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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월북 《왕년의 명우》 문예봉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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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13,342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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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에 전문가가 아니고 그 나라의 공민으로서 그 땅에 살아 본 일도 없고 그리고 그 나라의 많은 작품을 대해 보지도 못한 사람이 감히 그 나라의 예술을 말하고 영화를 언급한다면 그것은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아주 위태롭고 또 분수에 넘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국적을 막론하고 영화 예술 그 자체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이 북이건 남이건 우리 조국의 영화 예술에 대하여 무한한 애정을 지니고 격려를 보내고 싶은 한 사람의 영화 애호인으로서 그나름의 감상 같은 것도 없잖아 있지 않겠는가.

지나간 근 반세기, 우리 앞에 전혀 닫혀 있는 그 나라, 마치 이승과 저승을 갈라놓기라도 한듯 천길만길 높은 장벽이 우리 사이에 가로놓였고 저 달나라만큼이나 우리에게서 멀리해 있던 그 나라이다. 그리고 그 장벽, 그 거리, 그 세월을 넘어 우리에게 《참》을 전해 줄 그 어떤 수퍼맨(?)도 통로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실인즉 우리가 그 나라 제반사에 대해 전혀 무지할 뿐 아니라 오해와 편견, 선입견을 지닌 채 또한 만 가지 의혹을 품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나의 경우 내 개인적 배경이 배경인 만큼 내 의혹의 초점은 먼저 그 나라 예술 부분에 겨냥될 수밖에 없었다. 그 어설픈 지식과 선입견을 지닌 채… 실은 우리에게 그 나라를 비추어 보여 준 단 하나의 통로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지나간 40여 년, 그 하나의 통로가 한결같이 비추어 보여 준 그 나라의 참상이라니….

그것은 태초의 역사 이전의 나라인들 그렇게 황량할 수 있으랴. 그리고 함흑 일색일 수 있으랴. 그 언젠가 원자 전쟁이라도 휩쓸고 지나가 세상의 종말이 온들 그렇듯 황폐하고 삭막할 수 있으랴. 그것은 차라리 어느 날 신의 저주를 받아 이 지구에서 떨어져 나간 도깨비 나라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 나라에 어찌 별이 뜨겠느냐. 태양이 비추겠느냐. 풀이 돋아날 수 있으랴. 하물며 그 나라에 문화 예술이 존재하며 그 꽃이 피어날 수 있으랴. 우린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 나라 문화 예술에 대하여 우리가 지닌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의혹이 있을 뿐 일련의 기대도 한가닥 소망도 없었다는 것을….
혼히들 말해 왔다. 공산 진영 사회주의 나라에서의 영화라면 그것은 다만 정치 선전의 도구이며 사상 교육의 매체일 뿐이라고…. 몇 차례인가 그 나라를 방문하고 불과 몇 편이지만 그 나라 영화를 감상해 보았고 그리고 그 나라 예술에 하나의 경전(?)이라 해도 좋을 김정일 저 《영화예술론》도 살펴본 나로서 위의 말들은 일단 사실임을 수긍해 보고 싶다. 그들은 정말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문학과 예술은 우리 당의 힘 있는 사상 교양의 무기이다.》 (김정일 저 영화예술론 P122)
참 예술이라면 개인의 독자적 창의성을 그 생명으로 여겨 온 우리네 개념으로선 해득하기 어려운 이론이며 솔직히 거부감마저 불러일으키는 주의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과연 그렇다면 다만 당의 사상과 정책을 대변하는 그런 문학 영화 예술이라면 그 얼마나 메마르고 차겁고 무미건조할 것인가. 그리고 당이 인민에게 전달하고자 하며 그들을 교양하고자 하는 그 당의 사상과 정책이란 또 어떠한 내용의 것인지, 다만 사상 전달을 수행하는 데 그치는 예술인들이라면 그들은 과연 참 예술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 또한 그들에게 진정한 예술인으로서의 기쁨과 보람 같은 것이 있을 것인지…. 나는 몹시 착찹한 심정이었고 의문도 많았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었다. 북한 사람들에게 그같이 꿈이 많을 줄이야. 그들은 참으로 원대하고 찬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저 공산주의 이상국이라는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느 날엔가 그 유토피아에 뒤이어 도달하기 위해 총진군을 하고 있었다. 그 하나가 《계속적인 혁명》이요 다른 하나가 《인간개조》라는 두 갈래의 길을 통해서….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저 공산주의 이상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나는 다시금 놀란다. 그들이 말하는 그 나라는 너무도 성서적 내용을 그대로 닮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마치 성서를 빌어 외우듯 이렇게 말한다.
