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전국연합, 범민련, 민가협 등은 그 경축행사 일정에 맞추어 가려고 백방으로 서둘렀다.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대표와 민주노총의 단병호 위원장은 어떤 법 조항에 걸려서 끝내 통일부의 방북허락을 얻어내지 못했다. 범민련과 한총련도 방북 허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전국연합, 민가협, 전농, 한국노총, 전교조, 민예총, 여연, 천도교 중앙총부, 천주교 주교회의, 통불협, 그리고 개인들로서 홍근수, 박순경, 백기완, 한완상, 현대아산부사장, 신준영「말」지 기자 등 42명이 우여곡절 끝에 9일 출발 직전에 김포공항에서 확정되었다.

PYcity02.jpg 7일 남쪽 TV 보도는 북쪽이 고려항공기를 보내온다는 소식을 공표했다. 우리는 8일밤 자정에서야 그 항공편으로 북행하라는 허락을 통고 받았다. 8일밤 자정까지도 중국경유 항로인지, 고려항공기편인지 불확정적이었다. 9일 오전 11시 출발이다. 9일 아침 범민련의 이종린 의장을 비롯한 통일운동진영의 환송객들이 우리 방북단에게 통일염원과 희망을 걸어주는 의식을 베풀어주었으며 전국연합 오종렬 의장의 방북 출발인사가 있었다. 통일전선에서 많은 고초를 겪어온 그들의 공로를 지고 우리는 드디어 방북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공항에까지 나온 민주노총 이수호 부위원장과 이규제 선생을 방북단에 포함시키려고 통일부와 줄다리기를 했으나 결국 불허되었다. 이렇게 옥신각신하던 끝에 오후 1시경에 우리는 감격스러운 고려항공기에 탑승했다. 나는 56,7년만에 북녘땅 과 북녘동포들을 본다는 흥분을 가라앉히곤 했다. 기내에서 한완상 총장이 방북단 단장으로 정해졌다. 이윽고 북쪽에서부터 내리는 순서가 전달되어 왔는데, 민주노동당-사회단체-종교단체-개인 순위이다. 남쪽의 제도권 정당들에 의해서 도외시되는 민주노동당이 1순위라는 노동자 우선의 절차가 감명적이다. 드디어 3시경에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

공항에서는 4∼5시간 대기하고 있던 영접단, 기자단, 환영인파, 화동들과 어린이들이 "통일! 통일!"을 외친다. 그 외침에 호응하랴, 꽃다발 받으랴, 단체별 개인별 사진촬영, 나는 정신나간 사람같이 움직였다. 인민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쏟을 사이도 없다. 우리는 나뉘어 승용차에 타고 봉화리 초대소로 향해갔다.

하늘과 들판이 정결하다. 도로가 좋다. 들녘을 바라보니 추수가 끝난 것 같고 무청같은 채소가 드믄 드믄 보이는데 풍족해 보이지 않다. 오염되지 않은 저 들판의 토양을 보전하면서 남북의 농업협동, 농업혁명이 빨리 추진되고 인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날이 기다려진다. (물론 이러한 혁명이 어떤 절차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지향해야 하느냐 하는 구체적인 전문적 문제가 있지만!)

봉화리 초대소는 대동강 상류에 위치한 아름다운 동산마을에 있다. 2,3층의 두 세사람이 유숙할 수 있는 여러 채의 집들이 드믄 드믄 서있는 전원마을이다. 부총리급 이상의 외빈들이 초청되는 곳이란다. 식당종업원들은 점심만찬을 준비해 놓고 4:30분경까지 우리를 기다렸다. 깔끔하고 맛있는 음식을 풍족하게 먹으면서도 우리는 북녘동포들의 식량을 축내고 있다는 송구스러운 마음을 내내 금할 길 없었다. 초대소 집은 호수와 같은 대동강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커다란 독실들 응접실 회의실 등이 갖추어져 있는, 편리하고 넓은 별장이다. 우리 민중들이 북녘 땅에서 그러한 대접을 받게 되다니 감격스러울 뿐이다.


2. 10월 10일이다. 오전 9시에 입장했고 경축행사는 12시 가까이 까지 계속되었다. 조선로동당 창건 55돐 경축 열병식 및 군중시위가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다. 열병식과 군중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백만이라 추측되기도 한다. 관중을 포함해서 놀라운 광경이다. 우리방북단 초대석은 외빈PYcity04.jpg석 앞줄이다. 열병장을 순시한 다음 김영춘 총참모장은 선언한다.: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 열병부대들은 열병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말」11월호, 신준영의 인용). 이 선언에 이어 김일성 군사종합대학의 학생열병대가 "위대한 당", "불패의당", "세련된 당" 등등의 깃발 아래서 행진을 시작한다. 육·해·공군, 여군 열병대들의 행진, 애국선열들과 공로자들의 후손들의 행진, 귀여운 소년 소녀들의 행진, 인민들의 율동행진, 끝없이 이어진다.

