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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동포 귀국 영화인 김윤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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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31,432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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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는 아침이면 각기 직장으로 출근했다가 해질녘이 되어야만 돌아오셨다. 그래서 우리 남매는 온종일 가정부 언니와 더불어 지내야 했다. 동생은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한 때이고 누나인 나는 제법 뜰안을 맴돌며 꽃을 따 모으고 어머니가 심어 놓으신 호박넝쿨을 새끼 호박을 따 가지고 소꼽놀이를 하던 때이다. 그러나 엄마 아빠가 돌아오실 때까지의 하루는 참으로 길고 긴 것이었다. 우리는 곧잘 가정부 언니를 붙들고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성화를 해댔다. 그러면 언니는 갖가지 빛깔을 색종이로 성냥개비만한 꼬마 인형들을 만들어 가지고 즉흥적(?)으로 스토리를 빚어가며 인형극을 상영해 주었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도 쉬이 그 동화 속에 빠져들어 넋을 놓으며 듣곤 했는데 이야기의 절반쯤 가면 천성이 낙천적이며 순둥이었던 동생은 어느새 쌕쌕 잠이 들어 보리곤 했다. 말갛게 잊어 버린 그때의 숱한 이야기들 가운데 그나마 지금도 추억에 남은 어느 날 이야기의 서두 한 조각이 생각났다.

《옛날에 옛날에 어느 마을에 4형제 살았단다. 4형제가 하루는 동구 밖에 십자로에 나아가 모의를 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이런 시골에 묻혀 있을게 아니라 각자 흩어져서 먼 이국 땅에 나아가 일하고 공부하고 돈을 모아 성공해 가지고 돌아오자. 그러니 첫째는 동쪽으로, 둘째는 서쪽, 셋째는 남쪽 그리고 막내는 북쪽으로 각기 행복을 찾아 나선다 》

나는 귀국 재일 동포 영화인 김윤홍 씨를 만났을 때 왜인지 또 한 사람 재일동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한 사람은 북반부 조국을 찾아온 청년 김윤홍 씨이며 다른 한사람은 남반부 조국을 찾아온 청년 서승 씨이다. 그들은 꼭같이 위의 동화처럼 그 어디엔가 있을 행복을 찾아서 한 사람은 북으로 한 사람은 남으로 찾아나선 것이다. 그런데 행복을 찾고 성공하기 위해 고향에서 타향으로 나아간 동화와 달리 반대로 타향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동화 속 형제들이 성공과 행복이 산 넘어 저 멀리 타향에 있을 것으로 믿는 것과는 반대로 이들은 고향 땅 내 조국만이 그들이 찾는 참 행복과 성공을 마련해 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양 굳게 믿었던 것이 아닐까. 그들은 비록 일본 땅에서 태어났으나 그 땅은 내 나라 내 조국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모님 또한 그 땅에 살고 싶어 사는 것이 아니요 고향 땅 버리고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 땅에서 천대, 멸시, 차별받으며 살고 있는 그들은 다만 치욕적인 역사의 희생물이라는 것도 자각하게 되었다. 의무만 있고 권리도 자산도 인간의 존엄도 없는 그 땅에서 언제까지나 헛된 삶의 투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청년 서승은 그 언제부터인가 꿈을 꾸게 되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산수경계도 아름다운 내 나라, 내 조국, 일가친척, 동족끼리 다만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의지하며 오손도손 사는 나라, 그래서 언제라도 달려가면 한품에 받아 안아 줄 내 조국, 5천 년 규구한 역사를 지닌 자랑스런 내 나라가 저 멀리 현해탄 건너에 있음을 . 하기 때문에 《마늘내 나는 조센징》 손가락질, 따돌림, 서름받아도 승의 가슴은 바위처럼 뿌듯할 수 있었다. 승은 어느 날 문득 결심을 했다. 조국에 유학을 떠나기로 . 조국에 가서 한 번 맘껏 어깨를 펴고 공부해 보리라. 그리곤 조국의 어느 산간 시골 학교의 교사가 되어 내 조국 어린 것들을 가르쳐 보리라. 그리고 또머잖은 장래엔 조국의 아릿다운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하리라. 그리해서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면 곧이어 부모양친 모셔다 효도하며 행복한 나날을 살리라.
