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과의 연애]: 북부조국 방문기 [2003.4.28] > 조선이야기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4년 4월 23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조선이야기

[조국과의 연애]: 북부조국 방문기 [2003.4.28]

페이지 정보

작성자 minjok 작성일03-04-29 00:00 조회2,366회 댓글0건

본문

신은희 교수가 이북을 방문하고 돌아와 민족통신 게시판에 올려 준 방문기를 북한자료실에 올려 소개합니다. 이 글을 통해 필자의 조국사랑과 이북사회에 대한 부분적인 실상을 접하게 됩니다.[민족통신 편집실]

그렇게 기다리던 봄이 왔다. 겨울의 자취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봄바람이 어서 불어주기를 너무도 기다렸다. 아직은 차가운 봄의 기운이었지만 그 봄바람은 노처녀의 마음을 뒤흔들어놓기에 너무나도 신선한 춘심이었다. 봄방학이 정식으로 시작되는 것을 기다릴 수 없어 결국 나는 이틀간의 수업을 취소하고 다음날 첫비행기로 평양을 향해 떠났다. 처음으로 가는 길이었고, 혼자서 가는 길이었다.

사실 내가 북조국을 혼자 간다고 하니 동료교수들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런 “Godless country”에 왜 가는가 하고 의아해 하였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Godless country” 란 의미를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일상적인 영어에서 이 표현은 저주받은 땅, 신이 거하지 않는 땅, 신조차 사랑하기를 거부한 버려진 나라 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내게 Godless country라는 말의 의미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오히려 북조국은 전쟁과 살육을 일삼는 서구기독교의 허구화된 신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도도한 땅일 것이라 생각했다.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내게 비추어진 북조국의 모습은 진한 황토색 세상이었다. 흙의 생명력이 그대로 녹아있는 살아있는 땅, 그 땅의 견고함이 꾸밈없이 펼처져 있는 듯 하였다. 가난하지만 민족의 정신이 살아있는 땅. 그 땅과 그 흙을 지키고자 얼마나 많은 한셜 눈물과 한숨이 있었던가. 뚝위에서 쉬고 있던 표정없는 군인들의 모습속에서, 농기구를 메고 간간히 그 옆을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속에서 나는 감히 우리 민족이 감당해 온 그 고난의 역사를, 조국이 지켜낸 순결한 저항정신을 막연하게나마 떠올릴수 밖에 없었다. 단순한 호기심과 신기한 눈빛으로만 바라보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역사성이 서려있는 우리민족의 황토땅이 아니던가.

북조국에서의 첫날밤.
어디선가 들려오는 와~~ 하는 함성소리에 잠이깼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일요일 새벽. 그 함성소리는 곧 힘찬 노래의 합창으로 이어졌다. 내가 있던 숙소에서는 대광장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는데 새벽부터 젊은 청년들이 그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그 곳에서 민족의 자주성과 정통성을 노래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청년돌격대의 “각계정신”을 다지기 위한 집회였다. 순간 나도 뛰어나가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미국의 자본주의 문화와 개인주의 생활습관에 찌들은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훈련이 아니겠는가. 처음이라 그랬을까... 결코 저 청년들이 남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연합하여 민족 대단결의 과제를 이루어 내야만 하는 나의 혈육들이며 나의 동지들이고 동생들이 아닌가. 아직 새벽날씨가 쌀쌀한데 발시렵겠다는 생각에 가슴끝이 아파왔다.

나의 방문은 계획대로 잘 진행되었다. 만경대를 시작으로 모란봉, 묘향산, 인민대학습당, 서해갑문, 통일문, 애국열사릉, 만수산 기념궁전, 모란봉 중학교, 김일성 종합대학 등등 바쁘게 다녔다. 낮에는 평양시내의 화려한 건축물들과 명소를 방문하였고 저녁에는 그 화려한 이면에 드리워진 희생과 아픔의 그림자들 또한 느꼈다. 빛과 어둠이 두개의 분리된 실체가 아니듯이 북조국의 건재함은 수많은 인민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더욱 더 그 애절함이 내 가슴속에 깊이 내려 앉았다.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를 지나온 분들은 지금도 어렵지만 그래도 경제적인 상황이 그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하며 당시 먹었던 “피죽”을 지금과 같은 맨정신으로는 다시 먹기 어려울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하였다. 지난 10월부터 불거진 조미간의 긴장관계와 핵사태로 결국 경유공급도 중단되고 경제제제 조치등으로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지만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생각보다 평화롭고 여유로와 보였다. 당시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가까운 때여서 만나는 분들과의 대화는 주로 미국의 힘에 기초한 외교정책과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제국논리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들로 이루어졌다. 힘이 곧 정의가 되는 시대에는 영미식 자본주의가 곧 민주주의로 둔갑을 한다. 자본의 독점화 현상이 극대화되는 소위 세계화 물결속에서는 서구 자본주의 정신과 달리하는 사회주의 이상들은 즉각적으로 비도덕적, 반윤리적, 비민주적이라는 철퇴를 맞게 된다. 우리는 아주 쉽게 북조국의 정권이 유지되는 것은 세뇌교육 때문이라는 냉소적 비판을 일삼지만, 사실 북미에 살아가는 우리들이야 말로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식민문화속에 철저히 세뇌되고 지배당하며 살아가는 진짜 희생자들인지도 모른다.