"백전백승의 조선로동당", "강성대국건설에로", "선군정치", "사상은 사회주의의 생명" 등등의 구호의 꽃수레 행진들이다. "조국통일, 자주통일, 북남공동선언"의 꽃수레도,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영광이 있으라!"의 꽃수레도 행진한다. 남쪽은 왜 6·15 남북공동선언에 저렇게 단결하지 못하는가? 남쪽의 개인주의와 다원성이 우리로 하여금 긴박한 단결을 요할 때 조차도 분열의 분열을 거듭하게 만들고 있다. 장기수 어른들의 모진 고통이 저렇게 보상받게 되니,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우리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군·정·인민이 한 덩어리 되어 하나의 거대한 집단예술을 저렇게 장엄하게 엮어내는 광경을 지구상 어디에서 또 볼 수 있을까? 열병식도 예술이라는 것을 처음 바라본다. 갑자기 가득 메워진 열병장에서 부터 터져 나오는 함성과 관객들의 우뢰같은 박수가 일제히 진동한다. 우리 초대석 좌편 위쪽 주석단에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례에 대한 함성이다. 열병장의 열광하는 표정들이 역력하게 보인다. 국방위원장이 우리 내빈석 위층 좌측 주석단 노대에서 우리 내빈석 위층 노대로 와서 손을 흔들어 환영을 표하니, 우리는 아주 가까이 그를 볼 수 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는 6월 남북정상회담 때 보인 것처럼 익살스럽기 까지한 마음씨 넓은 보통사람, 그러나 "인덕정치·광폭정치"에 걸맞는 정치가로 보인다. 열병장의 열광은 한사람 독재자의 명령에 굴종한다고 도저히 생각될 수 없다. 어떤 독재자가 인민들의 저러한 열광을 얻어낼 수 있단 말인가? 군·정·인민이 한덩어리 되어 엮어내는 저 단결력의 원천은 도대체 무엇이냐? 그들의 자발성 없이는 그러한 열병장을 만들어 낼 수 없다고 생각된다.

열병식과 군중시위는 2시간 넘도록 지속되었다. 5∼10분만 부동자세로 서있으면 다친 내 왼쪽 다리가 저려오는데 나는 내 다리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제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엄청나네, 예술야 예술!" 민주노동당 통일위 최규엽 위원장의 탄성이다. 그렇다. 군이 예술로, 전쟁터가 연극무대로 바뀔 수 있다. 우리의 관람석 아래층에 월북한 윤성식 선생과 오익제 전천도교교령이 보였다. 아주 건강해 보인다.

그 날 오후에 우리는 부슬비를 맞으면서 주체탑, 단군능, 개선문을 보았으며, 저녁 6시 인민문화궁전에서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주최 조선로동당창건 55돐 경축연회에 초대받았다.

PYcity05.jpg 170m 높이의 주체탑, 3톤의 강철을 녹여만든 육중한 조각철문, 역시 강성대국 고구려 문처럼 느껴진다. "열어보십시오. 얼마나 무거운지∼"라는 안내원 동지의 말에 백기완 선생과 내가 열었는데, 육중하지만 스르르 열린다. 탑 정면기둥과 양쪽 벽면에 82개 나라들의 주체사상 관련 연구소들과 대표자들의 글씨들이 새겨진 252개의 주체사상 기념돌이 수놓은 대리석처럼 박혀있다. 주체사상 국제학회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으나, 저러한 작업이 벌어졌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주체탑에 우리가 안내된 것은 물론 주체사상 선전을 위해서가 아니었으니, 북측은 남쪽 정부에 대한 배려에서 일체의 선전을 하지 않았다. 탑 정상에서 평양시를 개관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안내된 것이란다. 시 한복판을 흐르는 대동강을 끼고 설계된 아름다운 평양시가 시야에 펼쳐져 보인다.

단군능은 넓고 높은 자라에 큰 돌 3단씩 9층 파라밋식으로 웅장하게 축조된, 배달민족을 상징하는 것같은 하얀 돌무덤이다. 93년에 발굴된 단군유골은 "전자 스핀(spin) 공명법"(?)에 의해서 감별되었다고 하며, 93년에 개건되어 음력 10월 29일이 개천절로 정해졌다고 한다. 묘석실에 커다란 관이 안치되어 있고, 뒤 벽면에 단군 영정이 새겨져 있다. 능에서 내려오는 넓은 폭의 돌계단 양측면에는 단군의 아들들과 재상들의 거대 석상들이 늘어서 있는데, 동북아의 강성대국 고조선의 풍모를 말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강성대국 건설"이라는 북의 구호가 어쩐지 동북아의 강성대국 고조선→고구려의 기상을 연상시켜 주는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주체탑 단군능 개선문 등의 장대한 규모들이 다 그렇게 느껴지게 한다.

개선문 설명을 내가 잘 듣지 못했다. 어쨌든 높이, 폭, 상징성에 있어서 그 규모가 장대하다. 돌문위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새겨져 있고, 문 앞 뒤의 다른 상징들이 표식되어 있어서 앞뒤를 다 바라보아야 하고, 문 양 옆에는 1925와 1945가 새겨져 있는데, 김일성 장군의 항일무력투쟁 조직의 시기와 해방을 표식한다.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장군 개선 환영대회에서의 그의 연설,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새조국건설에 이바지하자!"라는 연설은 이미 당시에 좌우를 포괄하는 민족대단결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저녁에는 인민문화궁전에서의 경축연회에 참석했다. 어느 응접실에서 우리는 최고인민위원회 김영남 상임위원회 위원장의 6·15 북남공동선언 실행과 통일을 강조하는 환영사를 들었고, 한완상 총장의 답사가 있었다. 우리식탁에는 박용길, 임기란, 박순경, 권오헌 등이 배정되었는데 북의 저 유명한 리춘희 앵커, 최성원, 정영순 방송인들이 함께 자리했다. 만찬이 풍성하게 차려졌는데 나는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북의 식량을 축내고 있다는 생각은 가시지 않았다. 사람들이 우리 식탁에 모여들어 사진 촬영하는 바람에 저 유명한 북의 여성들과 작별인사를 제대로 했는지도 생각나지 않고, 아쉬운 마음이 지금도 가시지 않는다.