《그 나라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며…》,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사는 오직 정의, 평등, 사랑이 다스리는 사회라고.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나는 언제나 성서의 이런저런 귀절이 떠오르곤 한다. 그것은 마치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거한다》는 이사야(11:6이하)말씀 같고 《정의가 하수같이 흐른다》는 아모스(6:24이하)말씀 그리고 평등사회를 구가한 듯한 누가복음(1:46이하) 성모마리아의 찬가를 생각케 하며 또한 네 것 내 것이 없고 오직 천국을 그리며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하여 그들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순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저 사도행전 초대 교회의 아름답고 숭고한 사회, 교인들과 사도들을 연상케 한다.
그들은 또 말한다. 아니 그나라 《당》이 말한다. 과연 그러한 사회 그러한 나라가 마침내 이 지상에 실현되고 또 우리 모두가 가기에 도달하자면 그 나라의 시민으로 합당한 《고상한 공산주의적 덕성과 풍모》를 갖춘 인간들로 개조돼야 한다고. 그러므로 부단한 사상 교양을 해야 한다고. 그리고 《당》은 말한다.
《영화 예술은 대중 교양의 가장 힘있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당보의 사설과 같이 호소성이 높아야 하며 현실보다 앞서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혁명투쟁의 매단계에서 동원적 역할을 해야 한다(김일성 주석)》라고.
그러면 그들 영화 작품 속엔 무엇을 어떻게 담아내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그들 생활의 교과서이며 사상 강연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 즉 그들의 벅찬 혁명의 길을 계속 해쳐나가야 하는 인민들에게 그들은 영화를 통하여 고무하고 위로하며 또한 문제를 풀어 주며 한편 그들을 높은 정신 세계로 이끌어 올려 주고자 한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과서와 사상 강연 혹은 도덕 강좌가 전혀 냉냉 하거나 진부하지 않은 것은 그 무슨 까닭에서인가. 뜻밖에도 그들 작품을 감상할 때 오히려 뜨거운 그 무엇이 가슴에 벅차 오르고 돌아서 나올 땐 언제나 눈시울이 흥건히 젖어서 자리를 뜨게 되는 것은 그 무슨 연유인가. 그들은 언제나 영화 속에서 이렇게 역설한다.
《개인주의, 이기주의 금 만능주의를 버리라. 대신 인간 본래의 존엄을 되찾고 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라.》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 어떤 희생의 어린양을 사랑의 교사고 세우고 그들이 이상하는 이간 전형으로 내세워 그의 높은 정신 세계와 아름답고 숭고한 삶을 그려 보여 줌으로써 고나객으로 하여금 마음의 정화를 체험케 하고 스스로의 양심과 생을 반추해 보도록 한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인간의 원죄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중생하기를 종요해 온다. 하지만 그 권유와 설득이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또 그 무슨 비법에 의한 것인가. 그 또한 예기치 못했던 일, 그들 영화마다에 넘치는 뜨거운 인간애, 높은 도덕성, 언제나 차원 높이 승화되는 남녀의 푸라토닉한 사랑, 생에 대한 열정과 신념, 목숨도 아끼지 않는 불붙는 애국 애족의 마음 그리고 투쟁, 그리고 수려한 자연, 다감한 서정적 배경 음악, 회화적인 화면 구성, 다이나믹하게 살아 움직이는 촬영, 결코 매너리즘을 볼 수 없는 연기자들의 저 심혈을 다하는 참신하고 진지한 그래서 언제나 초년병 같은 신선한 연기…. 화면에 담겨지지 않는 이 모든 것들이 결코 세계 수준에 뒤지지 않는 그윽한 예술적 향기로 느껴지는 것은 과연 고도의 기술을 동반하기 때문인가.