내게 특별히 유익했던 시간은 대학과 연구소에 계시는 교수진들과의 좌담회였다. 북조국의 대학은 4월이 개강이라 수업참관은 어려웠지만 김일성 종합대학 철학과와 종교학과 교수, 학생들과의 대화시간은 참으로 뜻 깊은 시간이었다. 오래전부터 나는 북조국의 핵심간부들과 엘리트들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알려진 종합대학에서 인문학교육을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 또한 교육 내용은 무엇인지 연구하고 싶었다. 흥미로왔던 것은 북조국의 교원들이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개방적이었고 유연한 사고를 한다는 점이었다. 신세대 농담도 잘하시고 어떤 분들은 대화도중에 영어표현을 함께 섞어 쓰시기도 하면서 “영어도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서 쓰면 우리말이 되는거 아닙니까?” 하시며 빙그레 웃으시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다. 좌담회를 마치고 내가 북조국을 여름에 다시 방문을 할 때는 포스트모던니즘 사상과 기독교에 대한 강의를 종합대학과 김형직 사범대학에서 할 수 있도록 초대해 주신것에 많은 감사함을 느꼈다. 이러한 사상교류를 통하여 나와 북조국의 사상적 연애의 깊이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교육과목은 주체사상 학습을 제외하고는 한국이나 북미의 대학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종교에 대한 인식도 과거에 비해 많은 변화가 있었다. 북조국의 종교적 특징은 민족의 개념을 떠나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민족종교의 형태이다. 미국정부는 북조국을 종교탄압국으로 지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미국식 기독교를 허용하지 않는 북조국의 민족주의 정신에 대한 탄압일 뿐이다. 북조국에도 세계종교가 있다. 다만 그 특징은 무슨종교이든지 북조국의 주체문화속에 들어오면 민족종교로 승화된다는 점이다. 북조국에서는 일찍부터 토착 신학화 작업이 전개 되어 왔었다. 즉, 조선사람은 조선하늘 보고 조선 하나님을 믿자는 운동이다. 민족이 외세에 의해 짓밟히는데 개인중심의 서양식 구원은 받아 무엇하는가 라는 질문은 오늘날 현대신학이 추구하는 조선식 토착신학의 대명제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종교"는 우리 민족에게는 외래적인 용어이다. 종교라는 용어자체가 19세기말에나 비로소 동양문화권에 소개가 되었던 것을 고려해 볼 때 종교라는 개념은 지극히 서구적인 것이다. 우리 조선민족은 오래전부터 종교와 문화를 구분하지 않았다. 종교란 고유 문화의 제례적 표현양식일 뿐이다. 동시에 문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민족성을 배제하고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한 종족의 정신적 원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복음주의 기독교에 매달려 민족과 신앙을 서로 배타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한국교회와 북미 동포교회의 현실을 볼 때 나는 진정으로 세뇌된 종교교육의 잔인성을 실감할 수 밖에 없다. 북조국의 민족종교와 민족교회운동이 숭미사대주의 종교성에 휘청거리는 한국과 북미 해외동포 사회에서도 힘차게 전개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민족”은 우리 조선민족에게만 영원한 것이 아니고 고유문화와 전통을 사랑하고 보존하는 어느 종족집단에게도 영원한 존재양식이다. 북조국은 민족배타주의를 말하지 않았다. 민족주의의 극단성인 피의 순수성이나 우월성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우리”이게 하는 부인할 수 없는 공동체의 정체성과 그 공동체를 유지 시켜온 고난의 역사, 분단의 역사, 그리고 치유의 역사를 말하는것이다. 민족은 공시성의 생명체와도 같은 것이다.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초월적 영성으로 각 종족집단속에 살아 꿈뜰거려 때론 분노하게도 하고 신명나게도 하는 우리 “얼”인 것이다. 역사속에 일정기간동안 국가의 영토나 주권을 상실할 수 있지만 민족의 혼과 주체성을 상실한 종족은 언제나 역사의 무대뒤로 비참하게 사라져갔다. 그러기에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민족의 역사는 너무도 소중한 것”이라는 김수영 시인의 역설적 표현은 아직도 내겐 큰 의미로 남아있다.

