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05-18 00:00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 저자의 말
 글쓴이 : minjok
조회 : 8,944  
1988년 가을이었다. 북한 당국에서는 해외에서 통일 운동을 벌여온 대표적 단체중 하나인 《조국통일북미주협의회《약칭:통협》》의 일꾼 몇 사람을 그 나라 건국 40돌잔치인 9.9절에 초청해 왔다.

그것은 아마도 북한 당국이 남한 출신의 재미 동포 운동권 인사들에게 보내온 첫 번째 되는 공개적이고 공식적 초청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리고 그 중 일원이 돼 있는 내 남편 홍동근 목사는 초청자 명단에 없는 그의 아내인 나를 동행코자 원했다. 나는 초청장 없는 나 자신은 물론 남편의 방북마저도 선뜻 동의하고 싶지 않을 만큼 온갖 근심과 불안 그리고 망설임의 몇 날을 보내야 했다. 남다른 애국심도 불타는 정의감도 유별히 지니고 있지 못한 평범한 소신 민에 불과한 나로서는 먼저 미지의 땅 북한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물론 방북 이후 어쩌면 애국 애족, 정의를 부르짖는 자들에게 오히려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수난과 괴로움이 지난날에 겪어 온 그 몇 배로 격해지리라는 불안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에겐 거기에 대항할 만한 그런 강인한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는 그 어떤 사실들이 나를 괴롭히고 끝내 북행 길에 오르도록 추동한 것이다.

도대체 분단이래 지나온 반세기를 다시는 그 땅을 밟지 못하는 피맺힌 한을 안고 살아온 남한과 해외의 동포 5천만 가운데 감히 그 나라의 문전을 두드릴 수 있는 특전을 받은 자가 그 누구인가. 그것이 비록 수난의 길로 인도되는 특전이 될지라도 당시만 하더라도 그것은 5천만의 소원을 대신하는 임무가 아니고 무엇이랴.
나는 그러한 상황에 접했을 때 《운명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나아가서 거부할 수 없는 저 두려운 신의 음성으로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무언지 모를 두렵고 경건한 마음마저 들게 되었다.
초청자 외 덤의 신분으로서의 나의 첫 북한 방문은 극히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 동안 감당해 내야 했던 충격, 감동 그리고 환희와 슬픔의 엇갈림 그리해서 그 어느 하루도 눈물이 마를 새 없었다. 나는 눈물 속에 꿈인 듯 갔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평시에 정상적인 나의 생활로 돌아오고자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돌아온 것은 나의 육신 뿐 내 영혼과 가슴은 여전히 거기에 남아 머물고 있지를 않은가. 도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없고 손에는 일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어느 사이 남모르는 고민을 시작하고 있었다. 다시 가야만 한다. 다시 가서 무언가를 보다 더 많이 듣고 보고 그리고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그리고 돌아와 전해야 한다. 몇 날 며칠을 아무리 지워 버리려 해도 끈덕지게 고개를 드는 그 같은 엉뚱한 생각 평소에 없던 알 수 없는 용기와 소원을 두고 나는 씨름을 해야 했다. 나는 결국 첫 방문에서 돌아와 두 달도 채 되기 않은 어느 날 기어이 여장을 꾸리기로 했다. 물론 그때엔 동행지도 초청장도 없는 단신으로 무작정 모험 길에 오르자는 것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북경으로 향하는 중국 여객기 (China Airline)에 몸을 실은 나는 태산 같은 근심을 안고 떠나야 했다. 내 생애를 건 최대의 모험 길에 뛰어 들었건만 그들이 과연 나의 요청을 들어 줄 것인지 아닌지, 북한은 여전히 나에게 미지의 나라였고 경직된 사회로만 알고 있었기에….
