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05-18 00:00
인간문화재 도예가 임사준
 글쓴이 : minjok
조회 : 8,662  
살얼음 에이는 추운 겨울 바다, 다만 절망 속에 웅크리고 앉은 그들은 자기들을 싣고 가는 배가 어디로 가는지 그 향방을 알 수 없듯이 자기들의 운명 또한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루 아침에 고향 땅 남원성이 저 철천지 원수 왜놈들에게 함락되면서 왜놈 장군 시마즈요시히로는 왠지 도공이란 도공은 모조리 잡아 배에 싣고 그 가족들까지 끌어다 뱃간에 처넣었다. 끌려가지 않겠다고 반항하는 자는 즉시 총살하여 바다에 내던졌다. 그들을 실은 배는 동지나해를 지나 일본 땅 규우슈사쯔마반도, 시마비라는 해안에 닿았다. 내리고 보니 사면팔방 무인지경, 황량한 바닷가 끝없는 모래사장뿐, 절망과 비탄의 긴 뱃길에서 이미 병든 자는 벌써부터 쓰러져 죽어가고 아녀자들은 울부짖었다. 남정네들은 암담한 현실과 앞날로 해서, 여인들은 망향의 슬픔에서, 어린 것들은 춥고 허기져 해변엔 애곡의 소리가 메아리쳤다. 통곡의 한밤을 지새이고 또 하루, 이틀, 사흘… 그렇게 언제까지나 눈물로 지낼 수만은 없었다. 누군가 주섬주섬 언덕 밑에 오막살이를 짓기 시작하고 누군가는 밭을 갈아 식물을 심고자 들을 헤매이고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도자기 굽는 일, 노인들은 산에 올라 도토를 찾고 젊은이들은 가마를 쌓아 그릇을 굽기 시작했다.

가난한 천민들은 물론이려니와 부유한 권세가일지라도 고작해서 투박한 목기 아니면 칠기밖에 모르던 왜인들에게 조선인들이 만들어 내는 우아한 도자기는 진실로 신기롭고 희귀한 귀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마치도 지어 낸 물건인양 정녕 고아한 아름다움 그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그 재능과 그들이 창조해 낸 아름다운 예술품은 오히려 조선인들을 저 피비린내 나는 수난의 길로 인도했다. 조선인들에 대한 관리들의 냉대와 원주민들의 만행은 그칠 날이 없었다. 걸핏하면 시비를 걸어 조선인들을 두들겨 패고 도자기를 빼앗아 가고 온 부락을 짓부셔 쑥밭을 만들었다. 집 잃고 피흘리고 가난한 핍박 속에 하나 둘 죽어가도 다만 소리없이 통곡할 뿐 하늘 아래 그 어디에 호소할 곳도 없다. 그럴 때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다만 오직 하나 몇 번이고 헐벗고 굶주린 몸 되어 또다시 정처없는 유량의 길을 떠나는 것밖엔….

어느 날, 그 몇 번째 유랑의 길에선가, 저만치 대숲으로 둘러싸인 정겨운 풍치의 언덕이 나타나자 별안간 누군가 외쳤다.
《고향 땅 남원 비슷하다!》
규우슈 남부 가고시마의 한 촌락 나에시로가와, 그들은 비로소 거기에 정착하게 된다. 《옥산궁》이라 하여 사당을 짓고 조상신 단군에게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이제는 그 땅에 뿌리를 내리기로 했다. 간난신고, 지나간 상처와 망향의 슬픔을 이제는 그 땅에 묻어 버리기로 했다. 다시금 도자기를 구어 그나마 호국지책을 마련, 그날 그날 근근이 이어가는 살림살이들이 시작된다. 조국에서 가져온 도토로 만든 백자는 오직 권세가들이 조선인들이 만든 진품 도자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도자기는 곧 그들의 목숨이 걸려 있고 운명을 함께 하는지라 그들은 도자기 제작에 온 정성과 진정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어쩐 일인지 성주로부터 관대한 처분의 명이 내려졌다. 전언을 가지고 온 사자는 큰 선심이라도 쓰는 양 거드름을 피우며 이렇게 말했다.
