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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천재 소녀 화가 오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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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11,1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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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0여 년 우리에게 금단의 땅이었던 북한 땅을 향해 무한한 의혹과 설레임을 안고 날아갔던 것은 지난해 가을 어느 날이었다.
지구의 절반을 돈다 할 긴긴 여행 끝에 마침내 그 땅의 상공에 이르렀을 때 이미 벅차 오르던 감격과 눈물을 가누지 못한 채 나는 그 땅에 첫발을 들였다.

상상도 못했던 그 나라의 놀라운 건설상을 보았다. 혈연친지를 만난 장소에는 눈물의 수라장이 벌어졌다. 그 땅의 산천이 그처럼 아름답고 수려할 줄은 몰랐다. 손마디가 아플 정도로 우리 손을 힘껏 부여잡고 뜨거운 악수를 해대는 그들의 인심이 그처럼 따습고 순수히 보존돼 있음을 또 한 번 놀랐다.

나는 하늘을 보고 땅을 보았다. 호젓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가을 꽃들을 보았다. 담 밑에 봉선화, 떼지어 무더기로 피어 있는 코스모스, 곳곳에 피어 있는 맨드라미, 사루비아 그리고 시골길 어디에나 무연히 펼쳐 있는 논밭 전원의 아침 안개, 새벽을 울리는 닭소리, 그 어느 것 하나도 꼭 같지 않는 것이 없다. 내가 40년 몸담아 살아온 저 남녘 땅의 그것하고 말이다. 아무리 다시 보아도 몇 번이고 만져 보아도 그것은 갈 데 없는 내 조국, 내 고향 땅의 바로 그것인데 어찌하여 예까지 오던 길이 그처럼 멀고 험한 길이었던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땅은 나에게 있어서 신비한 나라였다. 비록 짧은 체류 기간이었으나 그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한 시시로 가슴은 미여져 오고 시시로 알 수 없는 눈물이 솟구치게 하는 신비한 나라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44년 지녀왔던 반공에 대한 죄책인가 아니면 완전 폐허의 잿더미에서 불사조같이 일어난 그들의 지난날 투쟁사가 너무나도 눈물겹기 때문인가. 그러나 아마도 이런 이유에 앞서 내가 안으로 굳게 닫아걸고 있던 마음의 철문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게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저 천진난만한 어린것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40년 묵은 반공이라는 최면술은 우리의 지성마저도 그 나라는 다만 모진 겨울 바람만 휘몰아치는 겨울 왕국으로 생각할 만치 그 기능을 마비시켰다. 최소한 내 경우에 있어서….
그 나라에도 봄이 오면 동산에 진달래, 개나리 피고 뻐꾹새 울어예일 줄로 믿어지지 않았다. 그 나라에도 그처럼 귀여운 우리의 재롱둥이들이 어른들의 죄악된 세상일랑 아랑곳없이 그처럼 티없이 맑게 자라고 있을 줄을 믿어지지 않았다. 거리거리, 골목골목마다 《세상에 부럼 없이》 천진난만하게 뛰어 노는 어린것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들, 나는 그 때문에 그 몇 번이나 가슴 기며 뜨거워 오는 눈시울을 적셔야만 했던가.
그런데 어느 날 그 천사들 가운데 내 앞에 한걸음 성큼 다가와 안겨드는 샛별 하나가 있었다.
그 이름은 오은별, 천재 소녀 화가라는 은별의 명성과 그 천재성에 대한 소문은 이미 앞서 들은 바 있다. 나는 은별의 명성과 그 천재성에 대한 소문은 이미 앞서 들은 바 있다. 나는 은별이를 만나고 싶은 간절한 바램을 갖게 되었다. 마침내 은별이는 아빠의 손목에 이끌려 화구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8세 소녀라지만 아직도 젖비린내 나는 너무나 애띤 소녀였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내성적 성품으로 보였다. 나는 은별이가 화필을 잡게 된 처음 동기부터 물었다. 화가인 아빠가 그림을 그릴 때마다 자기도 그림을 그리겠다고 성가시게 구는 것을 떼어놓기 위해 붓과 화지를 내준 것이 동기라 했다.
그것은 은별이 만 2세 때 였고 그 이후 8세가 된 이날까지 은별이는 단 하루도 붓을 놓은 일이 없다고 한다. 근자에 와서는 하루에 30장을 그려내기도 한다. 은별이의 그림은 그 곳에서 말하는 《조선화》라 했다. 은별이의 천재성이 인정된 것은 이미 3세 때로서 당시부터 조기 수재 교육 수업을 받아왔다. 수재 교육이란 주 2회 평양 미술대학에 출석하여 개별 교수를 받게 됨을 의미한다. (화백 최성룡 교수에게 사사)
은별이의 천재성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1987년 9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국제 청소년 그림 현상 모집에서 세계 60개국에서 모여든 3만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당 최우수상을 차지한 사실을 기해서라 할까. 당시 은별이 나이 7세.
그러나 이 영예로운 수상 뒤엔 웃지 못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숨겨 있다. 은별이의 뛰어난 작품을 놓고 그것을 믿어워하지 않는 심사위원들 사이에 벌어진 열띤 논쟁을 진압(?)키 위해 은별이 모스크바까지 날아가 현장에서 시범을 보인 뒤 비로소 주어진 상이라는 것. 당시 은별이의 일기장을 열어 보았다.

1987. 9. 8
오늘 비행기 타고 소련에 왔다. 조선 노동당 아저씨가 나를 바래주며 우리나라를 빛내이고 소련 선생님들을 기쁘게 해줘야 한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어머니와 할머니도 손을 들어 나를 바래 주었다. 비행기가 뜨니 정말 좋았다. 놀이터 비행기보다 느릿느릿했다. 비행기에서 보는 우리나라가 정말 컸다.
아버지가 《은별아, 이게 바로 우리 조국이란다》 했다. 구름 위에 내가 떴다. 그러니 나는 선녀다.