예상대로 초청장 없는 입국 수속이 수월할 리가 없었다. 북한의 문턱인 북경주재 조선 대사관 평양간에 어려운 전화가 여러 차례 오고 갔다. 내가 북한 입국 비자를 받기까지 나는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북경호텔에서 약 1주간을 초조히 지내야만 했다. 마침내 내가 단신으로 평양공항에 떨어졌을 때 크게 놀라워한 것은 로스앤젤레스의 주변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북한 당국의 사람들이었다.
직업적인 기자도 명성 있는 작가도 통일 운동권의 인사도 아닌 이름 없는 한 여성의 그 같은 엉뚱한 처사에 그들은 우선 놀라움을 금치 못해 했고 어이가 없는 듯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막무가내로 들이댄 결코 간단치 않은 나의 요구가 관철되기까지는 내가 호텔의 빈방을 지켜야 하는 수일이 경과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긴장되고 초조했던 기다림의 시간 나는 수없이 무릎을 꿇고 주님께 기도를 올렸다. 마침내 그들이 나의 요구를 수락한 데는 그 어떤 그럴만한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지 그것을 나는 지금도 명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통일 운동권 그 누구의 아내라는 명칭이 참작된 것인지 혹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당시의 정체 모를 나의 용기와 소원을 혹시나 그들은 한 여성의 갸륵한(?) 애국심으로 관분한 평가를 해준 것인지 내 멋대로의 추측이 있을 뿐이다. 어찌됐건 나의 청원한 바 그 나라의 대표적 저명예술인들을 접견할 수 있는 특전이 베풀어졌고 나의 요구는 어느 만큼 성취되었다고 해야 하리라.
한편 이렇게 해서 제2차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붓을 들고자 했다. 그러나 나에겐 좀처럼 원고를 정리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돌아오자 내 남편이 속해 있던 운동 조직 《조국통일북미주협회》로부터 2개 부문의 중책을 떠맡게 되었다. 조직 내 《이산가족 찾기》의 대표인 남편을 도와 막중한 이산 가족 찾기 실무 회의와 이산 가족들의 북한 방문 인솔자로 그리고 해마다 평양에서 개최되는 국제적 예술제 《4월의 봄 예술축전》, 《범민족통일음악회》 그리고 미국에서의 북조선미술전시회 등등 남북 문화 예술 교류 사업을 위하여 음악인들을 인솔해 북한을 방문, 행사에 참여하는 등 사업 관계로 나는 연이어 수차례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산가족 찾기》 업무와 《북과 재미동포 문화예술교류》 사업은 의외로 내게는 너무나 벅차고 고달픈 것이었다. 그것은 전혀 내 개인적 사생활이 전폐될 수밖에 없는 막중한 업무량과 시간을 요하는 것이었고 뒤에는 철두철미 반공 사회, 개인주의 사회이며 앞에는 이념이 다르고 체제가 다른 그들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서 그리고 다만 예술 애호가에 불과한 몸으로 그 곳 정치를 하자는 위정자들과의 대화, 협상을 해내어야 한다는 일 등등 그러한 환경, 조건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은 걸음마다 헤쳐가야 하는 투쟁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나는 일손을 놓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때때로 내가 정이라는 평화로운 아성에서 고요히 화폭 앞에 앉아 다만 사색과 아름다운 환상을 좇던 어젯날의 동화 속에 먼 옛일처럼 그리워져서 눈물을 짓기도 했다. 나는 수십 번도 더 나의 무거운 짐을 그 누구에겐가 의탁하고 싶었다. 그러나 참다운 일꾼을 찾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불과 수년 전의 상황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 누구도 쉬이 통일 운동에 나서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첫째로 북한에 대한 불신과 공포감 그리고 통일 운동에 나설 때 무조건 자동적으로 받아쓰게 되는 《적색 분자 또는 친북세력》의 누명 혹은 혐의, 거기에 따르는 《현실적 어려움》 그리고 요구되는 전혀 무보수 봉사 이런 등등이 그 주요 이유가 되지 않을까.