3. 11일에는 대동강 쑥섬과 거기에 세워진, 1948년 남북연석회의를 기념하는 통일전선탑을 보러갔다. 당시 백범 김구선생의 방북길을 얼마나 많은 남쪽 사람들이 반대했던가. 그리고 비운에 간 백범선생을 회상했다. 안내원 동무의 말에 의하면 백범선생이 자신의 "편협한 반공주의"를 뉘우쳤다는 것이다. 탑의 뒷면 비석에 연석회의에 참석한 대표자 이름들이 새PYcity07.jpg겨져 있고, 거므스레한 볏집으로 된 지붕의, 50여년의 성상을 버티어낸 원두막이 아직도 서있다. 그들이 통일과 민족의 미래를 염려하면서 장기를 두던 곳이란다. 김일성 주석의 검게 퇴색한 통나무 쪽배가 강변에 매어져 있는데, 아마도 저 선열들은 뱃놀이를 즐기면서 통일을 꿈꾸었을 것이다.
다음 우리는 지하철을 보러갔는데, 지하철이 깊고 넓고, 벽면에는 김일성 주석과 인민들의 혁명사업 건설사업의 벽화들, 돌가루로 그린 변색하지 않는 벽화들이 가득하고, 천정의 조명들과 어울려 지하궁전을 연상하게 한다. 지하철을 오르내리는 수많은 인민들의 화장기 없고 순박하고 착하디 착해 보이는 얼굴들, 웃음짓고 손흔드는 그들을 끌어안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저들이 배고픔을 견디어내면서 통일 강성대국건설을 희망하겠지.
그날, 11일 저녁 7시에 김일성 광장에서의 청년동맹 주최, 조선로동당창건 55돐 경축 청년학생들의 횃불행진을 참관했다. 축포가 하늘을 형형 색색으로 수놓으면서 횃불행진의 개막이 열린다. 주체탑 정상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횃불행진에 걸맞는다. 횃불행진은 혁명과 건설, 고난의 장정의 상징인 것 같다. 30만명이 동원되었을까? 한덩어리 대오들의 행진이 연속 만들어내는 글씨들과 상징들을 내 시력으로는 읽어내기 어렵다. 아마도 정신을 잃을 정도였기 때문에 보면서도 읽어내지 못한 것 같다. 장엄한 예술이다!. 지구상 또 어디에 저러한 나라가 있을까? 놀랍고 불가사의하다! 어디로부터 저러한 단결력과 동력이 솟아오를까? 마르크스주의 혁명의 불꽃이 유럽에서 꺼져간다고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개탄한 적이 있다. 동유럽과 소련이 붕괴되었다. 그런데 저 횃불행진의 단결력과 구심력은 여전히 타오른다. 이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민족사적인 요인들에 비추어서 설명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축포소리를 들으면서 퇴장하여 타고 갈 버스들을 찾느라고 우왕좌왕할 때 최하중, 김선명 장기수어른들이 나타났다. 포옹하고 소식을 묻기도 전에 다른 장기수 어른들이 차창 밖으로 손을 내민다. 이리저리 정신없이 악수했지만 안부를 들을 기회가 없다. 윤희보 선생이 동생을 만났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나 남쪽에 남아있는 그의 부인에게 전할 소식을 물을 기회가 없었다. 세분 정도는 병치료 받고 있으며 그 외의 모든 장기수 어른들이 경축행사들에 참석한 것 같으며 모두 건강해 보인다.


4. 12일의 첫 일정은 묘향산행이다. 평양시를 벗어나 북쪽으로 달리면서 우리는 그리워하던 북녘땅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파란 하늘 아래 오염되지 않은 들판들, 남북의 농업협력과 농업혁명을 기다리는 PYcity10.jpg들판들이 펼쳐진다. 야산들에 나무가 부족하다. 그래도 "민둥산이구나"하는 말을 들으니 가슴아프다. 드믄드믄 보이는 2, 3층의 시멘트 가옥들이 썰렁해 보인다. 인민들의 곤궁한 생활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더욱 가슴아프다. 그러나 밭에서 일하는 농민들이 평화롭게 보인다. 우리 차 일행에게 손을 흔든다. 건설하는 인민들도 손을 흔든다. 선량한 인민들! 도로가 견실하게 닦여져 있으니 인민들의 수고가 얼마나 컸으랴. 역사적 기념물과 마찬가지로 도로도 만년대계로 건설된 것 같이 보이니, 인민들의 정직하고 헌신적인 노동의 결과이리라. 북녘 노동자들의 노동력이 우수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그러나 그 노동력이 사상훈련 정신무장 헌신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을 모른다. 그것이 바로 북녘 동포들의 단결력의 원천이다. 그러나 거기에 구심력이 주어져야 그 원천이 도출되고 살아나온다.

묘향산맥에 접근하면서 수려하게 우거진 숲들이 보인다. 단풍이 아직 덜 든 푸른 숲들, 수려하고 부드러운 산맥들, 흐르는 물이 새파란 하늘 아래서 절경을 이룬다. 등산하고 싶었는데 등산도 못하고 바라보고 즐길 사이도 없이 우리는 서둘러 묘향산 호텔에서 묘향산 송이버섯과 별미의 점심을 먹고, 국제친선 전람관의 김일성 주석관과 김정일 위원장관을 역시 서둘러 부분적으로만 관람해야 했다. 김일성 주석관 6층의 150여실에는 21만여점, 김정일 위원장관에는 현재까지 4만여점에 이르는, 여러나라들의 대표들, 고위층, 개인들의 기증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계적 보물급의 예술작품들이다. 중국관과 일본관의 소장품들이 제일 많다고 한다. 아프리카관, 아시아관, 유럽관 등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실로 놀라운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감탄과 탄성의 연발이다. 세계적 국보급 박물관이다. 음미하면서 다 보자면 몇 달이나 걸릴까? 김일성 주석은 누구인가? 영도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들을 잘 모른다. 주석의 인품이 어떠했기에 그토록 존경을 받았는가? 그는 개인이 아니라 민족의, 인민의 영도자로서 그러한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 사회주의권이든 아니든 세계의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이 부정될 수 없다.

