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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청년 이북방문기-노둣돌 강병철/림율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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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2-07-31 00:00 조회3,0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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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부조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미주청년들이 있다. 이들의 눈에 비친 북부조국에 대한 인상은 무엇일까. 이들은 또 이북서 중국과 일본서 온 청년들과 사귀어 그들이 갖고 있는 민족에 대한 심정들을 서로 나눌수 있었다고 한다. 뉴욕의 1.5세와 2세들로 구성된 <노둣돌>회원들중 미국서 의대를 졸업하고 현재 의사로 일하면서 이 단체에 가담하고 있는 강병철 회원이 민족통신에 그의 방북수기를 <특별기고>로 보내왔다. 전문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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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북부 조국방문을 마치고

*강 병철(뉴욕 노둣돌 회원)

지난해에 이어 올해 또다시 우리 뉴욕 노둣돌은 북부조국 방문 및 재중 재일 동포들과의 연대 교류 사업을 6월 22일부터 7월 6일 까지 약 2주에 걸쳐 성과적으로 마쳤습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 참가 성원들이 받은 느낌과 감동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PYcity05.jpg먼저 저희 뉴욕 노둣돌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왜 우리가 이런 사업을 벌이는지 이야기하겠습니다. 뉴욕 노둣돌은 1999년에 뉴욕과 뉴저지 일대에 사는 1.5세 2세 청장년들에 의해 만들어 졌습니다.

그 당시는 미주의 여러 청년단체들이 하나 둘 문을 닫고 있는 상태였고 단체를 잃은 성원들은 생활전선으로 또는 학교로 하나 둘씩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큰물 피해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북부조국을 돕자는 운동이 뉴욕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 가운데 생겨났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학습모임이 생겨나게 됐고 그 학습을 통해 북부조국이 왜 이런 고통에 시달리게 되는 구조적 원인에 대한 연구, 그리고 우리조국은 왜 갈라지게 되고 우리는 미국에 이민와서 살게 되었는가라는 우리자신의 현재와 역사를 다시 조명하는 시간을 가지게 됐습니다.

현재까지의 소위 미주운동은 1세와 2세들 운동조직들 사이엔 운동내용과 목적에 상당한 차이가 있어왔습니다. 1세들이 중심이된 조직은 대부분 "통일운동 또는 남부조국의 민주화 운동"이 주류를 이룬 반면 1.5세, 2세들의 운동은 동포사회 권익 신장운동 소수민족 연대운동등 미국 내 문제에 역점을 둔 활동으로 세대간의 이해 및 연대의 고리가 약했습니다.

nodutdol-1.jpg우리들의 학습은 1.5세, 2세로서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운동의 영역 즉 통일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고 조국통일운동과 동포사회운동은 서로 각자 갈 길을 가는 형태로 진행되서는 안된다는 각성이 우리사이에 공감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들은 조국통일운동과 동포 대중운동을 동시에 지향하는 운동조직인 노둣돌을 1999년 내오게 되었습니다. 조직체계로는 두 운동 방향을 결합시켜 조국 통일 연대사업을 진행하는 코리아 연대 분과와 교육분과 의료분과가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코리아 연대 분과의 한 사업으로 작년부터 북부조국 방문 및 해외동포 교류연대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7명의 대표들이 갔다온 것에 이어 올해는 8명의 대표들이 사업을 성과적으로 마쳤습니다.

저희가 이런 사업을 하게 된 이유는 먼저, 알 수 없는 근거들을 가진 북부조국에 대한 여러 정보들이 넘쳐나는 가운데 서로가 만나지 않고서는 북부조국에 대한 이해의 시각을 넓힐 수 없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며 또 남북 해외 3자가 주체가 되어 민족 통일을 이루자 했는데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신문, 방송등 제 3자들의 시각으로 각색되어 나와진 정보만으로는 서로의 신뢰를 쌓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적인 정이 오가지 않는 한 민족통일이란 사람들의 마음에서 당위적인 구호만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활동에 대해 "관광단" 사업이라고 비난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남들이 못 가는데 가보는 좋은 관광 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의 북부조국 및 해외동포 방문사업이 일반관광과 다른 것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참가자 전원은 사업을 마치며 가슴속에 "민족성원으로 나는 지금 무엇을 하여야하는가"란 큰 물음표와 더불어 실천의지를 담아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국에서 조차 민족통일의 깃발을 올리고 활동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만날 때 북부조국의 사람들과 재중 재일 동포들이 큰 힘을 얻는다는 감동섞인 고백을 들으며 이 사업은 우리 노둣돌만을 위한 사업이 아님을 느끼게 됩니다.

