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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북녘사람들>의 추천의 말-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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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10,6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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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황석영

내가 홍동근 목사님을 만난 것은 아마도 1990년 제1차 범민족대회 기간 중에 백두산 기슭의 항일유격대 사적지를 답사하던 길목에서 이었던 듯 싶다.

나는 그가 88년에 써서 펴냈던 《미완의 귀양살이》를 이미 읽었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던 터이라 목사님의 함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더구나 방북을 준비하던 89년 봄에 그의 방문기를 뜨거운 마음으로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였다. 책표지에 그가 팔순이 넘은 노모와 부여안고 있던 사진은 나를 슬프게 했었다. 나에게도 세상을 떠난 지 십 년 가까이 되는 평양이 고향이었던 어머님이 계셨다.

내가 썼던 단편소설 《골짜기》라든가 《한씨년대기》같은 글들에 어머니의 고향 그리던 마음과 생활의 편린이 그 흔적으로 남아 있다.
《골짜기》의 어느 장면을 따라 해방 직후 월남한 이래로 언제나 낡은 가죽 가방을 장롱 깊숙히 간직하고 계셨다. 그 안에는 당신 형제들의 퇴색한 사진 몇 장과 이북의 집문서와 식민지 시대에 일제가 발행했던 몇 장의 부동산 증명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전쟁 직후에 병으로 돌아가신 뒤에 어머니는 혼자 과부로 남아서 우리들 4남매를 기르고 대학까지 가르쳤다. 작은 식료품 도매상을 했었는데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장사는 별로 신통치를 않아서 날로 가세가 기울었다. 어머니는 생활의 어려움이 닥치던 나날에 밤늦게 점포를 닫고 돌아와 혼자 숨죽여 불을 켜고 잠든 아이들의 머리맡에서 그 가방을 열었다. 어머니가 그런 밤에 추억의 잡동사니들을 꺼내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이북에 두고 온 소시민의 코딱지 만한 사유 재산이 아니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바로 《갈 수 없는 고향》의 상징이었다.
그 낡은 가죽 가방은 우리 형제들의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 하여튼 어머니는 누나들이 시집을 가고 내가 결혼해서 현장을 찾아가련 다고 서울을 떠나 해남의 농민들 곁으로 내려가고 70년대 중반 무렵까지 그 낡은 가방을 끌고 다니셨다. 글을 쓰고 유신 반대 투쟁을 전개하던 전라도 시절, 어머니는 때로는 가장 없는 집을 지키며 기관원과 실랭이를 벌이고 가택수색을 당하면 그들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너희는 예의 염치도 없느냐고 호통을 치기도 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조용히 살아가기를 간곡하게 호소하기도 하셨다. 어머니의 간절한 뜻에도 불구하고 격동하는 시대 가운데 나는 어쩔 수 없는 불효자 였다.
그러던 어머니가 광주에서 그 끔찍한 5월을 겪으시고 6개월이 넘는 도피 끝에 내가 집에 돌아오니 앓아 누워 계셨다. 늦가을이었던가…. 포도나무 잎새가 노랗게 변해서 날마다 뒷뜨락을 덮던 광주 양림동의 집에서 어머니는 그날 따라 가방을 들고 뜨락으로 나가셨다. 나는 어머니의 행동을 별다르게 보지는 않았다. 저녁 햇살이 따스하니까 바람을 쏘이면서 또 잡동사니들을 어루만지려는 듯이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것들을 꺼내어 소복하게 쌓아두고는 불을 당겨 버렸다. 불길이 오르면서 손으로 만져도 부서질 것 같던 종이 장들이 일순간에 재로 변해갔다.
소설에서의 대화는 이렇게 썼을 것이다.
《어머니 그걸 왜 태우세요… 무슨 일이에요?》
《이런 거 까탄에 고향에 더 못간디. 내 고향이야 이런 거 아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야 나이들구 늙어두 다 똑 같디. 지금 거기 살갔디.》
이런 추억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그들 서로는 영원히 정지하여 있었다. 홍동근 목사의 어머님과의 만남의 순간은 내가 가슴에 품고 있던 저러한 회한과도 같아서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89년 문 목사님과 함께 방북을 결행하게 되고 그가 닦은 길을 내가 밟게 되었다. 백두산 기슭에서 만났을 제 곁에서 잔잔히 미소를 짓고 아무 말이 없던 이가 부인 홍정자 선생이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 그분도 지아비 되시는 이의 뜻과 실천에 따라서 북녘을 오가며 소박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그 곳 사람들과 세상에 알리는 것이 해외에 사는 동포들 사이에 얼어붙은 분열의 벽을 깨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요란하고 시끄럽게 일을 벌이면서 허장성세 하는 것보다 작은 목소리로 꼭 필요한 일을 하기가 쉽지 않은 세태인데 홍정자 선생의 만남과 기록이 그러하다.
이제 틈틈이 여러 지면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아 책으로 낸다 하는데 이들을 찬찬히 읽어보면 북녘 사람들의 훈훈한 인정과 열심히 살아가는 생활의 면모가 따뜻하게 드러나 있어 그 어떤 정치적인 제약도 무력하게 녹아 사라짐을 보게 된다.
여기서 모름지기 홍 선생의 글을 읽는 이들은 《사람》을 다시 발견하게 되리라.
어머니의 낡은 가방은 이제 아무런 증명이나 서류 장이 남아 있지 않은 빈 것이 되어 내가 살던 연희동 집의 어느 구석에 버려져 있을 것이다.

1992년 새해에 뉴욕에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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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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