나는 몇 번이고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성을 구하는 데 필요했던 의인 10인을 찾지 못했다는 성서 《창세기 18장》의 비유를 떠올리곤 했다. 통일 운동에 있어서 특별히 재미 교포 사회 그리고 예술계에서의 일꾼을 찾기 어려웠던 일 그것은 운명적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짊어지게 된 소인에 불과한 내게는 벅차다고 느끼면서도 그 짐을 벗지 못한 또 하나의 내 개인적 사유가 있었다. 취재를 목적했던 제2차 단독 여행이래 그러한 나의 직분으로 해서 북한 방문의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왜인지 취재에 대한 나의 집념과 열정만큼은 지칠 줄을 몰랐다. 나는 직업적인 기자 못잖은 열정으로 그 무슨 취재에 신들린 사람 마냥 그 나라의 온갖 풍물을 나의 잡기장과 카메라에 담고자 했다.
평양 거리에 귀여운 아기를 업고 지나는 젊은 엄마, 비오는 날 출근길 버스 정류소에 줄지어 늘어선 온갖 빛깔의 우산들, 빨간 스카프를 매고 머리를 곱게 땋아 느린 여학생이 들고가는 바이올린 상자, 냉면 집에 만난 아낙네들과 몇 마디 대화, 내가 들이댄 카메라가 무서워 울음을 터트린 어느 뒷골목 꼬마 개구쟁이, 시댁을 방문코자 신의주행 열차에 올랐을 때 웃통을 벗어제끼고 트럼프 놀이에 열중하던 군인 아저씨들, 시골길에 달구지를 끌고 가던 노인네, 낙엽 길을 홀로 독서에 빠져 거닐던 긴 머리채의 젊은 여성, 거리에 서 있는 우체통, 호숫가에 캔퍼스를 펼치고 장래 《인민예술가》를 꿈꾸던 청년 화가…. 나에겐 그 모든 것이 신기했고 아름답고 슬프고 감동적인 피사체이며 테마로써 영상화되어 다가왔고 글이 되어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아마도 여기 그나마 조그만 책자를 묶어 내게 된 데는 지나간 수년 사이 그러한 이변적인 나의 취재열에 의한 하나의 작은 결산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분명 최소한 단 한 번도 그 나라에 발을 들이지 못한 자들보다는 그 땅의 많은 것을 보고 들었으리라. 그리고 얼핏 그 나라에 대해서 적지 않은 것을 아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나는 그 나라에 대해서 적지 않은 것을 아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나는 그 나라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도대체 그 땅에 대해 내 그 무엇을 안다 하리오. 왜, 평양의 인구수보다 더 많이 떨어트렸다는 미 제국주의 폭격을, 그 불바다를 내 그 언제 그들과 함께 체험했으며 그 잿더미를 딛고 살길을 찾아 불사조같이 일어서려 했을 때 그 언제 단 한 번 한 삽의 흙을 그들과 더불어 떠본 일이 있으며 그들이 식량이 어려울 때 내 그 언제 한 번 그들과 더불어 풀죽을 떠 넣어 본 일 있는가.
내가 접견한 수십 명의 사람들 가운데는 그 중 여러 명의 사람들에게서 이 같은 말을 듣고 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적어주십시오.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선생께서 들은 대로 본대로 적어주십시오.》

내가 들은 것은 그들의 말이요. 내가 본 것은 그들의 겉모양일 수 있다. 나는 결코 그것을 설득코저 역성드는 일을 하지 않으리라. 내가 보고들은 것을 있는 그대로 여기에 옮기는 것은 다만 지금의 현실로서는 그 누구에게나 쉬이 허락되지 않는 나에게 주어진 그 같은 기회와 체험을 받지 못한자들 그리고 그 남의 기회와 체험을 얻기 원하는 자들과 더불어 그것을 공유하기 위함일 뿐 거기에 대한 해석이나 판단하는 일에 대해서는 각자에 맡기고자 할뿐이다.
