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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창건55주년 기념행사...평양방문기(200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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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rohkilnam 작성일01-01-05 00:00 조회2,9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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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평양까지...."

*글: 홍근수/향린교회 담임목사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이만 원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 가는 곳 없는데
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은 왜 못 가
우리 민족 우리네 땅 평양만 왜 못 가
경적을 울리며 서울에서 평양까지
꿈속에라도 신명나게 달려 볼란다

분단 세력 몰아내고 통일만 된다면
돈 못받아도 나는 좋아 이산가족 태우고 갈래
돌아올 때 빈차걸랑 울다 죽은 내 형제들
묵은 편지 원혼이나 거두어 오지
경적을 울리며 서울에서 평양까지
꿈속에라도 신명나게 달려 볼란다."
(조재형 글, 윤민석 곡)


* 시작하는 말: 멀고도 가까운 서울에서 평양까지
hks1.jpg"친북 인사"로 널리 알려져 온 사람인 나 같은 사람들, 그것도 적은 숫자가 아닌 42명이 한꺼번에 정부 당국의 허락을 받아서 10월 9일(월)부터 5박 6일간 북을 다녀왔다. 이것은 일종의 사건이다. 실정법이라는 소위 "국가보안법"을 정부 당국과 공모하여 그 법이 금지하고 있는 거의 모든 조항을 위반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것이 실정법 위법사항이면서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은 것도 그렇다. 그동안 방북 신청도 해 보았고 북한 동포 접촉신청도 여러 차례 해 보았으나 그때마다 불허 통지로 못 갔었으나 이번에는 초특급으로 수속을 하고 다녀올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번 평양행이 더욱 사건성 성격의 여행이었던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토요일에 신청서를 내고 일요일 오후에 통일연수원에서 실시하는 교육을 받아야 하지만, 강사를 통일부로 오게 하여 교육을 받게 하고 월요일 아침에 방북하도록 정부 당국에서 편법을 쓴 것이다. 이것은 관료적인 한국 정부를 생각할 때 더욱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을 당국이 직접 솔선 나서서 추진하여 그 어려운 일들을 모두 가능하게 했었기 때문에 이번 평양행 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북에 가서 어떤 정치활동도 하지 않고 다만 "참관"만 한다는 조건이었지만 이북의 최대 정치적 명절인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55 행사에 가게 하였다는 것, 비록 판문점 통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 3국을 경유한 것이 아니고 직항로를 이용하게 하였다는 것, 북에서 특별기를 보내어 와서 초청자들을 실어가고 또 남으로 보내주는 방식을 남.북 당국이 합의하였다는 것, 특히 남한 당국이 거절해 왔던 남한의 정당.사회 단체장들과 재야 대표들을 북의 조선노동당 창건 55 을 축하하도록 북으로 보냈다는 것, 등은 확실히 큰 변화이고 통큰 결단이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초청장은 여러 방식으로 여러 단체들로부터 왔었다. 나와 박순경 교수는 조선 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회의 강영섭 위원장이 초청하였고 불교, 천도교, 천주교, 여성단체연합, 민예총, 민가협,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한국노총, 전농, 전국연합, 민화협, 등은 각기 이북의 상대 단체들이나 민화협이 주로 초청장을 보냈었다. 그러나 모두 같은 일행으로 같이 갔고 이북에서도 모두 같은 일행처럼 대접하였으며 일제히 5박 6일의 일정을 마치고 같이 서울로 귀환했었다.

이것은 모두 6.15 이후 가시적인 한반도의 변화된 상황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세상이 참으로 많이 변했음을 우리는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떠나는 날 아침 택시를 타고 공항을 가면서 기사와 나눈 대화 가운데서도 나의 이번 여행이 많은 사람들에게 놀람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어디 중요한 곳에 가는 모양입니다."라는 택시 기사의 말에 "예, 평양을 갑니다"고 했더니 그 기사가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며 "예?!"라고 큰 소리로 반문한 것을 보면 믿지 못하겠다거나 혹은 혼란해 빠져 있는 표정을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여태까지 그런 손님이 없었고 그런 말을 들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사실은 마음만 먹으면 내 나라 내 땅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동안 그 당연함이 금지, 불법시되고 처벌되었기 때문에 이번의 이남의 민간 대표들이 반세기가 넘도록 금기의 땅이었던 이북을 간 것은 불가능의 장벽을 깨는 사건이었다. 내가 이번에 모든 바쁜 스케줄을 취소하고 이북을 가게 된 중요한 동기 중 하나는 앞으로 남.북 교류의 길을 좀 넓히는 일에 보탬이 되었으면 해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가는 것은 미리 알았지만, 김포공항에서 예의 그 한복을 입고 나온 백기완 선생을 만났을 때 이는 정말 뜻밖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뜻밖의 일은 어제까지만 해도 가는 것으로 알았던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이 못 간다고 했고 경실련 통일협회 운영위원장인 이장희 교수(한국외대 교수)가 보이지 않았으며(그는 당국에서 못간다고 하여 나오지 않았다고 함), 이철기 교수(동 정책실장)와 차승렬(동 자통국장) 부장은 공항에 나왔으나 불허라 못가게 되었다며 풀이 죽어 있었으며, 이규제 선생(민주노총 부위원장), 정광훈 선생(전농 의장), 양연수 선생(전빈련 고문, 그는 미리 알고 나오지 않았다), 오병윤 선생(전국연합자통위원장) 등은 방북 차림을 하고 김포공항에 나왔으나 불허
통고를 받게 되어 못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어서 여행자들 간에 논의가 분분하여 한동안 방북 여부 마저 불투명하였다.
사실 평양에 가려고 공항까지 나왔다가 가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 아픈 심정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 "운동판"의 의리대로 하면 이런 경우 의리상으로라도 안 가는 것이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또 모처럼 정부에서 통크게 마음 먹고 이북으로 보내려 하는 데 몇 사람들이 국가정보원과 법무부 등과 통일부 사이의 상반된 입장 때문에, 그러니까 정부 내의 강.온 양파의 싸움 때문에 못간다면 이도 또한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방북 자체가 불투명한 채로 논의에 논의를 거듭하면서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쉽사리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서 공항 영빈관에 들어가서 대표자 회의를 정식으로 열어 논의했다. 결국 이규제 민주노총 단장 대신에 통일부와 교섭했던 이수호 사무총장도 포기하고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이라도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취하여 그냥 가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김포공항에 내려 앉은 채로 무작정 기다리고 있던 이북 특별기를 더 이상 세워두거나 돌려보내어 초청을 거절하는 실례를 범하지 方 돌아가려던 북의 특별기를 간신히 탑승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방북은 그만큼 어려웠고 큰 진통 끝에 가능하게 된 것은 그것이 마치도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통일의 아기를 분만하는" 역사적인 여행임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 할지?