《나에시로가와의 도자기를 굽는 조선인들도 이제는 성내에 들어와 살도록 하라. 그러면 집도 주겠고 법적으로도 보호를 받게 해줄 것이며…》
그러나 이 전언을 받은 조선인들의 답변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높은 은혜는 감사합니다만 가고시마성에는 결코 가지 않겠습니다.》
《뭣이라구?! 이 배은망덕한 놈들 같으니라구, 벌써 가고시마에는 고려촌이라 해서 조선인들을 살게 하고 있는데 네깟놈들이 어째서 도대체 무슨 이유냐?》
《가고시마에는 주가전이라는 조선인이 산다고 합니다. 그놈은 우리 민족의 배반자요, 우리 조선인들은 민족의 배반자 하고는 결코 같은 하늘 아래 사는 법이 없습니다.》
《이 거지 같은 것들이 주제에 고상한 얘기만 하고 장군의 호의를 무시할 셈이야?!》
조선인들은 수심에 차서 다시 이렇게 말한다.
《고향을 잊을 수가 없나이다.》
《그건 또 무슨 제멋대로의 소리인가. 이 나에시로가와에서 가고시마성까지는 6리밖에 안되는데 여기 살면 고향이 그립지 않고 성주에 가면 고향이 그립단 말인가?!》
《아닙니다. 저기 언덕을 보십시오. 저 언덕은 삼부라가의 언덕이라고 하오. 저 언덕에 올라가면 우리들이 떠나온 동지나해가 보이고 그 수로, 바닷길 저 멀리 조선의 산하가 누워 있오. 우리들은 천운을 만나지 못해 조선의 무덤을 버리고 이 나라에 끌려왔지만 그러나 저 언덕에 서서 제단을 쌓고 선조에 제사를 들면 멀리 조선의 산하를 몸에 느끼고 거기 조국의 잠든 선조의 영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요…》
조선인들은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심당길 일가 외 박씨, 김씨 등 과연 그들은 고향 땅 남원을 닮은 그 곳, 저 멀리 아득한 지형선 너머 조선의 산하가 떠오르는 나에시로가와를 그후 400여 년 세월이 흐른 이날까지 떠나지 않고 있다. 아니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 한생애를 다해 조선의 미술을 예찬하고 흠모해 마지 않았던 미술 학가 야나기무네요시는 이렇게 서슴없이 말했다.
《일본의 문명이 조선의 미에 안겨 탄생했다》라고.
그렇다. 뉘라서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일본이 천연스럽게도 자국의 국보로써 소장하며 자랑하는 대다수의 작품들이 우리 조선 민족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또한 오늘날 그들이 그처럼 자랑스럽게 세계앞에 내놓고 있는 일본의 도예와 그 산업이 다름 아닌 그처럼 슬픔 많고 불행했던 우리 선조들에 의한 것임을….

북한의 《인간문화재》 도예가 임사준 씨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잠시 까마득히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현해탄 저 너머에 가 있었다.
내가 도예가 임사준 씨의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실내엔 사면 벽을 가득채운 작품들이 진열돼 있을 분 아니라 여러 명의 남녀 젊은이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나는 으레히 그들은 선생의 문하생들이려니 그렇게만 짐작해버렸다. 한데 듣고 보니 그들은 모두가 선생의 제자일 뿐 아니라 바로 선생의 자녀손들 이라는 것이다. 한 가정의 하나의 사업, 하나의 이상을 두고 한데 얼려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은 언제 어디서 보아도 아름답고 흐뭇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극단의 개인주의와 더불어 황금만능주의, 경박한 시대풍조 앞에 선조들이 피땀으로 쌓아 올린 유업이나 전통, 뿌리를 박한 시대풍조 앞에 선조들이 피땀으로 쌓아 올린 유업이나 전통, 뿌리를 쉬이 양도해 버리는 현대 사회에서 이 같은 일은 날로 보기 드문 정경의 하나이기에 우선 내게는 퍽이나 인상 깊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같이 자녀 손들에게 자신의 생애의 업을 유산으로 물려주며 그들을 또한 그 무슨 근위대처럼 거느리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현해 내고 있는 그가 그 어느 장군보다 의연하고 행복해 보였다.