그런데 이제 나에게도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서만은 필자로서 확신을 가지고 열정을 다해 전하고 싶은 일들이 여기에 있다. 아마도 이런 것들이야말로 필자로 하여금 붓을 들도록 추동한 참 이유와 동기가 될 것으로 안다. 그리고 필자로서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서만은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전하고 싶은 강렬한 의욕을 느끼고 나아가서 결코 회피해서는 안될 나의 사명으로도 느껴졌다.
나는 확인했다. 그 땅에 고이 간직돼 있는 우리의 유구한 역사, 배달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쉬는 것을, 저 선량하고 순수한 한민족의 고귀한 피와 민족성을, 저 산천도 수려한 우리 강산에 우리들과 더불어 한줄기 물 속에 그들 또한 삶에 뿌리를 내리고 밤이면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저 하나의 달빛과 무수한 별들을 헤이며 살고 있는 한 점의 티도 없는 우리 백의민족임을….
그 나라에는 사대주의가 설 땅이 없고 제국주의가 발붙일 곳이 없었다. 다만 민족 주체성만이 온 나라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목숨으로 사수하고 키워가고자 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장한 일이면 어찌 우리에게도 자랑이 아니랴.
나는 증언하고 싶다. 우리 역사 반만 년 민족 최대의 비극인 외세의 압제로 인한 분단 그리고 전란으로 인한 저 처절한 시련, 참상의 피해자, 희생자로서 우리는 지난 반세기동안 하나의 수난사를 함께 걸어온 《고난의 동지》가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는 생애를 통하여 고난의 장을 함께 넘어온 친구에게서 때로 피를 나눈 혈육보다도 더 절절한 애정을 느끼며 그보다 가깝고 다정히 느낄 때가 있다. 하물며 그들이 내 동족이며 혈육일진데…. 반공으로 얼음장같이 굳어 있던 내 가슴을 그 무엇보다도 뒤흔들어 놓은 것은 그들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온 이야기》들이었다. 우리의 슬픔은 곧 그들의 슬픔이었고 우리의 고통이 그들의 고통이었으며 우리의 피끓는 한이 그들의 것이었다. 우리의 이별이 그들의 이별이었고 우리의 굶주림 헐벗음이 그들의 것이었다. 우리가 생존해 남고자 피땀을 흘릴 때 그들 또한 피눈물 뿌렸다. 우리는 동족이기에 하나이며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고난의 동지였기에 더욱 하나이다.
나는 대변하고자 한다. 그들 북녘 땅 사람들의 남한 동포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뜨거운 동포애 그리고 끔에도 그리는 동족의 재결합 저 열렬한 통일 염원을, 나는 지나간 수년 사이 여러 경우, 갖가지 모양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장면은 언제나 저 견우와 직녀처럼 마치 강제에 의해 격리되었던 두 여인이 감금에서 풀려나 재상봉 했을 때의 그 격렬하고 뜨거운 포옹 그리고 만남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그 언제 한순간인들 북의 어머니가 남의 자식을 저주했을 것이며 남의 아우가 북의 형님을 적대시 했더란 말인가.
북녘 사람들 그들이 원한을 씻지 못하고 증오하고 적대시하는 것은 결코 남한 동포가 아니었다. 나는 일찍이 그들처럼 내 나라 내 민족을 최고의 가치로써 믿고 사랑하고 긍지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인민을 이 지상 어디에서도 본 바가 없다. 나는 명백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적대시하고 분노하며 저주하는 것은 결코 남녘 땅의 내 민족 내 동포 내 혈육이 아니며 오직 우리 한반도의 분단과 전란, 군사 기지화의 원흉 미 제국주의라는 것을.
나는 목격했다. 분계선 저 너머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내민족, 내동포가 살고 있었다는 것을. 고난을 살아온 그들이기에 오히려 다정다감한 눈물도 웃음도 많았다. 뜻밖에도 미를 찬양하기에 그처럼 열정적이었고 그토록 사랑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그들이었고 평화를 희구하는 그들인 줄은 미처 몰랐었다.