10월 9일(월) 1시 경 우리는 북의 특별기에 올라 비행기가 드디어 이륙하여 하늘 높이 올라갔다. 평양을 가는 비행기 창 밖으로 김포 등지의 이남의 산하를 내려다 보니 이남은 점점 멀어지는 것이었다. 그 대신 이북으로 점점 더 가까이 가고 있었다. 그 비행기에 몸을 싣고 평양을 향해 가고 있던 사람들 중에 그러한 감회에 젖지 않은 사람 없었으리라.
6.15 남.북 정상회담 때 개설되었다는 직항로로 우리는 평양을 향해 날아갔다. 직항로의 거리는 약 530 여 킬로 미터이고 비행시간은 1 시간 남짓이었다. 제주도에 가는 거리와 시간과 비슷하다고 할지. 그러나 김포에서 평양으로 직선 거리로 가면 그보다 훨씬 가까울 것이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강한 이북 액센트를 가진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짐에 따라 우리는 북한 비행기를 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불과 얼마 전에 백두산과 한라산을 교환 방문키로 하는 남.북 당국의 합의에 따라 먼저 100 여명을 이끌고 북을 다녀 온지 며칠 안 되는 한완상 상지대 총장이 단장을 맡아 우리를 대표하고 대변하게 하였다.
북에서 마련한 푸짐하고 큰 도시락을 먹고 과일과 음료수 등을 마시고 나니 이내 평양공항에 착륙할 예정이라는 기내 방송이 나왔다. 김포공항을 이륙한지 1시간 남짓하여 평양의 순안 비행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때가 오후 2시가 훨씬 넘은 때였다.
북에서 정한 순서를 따라 비행기를 내리게 되었는데 민주노동당이 제일 먼저 내리도록 북에서는 배려하였다. 이남에서는 푸대접을 받는 존재가 이북에 오니 대우를 받는 아주 다른 상황이라고 웃습다는 농담들을 하였다. 나는 민주노동당 인사들에게 북의 노동당과 돌림자가 같아서 대우를 받는다고 농담을 하였다.
우리가 처음으로 평양 공항에 발을 디뎠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가히 역사적이었다. 비행장에는 약 5백 여 명으로 보이는 환영객들이 붉은 가화를 흔들고 "조국통일" 등의 구호를 연호하면서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우리를 환영하는 이북의 시민들 옆을 한 줄로 서서 지나면서 일일이 답례하였다. 대게 여성들이 주를 이룬 그 환영객들의 얼굴은 깡마르고 영양이 그리 좋지 않은 혈색들이었으며 화장품도 얼굴에 바르지 않은 모양으로 내 마음 한 곳에서 뭉클함을 느꼈다. 이는 이남에서 간 다른 분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 분단국의 한쪽에서는 이적단체 요원, 다른 한 쪽에서는 영웅인 "참관자들"
간단히 단체별로 사진을 찍은 후 아무런 공식 행사 없이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우리들에 대한 이북의 대접은 특별하였다. 42명 전부를 밴츠 승용차로 모셨다는 것, 한 차에 두 사람씩만 태웠으니 모두 스물 한 대인 셈이었다. 나는 30 여 년 전에 미국에서 한번 타 본 이래로 밴츠를 타보기는 이번이 처음인 된 셈이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우리를 외국 국빈이 머무는 초대소를 숙소로 하고 이북에 체재하는 동안 그야말로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나는 속으로 너무나 다른 곳에 와 있음을 이상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남 당국으로부터는 "문제" 많은 "말썽꾸러기"들이고 기껏해야 "이적단체의 요원"으로 "대접"받았던 우리들이 분단의 다른 한 쪽인 이북에 와서는 "국빈" 대접을 받다니..
사진과 티.브이.에서만 보았던 평양 거리를 이렇게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서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니 그 감개는 말할 수 없었다. 처음 보는 평양시는 질서정연하고 맑고 깨끗하였다. 좌우에 지나가는 광경들은 우리 눈에는 신기하기만 하였다. 평양에서 36 킬로 미터를 달리자 큰 길에서 꺾어 돌아 양쪽에 가로수가 우거진 도로로 들어갔다. 다 온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들어가자 넒은 주차장이 나왔고 거기에 2층으로 된 큰 빌딩이 나왔다. 그 서쪽 옆에는 대동강 상류라 하였는데 물 대야 같이 넓은 물이 호수처럼 보였고 집은 여기 저기 아름다운 서양식 집 스타일의 별장 같은 것들이 있었다. 한완상 단장은 전에 북에 몇 차례 와 보았지만, 이렇게 좋은 초대소에서 묵게 한 일은 없었다면서 크게 의미를 부여했다.

3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숙소에 도착하였다. 그 초대소는 평양에서 약 36 킬로 미터 동쪽이고 강동에서는 서쪽으로 8 킬로 미터가 떨어져 있다는 이정표가 있는 강동군의 봉화 초대소였다. 우리가 차에서 내려 초대소의 본관에 들어서니 붉은 양탄자가 깔린 계단이 나타났다. 그 계단을 밟고 올라가니 넒은 라운지 같은 것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식당이 있었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저녁시간이 다 되었지만 준비된 점심이어서 먹어야 한다기에 또 먹었다.

그리고 각기 숙소 건물로 갔다. 대게 2 층으로 된 큰 집이었고 회의실, 등을 갖추고 있었으며 2층에는 큰 방 세 개가 있었다. 한 사람이 한 방씩이었다. 나는 백기완 선생과 김영대 민주노총 부위원장과 같이 핑크 색의 17동에 배치되었다.
방 가운데 큰 침대(킹 사이즈 정도)가 있고 냉장고가 있으며 응접실 의자가 두 개, 탁상이 하나, 옷장 등이 있는 넓은 방이었다. 화장실과 샤워실도 넓고 깨끗하였다.
우리는 짐을 방에다 놓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저녁 밥 먹기 전에 우리는 초대소 내 강을 따라 산책을 하였다. 이북 출신인 백기완 선생은 감개가 무량한 듯 대동강변에 쭈그리고 앉아서 자꾸 눈물을 지었다. 왠지 눈물이 자꾸 난다고 하면서....
6시가 되자 또 저녁을 먹어야 했다.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 날은 저녁 식사 후 식당 옆에 있는 영화상영관에서 6.15에 대한 영화를 보았다. 이것은 매우 당연하게도 이북의 관점에서의 이해와 해석으로 엮어진 이북 판 6.15 이해였다. 아마도 남쪽에서는 이것과 아주 대조적으로 6.15는 김대중 대통령의 성취라고 할 것이 틀림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대단한 대접을 받으면서 우리가 그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인가 하는 질문을 속으로부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남에서 간 42명 대표들 대부분은 그 동안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해서 투쟁했고 그 "덕분"으로 고문과 감옥 신세 등을 감수했으며 사회적으로 온갖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도 많았으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왜 우리는 분단의 남 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분단의 북 당국으로부터는 이렇게 칙사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침실은 더 할데 없이 훌륭하였다. 큰방에다 자리는 아주 편했다. 나는 이북 땅에서의 첫 날 밤을 편히 곤하게 깊이 잠잤다.