1987. 9. 11
오늘 상을 받았다. 거기 선생님이 맑은 아침의 나라에서 오은별이가 여기에 왔다고 했다. 상을 줄 때 손을 흔드니까 모두 박수를 쳤다.
내가 그림을 그리니까 계속 박수쳤다.
기자 선생님들이 내 입에 계속 마이크를 갖다 댔다.

은별이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제 팔뚝만한 굵은 붓을 고사리 손에 휘여잡고 음악적 리듬에 힘있는 필력을 과시한다. 노대가의 권위 같은 것이 느껴온다. 삽시간에 대나무를 쳐내곤 이렇게 글을 적어 넣는다. 《대나무처럼 바르게 살겠어요.》 대나무 그림을 한 점 더 청했더니 두 번째엔 이렇게 또 글을 적는다. 《대나무는 꺾이면 꺾였지 구부러지지 않는다.》 이어서 복숭아, 기러기, 버들가지, 제비, 다람쥐, 갖가지 꽃들이 비단폭 풀려나듯 그려져 나간다. 그대로 둬두면 끝도 한도 없이 그릴 태세다. 이미 화도의 깊은 경지에 들어서 있는 감이다. 나는 이 어린 천재 아니 대가 앞에 그저 아연하여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어린 소녀가 나를 경탄케 한 것은 그의 그림 솜씨만이 아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또박또박 적어 놓은 그의 일기장에서 보여 주는 은별의 시상, 철학(?), 애국심 또한 여간 탁월한 것이 아니었다. 한줌도 안될 그 조그만 가슴속엔 이미 온갖 사념들이 정립돼 있지를 않는가.

1986. 8. 28
나는 통일문을 그렸다.
통일문도 개선문처럼 언젠가 생길꺼야.
통일문을 다 그렸는데 날짜를 쓰지 못했다.
나는 날짜를 쓰겠다 했으나 아버지는 통일이 될 때까지 쓸 수 없다 했다.
언제나 통일이 되나.

1988. 10. 10
내가 동무들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게 무엇이니?
그러자 한 아이가 《보석이야》했다. 그래서 보석보다 더 귀중한 것이 무엇이니? 하니 또 한 아이가 《금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보석도 금도 귀중한 건 맞아.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건 사람이야.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이 있어야 금도 쓰고 보석도 만들어 줄 게 아니니 했다.
나도 전에는 몰랐댔다.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다고 가르쳐 주신 건 우리 어버이 수령님이야 했다.

1988. 10. 2
나는 그전에 눈이 올 때 기러기들이 줄을 지어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때는 바람이 몹씨 불고 추웠댔다.
그런데 그러기들은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고 줄을 지어 날아갔다.
그 영명한 기러기들을 그리고 싶어서 오늘 그렸다.
그리고 시도 지었다.
《눈보라 헤치는 기러기들
따뜻한 곳 찾아가는 기러기들
서로 돕고 이끄네
줄에서 떨어지지 말라. 떨어지면 죽는다.
제 동무 떨어질까 이끌어 주며 따뜻한 곳
찾아 기러들 가네.》

1988. 2. 17
아버지가 오늘 어머니와 팔을 끼고 거리에 나가겠다고 했다. 나는 《에이》 했다. 아버지는 《왜?》 했다. 나는 《창피하게》 했다. 아버지는 《소련에 갔을 때 소련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다니는 걸 보지 않았니? 좋지 않던?》 했다. 그래서 내가 《남의 나라 따르면 되나요? 《우리식대로 살아 나가자》라는 글도 못 보았나요? 우리식대로 해야죠. 어머니를 좋아해도 속으로 좋아해야죠.》
아버지도 어머니도 할머니도 하하하 웃었다.
아버지가 어머니 팔을 끼고 나가면 난 같이 안 나가겠다고 했다.

1987. 11. 11
오늘 자다가 꿈을 꾸었다. 내가 닭을 그리니 닭이 꼬꼬대 하고 울며, 병아리를 그리니 병아리가 살아나서 삐용삐용 했다.
학을 그리니 또 살아서 하늘로 날아갔다.
내가 그리는 그림들이 다 살아나면 얼마나 좋을까.

은별이는 제나름대로 보다 훌륭한 그림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수업을 쌓고 진지한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해서 친구들과 더불어 마음 놓고 소꼽장난도 못하고 T.V. 어린이 프로그램을 즐길 수도 없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교외로 나가고 식물원, 동물원 등지에 스캐치를 나간다. 보다 꽃을 잘 그리기 위해 꽃송이를 꺾었다가 꾸중을 들은 뒤엔 꽃가지를 꺽어 들고 오는가 하면 어느 날엔 어린 것이 실종되어 온종일 집안을 공포속에 몰아넣은 일도 있었는데 후에 안 그 사정인즉슨 어린것이 보다 나뭇가지를 잘 그리기 위해 마땅한 나뭇가지 수집을 위해 밤늦도록 헤매리다 돌아왔다는 것.
참새 부리의 빛깔이 계절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도 아빠가 오히려 딸에게 배웠다고 한다.
은별이는 백두산의 진달래와 제주도에 있는 비파를 나란히 하나의 화폭에 담아 그렸다. 나는 문득 은별을 등에 업고 서울 한복판 통일의 광장으로 달려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은별이 손목을 잡고 숲속의 사슴마냥 즐거이 남한 산천을 뛰놀며 마구 헤매이고 싶다.
그것을 왜 못한단 말인가. 그것이 왜 금지돼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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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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