나는 묵도했다. 수양버들 늘어진 강변에 타는 듯 사랑을 속삭이던 청춘들을, 첫아기를 낳은 아내에게 꽃다발을 들고 찾아온 수줍은 아빠를, 부모님 환갑상을 차려드리고 하늘같은 부모님 은혜 감개무량하여 흐느끼는 효자 효부들을, 그 누가 상처를 입으면 저마다 다투어 헌혈하고 살을 떼어주며 잔칫날엔 떡치고 밤새워 춤추며 노래하고 해질녘이면 엄마가 아빠가 기다리는 아내와 어린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 행복하고 단란한 내 가정, 내 가족이 그리워 발길을 재촉하고, 처녀 총각 시집장가 가던 날엔 행복에 겨워 수줍어하면서도 함박만한 미소가 피어나고, 어린 것의 운동회 날 조무래기 손의 손목을 잡고 함께 뛰어 주던 착한 아빠를…. 사람 사는 동네에, 우리 인간사에 이 지상 그 어느 곳에서도 펼쳐지는 이 같은 사람들의 사는 모양인 일상적이고 범상한 사건들을 두고 그 무슨 새로운 세상, 신기한 정경이라고 기록하고 셔터를 누른단 말인가. 그러한 행위를 하고 있었던 나 자신이야말로 카메라에 담겨지고 기록돼야 할 비인간 비정상인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지난 40여 년 세월을 북한에 대한 악몽속에 헤매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진정 너와 내가 살아남기 위해 더이상 동족간의 부끄러운 역사를 남기지 않기 위해 그 악몽을 이제는 길몽으로 바꾸어야 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 《분단》이라는 악몽에서 《통일》이라는 길몽으로…. 길몽, 그것은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한다면 《화해》라 생각한다. 그리고 진정 화해를 원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가진 자는 더는 피차의 아픈 곳을 들추거나 어둡고 부정적인 측면에 언제까지나 집착하기를 즐겨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화해는 천국이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복잡한 마음을 버려야 한다. 나는 가능한 한 그들의 이야기를 빈 마음으로 듣기를 원한다. 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먼저 성심껏 듣고자 했고 짧은 필력으로나마 충실히 옮기고자 노력해 보았고 다만 그것으로 필자의 할일을 끝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놓고 분해하고 판단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독자들에게 맡기고 그 진실을 가려내는 일에 대해서라면 역사에 맡기고자 한다.
나는 몇 차례인가 잠시잠시 그 나라를 방문했던 이방인 아닌 이방인에 불과하다. 또한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는 필자가 그 나라를 보았다면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이 작은 책자에 담겨진 내용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수록된 접견 대상이라면 필자에게 주어진 여건의 한도에서 우선적 관심사가 예술일 수밖에 없는 것은 필자의 전공 분야가 그렇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 자신의 요청에 따라 주로 그 나라의 수도 평양에 거주하는 예술인들을 중심으로한 거이며 그러한 범주에 한정되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는 1988년 늦가을에서 1990년 사이 취재하여 씌여진 것이다.
이제 여기 나의 작은 책자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된 애국 선열 앞에 삼가 옷깃을 여미고 드리는 나의 경건한 묵념이기를 그리고 민족 최대의 과업이며 숙원인 통일을 기원하여 바치는 한떨기 나의 작은 꽃송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끝으로 이 한 권의 책이 엮어질 수 있도록 무명의 한 여성에게 특전의 기회를 베풀어 준 북한 당국과 귀중한 시간을 할애하여 접견에 응해 준 북한의 동포 여러분에게 그리고 수차 북한 방문의 기회를 마련해 준 조국통일북미주협회에 깊은 감사의 뜻을 바친다.

1991년 10월 10일, 어머님 생신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저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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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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