* 비 맞으며 참관한 조선 노동당 창건 55 축하행사
평양에서의 둘 째 날인 10월 10일(화)이었다. 이북의 최대 명절이라는 이 날은 날씨가 잔뜩 흐리고 비가 뿌렸다. 인구가 3백 만 명도 못되고, 녹색지대의 비율이 40% 가량이라고 하는 평양시는 온통 노동당 55 경축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공기 맑고 물 맑고 거리도 깨끗하고 서울 같이 조밀하지 않고 넉넉하게 보이는 도시인 평양은 6.25 후에 독일인의 설계로 새로 건설하였다는 평양은 아름다웠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아무리 도시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사람이 사람다운 생을 살려면 이 정도의 환경은 갖추어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무력부와 조선로동당평양시위원회가 공동 초대하는 조선로동당 창건 55 돐 경축열병식 및 군중시위라는 이름의 행사에 참관을 위해 8시 10분까지 김일성 광장에 입장을 완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침 7시 경 일직부터 서둘러 초대소를 떠났던 관계로 우리는 시간에 맞게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들어가는 데 보안 검사 절차가 있었다. 우리는 외국 손님들과 최고 초대객들의 좌석이라는 주석단 바로 우측 아래쪽에 위치한 곳에 안내되었다. 그곳은 스타디움 같은 시설은 갖추지는 않았지만, 가운데 넓은 운동장이 있었다.
식은 정시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가 우리 식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갑자기 그때까지 기계처럼 마당에 서 있던 그 수많은 군인들과 관중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펄쩍 펄쩍 뛰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치 열광상태에 빠진 광신도들 같이 행동하는 것이었다. 군인들과 인민들이 그런 행동을 보인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선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대회사 비슷한 것을 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 기억할 수 없지만, 김정일 위원장에게 고무.찬양하는 발언이었던 것 같았다. 정작 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연설은 없었다. 이어 총참모장 격인 군인 지휘관이 자동차를 타고 한바퀴 돈 다음에 김정일 국방위원장 앞에 와서 경례를 하고 무어라고 보고한 후 열병식이 시작되었다.

수 십만 명의 군인들, 비록 무장은 하지 않았으나 무리를 이루어 열병식을 하는 광경을 보는 우리는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면 끝에 대동강 강둑 같은 것이 있었는데 수많은 군인들이 그 언덕을 계속 넘어왔고 나중에는 꽃을 든 수많은 인민들의 떼가 끝이 없는 듯 계속 넘어 왔다. 그 많은 숫자의 군인들과 인민들의 일사분란한 행진에 우리의 열린 입이 닫혀 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 열병식은 너무나 훌륭하였고 화려하였다. 일직이 그런 광경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신기하게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으리라. 경축식이 끝난 것은 두어 시간이 훨씬 넘어서였다. 우리는 내내 비를 맞으면서 서서 참관하여야 하였다.
마치고 나와서 버스 타러 가는 데 갑자기 뜻 밖의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몇 년 전에 느닷없이 북으로 갔다는 윤성식 선생이 아닌가! 나는 너무나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 한 참 말을 잃을 정도였다. 그는 너무나 건강하고 젊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이북의 의술이 서양의학이 지배하고 있는 이남보다 확실히 우수하다고 판단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그는 이남에서 "희망이 없는"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이북에 와서 건강이 회복되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 만남이 전적으로 이외였기에 그 기쁨 또한 더 컸다고나 할까. "죽지 않고 살아있으면 이렇게 만나게도 되는구나!" 하고 새삼 느꼈다. 서울로 떠나기 전에 우리 둘이 꼭 좀 만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숙소로 와서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그 근방에 있는 단군릉을 보러 갔다. 같은 강동군이어서 숙소에서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 에짚트의 어떤 신전이나 박물관 모양의 돌 릉으로 보였다. 날씨는 여전히 비가 뿌렸지만, 단군릉을 보자는 우리의 열심은 그런 비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은 듯 했다.
안내 책임자 같이 보이는 여성이 비전향 장기수 김린서 선생의 둘째 딸이라고 더욱 반가왔다. 그가 아주 어릴 때 아버지를 보고는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동안 그를 돌봐준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돌 무덤 속으로 들어가니 어두운 곳에 박달나무로 된 두 개의 큰 관이 있었다. 햇빛을 보거나 사진을 찍으면 상한다고 하여 씌워 놓았는데 300불을 내면 관을 열어 보일 수 있다고 하였으나 우리 일행 중 아무도 300 불을 내 놓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 박달나무 관 속에 돌무더기가 들었는지 인간 뼈가 들었는지 볼 수 없었다.

백기완 선생은 그곳에 단군 묘가 있다는 이야기를 어릴 때 듣고 배웠노라고 하면서 그것이 새롭거나 조작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밖에 나와서 그 돌 건물의 전면 쪽으로 내려다 보니 오른 쪽 잔디밭에 비파무늬 큰 칼이란 것이 꽂혀 있었는데 그것이 고대 한국의 칼이었다고 백 선생은 말하였다. 릉 앞에서 내려다 보니 장관이었다. 풍수적으로 보면 좌청룡우백호인데 그 자리는 김일성 주석이 정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돌 계단의 양 쪽에는 단군의 아들들과 신하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고시래" 라는 신하도 있었는데 그가 농사를 관장하였다고 하였고 농부들이 술이나 음식을 먹을 때 "고시래"라고 말하면서 술이나 음식을 뿌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했다. 208개라는 계단을 다 내려오니 단군릉 개건기념비라는 것이 있었고 그 맞은 편에는 단군릉 발굴 때 나왔다는 본래의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저녁에 다시 평양으로 나갔다. 이날은 6시 30분에 인민궁전에서 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 만찬에 초대되었기 때문이었다. 초대장을 가지고 거대한 건물로 들어갔다. 공식 만찬 전에 김영남 위원장, 김용순 비서, 여성 위원장 등이 연희석 옆 방에서 서울에서 온 우리들을 잠시 접견하고 환영하는 말을 하였다.
이내 만찬장으로 들어갔다. 김정일 위원장은 나오지 않았고 김영남 위원장이 가장 고위 인사였다. 그가 방으로 들어서자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북한의 유명인사들, 지도급 인사들이 모두 참석한 모양이었다. 한 쪽에는 군복을 입은 장군들이 앉았고 훈장을 주렁주렁 단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김영남 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건배를 요청하자 만찬이 시작되었다.
한 참 시간이 흐르니 사람들이 여기 저기 다니면서 서로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곤 하였다. 북의 세계 마라톤 선수로 작년에 이름을 떨쳤다는 갸날픈 여성, 또 북의 T.V. 방송의 "앵커 우먼" 등이 인기였다. 이번에 평양 취재를 위해서 남의 SBS 방송사에서 중계차 한 대와 기자 29명인가를 파견하였다고 했고 그들은 매일 생방송으로 평양 소식을 전했다고 했다. 이 연회에서 또 반갑게 만난 사람들은 이남에서 온 한겨례 신문 기자들이었다. 북경특파원과 서울에서 직접 왔다는 기자 등 3 분이었다. 옆 테이블에 가슴에 붉은 천에 "조선로동당 찬건 55 경축"이라고 쓰고 또 "재일동포"라는 글도 쓰여진 턱받이 같은 것을 두르고 청색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내게 와서 인사하였는데 일본에서 온 조총련계 젊은이들의 회장이라고 하였다. 그는 언제가 내 강연을 들었다면서 그 이야기의 줄거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늘 기억하고 한번 만나서 감사의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다며 사진을 함께 찍자고 요청하기도 했다. 9시나 되어 김영남 위원장이 자리를 뜨니 그제야 만찬이 끝나고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왔다.