《꽃파는 처녀》, 《돌아오지 않는 밀사》, 《조선의 별》, 《소금》, 《피바다》, 《보증》, 《나의 행복》, 《봄날의 눈석이》, 《옥비녀》, 그리고 《평범한 사람》, 《자신에게 물어 보라》, 《도라지 꽃》등 그 나라의 작품을 보면 나는 잃었던 옛 전설을 되찾는 것 같기도 하고 저 외롭고 피로한 탕자의 긴 방랑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마음의 고향 집을 찾은 것도 같다. 그것은 왜냐면 이렇듯 봄비를 맞는 듯 촉촉히 가슴에 스며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야기들이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 버린 지 꽤 오래인 듯 하니 말이다.
우리나라 영화60년사엔 파란만장한 그 비화도 많겠으나 그 60년을 거슬러 길이길이 빛내는 참 예술가 명연기자들도 적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들은 그 한세대에 있어서 만인의 연인이 되고 때로 우상이 되기도 했으리라. 그럴만치 영화 예술은 우리 생애에 다정한 길동무가 돼 주었던 것도 사실이 아니겠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또한 생생한 드라마를 연출하며 살고 있으니….
무성 영화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영화 초창기 1930년대, 우리나라엔 온 세상에 흠모를 받던 한 여우가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데뷰하자 뭇 사람, 뭇 청년들의 연인이 되었다. 그녀의 첫 작품인 나운규 씨와 더불어 출연한 《임자없는 나룻배》, 《장화홍련전》, 그리고 《아리랑 고래》 등에서 보여 준 그녀의 미모와 천재적 연기력은 뭇 사람들을 매료해 버렸다. 그러나 때는 일제 하 대동아 전쟁 시기, 그녀는 일제의 선동적 영화에 동원되었다. 아들을 《가미가제》의 기수로 바치는 어머니 역을 《태양의 아들》에서, 왜놈에게 시집가는 조선 여인의 역할을 《사랑과 맹서》에서 연기해 보였다.
조선의 청년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항의의 편지가 쏟아져 왔다. 거리, 거리에서 만나는 청년마다 또다시 그런 영화에 출연할 것인가에 대해 그들은 노기 어린 질문을 던져 왔다. 삼천리 방방곡곡 감격의 물결을 몰고 온 8.15해방, 그러나 민족 양심을 가진 일부 예술인들에게 그것은 진정한 해방이 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미군정 고관들로부터 위안부가 돼 주도록 거금의 흥정이 들어오는가 하면 그녀가 서는 무대에 수류탄이 날아들고 다이나마이트가 장치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미군정 수배의 대상이 되었다. 어느 날 조선일보에 그녀의 은퇴 선언이 실리었다. 그후 그녀의 종적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남은 것은 그녀에 대한 전설적 이야기와 그리움뿐….