이번 조국 방문 및 연대교류 사업이 작년과 달리 특이했던 것은 우리말이 불편한 3세 청년들이 참가한 것이었습니다. 의사소통이 통역을 통해서 이루어져 불편한 점도 많았으나 우리말이 불편한 그들은 이번 방문사업을 통해 자신들이 민족성원임을 다시 한번 뚜렷이 가슴에 새기고 돌아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부모중 한쪽만 한국인이어서 자신의 민족정체성문제로 고민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고민들이 이번 방북사업을 통해 한꺼번에 정리될 수 있게 된 것은 이번 사업의 또 다른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김형직사범대학 교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주체사상이 말하는 민족규정 즉 혈통, 언어, 문화 가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라 개방적 개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 혈통, 문화, 언어는 민족이라는 집을 버티우는 큰 세 개의 기둥같은 것이지 나와 남을 가르는 담장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혈통이 2분의1 또는 4분의1이건 간에 상관없이 자신이"조선인"으로 자기를 규정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사는 사람은 모두"조선인"이고 그들을 다른 조선인들은 동포애로 따듯이 대해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지로 북부조국 방문 내내 부모중 한쪽만 한국인인 그들은 따뜻한 동포애를 많이 느꼈습니다. 배타적인 이남의 민족정서에 비해 훨씬 더 개방적인 이북의 민족적 동포애에 편안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번 방문사업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중국의 범청학련과 교류사업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쁜 가운데서도 동포로서 따뜻이 맞아주고 북경체류 내내 편의를 봐주었습니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알게된 놀라운 사실은 중국 당국의 소수민족 동화정책에 따라 대다수의 조선족으로 불리는 동포들이 중국을 자기 조국으로 여기며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북부조국에 가기 위해 입국허가서를 받으러 북경주재 북부조국의 영사부를 찾아가는 도중 이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택시로 대사관 앞에 내린 후 영사부를 찾기위해 손짓 발짓으로 중국경찰에게 영사부 방향을 물어보고 있는 나에게 어떤 중년의 남자가 우리말로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반갑게 영사부를 찾는다고 했더니 자신도 그곳에 가는 중이라고 하여 같이 걸었습니다. 걷는 도중 나는 그에게 "조국에 들어가는 길이십니까?" 했더니 뜻밖에도 그는 "아닙니다. 나는 조선족입니다. 여기서 교수를 하는데 평양에 볼일이 있어갑니다".며 북부조국이 자신의 조국임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입국허가를 받은 후 나는 돌아와 범청학련 성원들에게서 구체적으로 중국정부가 어떻게 교묘히 조선족의 민족적 단결과 북부조국 또는 남부조국과 연계를 방해해왔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중국 정부는 현재는 티벳을 가장 골치 아픈 소수민족 문제로 다루고있지만 실은 조선족에 대해 가장 깊게 경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중국 내 50여 소수민족가운데 독립된 조국을 가진 소수민족은 조선족과 몽골족 정도인데 조선족은 본국과 가깝게 근접해 살고있으며 또한 그들이 살고있는 땅은 예전의 우리 땅이었기에 현재는 조국이 분단되어 조선족과 그들이 사는 땅에 대해 관심을 돌릴 틈이 없지만 통일이 된 후에는 분명 국경분쟁 내지 중국 내 소수민족 갈등의 큰 화근이 될 거라고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둔 정책의 결과 중국정부는 의도적으로 남부조국 기업들의 투자를 연변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리고있고 그 결과 많은 조선족들이 중국 남부와 내륙에 흩어져 13억 한족 바다에 매몰 될 처지에 있다고 합니다.

nodutdol-2.jpg현재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는 조선족들의 인구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따라 중국의 다른 지방으로 또는 남부조국으로 향한다고 합니다.. 최근 탈북자라고 하는 사람들 중엔 이런 조선족들도 상당수 있다는 것입니다. 1-2년 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선가 잡힌 김 순이(?)라는 분은 잡히자 탈북자라며 정치망명을 신청하다 나중에 조선족동포라는게 발각된 사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일부 언론에서는 탈북자로 인용되고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국도 잃은체 생존을 위해 타지를 헤메는 조선족들의 실상을 들으며 나는 또 한번 조국의 분단은 해외에 사는 동포들의 생활 속 깊은 곳에 까지 삶의 멍에로 남아있음을 확인하며 서글픈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1년만에 다시 찾은 평양은 훨씬 더 활기 차 보였습니다. 아리랑축전 때문에 호텔은 외국인관광객으로 붐볏고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 때문인지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있었습니다.. 우리가 묵은 청년호텔은 광복거리에 있는데 이 거리는 아침저녁 출근 때면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습니다. 아침에 우리는 일찍 일어나 호텔 앞 광복거리 곁길에서 인민들과 만나려 산책을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외지인이라 그런지 처음엔 사람들이 피하는 것 같았으나 후에는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에 "반갑습니다"로 웃으며 화답들을 해주어 흐뭇했습니다.