* 광고냐 구호냐?
다음날인 10월 11일(수) 아침 8시에 우리는 다시 평양시로 향해 떠났다. 다들 차를 타고 기다리고 있는데 일행 가운데 나타나지 않은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모두는 차를 탄체 기다려야 했다. 차로 숙소에 다녀 온 안내원 동무가 오늘 아침에 출발시각이 그에게 "침투되지 않았다"는 말을 하여 우리가 모두 어리둥절해 하고 웃었다. 알고 보니 그 말의 뜻은 "알고 있지 못하다,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았다" 는 등의 뜻이라 했다. 이것은 이북 인민들의 일상적인 생활정서는 "투쟁적"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오늘 날씨는 어제에 이어 여전히 흐리고 비가 뿌리며 음산하였다. 우리는 평양의 명물인 주체탑을 가 보았다. 과연 높고 웅장하였다. 150층 가량 된다는 높은 탑 위에 올라가서 평양시를 동서남북을 보는 데 날씨가 흐리고 안개가 끼어 시야가 어두워 그리 멀리는 볼 수 없었다. 횃불 높이가 약 10미터라는데 밤에는 이글이글 타는 것 같이 된다고 하였다.
우리가 평양 시내에 들어 갈 때마다 지나가는 길에 높은 탑이 있고 높은 문이 있었다. 전자는 김일성 수령의 "영생탑"이라고 하였다. 그 탑에는 위에서 아래로 "김일성 수령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글이 씌여져 있었다.
후자는 개선문이라 했다. 오늘 우리가 그 곳을 모두 가 보았다. 김일성 장군이 1945 년에 귀국하여 연설한 것을 기념하여 그 자리에 세웠다는 이 개선문은 불란서의 개선문보다 더 높다고 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과연 웅장하였다. 거기 "장백산 줄기 줄기..." 라는 김일성의 노래를 한쪽에 한 절씩, 두 절을 써 놓은 것을 올려다 볼 수 있었다. 2절은 정말 완벽한 시라고 우리와 동행한 한 시인이 말하였다.

평양 거리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소비도시인 서울과 판이하게 달리 일체의 광고가 없었다. 그 대신 중요한 광고가 붙어있을 자리에는 구호들이 여기 저기 붙어 있었다. 순서 없이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위대한 김일성 주석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신다; 오늘을 위한 오늘을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자; 우리 운명의 영원한 수호자 김정일 장군 위원장; 위대한 장군님만 계시면 우리는 이긴다; 우리 당의 영원한 사상인 주체사상; 우리의 집은 당의 품, 위대한 어머니 당; 위대한 어머니 당에 영광 있으라; 모든 것을 우리 식대로; 위대한 선군정치 만세!; 내 나라가 제일로 좋아; 총진격; 자력갱생; 인덕정치 광폭정치; 결사옹위; 당의 사상중시, 총대중시, 과학중시 로선을 철저히 지키자;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세상에 부럼 없이 자라난 우리; 혁명적인 정신; 은혜로운 우리 당; 우리 당이신 김정일 장군 만세; 모두가 속도전 모두가 앞으로;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상 유격대식으로...."

우리는 그 유명하다는 지하철을 타 보러 갔다. 그 깊고 또 그 벽위에 그려놓은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이해하며 지하철을 실제로 타보기 위해 내려갔던 것이다. 지상에서 지하철까지의 높이는 약 150 미터나 된다고 하였는데 우리가 내려간 역은 부흥역이었다. 거기서 영광역까지 한 정거장을 실제로 타보는 경험을 갖기 위해 일부러 들어 간 것이다. 다. 에스컬레이터 속도는 매우 빨랐다. 그것을 타고 까마득히 높고 깊은 곳을 오르내리면서 오직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하 깊숙이 있는 지하철역의 벽 그림들은 비록 대부분이 사회주의 체제에 관련 된 것이기는 하지만, 아름답고 훌륭하였다. 작은 타일 같은 것으로 벽을 단장을 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만일 먼지나 때가 끼면 물 청소를 하여 다시 깨끗한 새 작품 같이 보이게 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하였다. 서울의 지하철 같이 붐비지 않았다.
우리가 지하철 역에서 나왔을 때 그렇게 많이 들어 익히 알고 있는 고려호텔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그 호텔을 쳐다보면서 그곳에서 머물렀다는 수많은 평양 방문객들, 아직도 그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이곳에서 최근에 돌아간 비전향 장기수 노인들을 생각하였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만수대의 예술창작사로 갔다. 오늘도 "휴식"이어서 예술가들은 만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작품은 만날 수 있었다. 돌가루로 그림을 그렸다는 것, 유리의 양쪽에 선녀 그림을 그렸는데 모두가 바른 모양이었다는 것, 등이 눈에 띄었다. 일행 중에는 더러 작품을 사는 사람도 있었다. 지은희 여성단체연합 대표는 큰 그림을 사기도 했다.
평양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가 본 경험 역시 북을 다시 보게 하였다. 입구에 들어서니 검은 색의 큰 바위가 나왔고 그 위에 구리 빛 글씨로 다음과 같은 말이 써져 있었다: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 건설, 나라의 통일 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열사들의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1986년 9월 17일" 김일성 수령의 친필로 쓴 것이라 했다. 48년엔가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북을 갔다가 일제시대에 민족해방 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의 후손들에게 잘 살도록 해 주었던 것을 직접 목격하고서 김구 선생이 "우리 남이 졌다."고 탄식했다는 말을 다시 생각하였다. 우리는 여러 묘지를 지나가며 급히 보았다. 묘비에다 돌 사진을 새겨 놓은 것이 아주 특이했다. 김창준이란 이름이 눈에 띄었다.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목사이다. 나와 박순경 교수는 그 비석 옆에서 사진을 촬영했다.

우리는 평양의 세 개의 섬 중의 하나라는 쑥섬으로 갔다. 이곳이 1948년에 김구 선생이 참석하였다는 남.북 연석회의 장소라고 했다. 말하자면 그때 이래로 두 번째 평양에 온 정당.사회 단체 대표들인 셈인 남에서 온 모든 사람들은 깊은 관심을 보였다. 99년 8월 10일에 세웠다는 이 탑은 이름하여 통일전선탑, 당시 북에서 15명, 남에서 41명이 참석하였다고 하여 화강석 56개를 써서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높이 13 미터, 돌 무게가 550톤이라는 그 엄청난 돌 탑 뒷 쪽에는 특별히 중요한 대표자 들 12 분의 이름을 새겨놓았는데 김일성, 김책, 김구, 김규식, 홍명희, 백남운, 조소앙, 엄항섭, 조완구, 최동오, 김종항, 정진석 등이었다.
다른 한쪽에 가니 큰 버드나무가 있는데 134년 되었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됨직하게 보였다. 거기에 또 돗자리, 원두막 등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그 옛날 김구 선생이 남.북 연석회의에 왔을 때에 이 원두막에 올라가서 쉬었고 돛 자리를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다시 탑 앞쪽 대동강 가에 왔을 때에 목선이 하나 있었다. 그 목선은 그 때 사용했다고 하여 기념물로 보존하고 있다고 했다.