우리에게 있어선 왕년의 명우 문예봉 여사, 그러나 그녀는 결코 왕년의 명우가 아니었다. 1948년 월북한 이래 그녀는 그 누구 보다도 활기에 찬 연기 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그 옛날 옛적에 우리나라 은막의 여왕이었다는 문예봉 여사, 나는 너무나 많이 그 전설 같은 이름을 들어왔기에 내가 그 땅에 첫발을 들이던 그날부터 그녀를 만나 보기 원했다. 마치 미지의 그 땅에 묻혀 있을 그 무슨 국보적 골동품(?)이라도 찾아 보고 싶은 기대와 불안한 마음에서 나는 그녀를 만나 보게 될 것을 초초히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제2차 방문 시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안에 있는 접대실, 그녀 외에 다른 여러분의 영화인들과 자리를 함계한 장소에서 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안내인으로부터 소개를 받기에 앞서 나는 먼저 내 스스로 여사를 찾아 보기로 했다. 청장년의 영화인들 가운데 약간의 빛깔을 넣은 안경 넘어로 어느 부인이 다사로운 미소로 나를 반기고 있었다. 나 또한 그녀에게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그녀를 문예봉 여사로 보기엔 너무나 젊지 않은가. 그녀는 30년대 배우, 족히 칠순을 넘었으리라 했다. 그녀를 칠순의 여인으로 보기엔 그녀의 미모와 젊음이 너무도 고이 보존돼 있는 감이다. 나는 잠시 그녀를 확인함에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조심스레 그녀를 살펴본다. 그녀가 출연했던 신파극 못지 않게 불행하고 쓰라린 소녀기를 지냈다는 그녀, 그 뛰어난 미모로 해서 몇 번이고 마수의 손이 뻗쳐 왔으나 그 때마다 단호히 물리쳐 온 그녀, 남달리 민족 의식이 불타던 그 청춘이었기에 스스로 위험과 고난의 길에 몸을 던져온 그녀, 그녀의 인생 노정이 결코 평탄치 않았으련만 그녀는 이렇게 곱게곱게 늙어 왔던가, 그리고 이렇게 존엄에 찬 것이었던가. 그녀는 칠순을 넘었으나 그 젊은 날의 미모를 충분히 그려볼 수 있을 만큼 그 유순하고 덕스러운 조선 여인의 고유한 미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면, 이 여인에게서 그녀가 만인을 울리고 웃기는 한 연기자라는 느낌보다는 그 어느 대학 철학 교수라도 만난 듯한 그 무엔가 엄격하고 존귀한 지성의 빛 같은 것이 또한 느껴져 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내 이 전설의 여인을 두 번째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지난해 여름(1989),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이다. 황송하게도 여사편에서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 주셨다. 그녀는 정숙하게 머리를 틀어올리고 엷은 물색 계통의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오셨다. 내가 어르신네를 왕림케 한 데 대해 몹시 송구해 하자 그녀는 다정하게 내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한다.
《나야 내 집에 있는 사람이고 홍 선생께선 만리를 찾아오신 분인데 무슨 말이야.》
그녀의 손이 따습게 느껴져 왔다. 문예봉 여사, 나는 이제야말로 그녀의 영화가 아닌 그녀 자신의 산 드라마를 들을 수 있으리라. 그녀는 흘러간 자기 인생에 대해 초연한 듯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5~6세 가량 되었을 때 어느 날의 기억이다. 조부님께서 땅을 치며 통곡을 하시는 것이었다.
《이 집안 망했구나! 이 집안 망했어!》
아마도 그날은 문씨 가문의 가산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마지막 날이었던가 보다. 9세 때 제사 경문을 외어대던 총명한 아들이라 애지중지 키워온 그 아들이 이렇듯 망나니가 되고 불효자식이 될 줄이야. 예술을 한답시고 서울을 오르락내리락 하던 아들이 부친의 도장을 위조, 가산을 하나씩, 둘씩 탕진해 버린 것이다. 그뿐인가 14세 소녀의 몸으로 9살 난 코흘리개 신랑에게 시집을 와 이날까지 독수공방 모진 시집살이만 해온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난데없이 이혼해 줄 것을 요구해 왔다. 그 철모르던 소녀기로부터 시작된 그녀의 파란만장한 형극의 인생길은 어쩜 그 부친의 타고난 예술적 소양과 방탕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까. 하루 아침에 올 데갈 데 없어진 어머니, 전형적인 봉건 사회의 희생물인 어머니는 딸의 손목을 잡고 눈물을 뿌리며 이 집 저 집 품팔이 일감을 찾아나서야 했다.