이번에 들른 곳 중에 기억에 남는 하나는 조선혁명박물관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친절하고도 자상한 어머니 같은 강사님을 만나 항일무장투쟁의 간고한 역사를 실감나게 보고 들었습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항일 빨치산들이 자체로 만들어 쓰던 나무대포와 연길폭탄이었습니다. 나무로 대포를 만들었는데 포탄이 18km나 날아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군들은 항일 빨치산이 쏘련제 무기를 받아쓰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쏘련에게 조그만 조선이라는 나라는 안중에도 없었기에 쏘련의 지원이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기는 일본놈들에게 뺏어쓰고 만들어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하30도 40도 되는 만주벌 눈보라 속에서 수많은 항일전사들이 목숨을 바쳐 싸우던 전장터와 그들의 사진들은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듯했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어떻게 되찾은 조국인데 나라가 둘로 갈라져 동족에게 50년 동안 총을 겨누고 있는가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조국이 통일되어야만 이들의 평가도 전민족적으로 온전해질 것이며 자랑찬 역사의 한 장으로 후세에 길이전해질 것입니다.

arirang2002-20.jpg이번에 아리랑축전 참가를 위해 이번 조국방문사업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지만 운 좋게도 우리는 아리랑을 볼 수 있었었습니다. 5.1경기장 앞은 외국인과 지방에서 올라온 인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있었습니다. 아리랑의 웅장함과 높은 예술적 완성도는 갔다온 여러 사람이 소개한 관계로 생략하겠습니다. 어떤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아리랑은 남부조국의 월드컵과 발맞추어 축전을 열어 남북이 교차축하방문을 통해 전 조국강토를 통일열기로 달아오르게 하기 위해 기획되었다도 합니다. 또한 이북인민들이 지금까지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마치며하는 자축의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도와 상관없이 외세의 입김에 의해 교차방문은커녕 서해교전이라는 불상사로 이어지게 되어 참 안타깝습니다.

이북에서도 많은 인민들이 이남의 선수들이 월드컵에서 선전하는 것을 TV로 보고 참으로 자랑스럽다고들 하였습니다. 응원전에서 보여준 민족통일의 열망과 반외세적 분위기는 아리랑과 월드컵이 교차방문으로 성공적으로 끝났을 경우 우리 조국의 통일 분위기는 아마 어느 수구외세의존세력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을 것입니다. 서해교전이 있던 날 이북의 축구협회는 이남의 축구협회 앞으로 축전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던 그 날 우연히도 서해에서는 남북간에 총질이 오가고 아까운 젊은 목숨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알다시피 이남 군대의 작전권은 미군에 있습니다. 미군의 명령없이 이북과 교전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건의 모든 정황상 누가 이 사건을 만들어냈고 무엇을 얻고자했는지는 알만한 일입니다. 모든 사건을 이북에 뒤집어 씌우는 이남과 미국의 언론들을 보며 우리민족끼리 통일의 문을 여는데는 외세를 뿌리치는게 얼마나 간절히 요구되는가를 다시 한 번 각성시켜줍니다.

nodutdol-7.jpg 우리일행은 5.1경기장 앞에서 재일본조선인청년동맹 아리랑 자원봉사자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아리랑 축전 시작하는 날부터 끝 날때까지 포장마차를 만들어 놓고 10여명이 자원봉사를 하고있었습니다. 그들은 평양의 인민들 집에서 민박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도 이렇게 장기 체류를 하며 민박을 하기는 처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인민들 살림집에서 자고 먹고하며 생활을 같이하니 친근감이 더욱 든다고 하였습니다. 아리랑 행사 후 깊은 밤 우리는 그들과 따로 자리를 만들어 5.1경기장 앞에서 경기장이 떠나가라고 노래부르며 술을 나누었는데 이국에 사는 동포라는 입장이 비슷해서 그런지 마음이 잘 맞았고 서로에 대한 이해도 빨랐습니다. 자신의 생업들을 쉬어가며 자원봉사를 하는 그들을 보며 조국에 대한 그들의 헌신성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됐습니다.