특별히 고려청자의 대가로 알려진 임사준 씨 그는 1927년 평안남도 출신, 근년에 회갑을 지낸 노대가라 하겠다. 나는 먼저 그의 반백의 흰 머리와 함께 예술의 한길을 걸으며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온 자만이 지니는 그 어떤 도인의 분위기를 그에게 느끼면서 우리 모두가 겪어 온 한반도 수난사와 더불어 한 예술인의 역정과 그 고뇌를 내 멋대로 읽어 본다. 또한 예술의 소인 중에 소인이 감히 이 같은 대인 앞에 나아가 숙연히 무릎 꿇게 됨에 그 시간이 무한히 기쁘고 소중하고 그리고 행운처럼 여겨졌다. 따라서 나는 그에게 많은 도의 말씀을 받고 싶었다.
그를 한 사람의 예술인으로 운명짓게 하고 오늘의 대성으로 인도해 준 것은 어쩌면 저 슬픈 가난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소학교 졸업 후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이 입학할 수 있는 상업 학교에 응시, 합격되었으나 1백 60원이라는 엄청난 기부금을 내라 하여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었으나 힘에 겨웠다. 그래 건축 설계를 배울 수 있는 직장에 나갔으나 그 또한 마음을 붙일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도마다엔 공업 실험소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로써 남포에 고려청자기 공장이 있었다. 14세의 소년 임사준은 직공으로 들어가 조금씩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다. 도자기 제조 작업은 그에게 여간만 흥미롭지 않았고 오래잖아 그를 매혹케 했다.
그는 보다 많은 것을 보다 깊이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때는 일제 식민지시대, 기술을 누구에게 배운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다. 워낙에 도자기 기술자가 드물기도 했으려니와 그들은 다만 사람을 부리기 위해 부려먹을 수 있을 만큼의 이상을 결코 가르쳐 주지 않았다. 소년은 답답한 심정을 풀기 위해 고적을 찾고 오지 또는 도기 만드는 곳을 찾아 사리원, 홍수, 해주 등 방랑의 길을 떠나기도 했다. 또한 예선인들의 작품을 사숙하기 위해선 박물관 출입도 몇 백 번 했으리라.
소년은 나름대로의 긴 배움의 순례 끝에 어느 날 일본 요업전문학교 출신의 한태익 씨를 비로소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가르침을 달라고 했다. 그의 대답은 퉁명스러웠고 극히 소량의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지만 그나마 스승이 그리웠던 소년에겐 그 평생을 두고 교훈이 돼 주었고 용기를 주는 것이었다.
《이놈아, 보고 하는 거지 배워서 하는가! 달려붙어 배워! 넌 똑똑하니 도자기 해먹을 게다.》
소년이 도토에 손을 대어 4~5년 지나자 비로소 조금씩 기술이 습득되고 날로 도자기의 묘미를 터득케 돌 때쯤 8.15해방을 맞이한다. 그러자 기업소가 문을 닫게 되었다. 종업원들은 스스로 힘을 모아 공장을 유지, 복구하기로 했다. 또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김 주석은 《우리의 고유 문화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교시와 함께 50만 원을 하사해 보내주었다. 그후 다량의 제품을 생간, 홍콩으로 수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과 수년이 못가서 전쟁(6.25동란)이 발발, 공장은 파괴되고 종업원들은 뿔뿔이 헤어져 군 입대를 하게 된다.
1955년 5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청년 임사준은 이제 그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져 평양 미술 대학에 입학 3년간의 수료 과정을 마친 뒤 교편 생활을 하는 한편 그의 본격적 작가 생활이 시작된다. 그의 창작 의욕이 왕성했던 그때 청년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 당시는 감당 못할 정도로 이메지가 떠올라 영필 긋기만 하면 작품이 됐죠. 이발소에서 기다리다가도 탁 떠오르면 내 차례 마다하고 미친 듯 집으로 달려가곤 했죠.》
청자의 명인 임사준. 그는 이제 한 작가로서 국내적으로 얻을 수 있는 온갖 최대의 명예를 한몸에 거두었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높이 평가받는 대작가로 추대되고 있다. 이날이 오기까지 그는 오직 한길. 그 생애 풍우설한 이겨내며 한결같이 도토와 더불어 살아오며 5백여 점의 작품을 빚어 냈다. 그에게 있어서 도자기는 곧 자신의 분신이며 생명체임을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 평양에서 70리 떨어진 곳에 신미리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 솔밭 우거진데 《로》가 있습니다. 도자기 굽기에 앞서 마지막 정성을 다하기 위해 장작패는 일부터 제 자신이 하고 불 때는 것도 자신이 손수 합니다. 그 어떤 신성한 의식을 거생하듯 경건하고 그리고 정결한 마음으로 마지막 작업을 하는 겁니다. 참나무는 숯이 산화되지 않아 소나무 장작이 좋고 도자기 색깔도 좋습니다. 한 번에 백 점 정도를 굽게 되는데 그 시간에 목숨을 건듯 초긴장을 하게 됩니다. 그래 도자기는 곧 제 자식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도자기의 감촉을 너무나 좋아하죠. 그래 남들이 다 불끄고 잠자는 시간에도 홀로 일어나 도자기를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묵상에 잠기다 보면 어느새 동이 터오르곤 합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도인의 경지》라는 것이… 그는 창작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계속 말했다.