"우리도 존경하는 지도자를 가져봤으면, …부러웠습니다." 라는 10월31일 방북 보고회에서 전농 홍번 조국통일위원장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북한 지도자들의 죄과를 물어야 한다고 보수 수구세력들을 대변한다고 하면서 목청을 높이고 있는데, 지금까지 남쪽을 통치해 온 지도층의 각성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저 북쪽 전람관의 소장품들이 공적인 소유로 보존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의 가치를 더 높여준다.

PY-city.jpg 우리는 이제 김일성 주석의 밀납상 실내로 자못 긴장된 자세로 들어갔다. 넓은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서있는, 미소를 머금은 자애로운 밀납상이 너무도 생생하였다. 나는 고개 숙여 기도했다. "하나님! 그가 당신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당신의 능력 안에서 우리 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도웁게 하소서! 우리가 정의로운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예비할 수 있도록 !"
그 다음 우리는 묘향산의 유서깊은 보현사로 갔다. 고려시대에 건립되고 부분적으로 재건된 보현사에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얼이 서려있는 것 같다. 푸르디 푸른 하늘 아래 선명한 단청, 대웅전의 독경, 12층 탑, 수려한 묘향산 정기가 별천지를 이룬다. 거기서는 법타 스님이 신난다. 독경에 투신하랴, 우리를 스님들에게 소개하랴 대단히 바쁘다. 스님들의 표정이 밝고 자비롭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후예들! 생각해보니 시주를 안하고 돌아섰구나. 묘향산을 언제 다시 볼 것인가?

평양으로 돌아오는 길도 마냥 좋다. 맑은 하늘, 깨끗한 들판, 걸어봤으면! 오는 도중에 한적한 도로변에 내려서 일도 보고 담배도 피우는 광경이 우습고 재미있다. 휴게소가 없는 것이 아주 깨끗하다. 평양시내로 돌아와서 우리는 창작, 전시, 판매하는 만수대 창작사 미술관에 들려 많은 작품들을 관람하고 사기도 했다.

우리는 곧 6시 30분에 시작할, 5·1 경기장에서의 체조예술을 보러갔다. 10일 오전 열병식, 11일 저녁 횃불 행진에 이어 12일 체조예술이 조선로동당 창건 55돐 주요 경축행사의 연속이다. 경기장에는 이미 한 30만명쯤 모여있을까? 10만명의 청년학생들이 체조에 동원되어 있다. 우리의 초대석 맞은편 배경대에는 2-3만명의 학생들이 운집해 있고 시끌버끌하다. 그들이 카드섹션식으로 체조연출장면들의 배경대를 연속 만들어낸다. 구호들, 글씨들, 상징물들,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등 산하화폭들, 날아다니는 새들까지 만들어 낸다. 기기묘묘하고 아슬아슬한 체조연출들을 어찌 묘사할 수 있으랴. 조선복을 입고 붉은 천을 휘날리며 율동 행진하는 인민들이 먼저 등장한다.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 만세!", "력사의 난국을 단신으로", "이 행성에 우리를 건드리는 자 살아남을 자리 없다", "죽음을 각오한 자에게 두려움은 없다" 등등의 글씨들을 배경으로 숙연하고 비장한 체조들이 연출된다. 학생들, 어린이들, 지역별 단위들이 각각 한덩어리로, 모두 한덩어리로 각가지 율동들을 연출해 낸다. 사람들이 새처럼 날아다닌다. 어떻게 저 많은 학생들, 어린이들이 역사 사회의 변화하는 장면들을 한덩어리로, 또 여러 덩어리들로 연출해 낼 수 있을까? 개인주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 개인들의 예술적 성취가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개인들의 차원에 머문다. 그러나 한덩어리 사회집단의 예술은 그 사회의 단결력, 생명, 정신으로서 더욱 아름답다.


5. 우리 방북단의 요청으로 13일 오전에는 남북의 부문별 만남들이 이루어졌다. 민주노동당은 북의 사회민주당을 만났으며, 남북 제정당 교류를 위한 "작지만 큰 걸음"(「한겨레」10.21, 정성희 민주노동당 부총장의 말)이었다고 한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북의 노동계와의 만남에서 "노동자 통일토론회" 개최에 합의하여, 아마도 12월초에 금강산에서 토론회를 가질 예정이란다. 전농은 북의 농근맹 김명철 부위원장과 만나, 남쪽의 비료지원과 쌍방의 종자교류의 사업을 논했다고 하며 우리토종 종자들의 재생이 기대된다. 전국연합은 북의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김영대 위원장을 만나 6·15남북공동선언을 위시한 통일운동방침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 같다. 여연은 북의 조선여성협회 홍선옥 회장과 만나, 2001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 공동행사를 합의했다고 한다. 민가협 임기란 의장, 박용길 장로, 권오헌 선생, 민주노동당 김혜경 부대표등은 장기수 어른들을 만났다. 이들은 현재 같은 마을에서 가족이 있는 분들은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병치료 받은 세분 정도 이외에는 다 건강하다고 하며, 그들을 위한 아파트가 건설중이라며, 김선명 할아버지를 위한 신부도 물색중이란다. 천주교 주교회의 사무총장 김종수 신부는 북의 장충성당에서 미사집전을 하면서 신도들을 격려했다. 통불협은 조선불교도연맹을 만나서 아마도 남북의 불교교류와 6·15남북공동선언 관철에 대하여 이야기 했으라고 추측된다. 홍근수 목사와 나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강영섭 목사님, 봉수 칠골 교회들의 목사님들, 제직들, 평신도들을 만났다. 봉수교회에서 약식 예배식으로, 매우 훌륭한 찬양과 독창, 우리 두 방문객의 간략한 인사말의 기회가 주어졌다. 련맹 사무실에서 련맹과 남쪽 통일신학동지회의 교류 가능성이 타진되었다. 목사님들, 제직들, 신도들의 뜨거운 환영 환송에 응답할 사이도 없이 우리는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우리들은 모두 점심을 먹으러 평양의 유명한 단고기집으로 모였다. 백기완 선생이 55년만에 누님을 만나 엉엉 울었다는 소식이 공표되었다. 황해도 구월산 자락 고향에 가서 늙으신 어머님과 누님을 만나고 싶다는 그의 한맺힌 갈망이 누님만 만나는데서 이루어졌다. 어머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누님은 앉은뱅이가 될 뻔한 병에 걸렸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별한 배려로 병치료받고 오히려 동생보다 더 건강해 보인다. 한완상 총장과 북측 인사들의 노력 끝에 이루어진 상봉이다. 우리는 모두 감격스러워 했다. 또 고 박종철군이 김일성 종합대학 명예졸업장을 받기로 결정되었다는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이 공표되었다.