이번에 특이한 경험 하나는 평양에서 뉴욕에 있는 집에 전화와 팩스를 보낸 것입니다. 호텔 한쪽에 있는 전화기를 통해 전화는 001을 누른 뒤 자기번호를 누르는 직통전화로 다른 나라에서 미국에 전화할 때와 똑같았습니다. 하지만 전화요금은 1분에 6불, 팩스는 한 장에 18불로 굉장히 비쌌습니다. 전화 후에 자랑스럽게 미국에 전화한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인민군에 오래있었다던 사람하나가 내 전화와 팩스는 이미 미정보당국이 다 보았을 거라며 몸조심하라는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북의 전지역은 24시간 미국의 군사위성이 따라다니기 때문에 모든 전자신호로 가는 모든 통신내용은 미국에게 노출되기 때문에 군사비밀등은 사람이 직접 왔다갔다하며 전달한다고 합니다. 작년이던가 미CIA가 유럽 각국의 전화, 팩스를 도청하다 발각되어 국제사회 비난을 받은 기억이 나는데 우방국조차 도청을 하는데 적성국이야 말로 무엇하겠습니까. 인편을 통해 정보가 전달되는 이북의 원시적 방법은 최첨단첩보위성을 무력화 시킬 수도 있습니다. 몇년 전 있었던 소위 "금창리 사건"은 미국이 최첨단위성에만 의존한 결과 이북에 뒤통수를 맞은 경우입니다.. 그때 단장으로 갔던 찰스 카트만은 텅 빈 지하운동장을 보고 "앞으로 핵시설로 전용될 소지가 있는 장소를 조사하여 가치가 있었다"는 말로 자신들이 속은 사실을 애써 감추려했었습니다. 비밀주의를 국방원칙으로 하여 사소한 정보도 외부노출을 금지하는 이북에 대해 미국은 속이 굉장히 탈거라며 그는 고소해했습니다.

7박8일간의 북부조국 방문후 우리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3박4일동안 일본에 들러 재일조선인청년동맹(조청) 회원들과 교류사업을 가졌습니다. 민족학교, 민족은행, 민족결혼상담소, 법률 상담소등을 만들어 가며 민족성을 지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그들을 생각하면 슬퍼지기도 하고 고개가 숙여지기도 합니다.

실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도 일제시대 때 일본 탄광에 끌려가 거기서 우리 아버지를 낳으셨습니다. 생각해보면 할머니 할아버지의 순간의 선택에 의해 나도 현재 일본에 있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니 그들의 처지가 남다르지 않게 다가왔습니다.

매해마다 약 만 명의 일본 귀화자들이 생기고 있는 현실에서 그들은 한 명의 동포에게라도 민족성을 심어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합니다. 일본방문 이튿날 저녁 우리는 두 패로 나뉘어 나를 포함한 한쪽은 오따라는 지부로 가고 다른 한쪽은 아다치로 갔는데 아다치로 간 회원들은 고등학생들의 가정방문사업에 같이 갔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학생들은 조선인 학생들이 사는 집에 찾아가 소풍이니 야영이니 하는 행사에 같이 가자고 그들을 설득하러 다니는 사업을 매주 금요일 한다고 합니다. 어쩔 때는 일본인으로 귀화한 부모들에게서 이제 우리는 조선사람 아니니 가라며 욕을 들을 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욕을 먹으면서도 그들은 자기또래들을 다시 또 찾아가서 그가 왜 조선사람인가를 직접 간접적으로 설득 교양하는 사업을 매주 꾸준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들의 이런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귀화하고 있고 일본정부는 총련과 민족교육말살을 위한 압력을 요즘 들어 한층 강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청간부들은 이런 추세는 북부조국과 일본의 담판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신념에 차있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북부조국정부는 기회되는 데로 "일본과는 셈 할것이 남아있다"는 말로 이남이 일본과의 과거청산을 어물쩡하며 넘어갔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표명해왔었습니다. 일본의 배상에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배상 및 민족적 권리보장이 반드시 들어가게 되고 이것을 계기로 재일조선인 운동은 새로운 중흥기를 맞을 거라는 확신에 차있었습니다. 미국과의 대결은 제네바합의와 미사일 유예시한이 걸린 2003년을 전후해 우호적 방향으로 해결될 거라며 그 다음은 일본과의 대결인데 일본은 이북과의 군사적 대치보다는 조미관계정상화에 발맞추어 조일관계정상화를 선택할것으로 전망되기에 앞으로 재일본조선인운동을 낙관적으로 전망하였습니다.

거의 2주가 넘는 사업기간 동안 서로 다른 세지역의 동포들을 만나며 우리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북부조국에서 새로 나온 노래 "우리는 하나"를 수 도 없이 불렀습니다. 돌아온 후 지금도 집에서 직장에서 흥얼거리며 "우리는 하나"를 부릅니다. 그러다보면 이번 여행에서 만난 동포들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민족분단의 아픔을 생활로서 느끼고 사는 그들이기에 하나하나의 얼굴이 떠오르면 아련한 생각과 함께 눈물이 나려합니다. 풍족한 물질 속에 만족하며 조국이고 민족이고 다 잊고 살게 만드는 애증의 땅 아메리카에서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다시 한번 역사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자리 우리 조국 삼천리반도와 잘리워진 조국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살아야되는 해외동포들의 고단한 삶을 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다시 다짐합니다. 내 인생을 조국의 통일에 바치리라. 그리고 우리의 자식들에게는 절대로 분단된 조국을 물려주지는 않겠다고..

*3세 여성청년 임율산씨의 영어방문기와 사진들은 여기를 짤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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