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11-30 00:00
<font color=ffooff>[서거 10주기 회고기]김일성 주석을 기억한다.</font>
 글쓴이 : minjok
조회 : 4,448  
"최근 해내외동포들이 민족통신 독자란을 통하여 김일석 주석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였다는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2004년 7월8일은 김일성 주석의 서거 10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이날을 생각하며 그를 기억해 봅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9순을 바라보는 나이의 선우학원 박사께서 8천여자나 되는 분량의 글을 특별기고로 보내왔습니다. 이 글이 이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전문을 소개합니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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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7월 8일은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 10주년이 된다. 김 주석을 나는 세번 만난 적이 있다. 그중의 한번은 1990년 8월 판문점에서 범민족대회가 끝난 후 대회 대표간부 30명이 함경북도 경성으로 초빙되어 여름 휴양 중에 계신 김일성 주석을 만난 때이다.

8월 18일 오전 열시 반에 호텔을 떠나서 김일성 주석이 계시는 별장에 도착했다. 김 주석은 대표간부들을 현관에서 기다렸다. 우리들은 김 주석과 개별적으로 인사했다. 일행은 회의실로 안내됐다.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김 주석은 다음과 같은 인사의 말씀으로 시작했다.

“범민족대회의 성사를 위해 멀리서 오신 대표 여러분들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고 하신 후 과거를 회상하셨다. 즉 지금부터 40년 전인 1948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 남북연석회의를 위해 김구, 김규식 선생 등의 어려웠던 방북 길을 회상하셨다.

그 당시 북의 일꾼들은 김 주석께서 김구 선생과 합작을 해야 한다는데 대해서 반대했었다. 그런데 그때 김 주석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미제의 분열책동과 ‘단선 단정’음모를 파탄 시키려면 반드시 <전 민족적인 통일전선>을 형성해야합니다. 그러려면 남조선에서 미제를 추구하지 않는 우익민족세력과도 대담하게 합작해야합니다.”

김 주석께서는 사상과 이념의 차이보다 민족적 대의를 먼저 앞세우신 것이었다.

1948년 3월 12일에 김구 선생의 연락인 안경근, 그리고 김규식 박사의 연락인 권태양 두 분이 평양에 도착했다. 그들은 김 주석께 전달할 메시지를 가지고 38선을 넘은 것이다. 안내원을 따라 두 분은 김 주석 앞에 나타났다.

그 들은 따뜻한 인사를 교환했다, 김 주석은 38선을 넘느라고 수고가 많았다는 위로의 말씀으로 반갑게 접견했다.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습니다.”라고 김 주석은 반가운 얼굴로 김구, 김규식 두 분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되어 수고스러운 걸음을 걷게 되었습니까?”하고 물으셨다. 그 들은 김구 김규식 선생이 남북 연석회의 소집을 지지하며 와서 김 주석을 뵙고 회의에 참석코자 하는데 과거를 백지로 해 주시겠는가 하는 뜻을 알아보기 위해서 왔다는 말을 전했다. 그들의 말을 듣고 김 주석은 신중히 말씀하셨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지난시기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의 태도에 대해서 주시 하였습니다.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지나간 과거를 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난시기 나라와 민족 앞에 어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현재 그 것을 뉘우치고 잘 나오면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본 놈들을 반대하여 산에서 싸울 때부터 견지한 시종일관한 입장이며 오늘도 그 입장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조국통일 문제는 몇몇 당파의 힘만으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로 단합된 남북의 애국역량의 거족적인 투쟁에 의해서만 해결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민족의 분열을 막고 나라를 자주적으로 통일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단결입니다. 이것은 역사의 교훈에서 찾은 우리의 변함없는 확고한 입장이며 현 난국을 타개 할 가장 혁명적인 투쟁 방침입니다.”라고 김 주석은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정신 밑에서 남북연석회의는 평양에서 소집됐었다.

이 정신은 범민족대회를 성사시키는데도 필요했다. 40년 전에 발상된 애국정신 즉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고 민족적 입장에서 조국을 통일해야한다는 정신은 지금도 김 주석께서 강조하신 것이었다.