정녕 다시는 냉대, 차별없는 그 땅에서 . 승의 꿈은 오뉴월 구름 궁전처럼 마냥 피어 올랐다. 그런데 문제는 유학을 가되 북과 남 어느쪽을 택할 것인가. 북도 남도 내 조국이 아닌가. 선택하는 일이 망설여졌다. 그래서 승은 일차적으로 현지답사 겸 첫 모국 방문을 했다. 먼저 북에 그리고 남에. 아무리 곰곰 생각해 봐도 북도 남도 자랑스럽기만한 그리고 수중한 동일한 내 조국, 하나의 내 조국이다. 결국 승으로 하여금 남을 택하기로 결정짓게 한 데는 오직 하나의 이유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부모님의 고향 따이며 대대로 내려오는 서씨 가문의 서산이 남도에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승이 유학을 떠나던 날, 온 집안은 자랑과 기쁨에 들떴고 소망에 부풀었다. 승은 불과 1시간남짓 짧은 비행이지만 숱한 외국 여객기를 마다하고 굳이 조국비행기인 KAL기를 택하겠다고 고집했다. 서울에서의 승의 캠퍼스 생활은 물 만난 고기떼 처럼 마냥 즐겁고 대학가의 물오른 푸른 나무들처럼 꿈과 소망에 찬 것이었다. 방학이면 집에 돌아와 어머니가 만들어 준 승이 가장 좋아하는 카레라이스를 먹으며 서울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아들은 행복했고 어머니는 그 아들이 그저 자랑스럽고 대견해 보이기만 했다. 그리곤 그런 방학이 몇 번인가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그날 세상은 아무도 없었다는 듯 태평세월 평시대로 돌아가고 거리에 사람들은 무심히 오고가는데 서씨 집안엔 억장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 일어났다. 책을 들고 등교하려던 승이의 두 손목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쇠고랑이 채워졌고 자신도 모르는 죄목에 의해 수의가 입혀졌다. 그리고 전국 각 신문마다에는 이렇게 대문짝만한 글씨들이 일제히 나붙었다.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
소내 흉악범들의 손을 빌어 가하는 고문은 진실로 야만적이고 잔혹한 것이었다. 고문을 견디다 못해 승은 불덩이를 뒤입어 쓰고 자살을 기도했다. 귀가 떨어져 나가고 입이 붙어 버렸다. 꽃다운 20대 미남 청년은 흡사 괴물을 연상케 하는 험상은 모습으로 변했다. 승은 차라리 죽음을 택할망정 허위 자백, 전향을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왜! 승은 말한다.
《나는 전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민족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 징역이 선고되었다. 무죄한 내 아들, 결백한 내 아들 살려달라. 어머니는 여기 가서 울고 저기 가서 호소하며 10년 옥바라지. 60여 회 현해탄을 왈래하며 뿌린 눈물, 울고 또 울러 그 끝에는 눈물의 씨가 말랐다. 그리고 쓰러지셨다. 어머니는 끝내 아들이 출소하는 아침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다.
20대의 새파란 젊은이로 옥중 투쟁 생활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는 두 손이 묶인 채 어느 날 이렇게 울부짖고 있다.
《나는 처분 대상이 아니라 한사람의 인간이다. 웃음도 있고 눈물도 있고 사랑도 미움도 욕망도 호기심도 있다. 연약한 한사람의 인간이다. 죠루주루오의 그림과 윌리암브레이크의 시를 사랑하고 J.S. 바하의 베토벤의 음악을 듣기를 원하고 이 삭막한 감방을 증오를 가지고 슬퍼하는 한사람의 인간이다. 목구멍이 터지도록 한국 가요를 부르고 싶고 판소리 창극을 마음껏 감상하고 싶고, 이문구 씨의 소설에 울고 또 웃는 인간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치미는 상념으로 때로 잠못 이루는 인간이다. 16년간의 철창살이를 옛 친구들, 형제들을 그리워 살아왔으며 때로는 어둡고 뜨거운 짐승 같은 욕망에 몸을 불태워 번민하면서도 한사람의 여성을 소년처럼 떨리는 가슴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다. 나면서부터 아이를 좋아하며 언제나 소학교 교사를 꿈꾸어 왔으며 죽기까지 이를 그리워 꿈꾸며 살아갈 한사람의 인간이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이 씌어지고 있는 이 시간에도 민족과 진실 앞에 스스로 《희생의 어린 양》이 되어 영하의 고독한 감방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렇게 독백을 하리라.
