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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탑 구상하는 여류 조각가 정윤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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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11,0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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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년 전의 일이 되었다. 나는 고작 1박 2일의 파리 방문 기회를 얻었다. 꿈에 떡 본듯 짧은 체류기간이었으나 소녀 시절부터 동경해 마지 않던 파리에 그 어느 거리 골목길에 가야만 했다. 그것은 전설적인 가난한 화가들의 촌 몽마르뜨 언덕길. 나는 감회어린 발걸음을 한 발작 두 발작 유서 깊은 포석길을 밟으며 저 드높이 서 있는 《성심》사원쪽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불쑥 동생이 말했다.

《누나, 여기 좀 봐. 여기가 바로 피카소의 그 유명한 《세탁배》집이야.》
《세탁배》, 그것이 무엇인가. 집이 하도 낡고 헐어서 계단을 짚어도 바람만 불어도 물 위에 뜬 《세탁배》처럼 이리저리 찌구덕 찌구덕 흔들리고 내려 앉을 듯 싶어 그런 별명이 붙었다. 그 후년에 가서 세계 앞에 떨친 그의 명성은 물론 이름난 거부가 된 피카소. 그러나 그가 한 사람의 예술의 선각자이며 혁명가가 되기까지 그의 청춘은 너무도 춥고 외로운 것이었다. 친구와 함께 파리에서도 가장 싼값의 하숙을 찾고 찾다가 비로소 얻어진 것이 바로 이 《세탁배》집 허름한 방 한 칸.

하지만 추위에 땔감이 없었고 허기진 배를 채워 줄 빵이 없었다. 뿐인가, 사람은 둘인데 그나마 몸을 가리우고 외출할 만한 옷이란 한 벌뿐이고 담요도 한 장뿐이다. 별수 없이 한 쪽이 그 단벌일 입고 외출하면 다른 한 쪽은 담요를 덮어쓰고 친구가 돌아오기만 기다려야 했다. 둘이는 당분간 함께 외출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추억의 집 앞에 감상에 젖어 서 있는데 한 빠리쟝이 방망이같이 생긴 기다란 불란서빵을 옆구리에 차고 지나가다가 우리를 보곤 《고니찌와》서툰 발음의 일본어 실습(?)을 하더니 《훗훗훗》웃으며 사라져 간다. 우리도 따라 웃을 수밖에….
과연 우리는 예술가의 고뇌와 그 외로움을 얼마만큼이나 이해하며 그들의 고통의 소산인 창작물을 향유하며 혹은 평가하는가. 아름다움이 다만 쾌락의 도구나 생활의 장식품으로 오해되고 남용되는 일은 없는가. 그가 예술 앞에 정직해 보고자 할 때 천재여도 천재가 아니어도 창작은 곧 수도의 길이라 아니 말할 자 그 누구이랴. 그리고 누구에게나 생의 장은 벅차고 고달픈 것, 비례하여 예술 창작 또한 더욱더 어렵기만한 고뇌의 길. 창작 행위란 무엇인가. 그것이 참다운 예술이며 창작품이라면 거기에 축소된 하나의 소우주가 구현되어야 할 것이며 작가는 제2의 조물주가 되어 독립한 하나의 생명체를 잉태해 내야 한다. 정녕 피를 말리고 뼈를 깎는 모진 산고를 겪으며….
창작 행위 속에 어찌 희열이 없다 하리. 하지만 한날의 무아의 황홀경에 있을 때 백날의 고뇌가 따라야 한다. 그 한날의 황홀경을 위하여 백날의 고뇌를 감내할 수 있어야 하고 그 한날의 황홀경과 백날의 고뇌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예술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성의 마음으로 생의 주변의 온갖 것을 애정으로 보듬어 안을 때 비로소 창작의 씨앗은 그 품에서 움을 트게 되는 것. 하늘의 마음, 바다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실로 그것은 거인의 힘과 인내를 요구해 오는 엄청난 작업, 정녕 모진 자학과 극기를 요구해 오는 수도의 길, 가시밭길. 하지만 고독한 자, 슬픔 있는자, 진실을 사모하는 자 그들은 그 길을 가고 또 간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그 길은 오히려 위안의 길이요 해방의 길이며 그리고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그들 운명의 정도이기에…. 저 싯달타가 그러했듯이….