저녁에 우리는 다시 김일성 광장으로 갔다. 이날 밤에 횃불행진에 초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날씨는 여전히 흐리고 비가 뿌렸으며 기온은 싸늘하였다. 처음에는 1시간 가량 집단 춤을 추었다. 춤추는 사람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내내 앉아서 그것을 관람해야 하는 우리는 좀 지루하였다. 마치 그것이 오늘 저녁의 행사의 주인가 라고 속으로 의문하고 있을 때에 화려한 불꽃 놀이와 함께 횃불행진이 시작되었다. 조명을 다 끄니 광경이 아주 일신되었다. 춤추던 사람들은 삽시간에 물러가고 두 손에 모두 횃불을 든 사람들이 광장을 메웠다. 그것으로 온갖 춤을 추고 온갖 모양을 만들어 냈다. 불의 파도... 정말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 뒤로는 주체탑이 우리 정면으로 보였는데 그 꼭대기의 봉화가 마치 실제로 불이 이글이글 타는 듯한 모양으로 평양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남.북 통일이 되었을 때 이남은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지만, 북은 내놓을 만한 명물이 아주 많다는 평에 대하여 정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가 "참관"했던 엄청난 행사들이나 우리가 가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것들은 차치하고 우리가 가 보았던 주체탑, 개선문, 지하철, 묘향산 선물전시관, 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장소로 보존되고 있었던 평양의 쑥섬, 등만 해도 내놓을 만한 민족의 유산에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구경을 다 마치고 집으로 와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모두가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기완 선생은 달랐다. 그는 첫 2-3일 동안 화가 잔뜩 나서 술을 많이 마시며 거침없이 욕설과 쌍 소리를 해대고 북에 대하여 소리소리 지르며 욕설을 퍼부어 댔다. 그는 "내가 일생을 고생하면서 통일운동을 하였는데 그래 나 백기완을 몰라준단 말인가? 이 노인을 조사를 한다니 초대장을 내놓으라니 말이 되느냐? 이제 이 놈의 북에는 절대로 안 온다. 사람을 못 알아 봐도 분수가 있지..." 그리고 또 그는 "이번에 내 어머니와 누님을 만나게 해 주지 않으면 절대로 가만 두지 않는다. 이 놈의 집을 떼려 부시든가 불을 질러 버릴 것이다." 등의 항의성 욕설과 위협적인 경고를 많이 했던 그였다.

그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백 선생은 55년 만에 처음으로 황해도에 산다는 누님과의 만남이 실현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었기 때문인지 백 선생은 술을 일체 입에 대지 않고 말이 없었다. 그의 모습은 우수에 적은 켈케골의 얼굴 같이 되어 있었다. 그는 나이가 늙어 가는 데 대하여, 또 민족의 분단 상황 등에 대하여 우울한 기분에 잠기는 듯 했다. 그가 원한 것은 직접 고향에 가보자는 것이었고 또 누님과 어머니를 꼭 만나자는 것이었다. 어머님이 오래 전에 돌아가신 사실을 알고는 슬퍼했으며 그의 누님을 만나서 하루 밤이라도 같이 지냈으면 하였다. 그러나 그가 고향인 황해도로 가는 대신 거기에 살고 있는 누님이 평양으로 와서 옥류관에서 따로 만나 하루 오전을 보낸다는 정도로 남.북 지도자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한국노총 회장 등의 우리 이남에서 간 사람들이 선물과 돈 등을 주어 "백수"로 왔던 백 선생은 누님에게 전할 수 있었다. 우리 모두의 이산 가족을 만나는 심정으로 우리는 함께 기뻐하였다.

* 묘향산 국제친선전시관 관람 소감
평양에서의 나흘 째 되는 10월 12일(목)날은 언제 그러했느냐는 듯이 날씨가 깨끗하게 개어 있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활짝 개인 아침 하늘을 볼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초대소에서 약 200 여 킬로 미터 떨어져 있다는 묘향산을 가기로 한 날이다. 우리는 아침 8시 경에 출발하였다.
오래간 만에 날씨도 쾌청했지만, 북의 시골 풍경을 보면서 자동차를 달리는 기분이 썩 좋았다. 우선 길은 잘 닦여 있었는데 길에 자동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도로가 마치 자동차 주차장이 된 듯이 차들로 붐비고 걷는 것 보다 더 느린 엉금엉금 기어가는 서울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차라고는 거의 우리 일행의 자동차들 뿐이었다. 장거리 뻐스 같은 것은 물론 짐추럭은 더더욱 볼 수 없었다. 남한의 그 많은 휴게소도 여기서는 볼 수 없었다. 그래서 2시간 자동차 여행에도 도중에 길 거리에 차를 세우고 담배를 피우는 등 휴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림한 것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낮은 산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개의 야산은 왠지 알 수 없으나 나무가 거의 없고 붉은 야산 그대로인 것이 머리카락이 다 빠진 대머리 같이 보였고 길가에는 백해무익한 아카시아 나무들만 눈에 띄었다. 옆에 앉은 백 선생은 이 사람들이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고 혀를 찼다. 작은 동네들이 여기 저기 보였으나 동구능이나 그 마을을 상징하는 큰 고목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를 보고 백 선생은 "거주지만 있지 마을은 없다"고 한탄하였다. 나는 반공적이고 반북한적인 시각과 별로 다름이 없는 부정적인 말이 그의 입에서 거침 없이 나오는데 대하여 적지 않게 놀랐다.
한참 갔더니 오른 쪽으로 강이 나오는 데 그 강 이름이 바로 유서 깊은 청천강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단순히 자연.문화 관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관광도 하는 셈이라고 느꼈다.

드디서 묘향산에 도착하였다. 정말 물 맑고 공기 맑고 길 맑고.. 등산할 차비를 하고 왔던 박순경 교수는 좀 허탈한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그 날 스케줄에는 묘향산 등반이 아니고 묘향산 밑자리에 있는 국제친선전람관 관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묘향산을 쳐다보고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묘향산에서 제일 높은 봉이 1,300 미터의 비로봉이고 이것이 주봉이라고 하였다.

한옥식으로 지은 이 국제친선전람관은 웅장한 건물이었고 무엇인가 북의 힘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구리로 되어 있다는 이 문 한 짝의 무게가 4톤이 나간다는 것 만 보아도 이 건물의 "무게"나 힘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 같았다. 6층 건물 내에 모두 150 여 개의 방이 있다는 이 집은 한옥으로써는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안내원은 예의 자랑을 또 하였다. 이 집은 창문이 하나도 없지만, 통풍이 잘 되고 또 선물전시관은 모두 아래층 지하에 있었지만, 습기 등이 전혀 없다고 하였다. 정말 자랑할 만 하다고 여겼다.
우리는 모두 물건을 사무실에 맡기고 신발을 벗고 대신 덧신을 신고 들어갔다. 옛날 예루살렘에 있는 모스크에 들어갔던 경험을 회상케 했다. 마호X이 그 바위 위에서 명상하다가 승천하였다는 그 돌을 보존해 놓았다는 그 황금 돔에 들어 갈 때는 아예 카메라, 시계 등 어떤 문명의 기계도 가지고 가는 것을 금했음은 물론이었지만, 신발을 벗고 맨 발로 가게 했었다.