《이 나의 고통, 부자유는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민족 전체의 문제이다》라고.
(서승 씨는 1972년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으로 연루되어 마지막으로 대전교도소에서 18년 10개월의 형을 살고 1990년 2월 28일 출소했다. 1992년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는 버클리대학에서 사회학 연구원으로 있으며 한국고문희생자원호회(STIK) 집행위원장으로 있다. ─편집자주)

내가 재일 교포 2제 영화인 김윤홍(43세)씨를 처음 대해 본 것은 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의 화면에서였다. 그는 이 영화에서 비록 조역을 맡았지만 자신의 존재를 뚜렷히 나타내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외향적 이유가 된다면 어딘가 예리한 감성과 저항의 냄새를 풍기는 그의 탄력 있는 연기로 해서 더욱 그는 젊음이 느껴지는 그런 배우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북한의 제임스딘》이라 별명을 붙여 보았다. 즉 《배력적인 반항아》. 이것이 김윤홍의 첫인상이라 할까.
과연 촬영 스케줄에 밤낮없이 쫓기는 그를 기어이 붙들고 내가 그의 반생애를 들었을 때 그에겐 적잖은 저항의 기질이 깔려 있음이 느껴졌다. 저항, 그것은 무엇인가. 나는 일단 이 《저항》이라는 두 글자를 예찬하고 싶은 사람의 하나이다. 왜 그것은 창조의 진통이며 전진의 태동이며 개혁의 요람이 될 수 있는 것 또한 남의 것이 아닌 우리의 삶, 나의 운명에 그리고 역사에 주인 노릇을 해보고자 하는 하나의 몸부림이기에 그래서 가장 생명감 느껴지는 그런 감정, 그런 행위가 아닐런지. 창작의 산고를 겪어 내는 천재들, 시대를 앞서 사는 선각자, 역사를 바꾸어 가는 개혁자 그들은 대체로 저항 의식이 강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불행 앞에 도도한 자세였다.
저항의 스타 김윤홍, 그는 일본 땅 가와사게에서 태어났다. 그 곳은 주로 경상도 출신의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비교적 총련의 영향을 강한 곳이기도 하다. 철들자 9세 때 부친의 상을 당하고 곧이어 사랑하는 여동생의 죽음을 본다. 홀로 된 어머니가 3남매를 거느리고 밀주업 《호르몽야끼(소 내장구이)》등을 해가며 고달프게 꾸려가는 살림은 옹색하기 그지없다. 때로는 월사금을 마련할 수 없어 휴학을 하기도 했으니까 . 그리고 윤홍이 해보지 않은 일도 없다. 신문배달, 구두닦이, 우유배달 등등. 한편 문 밖에만 나서면 《조센징》놀림, 천대, 멸시였다. 1951년부터는 총련학교가 세워져 학비 걱정은 덜게 되었지만 학교를 졸업해도 거짓 일본인 행세를 하지 않는 한 올바른 직업을 얻을 수도 없었다. 그날 그날 사는 것이 괴롭고 희망이 없어 보였다. 동네에서는 가끔 일본 사람, 조선 사람간에 패싸움이 벌어지곤 했는데 그럴 때면 한 차례씩 한껏 치고 받으면 울분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리고 워낙에 영화를 즐겨하기도 했지만 울적할 때면 으레히 극장에 들어가 처박히는 버릇이 있었다. 30원이면 한 번에 영화 3편을 돌려 주는 변두리 싸구려 극장에 단골 손님이 되었다. 그리해서 한때는 야구 선수가 되고도 싶었지만 윤홍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영화의 마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1959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일본의 적십자간에 이루어진 회담에 의해 조인된 《북송협정》과 《귀국선》의 출현은 재일 동포들 사이에 충격적 사건이며 역사적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저 구약성서의 출애굽을 연상케 하는 노예생활로부터의 해방이며 민족 대이동이기에 특별히 청년들 사이에 귀국선을 타고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진실로 행운 그것이었고 해방 그것이기에 그것은 누구에게나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잠깐, 나는 여기서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말하는 윤홍 씨의 말을 가로 막았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한 것이다. 