《사람이 감동을 잡아쥘 때 예술의 기본이 섭니다. 도자기가 왜 보기 좋고 왜 볼려고 하고 왜 갖고 싶어 하는가. 그것은 창조물이 조형적으로 잘 짜여졌기 때문입니다. 즉 색깔, 형태, 구성 등 다 맞아 떨어질 때 사람의 감정을 뒤흔들어 주는 감동이 옵니다. 하기 때문에 갈대 한두 대만 가지고도 거기에 조형적인 새 질서를 잡아 재창조될 때 감정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하자면 작품 하나를 감상해도, 길섶에 풀잎 하나를 보아도 깊은 사색을 통해 관조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항상 말합니다.》
그는 일본, 독일, 프랑스, 홍콩 등 몇 차례 해외 전시를 갖은 바 있다. 그의 작품이 일본에서 선을 보였을 때 그들은 임사준을 가리켜 《조선의 산국보》라 했고 그의 작품은 일화로 작품당 3백 만엔(2만여 달러)이라는 호가로 매진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 청자 차관이 독일에서 전시됐을 때 그들은 이렇게 절찬해 마지 않았다.
《이제 주전자는 임사준의 이것으로 끝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지만 노대가는 여전히 청년의 겸손과 성실을 지니고 있었다.
《창작가란 언제나 근심을 쌓인 인간입니다. 작품이 잘 되면 그 기쁨, 행복 말할 수 없지만 열 번 스무 번해도 형상 처리가 안될 땐 정말 낙심돼서 입술이 터지고 잠도 안 오고 밥맛도 없지요. 그리고 저 옛 선인들의 작품을 대할 때 신비할 정도로 미적으로 완전하게 해놓은 그 귀신같은 솜씨를 한참보고 있노라면 창작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휴일이면 어린 손녀딸과 함께 대동강에 나아가 낚싯대를 드리우는 것이 취미요, 낙이라고 하는 그와의 접견을 여기서 대략 마치고 나는 그의 작품 진열장으로 안내되었다. 거기엔 과연 그의 노작들 하나하나가 국보인 양 소중히 진열돼 있었다. 그리고 그 작품 한 점 한 점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저마다 그 심오한 및, 오묘한 형태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또한 그 절묘 우아한 작품들로 하여 전시관은 예술의 향기와 빛으로 가득했다. 나는 이 찬란한 미의 향연 앞에 다만 말을 잃고 황홀할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이것이 어찌 임사준 그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만 하겠는가. 이 명작들속엔 일찍이 예지에 빛나고 정서에 뛰어났던 우리 선조들의 얼과 넋이 오늘도 이렇게 맥박치고 숨쉬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의 선조들에겐 고난과 비애가 많았다. 웃음짓고 희락을 누리기보다는 한을 안고 슬픔을 당하고도 다만 조용히 눈물만 삼켜야 하는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또한 세상은 슬플 때 오히려 가장 아름답게 비쳐오는 것, 그 때문인가. 우리 조선 미술이 그 무엇에 비할 바 없이 섬세 우아한 아름다움, 저 애상의 미를 띄고 현세보다는 피안을 그리는 체념의 미, 달관의 미를 담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일까. 저 청자빛이 지고의 고상한 빛을 발하는 것은….
선생님과의 진정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오는 나에게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시인의 노래가 귓전에 울려 왔다.

《나그네여, 무심히 거닐지를 말어라.
그대 발 아래 백제의 기왓장이 깨어질까 두렵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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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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