이곳에 전시된 선물은 모두 211,688점인데 이는 1945년부터 그가 서거할 때까지 김일성 수령이 각 국의 정상들과 사절들에게서 선물 받은 것을 모두 전시해 놓았다고 하였다. 신기하고 아주 값비싼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5억년 전의 것이라는 골뱅이 화석, 나비날개공예벽걸이, 600년 전의 고려청자, 620 자, 또 1,150 자가 써져 있다는 만년필이나 옥돌 - 이것들은 중국의 주은례와 등소평이 준 것이라고 했다 - 등 공예품과 예술품은 물론 스탈린이 선물했다는 "지스"란 특수 방탄 자동차, 유리 두깨가 무려 8 센치 미터라고 하였다. 소련의 통치자들이 보냈다는 승용차, 역도산이 올렸다는 벤츠 등도 있었다. 새 자동차 그대로인 것을 보면 한번도 타 보지 않은 것 같았다.
선물은 일본과 중국이 제일 많다고 하여 따로 전시관이 있었다. 미국의 빌리 그래함 목사의 것도 있었다. 안내양은 미국의 유력 인사들이 이렇게 선물을 많이 했는데 왜 미국의 공화당이 우리를 어렵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평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두가 다 인상적이었지만, 특히 96년 7월 18일에 중국의 당과 인민이 모두 만들어 증정했다는 김일성 주석의 납관은 참으로 인상적이었고 훌륭했다.

만일 이 선물 전시관에 비치되어 있는 작품 한 개를 2분씩 본다고 하면 전부를 보는 데 1년 6개월이 요한다는 말, 만일 김일성 주석이 이렇게 많은 선물들을 자기 소유로 했다면 세계적인 갑부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 등을 안내양이 말해 주었다. 정말 수 없이 많은 아주 희귀하고 귀중한 물품들이 그 넓고 넓은 선물전시관에 모두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다녀 본 역사 박물관에 가 봤어도 이런 전시관만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나는 전시관을 돌면서 두어 가지를 생각하였다. 모든 선물을 사용화하고 자기 이사짐과 함께 싸 가지고 간 남한의 대통령들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대통령으로서 받은 선물은 개인의 것이냐 우리 나라 국민이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모두 인민의 것이다 라는 전제에서 이렇게 전시해 놓은 이북으로부터 이남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또 내가 정말 마음 한 구석에 이는 의문은 왜 스탈린 같은 독재자들로부터 받은 선물들도 전시해 놓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북이 인민을 위하는 정권이라면 이들을 억압하고 학살했던 독재자들로부터 받았다 하더라도 그 선물들은 여기서 제외하여야 하지 않을까?
선물 전시관을 대강 둘러보고 엘리베이터로 6층에 갔다. 거기 묘향산을 향하고 있는 누각 같은 것이 있었다. 참으로 상쾌한 곳이었다. 우리는 거기서 차도 마시고 사진도 찍고 상점에서 선물도 사고 묘향산도 감상할 수 있었다.

이어서 우리는 또 걸어서 그 맞은 편에 있는 김정일 위원장의 선물 전시관으로 갔다. 1996년부터 개관했다는 그 집은 모두 55개의 방이 있다고 하였고 작년까지 156개 나라에서 45,855점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였다. 물론 그의 아버지만큼 선물이 많지 않았고 집도 조금 작았지만, 그래도 많은 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는 데에 놀랐다. 마지막에 남한관도 있어 가 보았다. 과거 통혁당, 민주노총 등의 깃발이 벽에 걸려 있었고, 정주영 회장, 에이스 침대 회장, 김대중 대통령, 등이 한 선물들이 있었다. 그러한 것들은 다른 나라와 크게 대조가 될 만큼 빈약하였다.
관람을 다 마치고 우리는 아랫 쪽에 있던 호텔에 가서 고급 점심식사를 대접받았다. 점심 후에 우리는 그 옆에 있는 보현사(普賢寺)를 가 보았다. 이곳은 무엇보다도 8만 대장경 원본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김일성 주석이 평소에 특별히 관심했었던 절이었다고 했고 또 그가 죽은 곳이 바로 이 보현사 옆에 있는 어떤 곳이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날씨 관계로 일정을 변경하여 오늘 저녁에 10만 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백전백승 조선로동당} 행사가 열리기로 되어있는 5월 1일 경기장으로 갔었다. 우리는 역시 그 행사에도 초대되었었다. 날씨는 청명하였으나 매우 차가웠다. 우선 우리 초대석 맞은 편에는 1만 5천명이라는 학생들이 앉았는데 이들은 카드 섹션을 담당한 학생들이라 하였다. 카드 색션은 일품. 온갖 카드 색션을 통해서 멧세지가 전해졌다.
온갖 춤 등이 등장했다. 집단적으로 하는 춤, 노래, 공연 등 매우 다양한 것들이 연출되었다. 서장으로 "세기에 빛나는 불패의 당"이었고 종장은 "영원히 번영하라 조선로동당"이었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공연도 있었다.

*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과 북.미공동콤뮤니케 소식
이 날 우리는 집으로 늦게 돌아왔다. 그런데 이 날 두 가지 큰 소식이 전해 졌다. 하나는 남에서 온 기자들로부터 전해 들은 것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단독 수상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큰 소식이었다. 그러나 그 소식에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이는 의문은 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공동수상이 아니고 김대중 대통령의 단독 수상이냐? 는 것이었다. 만일 남.북 두 정상이 노벨 평화상을 공동수상을 했더라면 한반도의 평화에 얼마나 더 큰 경사가 될 것이냐 하는 아쉬운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북의 특사로 미국을 갔던 북의 국방위원회 제 1부위원장이고 총정치국장인 조명록 차수가 9일부터 12일까지 미국을 방문하면서 미국무장관 알 브라이트와 회담하고 역시 같은 기간에 미국을 방문하고 있던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 미국 대통령사이의 회담에 관한 소식으로 오늘 북과 미국이 공동콤뮤니케를 발표하였다는 것이다.
작은 "쇼" 같은 사건 하나. 이날 일과를 다 마치고 우리가 초대소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저녁 9시 경이어서 저녁을 아직 먹지 않아 배가 고팠다. 그런데 북의 민화협 부의장이고 우리들 안내를 책임진 김영성 선생은 매우 흥분하여 우리를 모두 라운지로 모이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좋은 소식인지 아닌지는 각 자의 판단에 맡긴다면서 북.미 공동 콤뮤니케를 읽기 시작하였다. 북에서는 남의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사건에 버검가는 사건으로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 틀림 없으리라. 그가 읽는 중 이남 사람들은 간간히 박수를 보냈었다. 이를 멀치감치 복도에서 본 백기완 선생은 배알이 꼬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공동콤뮤니케를 읽고 있는 김영성 선생을 향해 배고픈데 저녁을 먹으면서 말해도 되는 걸 왜 저녁을 하지 않고 모이게 하여 그러느냐고 큰 소리로 투정을 했다. 그가 배가 고팠다기 보다 북.미 공동콤뮤니케를 읽는 북의 인사나 우리 대표들이 박수를 보내는 것이 못마땅해서 였던 것 같았다. 당황한 김영성 선생은 그래도 그것을 표시하지 않고 밥 먹을 사람들은 식사하라고 대꾸하고 다시 읽기를 계속하였다.