13세 나던 해의 일이다. 배운 것이 없으나 영리하고 미인이었던 어머니에게 재혼 눈치가 보였다. 가슴이 무너져내려 왔다. 홀로 고민하다 못해 자살을 궁리하고 있던 중 어느 날 어머니를 데려가겠다는 장본인이 나타났다. 딸은 더 이상 슬픔과 분노를 숨길 수 없었다. 그만 걷잡을 수 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딸을 위로하고 타이르기는커녕 차라리 자기가 목을 메고 죽어 버리겠다고 법석을 해댔다.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것이 어머니와 딸의 마지막 장면이며 영원한 이별의 장소가 되었다. 손녀딸을 데리러 온 할아버지와 함께 그 어머니를 떠나올 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서 있는 어머니를 딸은 단 한 번도 되돌아보지 않았다.
그나마 소학교조차 중도에 그치고 예봉은 제사 공장의 직공으로 부잣집 아이보기로 전전하며 비록 자신은 멸시를 당하고 눈칫밥을 얻어 먹을 망정 그 노임으로 동생들의 학비를 대주며 소녀 가장 노릇을 하랴 고달픈 소녀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도 자식들도 내버린 채 극단의 배우로서 떠돌던 아버지가 때 마침 공연차 함흠에 왔다가 불현 듯이 딸을 찾아온 것이다. 바람 따라 나타나 새삼 공부를 시켜 주겠다는 아버지, 하지만 예봉은 그를 따라 나서기로 했다. 서울로 온 예봉은 곧 배우 양성소에 입학을 하게 된다. 그리고 15세 소녀의 몸으로 그녀는 연기자로서의 새 삶이 시작된다.
그런데 세상에는 아주 특수하고 기이한 성품을 지닌 자가 있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본능과 이성, 정상과 비정상이, 천사와 악마가 수시로 교체하며 그 영혼을 점령, 지배하게 됨으로써 그를 때로 악마로 혹은 천사로 그를 정상인으로 혹은 비정상인으로 변신케 한다. 하기사 이런 이율배반적인 모순을 그 누구인들 조금씩 지니지 않았겠는가만은 그들에겐 좀 다른 점이 있는 듯 싶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천사의 지배를 받는 시간이 되면 또한 철두철미 악마의 종노릇을 연출한다. 하므로 그 숨길 수 없는 선과 악, 본능과 이성, 정상과 비정상으로 해서 그들은 곧잘 주위 사람들을 혼돈케 하고 때로는 일종에 정신장애자로 판정되는 불행을 면치 못한다. 흔치 않은 일이나 대체로 천재형들에게서 종종 보는 이 같은 이상 성격은 당시 이름 있는 연극인이었고 예봉의 부친이었던 문수일 씨, 혹시나 그가 바로 이런 특수한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에게 있어서 예봉은 둘도 없는 사랑스러운 딸이었고 때론 그에게 있어서의 예봉은 그의 피와 살을 나누어 준 자식이 아니라 다만 그의 욕망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또는 자본으로 보였는지 모른다. 예봉이 무대에 서게 되자 그녀의 빼어난 미모는 곧 세인의 이목을 끌었고 장안에 평판이 자자했다. 그녀의 부친은 때를 만난 듯 이 딸을 앞세워 돈벌이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뿐이 아니다. 이 어린 나이의 꽃봉오리를 두고 탐을 내는 인간 늑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야, 이 쥣뿔두 없는 것이 네 주제에 웬 콧대야! 널 금방석에 들어 앉혀 평생 호강호강 시켜 주겠다는데… 에잇, 독한 년!》
여기저기서 부호들의 첩으로 들어와 달라는 청이 들어올 때마다 아버지와 그의 정부는 어떻게든 딸을 설득하여 그 일을 성사시키지 못해 안달하며 펄펄 뛰는 것이었다. 그것은 왜, 딸을 내어주기만 하면 그 아버지에게 한몫을 뚝 떼어 주리라는 꼬리표가 언제나 그 조건으로 달려왔으니까…. 언젠가는 철두철미하게 묵비권을 행사, 끝까지 항거하는 딸을 굴복시키기 위해 일주일 동안이나 감금, 설득 작전을 폈으나 끝내 실패로 돌아간 일도 있다.