북조국의 여러곳을 다니면서 한가지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인간의 고난에 의미가 있는가?” 과거 기독교 신학자들은 인간의 고통에는 신의 뜻이 있음을 교리화하여 지배문화의 종속에서 파생되는 인간의 고통을 미화시키는 사상적 도구로 사용했었기에 나는 어떤 종류의 사상이든 종교이든 체제이든 인간의 고난을 찬미하는 경향성을 극도로 싫어 했었고 그런 체제와 종교는 항상 열등한 것으로 규정해 왔었다. 그렇다면 우리 북조국 동포들의 고난의 의미는 도대체 무었인가. 개인적 차원의 고통이 아니라 한 집단 생명체가 조직적으로 당해 온 그 억압의 고통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는 지금 그 질문의 답을 할 수 없을것이다. 왜냐하면 그 고난의 의미는 미리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 엄청난 과제로 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젊은 차세대들이 어떻게 단결하여 민족주체적 통일사업을 이루어 나가겠는가에 따라 그 고난의 의미는 자주성을 지키는 산고의 고통으로 영예롭게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학대적인 고통으로 추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전 시카고 어느 대학에서 열린 북핵심포지움에서 재차 확인한 슬픈 현실은 아직도 대부분의 우리 동포들은 북을 “위협”과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고 있었고 전쟁 신드롬에 사로잡혀 백성들을 굶겨가며 핵을 만들고 있는 악의 축이라는 의견이 대다수 였다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뒬뢰즈 (Deleuze)와 같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인간의 이러한 얄팍한 인식체계를 비웃어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인간이 어떤 사물을 그냥 본다면 (seeing), 그것은 장님과도 같다고 하였다. 이 표현은 장애인들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단순히 보는것과 깨달아 가슴깊이 느끼는 것의 차이를 지적한 것이다. 진정으로 어떤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반드시 응시(gazing)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응시한다는 것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뜨거운 가슴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잊혀지지 않는 얼굴들이 있다. 묘향산을 돌아오는 고속도로에 잠시 멈췄을 때 얼굴이 하얀 중년여인이 어린아들과 함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어느 계곡을 힘들게 지날 때였다. 동행하시던 참사님이 저 분들은 아직 충분히 먹지 못할것이라며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빨리 우리도 강성대국이 되어야 조국을 찾는 신선생님의 마음도 좋으실텐데… 하며 말끝을 흐리시는데… 얘써 참았던 눈물이 어린아이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에겐 너무도 많다. 그냥 가슴이 내려앉는 애린의 심정들은 단순히 보는 차원으로는 결코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가능하면 많은 해외동포들이 북조국 방문을 하길 바란다. 그러나 가서 그냥 무심히 보는 것만 (seeing) 하지 말고 사랑과 애정으로 응시 (gazing)하여 봄으로 그 곳의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무심코 걷는 어느 골목길들 하나하나가 우리 동포들의 수고와 땀이 스며든 애환의 모습들이며 역경을 이겨낸 승리의 형상인 것을 느끼고 돌아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초강대국들의 잔인한 폭정이 계속되는 이 시대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볼 수 있는 성숙한 인식이 너무도 필요한 때가 아닌가. 레바논 출신의 시인 칼릴 지브란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너무도 작다. 그 이면에 숨기워진 위대한 사랑에 비춰보면….” 이라는 표현을 했다. 북조국은 비록 고난속에 있지만 그 안에 생동하는 우리조국의 정신은 너무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떠나기 마지막날 저녁.
그동안 함께 동행하시었던 선생님들께서 추억에 오래 남을 이별상을 봐주셨다. 아마도 당시 조미관계가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해 있던 시기에 혼자 조국방문을 한 것 고맙게 여겨주신 듯 하였다. 처음으로 구경하는 “조개 바베큐”는 꼭 자랑하고 싶은 조국의 메뉴이다. 큰 조개를 바닥에 펼쳐 놓고 기름을 술술 뿌려가며 즉석에서 직접 구워 먹는것이었다. 약간의 소주와 함께 하니 정말 특이한 맛을 내었다. 연분홍의 저녁노을이 가만히 내리는 배경을 뒤로 활활 타오르는 불빛 앞에서 나와 조국과의 연애는 새록새록 정을 더해갔다. 정다운 대화가 오고 가며 즐거운 저녁나절이 무르익을 무렵. 연세가 있으신 선생님께서 이별의 축배를 권하셨다. 워낙에 술을 못하는 체질이라 몇번이고 사양을 하였는데 그 선생님께서 “신선생! 시시하게 굴지 말라우! 미국서 와서리!” 하며 소리를 치시는데 그 농담섞인 꾸중에 정신이 번쩍들어 “들쭉술”이라는 과일주를 두 잔 받아 마시고 보니 정말 기분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선생님들의 모습이 둘로, 셋으로 분산되더니… 노래 가락을 어깨춤까지 춰가며 따라 부르고, 몇 개의 계단을 오른 것을 끝으로 내가 맞이한 것은 새파아란 북조국의 봄의 새벽하늘이었다.