그 공동 콤뮤니케는 매우 길었다. 그러나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북.미 관계를 총체적으로, 근본적으로 개선한다는 말, 정전협정 대신 평화보장체제를 구축한다는 말,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할 것이라는 말, 등 새로운 합의사항이 들어 있었다. 김영성 선생이 흥분할 만 하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흥분한 것은 이북의 지도자들의 생각을 가늠케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지금 북으로서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큰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을 그들에게는 사활의 중대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공동콤뮤니케가 우리 한반도의 새로운 정세,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은 틀림없는 사건이지만, 과연 북이 남과 달리 미국에 예속되지 않고 민족자주를 지킬 수 있을 만큼 북.미 관계를 조절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나의 관심이었다. 아마도 그러한 뜻에서 백 선생은 북.미 공동콤뮤니케가 좋은 것이 될 수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이 좋다고들 박수를 치고 있는 이남 사람들이 문제라고 보는 백기완 선생의 반응은 전혀 일리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 "심장에 남는 사람"
평양에서의 다섯째 날, 10월 13일(금)이었다. 북에서는 본래 이날 밤에 우리가 서울로 돌아가도록 예정한 날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밤에 서울에 도착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재 협상한 결과 다음 날 아침으로 연기하게 되었다. 나는 아침 먹는 대신에 산책을 하였다. 날씨는 어제처럼 좀 쌀쌀했으나 매우 쾌청하여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밝았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각 단체마다 출발시간이 달랐다. 박순경 교수와 나는 9시에 리춘구 목사와 함께 조선 그리스도교 연맹 사무실로 향했다. 평양시에 들어가니 곧 대동강이 나왔다. 매일 다녀서 이제는 익숙한 풍경과 거리들이었다. 대동강에서 약간 꼬부라져 들어가니 곧 봉수교회가 나타났다.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늘 사진이나 비디오에서만 보던 그 신화적인 교회, 그 교회가 눈앞에 와락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는 조선 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강영섭 목사 - 그는 김일성 주석의 외삼촌이었던 고 강양욱 목사의 아들인데 금년에 69세라 하였다 - 와 연맹의 목사들과 직원들 소개를 받았고 박순경 교수와 나는 2층 사무실에 안내되어 자리를 잡고 서로 인사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곧 이어서 봉수교회에 내려가서 봉수교회 마당에 널어 선 이북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났다. 담임목사였다가 이제는 나이가 많아 은퇴했다는 이성봉 목사, 그는 아직도 정정하였다. 또 내 아내 김영 목사를 미국에서 만났다는 김 아무개 목사와 장로들도 인사를 하였다. 이성봉 목사는 우리 교회의 도기순 장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옛날 젊을 때 성가대를 함께 하였고 도 장로는 풍금을 탔다고 말해 주었다.
주일이 아니었지만, 우리가 온다고 하여 연락이 되는 교인들을 오게 했다고 하여 교인 30여명이 나와 있었다. 교회당 안으로 안내되어 우리는 예배 아닌 예배를 보았다. 이성봉 목사가 사회를 보고, 기도와 성가대의 합창, 독창, 등이 있었다. 훌륭하였다. 나와 박순경 교수는 설교 아닌 설교를 즉흥 연설로 하기도 하였다. 사회를 맡아 보았던 이성봉 목사는 다른 일정 관계로 홍 목사의 축도로 마치겠다고 말하여 축도를 하고 마쳤다. 우리가 일어서서 나오는데 모두들 일어서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라는 찬송가를 부르지 않는가? 우리는 그들 앞을 지나면서 서로 열열히 인사하고 악수하면서 교회당을 나왔다. 섭섭하게도 그들과 헤어진 우리는 또 거기서 아주 가깝다는 칠골교회를 향해 떠나야 했다.

칠골교회는 아주 가까웠다. 이곳 지명들은 칠골, 팔골 등이라고 하였고 옛날 그곳 마을 이름을 그대로 따서 칠골교회라는 이름이 왔다고 하였다. 실제로 나오면서 보니까 팔골이란 동네의 간판도 있었다. 칠골교회라고 쓴 건물 앞에 가니 그곳도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이미 사진에서 보았고 봉수교회에서 경험했기 때문에 낯설지 않았다. 마당에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는 그 교회 담임목사라는 박화춘 목사와 장로들, 등 여러 분이 있었다. 박 목사는 키가 훤출하게 컸고 성격이 서글서글하였다. 그는 아무리 바쁘지만,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나는 칠골교회당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기도하였다. 이곳에도 성가대원들이 까운을 입고 있었으나 정말 시간 관계로 선 채로 헌금을 전하고 그냥 발길을 돌려야 했다. 리춘구 목사님이 갈 시간이 다 되었다고 재촉하여 섭섭하게 떠나 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너무 미안했지만, 안내되는 몸이라 어쩔 수 없이 그냥 떠나야 했다. 지나놓고 나니 지금도 그것이 아쉬웠다. 쉽게 할 수 없는 걸음인데 시간에 쫓겨 그만 선채로 이별을 하다니...

점심식사를 위해 모두가 모이기로 한 시간, 장소였던 12 시, 평양 단고기점으로 갔다. 지나다니면서 밖에서 볼 때는 평범한 집 같았으나 들어 와 보니 어마어마한 저택이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들은 모두가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고 집이 넓직한 넉넉한 느낌을 주었다. 이층의 식당은 제법 넓었다.
모든 일행들이 모여서 식탁에 자리하고 앉았다. 백기완 선생의 누님도 함께 앉았다. 백 선생은 소리 높여 일장 연설을 하였다. 그의 집안은 절반은 남쪽, 절반은 북쪽, 그래서 6.25 전쟁은 서로 가족끼리 살상을 했다는 매우 심각한 취지의 연설이었다.
우리는 단고기 점심을 즐겼다. 여러 가지 반찬이 많이 나왔고 단고기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요리를 하였는데 아주 맛있게 즐겼다.
점심을 다 먹고 났을 때 유흥이 벌어졌다. 몇 사람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며 온갖 시름을 잊고 즐기는 즐거운 한 때를 가졌다. 북측 대표인 김영성 선생은 노래를 아주 잘 불렀다. 김용태 선생과 함께, 또 지은희 선생과 함께 합창을 하기도 했는데 노래 솜씨가 수준급 이상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분들이 나와서 노래하면서 즐거운 오후의 한 때를 즐겼지만 아무래도 김영성 선생이 우리 이남 사람들과 함께 이중창을 한 노래, "심장에 남는 사람"이 마음에 오래 오래 남았다.

점심을 끝내고 우리는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평양학생소년궁전으로 갔다. 소년궁전이 왼 쪽에 있는 것을 보고 한 참 달렸다. 아주 넓은 새 길이었다. 그 길이 바로 그저께 완공되었다는 평양-남포 고속도로라고 하였다. 이러한 도로로 평양에서 서울까지 이어지고 남.북 민이 서로 다니면 그것이 통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한참 그 길을 달리다가 차를 돌려 소년궁전으로 왔다.
학생소년궁전의 소장 등 직원들이 나와서 우리를 맞았다. 소장은 오늘은 휴식이지만, 여러분들 같이 귀한 손님들이 오신다고 하여 일부러 나오고 이 건물의 문을 열었다고 말하면서 우리를 환영하였다. 우리 때문에 이 아이들과 직원들이 고생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 간절하였다.