북의 대표적 여류 조각가의 면담을 청원했을 때 그들이 나의 청을 받아 만나게 해준 정윤애 씨를 대하여 나는 우선 그녀의 젊음에 약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대표적》이라는 조건을 붙였기에 적어도 내 상상과 기대는 중년을 훨씬 넘어선 그 어떤 황혼의 여성을 예상했기에. 하지만 그녀의 나이 불과 32세. 그런데 첫눈에 무언가 꿈과 의욕에 찬 듯 그녀의 신선한 건강미 탓인지 그녀는 나이보다도 젊어 보였다. 마치 엊그제 갓 대학문을 나선 것 같은 청순한 소녀티마저 흐른다. 상기된 듯 발그레한 얼굴빛에 쌍거풀진 동구만 눈이 어딘가 이국적인 인상을 준다. 그래 그녀를 가리켜 가을날 능금 같은 여인이라 부르면 혹은 건강하고 부지런한 저 알프스 고원의 목련 같은 인상이라면 실레가 될까….
약간의 파마기 있는 머리를 자연스럽게 빗어 넘기고 흰 바탕에 잔잔한 검은 점 무늬가 있는 원피스 차림이 아주 시원하고 편안해 보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오동통한 그녀의 아담한 몸매 또한 갈데 없는 우리 조선 여성의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녀가 여류 조각가라는 내 선입견 탓일까. 그녀 어깨의 여성적 고운 능선을 타고 내려온 두 팔과 얌전히 모두고 있는 두 손에서 남성적 억센 힘이 느껴지고 더러 수줍은 듯 상냥한 그녀의 미소 사이사이에 그러나 오히려 가을날 고추같이 타는 듯 맵고 뜨거운 정열 같은 것이 번득인다.
만수대창작사 내에 있는 약 10미터 평방의 그녀의 개인 스튜디오는 좀 서운할 정도로 청소, 정돈이 잘돼 있었다. 열려져 있는 창쪽으로 몇 개의 화분이 놓여 있고 한줄기 스쳐 지나간 여름 소나기의 시원한 뒷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한쪽 벽을 다 차지하는 캐비넷 위엔 그녀의 갖가지 다양한 소재를 다룬 소품들이 진열돼 있고 꽤 대작을 할 만한 큰 조각대 위엔 아직 점토로 빚는 중에 있는 어느 건설 일꾼의 늠름하고 희망찬 표정의 반신상이 올려져 있었다. 듣기로 북한의 많은 미술인들이 그 어느 날엔가 우수한 작가로 인정되어 이 나라 최고의 대형 미술 집단인 여기 만수대창작사에 입성(?)하기를 그처럼 동경해 마지않는다 했다. 그리고는 그 뜻을 이룰 때까지는 꽤 치열한 경쟁과 통과해야 할 관문, 그리고 단계가 있는 것으로 들었다.
이 만만찮은 경주에서 기어이 뜻을 이루고야만 그녀의 패기에 우선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그것도 분야가 분야인 만큼 상대는 주로 억센 남성들이 아닌가. 감히 예술에 도전하고 남성들에 도전하며 태고의 돌덩이에 그리고 감히 우리의 조물주가 그랬듯이 질흙을 빚어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겠다는 조물주의 작업에 도전하는 이 당차고 야심만만한 여인, 정윤애 씨. 그녀는 어떻게 해서 뭇 사람들에게 별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돌과 나무와 흙에 꿈을 심게 되었는가. 그리고 뭔가 촉감되어야만 하는 양와 소리에 그 공간 정복의 3차원 예술에 그토록 생애를 걸고 싶을 만큼 매료된 것인가.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이 알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왕성한(?) 호기심이나 그 나라 대표적 여류 작가라는 그녀의 화려한 명칭이 멋적어질 만큼 질문에 답하는 그녀의 담담한 태도나 내용은 너무나 소박하고 겸손한 그것을 뿐이었다. 그녀는 먼저 이렇게 겸손한 고백으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조각을 시작한 것은 중학 3년 졸업 후 곧장 미술대학 전문부에 입학해서 시작. 전문부 3년에 이어 본과 4년을 했으나 이제 사회에 나와 5년이 되니까 비로소 조각에 대한 감이 조금씩 잡힐 듯 말 듯 합니다.》
문득 학창 시절 어느 교수님께서 힐난하며 풍자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여즘 미대생들은 미대 제1년이면 벌써 신인 작가 기분, 제2년이면 중진 작가 행세, 3년이면 대가연, 4년이면 노장, 쳇병에 걸려 졸업과 동시 은퇴가 아닌가.》 생의 아름다움과 진실의 본체를 만나고자 요원한 예술의 길에 들어선 뭇 미술 학도들이면 한번쯤 귀담아 볼 만한 조숙과 모방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아니겠는가…. 한데 그녀의 이 같은 겸양을 보고 나는 우선 그녀의 순수함과 성실을 느껴 볼 수 있었다.