대동아 전쟁 말기, 일제가 그 최후의 발악을 하던 시기, 문예봉이 일제의 선동 영화에 출연했다 해서 세인들은 그녀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그것은 에봉을 아끼고 사랑한 나머지 저지른 성급하고 아량없는 오판이었다. 그 한시대에 친일파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 가운데 그 누가 자유를 누렸던고, 오직 순국 열사가 되어 죽음으로써 자유를 주린 자 아니면…. 그들의 출연 요구를 몇 번이고 《보이콧》하자 그녀 앞에 떨어진 건 가차없는 체포 영장, 그녀는 감옥으로 가듯 촬영장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굳게굳게 결심을 했다. 다시는 그와 같은 민족 양심에 위배되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그러나 그렇게 하자면 길은 오직 하나 《은퇴 선언》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녀는 결심대로 과감히 실천에 옮겼다. 그 화려한 인기도 명성도 미련없이 내어던지고….
세상은 또다시 뒤집혔다. 1945년 8.15해방. 36년 일제의 식민 정책이 막을 내리고 그 압박과 쇠사슬에 풀려난 조선 땅은 환회와 감격으로 들끓었다. 줄곧 일경에 쫓기며 은둔 생활을 해오던 그녀 또한 기쁘기 한량없었다. 이제야말로 떳떳이 나아가 그녀의 숙원이었던 우리의 민족 영화를 만들고 저 슬기롭고 정숙한 전통적 우리 조선 여인의 참 모습을 부가해 보리라. 그녀는 다시 소망을 안고 창조적 열정을 불태우고자 했다. 그녀는 몇몇 동지들과 함께 다시 무대에 섰다.
그런데 8.15해방, 그것은 과연 우리 조선 민족에게 참으로 자유와 민족성을 되돌려주었던가. 여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겨우 범의 굴에서 벗어나자 이리를 만난 격이었다.》라고.
예술가인 그녀에게 거금을 줄 터이니 미 장교 클럽에 나와 웃음을 팔라고 요구해 오는가하면 걸핏하면 그녀가 서는 무대에 폭탄이 날아들어 그 몇 번이나 구사일생을 했던가…. 그녀를 포함한 몇몇 진보적이며 민족주의적 예술인들을 가리켜 《좌익 예술인들》이라 오명을 붙이고 갖은 핍박을 다 가해왔다. 진정한 자유가 없는 그들이 민족 예술을 꽃피울 수 없음은 물론 이려니와 운명처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가난 또한 면할 길이 있었겠는가. 지방 순회 공연 때면 극단의 여관비를 물지 못해 문예보이 인질로 붙들리는 일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촬영장이라고 사용하는 일인듯이 버리고 간 창고는 다만 판자 몇 개 세워 놓은 격, 겨울이면 살바람이 몰아치고 온 몸이 얼어들어 왔다.
《장화홍련전》을 제작할 때의 회상이다. 장화가 계모에게 시달리다 모해 한을 품고 몸을 던지는 장면을 위해 실내에 파놓은 살얼음이 깔린 옅은 못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그것도 전신을 다갔다 내야 했다. 그녀는 순간 자신이 곧 장화가 된 양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온몸이 젖어서 물에서 헤어 나왔으나 몸을 녹일 만한 모닥불 하나 따끈한 물 한 모금 마련돼 있지 않았다. 그날 밤이 깊도록 작업을 한 뒤 그 젖은 몸, 꽁꽁 얼어붙은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집이락 돌아오긴 했으나 대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다. 왜 그때에 그녀가 가장 무서워한 존재란 저 산주에 범도 사자도 일경도 아니다. 매일같이 밀린 방세를 독촉해대며 방을 비워 달라 으름짱을 놓는 집주인이었다. 대문 소리로해서 집주인을 깨워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문밖에 선 채 겨울밤 모진 추위 속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도 형편은 조금이남 펴지기는커녕 날로 악화되기만 했다. 그나마 헛간 같은 촬영장이 미군에게 압수되었다. 그날그날 끼니가 떨어질 때마다 한 권 두 권 내다 팔아먹던 책마저 이젠 동이나고 극작가인 사랑하는 남편이 폐결핵으로 몸져누웠다. 이제는 올 데까지 다 온것이다. 이판사판 이제 남은 일은 단 하나 당국에 대하여 항의 성명을 발표하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행동을 취하기로 했다.