김일성 주석이 "단고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단고기 요리를 먹기 전에 우리 수행단 단장, 민화협 김령성 부위원장이 "심장에 남는 사람들"이라는 멋진 노래로써 우리를 즐겁게 했는데, 10월 31일 종로 5가 기독교회관 구관에서 열린 우리 방북단 보고회에서 정성희 부총장이 또 멋지게 그 노래를 불렀다. 단고기 요리가 아주 특유한데, 부분 전체를 맛볼 수 있도록 차려졌으며, 우리 중 더러는 단고기를 평생 처음, 그러나 맛있게 먹어치웠다.

점심 후에 우리는 애국열사능으로 갔다. 남향 들판의 정연한 묘소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숙연하게 절했다. 비석에 돌가루로 새겨져 있는 선열들의 영정들을 바라보니, 과거의 혼령들이 현재에로 살아 나온다. 민족현대사의 혁명의 소용돌이와 건설의 진통을 묵묵히 일러준다. 홍근수 목사와 나는 김창준 목사의 묘비를 찾아냈다. 이는 1948년 남북 연석회의 때 북행하여 거기에 머무른 감리교신학대학 전신 협성신학교 학장들 중의 한 사람인데, 이 반열에서 제외된 분이다. 그는 유럽 그리스도교 평화회의(C.P.C)에 참석하여 6.25 사태에의 연합군 참전을 반대한 분이라고 추측된다. 우리는 항일투쟁에 몸바친 혁명열사능을 볼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그와같이 북녘 땅에 면면히 흐르는 민족근현대사의 맥이 북녘동포들의 단결력과 구심력의 동력이리라!

우리는 서두러 만경대 소년궁전으로 갔다. 50년전에 세워진 학생궁전이 따로 있다고 하며, 나중에 소년궁전이 건립되었다. 소년궁전의 정면이 두팔로 어린이들을 끌어안는 것을 상징하는 형이다. "이 나라는 어린이들의 것이다"라고 말한 김일성 주석은 특히 어린이 육성을 중시했다고 한다. 사회주의권 어느 나라들 보다 더 북의 교육체계가 잘 되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미국의 진보적인 학자 스웜리(John M. Swarmly)박사의 북한 방문기에 의하면 북에 있어서 인민의 인텔리화를 지향하는 교육제도와 열정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경축 공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이 조별로 각방에서 연마한 재능들을 보여주었다. 세쌍둥이 어린이들이 가야금 같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귀여움을 피운다.

공연장에 들어서니, 수만명의 관객들, 인민들과 외빈들이 가득한데, 인민들은 우렁찬 박수로 우리를 환영했다. 소년예술단 공연은 그저 신통하고 놀랍기만 하다. 서울에 왔던 어린이들도 보인다. 5,6세쯤 된 귀여운 어린 소녀가 성량이 50대 장년쯤 되는 사람의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니 청중의 감탄의 폭소가 터져 나올 뻔했다. 한량기 있는 양반의 시늉을 한 어린이가 익살스러운 춤으로 연출해낸다. 7,8세쯤 되는 어린이 씨름꾼이 힘센 청년 씨름꾼에게 들려 빙빙돌다가 이 청년을 때려 눕힌다. 장엄한 집단예술도 있지만, 그 집단내의 개인예술도 풍부하고 훌륭하다. 그 많은 어린이들이 국가적으로 육성된다!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개인들의 재능과 두뇌는 돈과 경쟁을 필요로 하고, 많은 개인들의 잠재력이 묻혀버리고 사그러져 버린다. 북쪽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남쪽에서 배울 점들은 무엇일까?

그날, 13일 저녁에 우리는 옥류관에서의 민화협 주최 환송만찬회에 참석했다. 각 사회단체 간부들이 동석했다. 민화협 김영대 위원장이 통일을 역설하는 인사말을 했고 누군가가 답사한 것 같다. 맛있는 음식들, 녹두전, 전통냉면이 차려졌다. 나는 거기서 뜻밖에 고 몽양 여운형 선생의 원구 따님, 조국전선의장을 만났다. 1944년에 만난 여운형 선생을 기리는 마음에서 나는 그분의 따님들을 늘 생각하곤 했다고 말하는 순간, 그와 나는 동시에 왈칵 울뻔했으나, 자제했다. "서울에 갔을 때 왜 안보였어요?" "그 때 나는 출옥하여 병원에 있었어요" 라고 내가 말하니, "아 - 혁명가시군요"라는 그의 말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살아온 내게 너무 벅차게 느껴져 반사적으로 웃을 뻔하다가 나와 다른 그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아니에요"라고만 대답했다. 그에게는 "혁명가"라는 말이 익숙하다. 1980년대에 "혁명"이라는 말이 남쪽 민족민주운동권에 대두했으나, 늘 조심스럽게 쓰여지곤 하더니, 동유럽과 소련의 붕괴 이후에는 "개혁"이라는 말이 일반화되어 버렸는데, 그러다 보니 말로만 개혁을 외치다가 결국 개혁은 사실상 실종되기에 이른다. 사회주의권이나 유럽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그러나 어떤 개혁이든 그것이 철저화되고 보편화되고 궁극적으로 성취되기 이해서는 "혁명"이라는 시야를 열어나가야 한다. 몽양선생의 모습을 그의 따님에게서 보면서 동시에 그의 혁명의지도 그의 따님의 언어에서 다시 읽어냈다. 옥류관을 떠날 때에 주최측 민화협의 김영대 위원장, 어느 남북 고위급회담 때에 참가했던 박영수 동지와 안경호 동지가 반겨주었는데, 만나자 작별이니 아쉽기만 하다.