학구적인 미술가는 아니지만 부친께서는 도안과 공예를 직업으로 삼고 계셨다. 아버지는 항상 무언가를 깎아 만들어 내셨다. 아버지가 직장을 나가시고 집을 비우면 소녀 정윤애 또한 남몰래 아버지의 칼을 꺼내 들고 무언가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힘이 부치고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다 손을 비어 피흘리기 일쑤다. 어른들은 꾸지람을 했다. 《계집아이가 그런 것 해서는 못쓰느니라》라고.
어린 마음에도 사나이로 태어나서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그러나 왜인지 그림 그리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무언가 자꾸 만들고 싶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찰흙으로 토끼 따위를 만드는 공작 시간이 제일 신나고 재미있었다. 마침 담임 선생님께서는 미술 교사였다. 정윤애의 조형적 재질은 곧 인정받기에 이르렀고 미술 교사인 담임 선생님은 윤애 양에게 각별한 관심과 지도를 아끼지 않게 되었다. 재능이 인정된 그녀는 중학 3년을 마치자 일반 고등학교가 아닌 미술대학 전문부에 곧장 진학을 하도록 추천되었다. 입학 시험의 주제는 사람의 발이었다. 결코 쉬운 주제는 아니지만 자신이 생각할 때 창피하게 빚은 것 같지는 않았다. 실기를 마치고 구두 시험을 치르는데 교수 모두는 근심어린 질문들을 했다.
《여자가 꽤 하갔나?》 그러면서 《제 1지망이 조각이면 제 2지망은?》
《조각입니다.》
《그럼 제 3지망은?》
《조각입니다.》
수험생 정윤애 양은 꼼짝도 않고 또박또박 답했다. 시험 결과는 합격이었다. 이제는 맘껏 조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학기가 시작되어 등교하고 보니 주변엔 모두 남학생들 뿐이고 교수님들의 요구는 혹독한 것이었다. 전혀 여학생에 대한 별다른 배려나 관용이 없었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자립성을 키워주기 위한 여학생에 대한 특별 배려였다는 것을 깨달은 건 한참 뒤에 일이다. 뿐인가 《여자가 뭘…》 걸핏하면 들어야 하는 주변 동료의 놀림. 윤애 양은 더는 그 놀림이 싫었다.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혼자서 구슬땀을 흘리고 흙을 빗고 나무를 깎고 돌을 쪼았다. 손에 멍이 들고 칼에 베어 피가 흘렀지만 날이 감에 조금씩 작업은 익숙해져 갔고 양(Mass)에 대한 무한한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윤애 양은 성숙해 갔다. 《계집아이》라고 놀림하던 반 동무들도 이젠 장난치는 소년이 아니고 청년 조각가들로 성숙해 갔다.
이제 그들은 하나가 되어 집단 대작들을 해내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들속에 정윤애는 이제 어딜가나 여왕처럼 떠받들리고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여자이기에 받아야 하는 특별 대우라면 절대 사절하고 싶다는 자존심 강한 정윤애. 그 불 같은 자존심 그리고 야심을 안고 그녀는 기어이 국가 전람회에서 3번이나 입상을 했고 다수의 기념비적 대작마다 주역으로 참여하여 헌심함으로써 국가 훈장만도 3개, 이 중 3대혁명 훈장까지 수여받았다.
그녀의 혼신, 청춘은 그래서 오직 한길 조각과 예술에 송두리째 바쳐지게 된다. 정윤애는 사랑할 시간이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동료들에게 떠밀리다시피 하여 시집을 갔다. 하지만 아내가 남성 모델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모델을 서 준다는 이해 깊고 착한 남편을 만났다. 그리고 공주같이 에쁜 연년생 두 딸도 얻었다. 함께 모시고 있는 시모님은 자랑스런 예술가 며느리를 거들어 집안 살림도 도맡아 해주신다. 아이들 때문에 작품 생활에 지장을 받는 일도 거의 없다. 오히려 집에서 보다 더 잘 보살펴 주고 아이들도 그처럼 좋아하는 탁아소, 유치원에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맘껏 작품 생활을 할 수 있고 그래서 그녀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여건이 있다. 그것은 국라고부터 받아 안은 예술가들에 대한 넘치는 혜택과 보장이다. 매달 고정 월급은 물론 작품을 위한 온갖 시설, 제작비, 자료 일체가 무상으로 제공될 뿐 아니라 때마다 각종 옷, 양보지, 신발 등까지도 공급을 받는다. 담화 도중 그녀가 몇 번이나 되풀이했던가. 《우리 사회가 좋다는 걸 항상 느낍니다》라는 말을. 《이렇게 모든 것을 풍부히 보장해 주고 고무해 주니 작업 의욕이 절로 납니다. 그리고 오직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답니다. 그래서 퇴근하여 집에 가면 어서 어서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 작업장으로 달려가고만 싶답니다.》
외유를 해본 일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다른 나라에 가보지 않았지만 다른 나라에 가면 이런 보장, 환경이 가능할까 생각케 됩니다. 그리고 외국에 실제 나가지 않아도 창작에 도움될만한 해외 자료들이 얼마든지 구비돼 있어서 언제든지 참고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부러울 만치…. 하지만 창작하는 자의 고뇌만큼은 그 누구도 거들어 줄 수 없고 보장받을 수도 없는 자신의 십자가…. 정윤애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주제 선택이 잘 돼야 한다. 그리고 현실을 모르고서는 좋은 작품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이를 위해서는 먼저 갖가지 자료를 수집, 참고하고 보다 현장감 있는 작품을 위해서 년 2회 (봄, 가을) 현지로 나가 몸소 참여, 현장의 사람들과 더불어 실습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당 정책에 부합되는 소재를 택하여 재치 있고 호소력 있는 작품을 구상한다. 그것은 왜, 당 정책이 어디까지나 인민의 복지를 위한 것이면 예술 또한 인민에게 복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문에 복무》를 최상의 가치로 믿기에 여기에 이의가 있을 리 없다.