그는 이 소년궁전에 관해 여러 가지 연혁을 소개, 설명하였다. 이 건물을 건축하는 데 1억불이 들었다는 이야기 - 우리 일행 중 한 분은 이런 건물을 남의 방식대로 하면 수십억 원 짜리일 것이라고 하였다 - 나 이 건물의 건축학적인 미나 웅장함, 직원의 숫자가 700여 명이나 된다는 사실 등이 아니고, 모든 원하는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습자, 무용, 악기연주, 노래, 등을 가르친다는 것이 나를 더 감동시켰다. 정말 사람 사는 사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 남에서 과외 수업 비용들을 다 합치면 우리 어린이들에게 이런 교육을 할 수 있으련만, 모두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사로 잡혀 서로 물고 뜯는 무자비하고 처절한 경쟁만 일삼았고 입시 지옥만 만들어 냈지 교육다운 교육을 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안타깝고 한심한 생각이 일어났다.
이 건물 모양은 반타원형에 다가 양쪽에 달아 붙인 것 같은 모양을 하였는데 이것을 설명하면서 마치 팔을 벌려 어린이를 안으려는 것 같은 모양이라고 하였다. 이 건물 밖에는 구호 같은 것이 붙여지지 않았다. 건물 안에 들어갔더니 큰 정면 벽에 구리로 김일성 수령의 글귀가 붓글씨 체로 쓰여져 있었는데 꼭 어린이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 같았다. "어린이들은 우리 나라의 보배입니다. 앞날의 조선은 우리 어린이들의 것입니다. 1989년 4월 15일, 김일성." 그러니까 이북 동포들에게는 비록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김일성"이란 존재는 석가나 예수와 다름없이 "영생불사"하는 지위에 있고 또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맨 먼저 안내된 곳이 서예소조였다. 모두가 붓 글씨를 쓰고 있는데 입구의 어떤 어린이는 "조국은 하나" 라고 굵은 붓글씨로 쓰고 있었다. 하도 아름다워서 그 글을 내게 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선듯 그러겠다며 써 주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북의 어린이로부터 그 중요한 말을 쓴 글을 얻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그 소녀는 13살의 김향이라 하였고 갈림길 고등중학교 3학년 5반이라고 하였다. 우리 교회의 청년 김향과 동명이인이어서 그가 더욱 귀엽고 친근하게 여겨졌다.

저녁 7시에는 시내 옥류관에서 "평양을 방문한 남측 정당, 단체, 개별인사들을 환송하는 연회에 초대합니다."라는 초대장을 가지고 들어갔다. 우리를 위해 환송만찬을 열어준 분은 민족화해협의회 김영대 회장(사회민주당 대표)이었다. 남에서 간 대표들 가운데도 민주노총 부위원장 김영대 선생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와 동명이인이었다. 이렇게 동명이인이 많은 것도 남.북은 하나라는 증거일 것이다.
냉면집이라지만 단순한 냉면 한 그릇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13개 코스였다. 그리고 냉면은 "국수"라 하고 아B 뒤에 나왔다. 그리고 디져트로 수박이 나왔다. 그 집에는 "크림"이라고 쓴 것도 있었는데 아이스크림이었다. 이 주체의 나라라는 이북에서도 영어를 그대로 쓴다고 백기완 선생은 또 한번 이북에 한방 먹였다.

생각해 보니 북의 안내원들과 환담할 수 있는 기회도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나와 같은 상에 앉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와 같이 다닌 안내원들과 여러 태이블을 다니면서 서로 술잔을 교환하였다. 나는 그들의 소속과 직책 등을 알아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묻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히 그들의 입으로 말하기도 하였다. 서로 실세라고 놀리는 젊은이들, 남의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는 책임자라는 사람, 등등 대부분이 40대의 젊은 사람들로 보였다. 어떤 분은 서울에 있는 내 친구의 남북교역 관계를 말했더니 이에 관한 여러 가지를 말해 주었다. 자칭 무신론자라는 사람, 민족경제협력련합회 서기실 참사로 일하는 사람, 등은 하나 같이 인상 좋고 마음씨 좋은 젊은이들이었다. 남.북 교류협력 관계를 물었더니 민경련 베이징의 대표부의 윤원철 대표를 소개해 주면서 그의 전화번호까지 써 주었다. 그 외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내게 술을 권했다. 모두가 상냥하고 서로 웃기고 웃는 농담과 "장난"기가 있는 젊은이들이고 나와 똑 같은 한국인들이었다.
환송연회를 마치고 나올 때 한겨레 신문의 장태호 기자와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내게 인사말을 하면서 미안하다고 하였다. 사연인 즉 내가 조선 그리스도교 연맹을 방문하여 그들과 대화하던 장면을 취재하여 기사를 서울로 송고를 했으나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기사로 덮여 신문에 나지 않았다고 하면서 사진은 챙겨서 전해 주겠노라고 말했다. 그것이 어디 그가 사과할만한 일이고 그의 책임인가?

* 언제 또 만나리....
평양에서의 마지막 날인 10월 14일(토)이 드디어 왔다. 어제에 이어 날씨는 매우 쾌청하였고 쌀쌀하였다. 아침 식사 대신 고요한 적막 강산 같은 초대소 주위를 산책하였다. 대동강 물은 유리판을 깔아 놓은 것 같이 고요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멀리서 군사훈련을 하는 군가 같은 소리가 아침의 고요를 깨고 있었다.
그렇게 친절하고 정들었던 북의 안내인들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아쉬웠고 서운하였다. 이들 나의 피붙이를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리춘구 목사를 만나 다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정리하고 인사하였다. 우리는 올 때처럼 모두가 벤츠를 타고 공항을 향해 떠났다. 오전 10시였다. 오늘은 북에서의 휴식이 다 끝나고 일을 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가 본 다른 날들과 달리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논밭의 벼를 거둬들이는 일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 이북은 자동차가 많지 않아 교통체증 문제가 없어 길이 막혀 시간에 늦었다는 핑계를 델 수 없는 곳으로 한편 좋기도 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산업이 활발하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니 마음 한구석에 씁쓸한 맛이 남았다.
올 때처럼 환송객들이 공항에 많이 나와서 붉은 가화를 흔들면서 조국통일, 민족대단결, 등을 연호하면서 우리의 가는 길을 축복하였다. 마지막에 가서는 어린이들이 서서 모든 우리들 모두에게 꽃을 한 개씩 주며 인사하였다. 오전 11시경에 비행기는 평양을 이륙하였다. 이제 역사적인 이북 여행도 마지막 막을 내려야 할 때였다. 비행기가 이륙하여 우리가 멀리 하늘 공중으로 올라갈 때까지 환송객들과 김영성 선생을 비롯하여 모든 안내원들은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이내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1시경이었다. 공항에 내리니 반가운 얼굴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범민련, 장기수들, 전국연합 동지들이 공항에 나와서 환영식을 하였다. 지금 연세대에서는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주관으로 통일에 관한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을 터이고 내가 그 자리에 가야만 하였지만, 나는 자통협의 여러 동지들이 마중 나왔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간단히 평양 다녀온 보고를 하였다.
이로써 떠나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5박 6일의 이북 여행을 모두 마감하였다. 이북의 안내원들이 말하였듯이 정말 나는 좋은 때에 이북을 다녀왔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이북에서 만났던 우리의 많은 동포들, 이북에서 보았던 산하와 역사를 다시 한번 회상하고 있다. 그곳에는 분명 우리의 고유한 풍속과 문화가 덜 오염된 상태로 보존되고 있었다. 또 거기에는 새롭게 변화된 세계상황에서 민족자주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유지해 나가기 위해 온갖 투쟁을 다 하고 있는 위대한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었다.

[출처: 민족민주인터넷 방송국 12-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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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홍근수 목사 ( 1937. 8. 15 생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 130 현대 구기 빌라 3동 205호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 징역(1991.2-1992.8) 만기 출소 후 사면 복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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