《우리 예술인들에게도 설 땅을 달라! 우리 예술인들에게도 살 길을 열어달라!》
그러나 당시 그러한 항변, 그러한 투쟁을 받아 줄 세상이, 당국이 그 어디에 있더란 말인가. 결구 그들이 허공을 향해 부르짖는 호소는 관철되기는 커녕 오히려 큰 죄목이 되어 돌아왔다. 그녀는 또다시 경찰에 추적을 당하며 어린 것들을 데리고 야간도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
1948년 이름 봄, 북으로부터 세 번째의 사람이 다녀갔다. 그리고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서자, 더이상 한 발작의 외세 침입도 용납치 않는 그 땅, 오로지 우리 한민족의 얼과 순수 민족 문화를 꽃피우고자 하는 그 나라로 가자. 그것은 어쩜 생애 최대의 모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세상 그 어디인들 지나온 세월 겪어온 고난의 길 그보다 더 한 곳이란 이 지상에 다시 없을 것이니…. 그녀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알지 못할 새 힘, 새 용기가 솟는 듯도 했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변장을 하고 어린 것들과 함께 넘어오는 38선은 곧 생과 사의 분계선을 넘는 듯 몇 번이고 위기의 순간을 넘겨야 했다. 더욱이 철없는 어린 것들 때문에 그 몇 번이나 들통이 날뻔 했는지 줄곧 이마의 식은 땀을 닦아야 했다. 마침내 경계선을 넘었을 때 들려온 《김일성 장군의 노래》, 《이젠 살았다》 싶었던 그때의 안도감, 그 감격을 여사는 평생토록 잊지 못한다.
그것은 1948년 초봄, 그녀를 맞이한 북반부 조국은 온통 화사한 봄의 정령으로 가득했고 만신창이 몸을 이끌고 찾아간 그녀에게 그것은 과연 고향집 어머니 품속 같은 그렇듯 따사롭고 포근한 것이었다. 어린 것들과 함께 피난짐을 풀고 불과 수일이 못돼서 있었던 김 주석과의 첫 상봉의 그날 또한 그녀의 한생에 있어서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때마침 촬영소에 나온 김 주석이 그녀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김 주석은 다정스레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래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소. 하여튼 잘 왔습니다. 문예봉 동무가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나는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우리 함께 우리나라 영화를 추켜세워 봅시다.》
그녀는 다시금 몸둘 바를 모르고 황송할 뿐이다.
《그래 38선은 큰 고생 없이 넘었습니까?》
《네》
《그거 다행입니다. 아이들이 몇입니까?》
《네 아이 입니다》
《학교에는 모두 들어갔습니까?》
《네, 다 들어갔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합디까?》
《네, 뛰고… 춤을 추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거 참 잘되었습니다. 아이들이 기뻐해야 집안에 봄바람이 돌지요.》
김 주석과의 불과 몇 마디 대화 가운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좀전에 어려움과 긴장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마치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집에 자애로운 친정 아버지라도 대하는 듯 얼어 붙었던 그녀 가슴에 봄볕 간은 따사로움과 희열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말한다. 해방 전 일제 시대의 출연 작품 《임자없는 나룻배》가 바로 그렇듯 설움 많던 당시가 자신의 신세와 같은 것이었다면 해방 후 북한에서 첫 작품 《내고향》 또한 비로소 새의 의미와 보람을 찾은 자신의 모습 같다고….