혹은 그의 말을 전적으로 의심한 것이다. 《귀국선》이라면 저 《노농 노예로서의 강제 북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건 이야기가 너무도 다르지 않은가. 《북송》이라면 우리는 즉 《강제 지옥행》으로 철석같이 들어 믿어 왔고 그는 지금 그것이 《자원 천당행》이라 말하고 있다. 이 어찌된 영문이가. 나는 그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고 그는 또한 내 말에 어이없다는 표현이다. 우리는 접견 도중 이 문제의 시비를 가리기에 꽤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강제 지옥행》을 계속 주장하는 내 말에 그는 계속 미소로 응수하더니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정 그러시다면 제가 한 말씀 드리죠. 실은 그 당시 가족들이 처음부터 다함께 귀국하지 않고 가중 중 한두 사람이 먼저 선발대로 귀국한 집들이 많았습니다. 저희 집도 그랬죠. 제 형님께서 먼저 단신으로 귀국했죠. 그리고 얼마 후 나머지 가족들이 뒤따라왔죠. 그렇다면 우리 온 가족이 떠나오기 전에 과연 조국이 지옥인지 아닌지 남 아닌 바로 혈육을 통해 그 정보를 충분히 들을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과연 그렇다면 저희 나머지 가족이 어찌 귀국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강제》라 하시는데 실은 그 당시 서로 경쟁하듯 앞을 다투어 오고 싶어 했습니다.》
나는 문득 이 죄없는 사람 앞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짐짓 무슨 수사관 행세(?)를 하고 있는 자신이 여간만 죄스럽지 않게 느껴졌다. 인민을 탄압하고 우롱하는 거짓 정책은 있어도 거짓 역하는 남지 않는다. 그 어느 날엔가 산 역사가 진실을 밝혀 주리라. 심문(?)에서 풀려난 그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날 형님의 뒤를 이어 가족과 함께 귀국한 것은 그가 16세가 되던 해, 실은 그 당시 순순히 어머니를 따라 나설 만큼 남다른 조국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주변에 동무들이 하나 둘 떠나가는 것이 무작정 마음의 동요를 자극해 왔다. 그리고 귀국선을 타고 조국을 향해 떠나올 때 그의 모국어 실력은 《밥, 국, 숫가락, 어머니 등 》단 몇 마디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봇짐을 싸들고 떠나오려는 순간 문득 그의 뇌리를 스치는 의문이 있었다. 비록 자신은 일본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님과 조상의 고향은 경상 남도라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북조선이 아니라 남조선이 아니겠는가. 그는 어머니에게 따져 질문을 했다. 어머니의 답변은 간단 명룡했다.
《왜 북으로 가느냐구? 김일성 원수임이 계시니까 간다.》
윤홍은 도시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기 기묘한 답변을 오래잖아 해득하게 된다. 《김일성 원수님 》그는 홀로된 어머니가 의지가지 없는 이역 땅에서 만나을 겪으며 고달픈 생의 노정을 걸오실 때 아무도 모르는 그 마음의 지주가 돼 주신 어른으로서 그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절망할 때 붙들어 주시고 외로울 때 쓰다듬어 주시며 낙심될때 빛이 되어 주신 어른임을 그리고 또 조국의 품이 그 어떠한 것인가를 .