김 주석은 과거를 회상하시면서 “90년대에는 통일을 해야 하지 않겠소. 우리가 통일을 하지 못하고 분단된 것은 모두 미국 때문이죠. 우리민족의 일을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맡겨서는 안돼요. 우리 손으로 해야죠. 미국에 예속되어서 두개조선을 하자는 분열세력도 있지요. 미국만이 아니고 일본도 경계해야 해요 미국이 일본을 키웠는데 요즈음은 일본이 경제대국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군사대국까지 된 실정이죠. 일본은 천마일 해상보위라는 구실 밑에서 군국주의를 발전시켜 일본이 또다시 아시아의 맹주가 될 가능성이 있어요. 일본의 군국화가 조선문제에서 가장 큰 장애가 되고 미국이 남조선에서 나가면 일본이 들어와요.”하시면서 일본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을 경고하면서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했다.

김 주석께서는 “일본사람은 우리를 제일 미워해요 일본의 우쯔노미아씨가 나를 찾아와서 사례하고 친선을 제의했지요. 그 후로는 일본 자민당에서 탈당했고요. 나는 그 분과 동감이요. 일본이 대국이 되기 원하는데 제일 방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조선이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내놓고 말하고 있어요. 남조선에서 반미감정 뿐만 아니라 반일감정도 이뤄져야합니다.”라고 지적하였다.

김 주석께서는 얼마 전 남조선에서 북의 영화 ‘피바다’상영을 거절한 것을 상기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지난 역사이지만 우리가 잘 알아야합니다. 남조선 사람들은 ‘피바다’를 보고 왜 과거를 들추는가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본인이 우리의 성까지 고치면서 일본 민족화 하려고 했어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 일제 때는 성을 고쳐야 대학에도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인텔리들이 친일을 많이 했어요. 이광수도 처음에는 작품을 잘 쓰더니 나중에는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최남선도 그랬지요.”하시면서 그 당시 인텔리들의 친일행동을 회상하셨다. 이광수는 자기의 성을 고칠 뿐만 아니고 글도 일어로 쓰고 조선청년들이 일본군에 입대해서 일본제국을 위해서 충성할 것을 연설했었다. 최남선, 윤치호, 신흥우, 김활란, 정인자 등 기독교의 거물들이 친일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했었다. 그런 상황을 회피하여 많은 애국자들이 만주로 이민했던 것이다. 이때 국내 인텔리들이 해외로 도피하는 바람에 해방 후 국내에서는 인텔리가 아주 부족했다. 그 문제에 관해서 김 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해방직후 제일 큰 문제가 인텔리 문제였죠. 우리 북조선에는 자연과학 한 사림이 열두 명 밖에는 안 되었어요. 기차도 움직이지 못 했으니까요. 기차를 몰 수 있는 사람은 김해일이 하고 다른 네 사람 뿐이었고요. 그 분은 교통위원장으로 생존하시고 김해일 운동도 했지요. 기관사는 없고 화부 밖에 없었어요. 일본사람들이 조선 사람을 화부로만 사용했어요. 그 때 남조선에서 인텔리를 좀 꾀 왔지요.”하시면서 그 당시의 어려움을 회상 하셨다.

김 주석께서는 로동당 창당 당시에 인텔리 부족으로 건국사업에 어려움을 감안하시고 인텔리 위치가 건국사업에 중요한 것을 강조하시면서 노동당 당기에 붓이 중심지를 차지하도록 지시하시었다. “우리는 조선로동당을 만들면서 노동자, 농민 외에 인텔리를 참여 시켰어요. 거기 대한 반대도 많았으나 우리는 우리의 식대로 해야 한다고 고집했어요. 남의 것을 배워도 입에 넣고 씹어 봐야지 씹어봐서 구미에 맞으면 먹고, 아니면 뱉어야 해요. 그 당시 북에서 일한 인텔리는 거의 서울에서 왔어요. 인텔리를 로동당에서 중요시하고 김일성대학을 세워 지금은 145만 명의 인텔리가 있는데 이 사람들이 잠도 안 자고 일해요. 여기에 우리는 큰 밑천을 가진 것이고 지금 생각해도 올바른 노선이었어요. 그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습니까?”하면서 감개무량해 하시었다.

“우리식대로 산다.”는 표어는 오늘 북측의 보편화된 이념이고 실천 사항이다. 이와 같은 정치노선은 이미 북의 사회가 건설되기 시작 할 때에 주춧돌로 됐던 것이며 항일투쟁시에 체험하고 이론화된 주체사상의 발상이기도 하다.