그녀는 과연 북한을 찾아와 비로소 한 예술인으로서의 뜻과 보람을 찾은 것일까. 그녀 심중엔 언제나 갈망해 오던 한 소원이 있었다. 그것은 언제나 한 번 민족적 작품에 우리 조선 여인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덕성을 부가 해 보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월북하자 처음 맡겨진 작품이 《내고향》. 그녀는 이 작품 속에서 항일유격대에 입대하게 되는 청년을 사모하는 애띠고 청순한 소녀 역을 해내야 했다. 그녀는 거울을 들어다보았다. 어느사이 30고개를 넘어 선 나이다. 이미 30을 넘어선 여인이 10대 혹은 20대의 처녀 역을 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소원을 이뤄보지 못한 채 다만 세파에 시달리며 30을 넘어선 것이 다시금 슬프게 느껴져 왔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다져 먹기로 했다. 인민을 복무하기 위해서라면 젊어지자, 얼마든지 젊어지자, 그러나 결코 화장술로써가 아니라 가슴속 불붙는 신념과 함께 주인공의 정신 세계를 침투함으로써 젊음을 재현하고 청춘 기백을 되찾으리라. 그녀는 자신감을 가지고 카메라 앞에 섰다. 북한 개국 첫 예술 영화 《내고향》이 완성되었을 때 김 주석은 이렇게 말했다.
《동무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셨오. 처음으로 만든 예술 영화인데 이만하면 대단하오.》
그리고 그는 특별히 여주인공 문예봉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빨치산 처녀》, 《성장의 길에서》, 《다시 찾은 이름》 등에서 청순한 처녀 역할을 맡아 해내었다. 그녀는 말했다. 《한생을 통해 시들 줄 모르는 청춘의 열정과 기백을 부어 주신 분은 바로 김 주석입니다. 오늘날 내가 있게 된 것은 오직 김 주석의 영명하신 이끄심과 끊임없는 고무와 온정의 결과입니다.》라고. 1952년 북한 최초의 공훈배우가 되었고, 다시 최고의 영예인 인민배우로 추대된 그녀는 월북 이후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에 대한 열정으로 60여 편의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현7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현역 연기자일 뿐 아니라 평양 영화대학 교수로 출강, 후진 양성에 봉직하고 있는 그녀는 4남매의 13손자들을 거느린 대가정의 어머니이다.
《나는 하루도 책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아요.》
이렇게 독서를 사랑하고 독서를 강조하는 그녀, 그녀는 때때로 책장을 덮고 만가지 고난과 슬픔으로 점철되었던 지나날, 그녀의 남녘 땅에서의 반생을 회상해 볼때가 있다. 그리고 두고온 옛 친구들, 서월영, 김일해, 전옥, 신일순 등 왕년의 여우들을 그리워하며 때로 그들이 염려스러울 때가 없지 않다. 왜냐하면 행여 그들이 자신의 예술성이나 사상을 피지 못한 채 다만 자본가 앞에 황금의 노예나 한갖 유흥의 희생물로 스러져 버리지나 않았느가고….
그렇다면 참 자유란 무엇을 뜻하느가. 그녀에게 찬서리가 내린 듯 위엄이 서리었다.
《칼은 육체를 죽이고 돈은 정신을 죽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 자유의 개념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재물이 아니고 인간입니다. 그리고 인간답게 남는다는 것은 자기 민족과 나라 위해 얼마나 자신을 헌신하며 봉사했는가 그것입니다.》
전설의 여인, 우리의 민족배우 문예봉, 그녀는 이렇게 마지막 말을 매듭했다.
《인민에게 복무하고 수령님께 보은하기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을, 내 생의 마지막 숨지는 그 순간까지 카메라 앞에 서서 생명의 불꽃을 태우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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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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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문예봉선생님은 한때 친일인사로 친일인명사전에도 나왔던 사람인데....!!!! 대한민국 남녘이나 북녘이나 친일파는 척결해야 할 대상임~!!!! 근데 문예봉선생님은 운좋게도 북녘에서도 배우활동을 하셨으니깐요~!!!! 제가 문예봉선생님 꽃다운 스무살시절의 사진도 봤지만 그렇게 미인은 아니더군요?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대한민국 남녘영화계는 좇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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