초대소로 돌아와 보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물상자들이 쌓여 있다. 김성령 단장이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의 방미 협상의 결과로 성립된 조-미 공동성명문을 낭독해 주었다. 6,15 남북 공동선언에 이어 이제 북의 대미관계의 관문이 열리고, 북이 미국의 핵위협에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안도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박정기 유가협 의장이 김일성 종합대학으로부터의 박종철 명예졸업장을 전달받았다. 경축 공휴일인데도 대학측이 졸업장을 만들어냈다. 장기수 권낙기 선생의 부인 이옥순 동지가 위암으로 투병중인데, 암에 특효라는 고가의 희귀한 약재 여섯 달 분(?)을 건네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거기 머무는 동안에 진찰도 받았고 박영희 동무의 정성어린 시중을 받기도 했다. 김령성 단장은 김정일 위원장의 선물을 나누어 주고, 또 우리의 아주 작은 보답의 표시를 커다란 선물인양 사양하다가 받아들였다.

6. 14일 오전에 우리는 귀환 길에 올랐다. 꿈같은 현실, 5박 6일의 시공이 끝나간다. 공항에 이르니, 환송객들의 "통일! 통일!" 함성에 정신없이 "또 만나요! 통일! 통일!" 외치다가 나는 어느 누구의 손을 잡았다. 그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얼른 잡은 손을 놓았다. 많은 손들이 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맞잡을 수 없구나. "안녕히 또 올께요!"외치다가, 우리를 5박 6일 동안 수행하고 시중들어 주던 주최 영접 환송단 동지들과의 작별인사를 제대로 못하고 비행기 트랩을 올랐다. 정성희 부총장은 김령성 부위원장의 눈물고인 눈을 보았고, 눈물 흘리는 어느 동지를 보았다. "자본주의에 찌든 남쪽 사람들의 눈은 멀뚱멀뚱 한데 저들은 순수해서 눈물을 뚝뚝 흘려요", 정성희의 말이다. 우리 민중들이 지구상 어디에서 그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으리오. 1999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축구 경기에 대해서 보고할 때, 이갑용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은 북에서 "평생에 받아본 적이 없는 그러한 대접을 받았다"고 말했으며, 민주노총의 이규제 선생도 비슷한 말을 했다. 비행기 승무원들의 시중도 최선이라. 우리가 북녘의 동포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김포공항에는 환송할 때처럼 통일운동권 사회단체들, 개인들이 꽃다발을 가지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영사, 답사, 인사말이 오갔다. 환영객들에게는 우리 방북단 자체가 선물이고 부러움이고 기쁨이다. 우리 방북은 그들의 결실이다.

이상의 기록은 사실 묘사에 치중된 것이다. 사실적인 부정확성이 있다면, 후에 정정되기 바란다. 경축행사들의 생생한 묘사는 거의 불가능하다. "직접 가봐야 해요"가 방북단 보고회에서의 결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적 사건의 기록은 필요하다. 우리의 방북을 허락한 남쪽 정부에게도 크게 감사하는 바이다.

7. 이제 위에 제시한 사건들 사실들에 비추어서 "북녘동포들의 놀라운 단결력과 구심력"이라는 우리의 주제를 풀이해 보려고 한다. 구심력 없이는 단결력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 단결력과 구심력의 역사적 요인들과 사상적 혹은 정신적 요인을 풀이해 보고자 한다.

조선로동당 창건 55돌 경축행사들, 역사적 기념물들, 건설물들은 인민의 단결력과 구심력의 결실들이다. 그 원천은 우선 역사적 맥락에서 찾아져야 한다. "선군정치", "강성대국건설", "이 행성에서 우리를 건드리는 자 살아남을 자리 없다", "고난의 행군"등등의 구호들은 역사와 현재의 맥락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고난의 행군"은 일제하 항일 투쟁사를 전제하며, 6·25전쟁에서의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해서 "석기시대로 되돌려져 다시는 소생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전쟁당시 호주의 어느 기자의 보도) 잿더미 위에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건설해 온 행군이며, 동유럽과 소련이 무너지고 홀로 미국의 핵전쟁 시나리오와 한·미 군사훈련들과 한·미·일 공조체제의 위협들을 버티어 내면서 확립해야 하는 생존권 쟁취의 행군이며, 1993년부터 몇 년간 연속된 냉해-홍수대파-식량난, 에너지 난, 기아상태에 시달리면서도 견지해내는 민족자주의 행군이다. 이러한 "고난의 행군"이 인민의 자발적 헌신과 단결력 없이 어떻게 지속되어 올 수 있겠는가? "고난의 행군, 강행군의 진두에 서시여"라는 구심력 없이 어떻게 그러한 단결력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그러한 단결력과 구심력에 의해서 역사적 기념물들의 건립과 건설이 이루어진 것이다. 남한과 자본주의 세계가 운운해온 "북 붕괴설"과 예상을 물리치고 이제 북은 자주적 대미 대일 대서방 수교의 관문들을 열어나가고 있다.