김 주석께서는 “우리식대로 하니 동구의 변화, 중국의 천안문 사건, 러시아의 내정문제로 흔들려도 우리는 괜찮아요. 우리사회에는 그런 문제가 없어요.” “조국은 든든합니다. 우리는 수령, 당, 인민이 모두 한 덩어리입니다. 물론 빈부의 차이도 없고 아편장이도 없지요. 요새 에이즈라던가 뭐 그런 게 유행한다는데 우린 그런 것도 없어요. 그런 것은 다 미국에 있고요. 미국에서 배울 것이 무엇이요? 남의 나라 간섭하는 것. 이라크와 쿠웨이트 문제를 왜 미국이 간섭해요. 사우디에 왜 미군이 출병해요. 소련이 좀 약해지니까 미국이 혼자서 거들거리지. 미국은 자본가만 위하고 대통령도 자본가들 심부름만 해요. 우리는 미국식 본 따를 생각 없어요. 우리 사회주의는 주체사회주의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이해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남조선은 군사통수권까지 미국에 내 맡기고 있는데 그래서는 독립국이라 할 수 없지요. 남조선 민중들도 다 통일을 원하는데 미국 앞잡이, 일본 앞잡이 들이 통일을 반대해요. 전민련, 전대협 구호가 참 좋아요. 반미 자주화, 반 군사독재 민주화, 조국 평화통일 우리 다 찬성해요.”

“이번 범민족대회에서 조국통일을 지향 한 것은 참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남에서 친미, 친일파 외에는 다 통일을 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고려연방제는 현 체제를 그대로 두고 연방공화국을 세우자는 거요. 우리는 절대 사회주의를 강요 할 생각 없어요. 이남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두고 연방제로 통일하자는데 왜 반대합니까? 남조선에 투자한 외국자본가도 반대 안 해요. 해방 직후 말 한 바이지만,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서 건국하자고 했어요.”

“연방제는 남과 북이 주석, 또는 의장, 또는 대통령이 순회 식으로 바꾸어 가면서 하자는 것이요. 위성국이 되지 말고 자주적으로 중립국으로요. 우리 주위에는 대국이 많으니까 오지리, 스위스 모양으로 우리도 중립국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도 찬성 함직 해요. 우리는 또 싸움하는 것은 반대입니다. 이런 우리의 자세를 여러분이 많이 노력해서 널리 알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기초로 한 통일을 주장합니다.”라고 강조하시었다.

“이후락, 장기영, 최규하 세분이 왔을 때 남조선에서 새마을 운동을 해 농민들을 잘 살게 하려는데 가뭄이 들어 양수기가 부족해 어렵다고 했어요. 농민들을 잘 살게 하는 일은 좋은 일이지요. 그래서 강철이 부족하면 멀리 가서 사다 쓰지 말고 우리 것을 쓰고 관개시설도 해 주마고 남북합작을 제의 했어요. 그랬더니 합작이란 말이 안 좋다고 해서 그러면 협력이라 하자 그런 말 몇 마디에 구애 받지 말자고 했어요.”라고 하시었다.

큰 민족사업을 앞두고 작은 일에 신경 쓸 필요 없다는 폭 넓은 자세였다. 결국은 김 주석께서 제의한 민족통일 3대 원칙을 이후락 대표가 동의 했고 남측에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지금도 그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조국통일을 위해서는 민간차원의 대화가 발전 돼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범민족대회가 성과를 얻은 것이었다. “텔레비전을 보니 여러분들 연설도 잘 하고 결의도 좋았소.”하시면서 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시었다.

“북에 한번 왔다 갔다고 문 목사 그 노인하고 임수경이 그 어린 학생을 10년이니 7년이니 징역에 처한다니 70 먹은 노인에게 10년 징역을 살리면 감옥에서 죽으라는 말인데 노태우가 악에 찬 사람이 아니고 서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어요.”하시었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은 두개 조선을 반대하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데 통일 하자는 사람들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요. 조선은 하나고 남도 북도 하나의 조국지요. 그래서 손잡고 함께 나가야지요.”라고 강조하시었다.

남북이 통일하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하고 작은 일에 구애 받지 말고 서로 양보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다시 역설하시었다.

“조선은 하나다란 정신 밑에서 나는 여러분과 손잡고 일 할 것을 맹세하오.”라고 하시면서 우리는 “조선의 넋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었다.