다음날 그 선생님께서는 새벽에 전화를 주시어 내가 몸이 괜찮으신지를 물으시고 다음에 올때는 술 좀 배워오라는 어려운 숙제도 내 주시었다. 아버지 처럼 인자하신 그 선생님은 내 손이 너무 차니 다음에 조국에 오면 병원에 가서 진단을 한 번 받아볼 것을 따뜻하게 권유하셨다. 그 분들과 함께 한 시간들 속에서 “나”와 “너”의 주체와 객체의 분리관계가 아니라 그냥 통합적인 “우리 가족”이 되어 버렸다. 아니 어쩌면 그동안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던 “조국”과 “민족”이라는 거대한 “생명체”에 이제서야 간신히 내 작은 호흡을 조심스럽게 붙여본 것은 아닐까.

나와 북조국과의 연애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 만남치고는 많은것을 느끼고 깨닫게 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내 가슴속에는 아직 많은 질문들이 남아있다. 그 질문들은 앞으로 천천히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조국과의 진한 연애를 통하여 풀어나갈 것이다. 그 시간들 속에서 더 깊은 열정과 더 뜨거운 가슴으로 조국을 열렬히 사랑할 것이며 그 사랑의 결실을 무수히도 많이 맺고 싶다. 조국이 현재 가지고 있는 아픔은 단지 북에 사는 동포들만의 것이 아니다. 나의 아픔이며 우리의 아픔으로 진실한 사랑을 통해서만 함께 치유할 수 있는 소중한 공동의 과제인 것이다. 정치적 이념과 이해관계를 다 초월하여 우리 하나된 동포로써 어찌 민족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죽어도 나에겐 죽음이 없다. 이 나라와 이 조국이 죽음인 것이다. 북조국을 떠나오며 시인 고은 선생님이 그 황토땅을 그리며 쓰셨던 시 한편이 내 가슴속에 끊임없이 메아리쳐 울렸다.

“임이여 나는 십만억토 지나는 서방정토에 가지 않으렵니다.
죽어도 이 나라 한 점으로 있으렵니다.
죽어서 몸뚱이야 흙이 되건만
물과 바람 하나되건만
그것으로 이나라의 산들바람도 되건만
내뜻이야 중음신 신세박차고 그대로 남으렵니다.
남아서 이 나라 강산 전내기로 취하렵니다.
몇천년을 떠돈 조상의 자손으로
죽어서 이나라가 온통 살구꽃 피는 삶이렵니다
영산강 가뭄 언저리도 놀매갱갱이에도 떠돌고
갈 수 없는 대동강 부벽루 위에도 떠돌면서
흔들 비쭉이 흙사리 따위 혼내주고
새가울면 나도 울어서
이 나라의 노래되고 깊은 밤 어둠이 되어
모든 한숨도 웃음도 별도 취하게 하렵니다.
이 나라에 태어날 때는
이 나라를 깊이 떠돌이 하려고 태어 났으며
다른데 가서 극락놀이하려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
하나의 괴로움도 천으로 만으로 쪼개어서 여러슬픔이니
천개의 달빛으로 천개 강물 비춥니다.
나는 서방정토에 가지 않으렵니다
죽어도 이 나라의 그믐밤 어둠이 되렵니다
물얼고 모진바람 불어도
함께 얼음 밑의 물이 되고
함께 태백산맥 바람의 아픔으로 바람소리가 되렵니다.
임이여 어찌타 이 나라를 그냥 떠나겠습니까
이 나라의 흙과 풀
황토말랭이 잔소나무들도
몇천년 역대로 죽어서 이룬 할아버지들 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굿은 비 한방울로
이 나라 날궂이 술취한 풀포기 키우렵니다.
임이여 나는 가지 않으렵니다.
거기에 가다니 거기 가다니
왜 그런 천하건달 서방정토에 가겠습니까.
죽어도 나에게 죽음이 없습니다. 이 나라가 죽음입니다 .
임이여 나는 서방정토에 가지 않으렵니다.”

<< 고은의 시집 “어느바람” 중에서 >>

* 신은희: 현재 아이오아 심슨 대학교 종교철학부 교수로 재직; 김일성 종합대학 특강 교수; 북조국 국제 학술교류 담당자로 활동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4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