나는 방북이전에 "강성대국건설"이라는 구호를 북이 현재 처해있는 어려운 현실에서 군과 인민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수단이라고만 생각했다. 경축행사들, 만년대계를 연상시키는 기념물들과 건물들의 규모를 관찰하면서, 나는 저 구호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관찰한 사실들은 어떤 강성대국의 기풍과 정신을 나타낸다. 그 기풍과 정신은 역사에 뿌리박고 있음에 틀림없고,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에 의해서 새롭게 촉발된, 과거 역사의 얼을 지니면서 새롭게 건설하려는 기풍과 정신이다. 그 정신력의 역사적 뿌리는 "고난의 행군"에서 단련된 것이다. 그 정신력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며, 민족사에 비추어서 추적될 수밖에 없다. 그 기풍과 정신은 고난에 찬 근 현대사에 비추어서만 설명되기 도 어렵다. 남쪽 사학계도 동북아의 강성대국 고조선을 시인하는 경향이라고 하며, 이에 이어지는 고구려가 또한 강성대국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항일운동 선열들 혹은 민족사가들이 "민족 혼", "국 혼", "조선 혼", "얼", "대한정신"을 민족사에서부터 이끌어내어 항일 투쟁을 고무시키고 국권회복의 필연성을 역설했는데, 대다수의 역사가들은 그러한 개념들이 관념적이고 신화적이라고 해석해 버리는 경향을 가진다. 그렇지 않다. 수 십 억년의 생물 유전자들이 오늘의 생물들과 인간에로 이어져 있다면, 정신이 작용하여 그 유전자들이 형성되어 왔다면, 현재적 정신의 표출이 먼 과거역사와 무관하다고 생각될 수 없다. 현재적 인간의식에 담긴 수 십 억년 과거의 문제 규명을 생물학, 심리학, 정신 철학 등에 맡겨둔다. 우리의 관심은 민족사적 정신이다. 역사적인 연륜과 계기들이 현재 주어져 있는 민족이라는 사회집단과 의식에 어떻게 내포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과거로부터 특정한 집단적 요인들에 의해서 형성되어 온, 공동운명 혹은 소여성에 의해서 형성되어 온 민족이라는 실체는 인민이다.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 민족자주의 의식, "고난의 행군", "강성대국 건설"이라는 개념들은, 단군 5천년이라고 가정한다면, 5천년의 먼 과거로부터 형성되어온 민족의 실체의 정신이다. 물론 강성대국 고조선과 고구려의 정신이 그대로 오늘의 저 개념들에로 재현되어 이어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단적으로 말하자면, 오늘의 저 개념들은 근 현대사의 고난과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계기들을 전제하고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강토나 문화유산들과 이에 담긴 혼은 역사적 변천, 개혁, 혁명의 과정들에서 새롭게 건설되는 새로운 민족사회 집단, 새로운 육체 혹은 물질의 현실에서 되살아난다. 즉 사회주의적 강성대국 혹은 민족 국가 건설이 모든 과거적 혼을 새롭게 되살린다. 북의 역사적 기념물들과 건설물들의 규모와 저 구호들이 민족 근 현대사의 맥락에서 풀이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이전 5 천년 역사, 완전하게 고증되지 않았다고 해도, 5 천년 역사에로 소급되어 풀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배제될 수는 없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현재에 대한 해석은 남쪽에도 해당된다. 다만 그렇게 풀이 될 수 있는 민족사적 맥이 남쪽에서는 산산이 조각나 있기 때문에 추론되기가 어려울 뿐이다. 5천년사의 물질과 정신의 유산이 "고난의 행군"을 버티어내게 하는 단결력과 구심력의 동력이다.

열병식의 "선군정치", "강성대국 건설"이라는 구호들을 북의 역사와 현재와 무관하게 또 세계의 지배세력들의 위협을 고려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바라본다면, 그 구호들은 군사대국주의 혹은 제국주의적 전체주의로 보일 것이다.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미국과 일본은 자체들의 군사주의 패권주의를 은폐하기 위해서 북을 위협적이라고 호들갑을 떨고 북을 제압하려 한다. 미·일과 같은 군사대국들이야 말로 전체주의적 군사제국주의 국가들이다. "선군정치", "강성대국 건설"은 그러한 초국적 제국주의적 패권국가들에 저항하는, 정의롭고 평등한 새 세계질서 창출을 배태한 구호들이 아니겠는가?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작장관이 10월 23-24일 북을 방문했을 때 북의 집단 체조경기와 소년 예술단 공연을 보고 감탄했다는데, 미국내의 대북 경계론이 일어나니 북 코리아의 "전체주의적 위험"이 있노라고 공적으로 말했다. 물론 북의 단결력과 구심력에는 사회주의적 전체주의가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체제가 개별적 사회단체들과 개인들의 자율성과 권리를 얼마나 포괄하고 있는가, 국가적 통제와 개별 사회단체들 혹은 개인들의 권리가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해답될 수 없으며 검토되어야 할 문제로 남겨둔다. 어쨌든 북의 인민의 단결력은 자발적인 것이며, 이것은 국가 통제와 구심력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이러한 전체적 단결력과 구심력없이는 오늘의 초국적 제국주의 지배세력들의 위협을 버티어낼 수 없다. 이러한 단결력과 구심력이 사분오열하는 남쪽에게 커다란 교훈이다. 북의 붕괴나 지구 자본주의에로의 편입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 존속의 붕괴일 것이다.

"지구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제대로 된 사회주의 국가"(방북단 보고회에서의 민주노동당 노희찬 부대표의 말)의 존립의의가 무엇인가? 북은 세계에로의 관문을 열어야 한다. 세계 안에서의 북 혹은 통일된 우리 민족은 초국적 제국주의 지배세력들로 하여금 자체들의 반인륜적 죄악의 씨를 극복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세계가 더불어 정의로운 새 세계질서 창출을 시도하게 될 것이다. 북의 생존권과 단결력은 북을 경계하는 바로 미국과 일본에 필요하다. 미국의 소수 부호들의 재력에 의해서 미국의 경제가 좌지우지되는, 초국적 투기자본과 기업들에 의해서 세계금융과 경제가 좌지우지되는 오늘의 지구자본주의야 말로 얼굴 없는 제죽주의적 전체주의, 빈부의 격차를 점점 더 증대시키고 세계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제국주의적 전체주의가 아니냐. 북의 사회주의는 미국과 일본에 대한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새 미래의 희망이다.

