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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평양서 프에블로 호 나포작전에 참가한 김준록 대좌와의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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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1-08-23 00:00 조회6,0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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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은 역시 민족자주를 생명으로 여긴다 





[평양통일대축전=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2001민족통일대축전> 평양행사를 취재하면서 여러 가지 놀란 사실들을 발견했다. 그중 하나의 귀중한 사실을 접하게 됐다. 이북은 미국의 불법행위에 사죄문을 받아 낸 유일한 나라로 기록됐다. 린든 비 죤슨 미국 대통령은 <프에블로 호 사건>과 관련해 「사죄문은 오직 이것뿐이다」라고 고백했었다.

미국이 힘의 논리로 세계를 지배해 왔지만 민족자주를 생명으로 여기면서 전 구성원이 하나같이 똘똘 뭉쳐 단합된 힘을 과시해 온 이북에 대해서는 무릎을 꿇고 말았던 역사가 바로 <프에블로 호 사건>이다. 필자는 이 증거물인 <프에블로 호>를 평양에서 참관했다.

이북은 1968년 1월23일 원산에서 나포한 미 간첩선 <프에불로 호>를 2년 전 대동강으로 옮겨 놓았다. 필자가 99년 제10차 범민족대회 평양행사를 취재하러 갔을 때 처음으로 발견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때 저 배를 어떻게 이곳에 옮겨 놓았을까 궁금하게 생각했던 점을 이번 취재에서 알게됐다. 33년전 나포작전 제1조 조장으로 직접참여 했던 김 중록 대좌(대령을 의미)는 <프에블로 호>는 원산에서 제주도와 일본 근해의 공해를 이용하여 서해안을 통하여 대동강으로 끌어왔다고 말한다. 수송작업이 완료된 후 3일 후에 미 당국이 알았다고도 설명한다.

이 배를 대동강에 정박시켜 놓은 장소 또한 우리 민족사에 새겨진 자주승리의 빛나는 역사를 되새기게 한다. 미 해적선 <샤만 호>가 1806년 9월2일 우리 나라를 침략하려다가 김응우 선생(김 정일 국방위원장 증조)을 비롯한 평양시민들이 힘을 합쳐 그 해적선을 격침시켰던 바로 그 장소에 <프에블로 호>를 옮겨 놓고 민족자주 역사의 산 교훈을 교육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 미 당국은 이북이 나포한 <프에블로 호>가 민간해양연구선(Ger-2)이고 영해를 침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전쟁불사를 외쳤으나 이북 당국은 「보복에는 보복, 전면전쟁에는 전쟁으로」로 나섰다. 그 때 이미 <프에블로 호> 선원들은 이북 해군들의 뛰어난 용맹술에 항복하고 <프에블로 호>가 간첩선이라고 고백하면서 영해를 침범했다고 진술한 상태였다.

로이드 부커 함장의 항복선언과 함께 선원내 간부장교들은 일본 사세보항을 출발하여 소련을 정탐하며 1백35회의 전파탐지활동을 벌인후에 이북을 정탐하려던 과정에서 나포되었다고 자백했다. 77명의 사병과 6명의 장교 등 모두 83명의 선원들이었으나 그중 사병 한 명이 나포 과정에서 반항하다가 현장에서 즉사했었다고 김 중록 대좌가 회고담을 말해준다.

그는 이어「미 프에블로 호를 나포하기 위해 처음에 인민군 해군 선발조 7명이 선박으로 뛰어 올랐다」고 설명하고 그후 추가병력 34명 등 41명이 미정탐선 선원 83명을 모두 체포하여 승리를 거뒀다고 실감나게 말한다.

이북이 <프에블로 호>를 나포하여 원산항으로 끌고 온 후 북미간의 대립은 첨예했었다. 미국은 항공모함 <엔제프라이즈 호>를 등장시켜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시도한 바도 있었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넘겨 돌려주지 않으면 전면전으로 협박하기도 했다. 이북은 이에 맞서 선원을 송환받으려면 미국정부는 사죄하라, 그러나 <프에블로 호>는 전리품으로 돌려 줄 수 없다는 자세를 굳히며 「선에는 선으로, 강경에는 초강경으로」라는 입장으로 맞서며 나포이후 11개월째 되던 1968년 12월23일 미당국은 드디어 이북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사진은 해외동포들이 <프에블로 호> 선실 내부 정탐기재실에서 김 준록 대좌의 설명에 심취되고 있는 모습]

김 중록 대좌는 「미제는 17차례 침범한 사실을 인정하고 공화국 사죄문에 서명했다. 죤슨 미대통령의 말이 거짓이었다는 것도 폭로됐다. 판문점에서 진행된 사죄문서 서명 식에서 미군대표라는 사람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수표(서명)만 하고 날자 쓰는 것도 잊어버려 날자 기입을 요구받고 얼른 기입하고는 황급히 사라졌다」고 되새겼다.

나포작전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이라 그가 설명하는 동안 필자는 넋을 잃고 있을 정도로 흥미 있는 한편의 장편소설을 듣는 기분이었다. 김 대좌 자신도「내가 프에블로 호 사건을 설명하면 우리 인민들도 이야기를 들은 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하루종일 듣고 싶어한다」며 자신의 이야기가 직접 체험담이라 다들 좋아한다고 귀띔 해 주기도 한다.

필자는 또 한번 이북사회가 진정으로 민족자주를 생명으로 생각하고 일구어 온 사회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러한 민족 자주정신은 비단 김 중록 대좌에게만 있는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학, 교육, 외교, 예술 등 이사회 전반에 흐르고 있는 정신적 지주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1806년 <샤만 호>격침사건에서 1968년 <프에블로 사건>,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진 우리역사에서도 이사회는 지도자와 당, 그리고 인민들 모두가 민족 얼을 간직하면서 뜨거운 동지애로 맺어진 사회, <하나가 전체를 위하고 전체가 하나를 위하는 사회>, 그래서 2천5백만 명의 인민들이 일심 단결된 사회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는 기회였다.(끝)

2001.8.23
민족통신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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