김 주석은 좌석에서 일어서면서 “자 연설은 그만하고 식당으로 옮깁시다.”하시면서 맞은편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점심식사의 차림표는 다음과 같았다. 칠면조구이, 배 밤 채, 쉬움지짐, 송편, 김치, 은이 버섯국, 새우 비빕밥, 개쏘가리, 소갈비구이, 섭조개즙구이, 언감자 깨 국수, 그리고 수박, 인삼정과, 과즙, 인삼차 등의 음식이 차례로 나왔고 김 주석께서는 음식의 종류에 따라 설명하시고 “더 드시라요.”라고 권 하시였다. 특히 언 감자 깨국수에 대한 설명을 재미있게 하시었다. 옛날 항일 유격대 생활의 추억이시었다.

식사도중 “최근에 남조선 신문에서 내가 계단을 내릴 때 부축을 받고 있는 사진을 내면서 내 건강이 나쁘다는 보도를 한 모양인데 그 때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면서 잠시 부축을 받은 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여러분 보시는 대로 내 건강은 괜찮소.” 해서 식탁에 앉은 우리들은 웃음을 피 할 수 없었다.

그해 4월 뵈었을 때 “우리들은 김 주석님의 건강하심을 기뻐합니다.”라고 인사하자 “내 건강은 좋소. 10년은 문제없소.”하신 말씀을 필자는 기억하기도 했다.

1938년에도 일본사람들이 내목을 베서 상을 타 먹었다는 이야기, 일인들이 조선 사람들의 사기를 죽이려고 선전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도 25세 때부터 있었다는 이야기, 그러나 여러 번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시었다.

백두산지대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하신 것 때문에 그 지역의 지리를 자세히 알고 계시었다.

김 주석께서는 중국과 조선국경문제에 대해서 “우리 조상들이 가마타고 다니며 경계비를 지고 가다 중간에 두었을 때 중국 사람들이 먼저 말뚝을 박았어요. 그 것이 문제가 됐어요.”하시면서 외교문제는 알려진 문제보다 알려지지 않은 문제가 더 많은 것을 설명하시었다. 즉 국경비가 백두산 남쪽에 떨어졌고 백두산 일대가 중국 영토로 됐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김 주석께서 중국의 주은래 총리와 교섭하여 백두산을 다시 회복 한 것이다.

필자는 수년전에 백두산을 찾았을 때 동행한 분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중국 측으로 백두산을 바라보면서 중국 안내인이 설명한것에 의하면 백두산 천지의 3분의 2는 조선 것이고 북측 3분의 1만이 중국 것이라고 그 까닭은 60년대에 김 주석과 주 총리의 결정으로 수립된 것이라고. 고구려는 만주를 점령하고 료동반도 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현 베이찡 근처까지 관할한 역사적 증거가 엄연히 남아있다. 강서 덕흥리에 있는 고적에서 그런 지도가 벽에 남아있음을 필자는 보았다. 백두산 성산이 중국의 영토였다면 하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일 정도이다.

식탁에 동참한 려연구 선생을 바라보면서 김 주석은 려운형 선생이 세 번째 평양에 방문 했을 때 자기의 신변에 위험을 염려하시고 자기의 자녀들을 김 주석께 부탁한 말씀을 하시었다.

“려운형 선생께서 딸과 아들을 보내겠다고 하시고 딸을 먼저 보냈고 그래서 연구를 소련에 유학을 보냈지요. 로어와 영어를 배우고 와서 일 잘 하고 있어요.”하시었다.

김 주석은 옛날의 사건과 지명, 인명을 서슴지 않고 분명히 기억하시어 듣는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그의 말씀 중에는 심각한 정치담만이 아니었다. 지방 풍습이니 언어에 대한 전문적 지식도 풍부하시었다. 우리 일행이 방문하고 있던 주을온천에 관해서 “주을이란 말은 여진족 말로 뜨거운 물이란 뜻이지요. 주을온천하면 ‘온천 온천이란 뜻인데 그냥 쓰고 있어요. 그래서 말을 경성으로 바꾸자고 한 것이죠.”하시면서 때때로 농담을 섞어가면서 식탁의 분위기를 온화하게 하시었다.

김 주석은 “여러분이 무두 통일 애국자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분이 문 입구에서 우리 일행을 한 사람씩 송별의 악수를 해 주시었다. 필자에게 “또 봐서 반갑소. 자주 오시오.”하신 말씀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사진은 선우 박사와 함께 해외동포들 그리고 당시(1990년 8월18일)에 남한 대표로 참가한 황석영 선생외 1명도 함경북도 경성(옛날 이름은 주을)의 별장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오찬을 나누며 환담을 나누고 기념촬영한 장면.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6명의 북부조국 대표들, 27명의 해외동포들, 2명의 남녘의 동포들이 이날 오찬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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