이제 저 단결력과 구심력을 형성하는 사상적 기반, 유일 주체사상 혹은 수령유일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남쪽에서 또 그리스도교에서 특히 배척되고 위험시되는 이 대목을 선입견 없이 객관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나는 아직도 주체사상을 충분히 연구하지 못했으며 다만 부분적으로, 그러나 핵심적으로 이 대목을 풀이해 보고자 한다.

사실 나는 주체사상과 수령의 유일성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피했다. 신학적으로 또 그 사상사적으로 유일사상 혹은 수령유일성을 인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의 그러한 요인이 북의 현실에서 단결력과 구심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나는 그 요인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종전의 내 사고방식은 추상적이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유일성이든, 역사적 상대성 속에서든 유일사상이란 있을 수 없다는 철학적 전제이든, 내가 이러한 원칙을 도그마적으로(dogmatic하게)전제하고서 어떤 특정한 역사 사회적 현실에서 유일사상이나 수령유일성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유일성이 북의 현실에서 작용하는데 말이다. 이러한 현실적 사상이 저 도구마적 일반화된 원칙에 의해서 거부될 수는 없다. 그 일반화된 원칙이란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수령유일성을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립시켜서 마치 이 유일성에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역사 속에서 유일성을 가지는 사건들과 인물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1991년 동경에서 열린 재일 대한 기독교 주최 통일 세미나에서의 주제강연에서 나는 김일성 수령은 그리스도교가 규정하는 우상도 아니고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군사독재도 족벌독재자도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굉장한 반발과 물의를 초래했다. 그러한 주장의 요지는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과 6·25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인민들과 더불어 이들의 생존권을 건설한 그의 업적을 고려할 때 그가 우상 혹은 독재자라고 규정될 수 없다는 요지다. 북의 현실을 관찰하면서 나는 그러한 주장을 더 보충설명 할 필요성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상"은 자연사물, 황금 따위의 신격화를 의미하며, 말하자면 인간성을 좌지우지하는 오늘의 투기자본 혹은 물신(物神)을 의미한다. "독재자"란 정치권력의 전횡자로서 인민의 생존권을 좌지우지하고 짓밟는자를 의미한다. 김일성 수령은 인민의 생존권과 평등권 확립의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된 영도자의 역할과 위치를 말하며, 그러한 우상이나 독재자로서 규정될 수는 없다. 우상이나 독재자는 결코 인민의 단결력의 구심력이 되지 못한다. 수령유일성은 그러한 역사적 결과로서의 일회성(Einmaligkeit)을 의미한다. 역사적 과정에서 주어진 사회의 전체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인물이나 사건은 유일회성을 획득한다. "고난의 행군"과 사회주의 건설을 선두에서 지휘한 영도자는 그와 같은 유일성을 가진다. 주체사상은 그러한 역사적 과정의 맥락에서 대두한 것으로 유일성을 가진다. 이러한 역사적 유일성은 역사발전이나 새로운 요인들의 수용을 배제하는 닫혀진 절대성이 아니다.

1945년 이래의 북의 사회주의 혁명은 분명히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소련혁명의 영향력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그러나 항일 민족해방투쟁, 이에 내포된 민족사적 요인들, 사회주의 건설, "고난의 행군"의 주체, 민족사적으로 규정된 인민이라는 주체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항일투쟁이 민족사회혁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각성시키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자본주의적 세계팽창세력으로서의 서양 근대의 부르주아 개인주의적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혁명적인 민족 개념의 출현을 촉발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 항일투쟁의 주체, 민족사적으로 주어진 요인들과 민족의 운명을 담지한 주체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는다. 주체사상은 그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되었다. 1945년 해방정국에 있어서 남쪽에서 전개된, 임시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좌우 합작"운동, 1948년 북에서의 남북 연석회의, 7·4남북 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체제와 이념의 차이를 넘어서는 민족대단결에 의한 통일의지, 북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 1991년의 남북 기본 합의서, 6·15남북공동선언, 이러한 사건들 중심에서 작용하는 것은 민족이라는 축이다. 이러한 민족 개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으며, 저 근대의 서양의 부르주아 자본주의적 민족개념에로 환원되어서는 안되는 민족개념이다. 주체사상이 이러한 민족개념을 내포한다면, 주체사상이 남쪽에서 거부되어서는 안된다. 주체사상에 내포된 민족 주체성 혹은 자주, 자본주의적 민족개념에로 환원 될 수 없는 민족주체성은 대미 예속적 분단상황에서 산산조각 난 남쪽의 민족개념을 치유함에 도움이 될 것이다. 민족은 바로 인민이다. 산산조각 난 남쪽의 민족의식은 북의 인민의 단결력을 필요로 한다. 그 단결력의 구심력으로 작용하는 유일 주체사상과 수령 유일성이 남쪽 체제를 위협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직된 선입견이 청산되어야 할 것이다. 체제와 이념의 차이를 넘어서는 민족대단결과 통일은 남쪽의 자본주의적 체제와 다양한 사상조류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사상은 세계의 사상조류들에 대해서 열려있으며 이것들에 의해서 검증되는 과정을 밟아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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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자료들은 민족통신 자료에서 올린 것입니다. 박순경 교수의 방문기에 대한 질의나 문의는 전자우편( skay25@yahoo.co.kr)으로 의뢰하기 바랍니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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