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6-05-04 00:00
[방북]지창보 박사, 평양서 26명 친척 모두 상봉
 글쓴이 : minjok
조회 : 5,030  

가족들 두 차례에 걸쳐 만나고 장기자랑 보여줘

[평양=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미주통일운동의 원로 지창보 박사(84)는 최근 평양을 방문하여 여동생 둘과 그 혈육들 26명을 만났다.

<##IMAGE##> 어머니와 남동생들은 전쟁 통에 폭격에 맞아 세상을 떠났지만 여동생 창옥씨(74)와 창도씨(71), 그리고 그의 자녀들, 손자와 손녀, 사위들 26명이 친척이라고 말하는 지창보 박사는 깊은 감회에 젖어 있는 모습이다.

이들 가족들은 지 박사가 머무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가족연회를 열었다. 4월16 일 밤은 평양대극장에 위치한 식당 별관에서 가족과 손님들30여명이 식사를 나누고 노래와 춤으로 이들의 상봉을 축하했다. 재미동포전국연합회의 유태영 고문과 이종천 사무처장은 이들 가족들의 뜻 깊은 만남과 연회를 위해 꽃다발을 증정했다. 유 고문은 축하의 말을 통해 “지창보 박사는 70년대부터 남한의 민주화운동, 그리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해 온 학자이며 미주통일운동의 원로로서 주위의 존경을 받아 온 어른”이라고 소개했다.

이날 모인 가족들은 모두 눈물과 웃음으로 노래와 춤으로 두 시간 동안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지창보 박사의 두 여동생 중 큰 여동생 지창옥씨는 막내 딸(김향미)만 빼고 치과의사인 남편 김처일씨와 3남2녀(김무룡, 김무광, 김무성, 김춘미, 김윤미)와 배우자들(오정란, 변숙희, 박해심, 조성룡, 리형선), 그리고 자녀들(김국진, 김성진, 김유진, 조진애, 리성, 리진향, 조진주는 군대복무로 못참석)이 참석했고, 둘째 여동생 지창도씨는 2남1녀(리영빈, 리영신과 남편 정경남, 리영혜와 아내 로은실) 그리고 자녀들(리평순, 정진원, 정진호)이 참석했다.

평양 근교에 거주하는 이들은 평남 평원, 순천 웅산, 숙현 등지에서 온 가족들이다. 이들의 직업들도 다양했다. 의사도 2명이고, 치과의사, 도서관 주임, 광산연구사, 간호원, 학생 등이었다. 이들 가족들은 지창보 박사를 통일오빠, 통일삼촌, 통일할아버지 등으로 생각하며 하루 속히 통일의 그날을 맞이하여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날을 학수고대했다.

가족연회에서 인상적인 것은 둘째 동생 창도씨(71)가 5분 정도나 되는 장시를 오빠에게 선물로 암송하여 주어 참석자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중학생 진향이 노래와 진애의 춤은 이날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켜 주었다. 모두가 가수였고 모두가 무용수 같았다. 연회 마지막에는 이북의 통일노래 ‘우리는 하나’를 합창했고 이어서 남녘의 통일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

70세가 넘은 동생들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에 장남인 오빠(지창보 박사)를 아버지로 생각하고 살았다”고 말한다. 1951년 가을 어머니와 다른 오빠들은 미군의 폭격에 전소된 평양 집에서 자취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지 박사의 슬픈 가정사도 일제시대의 암흑기와 분단시대의 아픔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학도병으로 끌려가 도망치다가 감옥살이도 했고 일본에서 강제노동도 했던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참혹한 일제만행의 죄악사를 더듬어 본다. 조국이 해방되어 일본에서 진남호를 타고 1945년 11월 부산으로 들어가 38선이 갈린 상황에서 임진강의 조수를 이용하여 고향으로 들어갔다.

45년 11월27일 평양에 도착했지만 가족들을 찾을 길이 없었다.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매일 평양역전으로 나갔다. 기차들이 들어 올 때 마다 열차 위 지붕위에도 사람들이 가득실린 채 귀향하는 열차를 발견했다고 한다. 지 박사는 “하루는 기차에서 내리는 귀향 객들과 함께 출구로 나갈 때 뒤에서 ‘창보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고모였다. 그 뒤에 어머니가 계셨다. 어머니는 해방 후 매일 이곳에 나와 이날 까지 나를 찾기 위해 기다리셨다”고 말한다.

그는 극적으로 어머니를 만난 후 열흘 만에 다시 서울로 내려갔다. 당시에 이북에 는 학교들이 많지 않아 서울로 갔다고 한다. 평양광성고등보통학교를 나온 지 박사는 1942년 봄에 일본에 유학하여 중앙대학 예과를 다니다가 일본경찰에 쫓겨 도망친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해방 후에도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욕망이 많았다. 연희전문 문과를 재학 중 국대안반대운동에 가담했다가 주모자 중 한사람으로 걸려 퇴학당했다. 당시 서울서 고학하며 ‘피난민 학생 기숙사’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서 서북청년단(반공테러집단으로 악명 높은조직)에 의해 점령당한 일이 있을 때 그만둔 사건도 있었다. 1953년 전쟁이 지속되던 시기에는 한성중학교에서 교사도 했고, 세브란스 병원서 선교사 심부름하는 소사노릇도 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듀크(Duke)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59년 봄 노스 캐롤라이나 웨이크퍼리스트 대학에서 첫 직장을 갖고 4년 동안 일하다가 뉴져지 드루대학으로 옮겨 3년간 일하다가 반전평화운동 관련 사건으로 옥신각신 하다가 롱아이랜드 대학 아시아연구부 사회학 교수로 1966년에 시작하여 그 후 30년 동안 한 자리에서 강의했다.

지창보 박사의 민주화 운동, 통일운동 역사는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이미 1971년에 고려청년동지회를 만들어 운동에 참여했고 그 후 고 서정균, 로광욱, 강근, 고은 등과 함께 뉴욕지역에서 민주화운동을 시작하면서 고인들이 된 임창영, 최도식, 김성락, 노의선, 김형식 등과도 함께 활동했다. 관련된 70~80년대 단체들은 미주민련, 한민련 미주위원회, 90년과 그 이후에는 범민련 활동과 학자들 통일심포쥼 행사 등을 지원해 주는 활동에 참여해 왔다.

그는 미주통일운동 원로로서 해외통일운동권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923년 5월23일 평양출생으로 이제 84세를 앞두고 있다. 아무도 엄두를 못내 던 1971년 이북을 방문한바 있는 지창보 박사는 작년에 이어 금년에 평양에 있는 가족들을 모두 만나게 되어 새로운 인생을 사는 활기에 넘쳐 있다. 그는 이번 방북에서 두 차례 가족모임을 통해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하루 속히 자주적 평화통일을 성취해 내자고 호소했다. 가족들도 하나 같이 뜨거운 가슴으로 지창보 박사의 평양방문을 환영하며 다 같이 노력하여 통일을 이루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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