본 작업이 시작된다. 작업은 언제나 생각보다 순조롭지 못하고 더디게 마련이다. 작품의 극히 사소한 한 부분까지도 작가를 붙들어매어 애를 먹인다. 주인공 성격이 잘 들어나지 않고 그의 감정 표현도 부족하고 바람에 나부끼는 여인의 머리결 치맛자락 주름 하나하나도 석연치 않다. 며칠을 붙들고 씨름을 해도 해결이 되지 않고 마무리가 안된다. 그래서 낙심이 되고 좌절감을 맛 보아야 할 땐 금시 땅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만 같다. 길을 가면서도 거리의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 모습들이 모두 움직이는 조각들로 보이고 그들의 예사로운 표정 동작 하나도 무심히 보여지지 않는다. 집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면서도 아이들 숙제를 보아 주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작업장에 붙들려 있다. 시모님께서 우울한 며느리의 눈치를 볼라치면 더욱 더 속이 상하고 짜증스럽다. 하지만 창작 생활에 또한 어찌 흐린 날만 있으랴. 작업이 어느 날 성큼 한 발을 내딛고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인양 그 어느 순간에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던 새 경지가 별안간 열렸을 때의 그 환희, 희열이라니 그런 희열을 안고 귀가하는 날엔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름처럼 떠가는 기분이요 온세상이 다 내 것이 된 듯 콧노래가 절로 난다.
국내 조각가로 인민 예술가 오대형 씨를 존경하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좋아하며 부르델의 제자이며 소련의 여류 작가인 《무이나》를 좋아한다는 정윤애 씨. 이렇게 자신의 창작 생활을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빛나고 두 뺨은 더욱더 상기되었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같은 말을 여러번 되풀이한다.
《집단이 좋습니다.》, 《집단이 좋습니다》, 《집단이 좋으니까… 힘든 것 다 도와주고…》
그들은 과연 그처럼 서로 사랑하며 도우며 하나되어 살아 가는가. 감명 깊고 새롭게 들려온다. 그렇다면 우리 남과 북이 한 《집단》이 되어 피차에 《힘든 것 다 도와주며》 살아갈 그날은 언제인가. 나는 그녀에게 통일 이야기를 들려 달라 했다.
《통일을 위해 우리 예술가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작품을 통해 싸울 길밖에 없습니다. 언젠가 남조선 어느 시인이 두 팔이 뒤로 묶인 채 몸을 굽혀 밥을 먹는 장면을 사진으로 보았습니다. 마치 동물이 밥을 먹듯…. 통일을 위해 투쟁하던 시인이 그같이 고난당하는 것을 볼 때 진정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났습니다. 그것을 주제로 삼아 작품화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만수대창작사엔 90여 명의 조각들이 있는데 우리 모두가 통일탑을 구상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그날이 오면 우리 북의 작가만이 아니라 남과 북의 모든 작가들이 한데 모여 통일탑을 세울 것을 소원하며 꿈꾸고 있습니다.》
전공이 같아서인가 같은 여성이기 때문일까. 우리는 만나자 그리도 쉬이 다정한 벗이 되어 버렸다. 진정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돌이켜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현관을 나서니 먹구름 하늘은 잔뜩 성이 나 있고 후두둑 후두둑 또 한차례 소나기가 퍼부울 기세다. 나는 잠시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소리없이 외쳐 보았다.
《성난 하늘아, 천둥과 우뢰여, 너의 그 노여움으로 저 저주할 분계선일랑 때려부수어라. 천지를 진동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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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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