배가 청진에 닿았다. 그리고 배치된 집에 들어섰을 때 그 무엇인가 가슴에 뜨거운 것이 안겨 왔다. 이것이 내 고향, 내 조국인가. 그날의 감동은 20여 년이 지난 이날까지도 진하게 남아 있다. 새로 도배한 온돌방은 벌써 첩이 쌓여 있다. 정지에 들어가 보니 김이 무럭무럭 피어 오르는 가마솥엔 누군가 닭곰을 해놓았고 그 곁에 있는 몇 개의 큰 항아리에는 가득가득 백마, 찹쌀, 팥, 콩, 강냉이, 밀가루 등 오곡을 채워 놓았다. 그리고 뜰에는 열댓 마리의 닭이 놀고 있고 토기 한 쌍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룻밤을 자고 나니 동네에선 고기를 가져오고 떡을 치고 빈대떡을 지져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귀국 후 열차 기관서 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석탄 퍼넣기를 하던 그가 마침내 자신의 꿈을 펴기 위해 조선예술영화촬영소의 문을 두드린 것은 1965년도의 일. 그는 막무가내로 촬영소 부부장 어른을 찾아가 배우가 되기 위해 먼저 소내 청소부 자리라도 내줄 것을 간청했다. 부부장 어른께서는 청소부자리 대신 영화대학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그가 영화대학 낙방의 상처를 안고 찾아온 윤홍의 속사정을 모르고 하신 말씀. 그는 소내 청소부자리마저 뜻대로 되지 邦릿 다시 한 번 그의 권유대로 영화 대학에 응시할 길밖에 없었다. 그는 서툰 조선말 실력으로 인해 첫시험에 낙방했거니와 두 번째 또한 가장 취약한 것이 역시 조선어이다. 그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시험장에 들어가긴 했으나 한 과목도 채 치르지 않고 나와버렸다. 그는 과연 반항아인가.
1966년 어느 날 조선영화예술영화촬영소엔 15만이라는 거대한 배우 지망 군중이 모여들었다. 그 누구나 합격자 40명 중에 하나 되기를 초조히 열망하면서 윤홍이 또한 그 군중 속에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엔 밤마다 강가에 나아가 열정을 다해 조선말 훈련을 쌓은 덕분인가, 6차례에 걸친 엄격한 시험을 기어이 통과했다. 반항아는 승리했다. 합격자 40명은 명화 대학 4년 과정을 1년에 수료하도록 하는 촬영소 내 배우 양성소에 등록, 훈련을 받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다시 10명의 우수한 배우 지망자가 선정된다. 윤홍은 다시 그 10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67년 단역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연기 생활은 지난 20여 년 세월 동안 꾸준하고 착실하게 성장, 발전해 왔다. 그간에 출연 작품은 약 70여 편이고, 그 중 《돌아오지 않는 밀사》, 《이름없는 영웅》, 《홍길동》, 《임꺽정》 등 다수의 대표작들이 있다. 그리고 그사이 꽉 짜인 촬영 스케쥴, 잦은 해외 촬영으로 바쁜 생활 가운데서도 두 번이나 낙방했던 4년제 영화대학을 통신과로 수료했는데 시기는 그 졸업 날짜를 불과 며칠 앞두고 있었다. 그의 취미는 고요한 시간 클래식 음악 감상이다. 그는 영화가에서도 호가 나있는 고전 음악 애호가일 뿐 아니라 그 방면에 전문가 못잖은 깊은 조예를 갖고 있다고…. 평소 화면에서 익히 보아 온 영화 배우 아무개와 처음 중매말이 났을땐 《키 작다》 툇자를 놓았는데 어느 날 우연히 극장 층계에서 마주치게 되자 아직 신부감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그의 곁을 살짝 지나치면서 키를 재어 본 결과 최소한 자신보다 더 작지는 않다는 것을 확인, 안심하고 결혼이 성사되었다는 깜찍하고 예쁜 아내를 두었다. 그녀는 미모의 무용수이며 어여쁜 두 딸을 두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던 어떤 좌석에서 이런 질문을 했던 일이 있다.
《북조선 영화인들에게 소재 선택의 자유가 있는가》라고.
그때 그는 이렇게 날카로운 답변을 했다.
《듣자니 바깥에서 걸핏하면 우리더러 자유가 없다고들 하는 모양인데 도대체 자유가 무엇입니까. 정의와 진리에 복종하는 것을 자유가 없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 나는 확신한다. 그리고 자부한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불의라고 믿어질 때 내 한 몸, 내 한 생을 바쳐 끝끝내 항거하는 청년, 우리의 서승이 있고 그것이 진리이고 정의라고 믿어질 때 또한 내 한 몸, 내 한 생 바쳐 절대 복종하는 청년, 우리의 윤홍이 있는 한 우리는 통일을 보고야 말리라. 그리고 태양은 맑은 아침의 나라 조선에 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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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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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김윤홍이라는 배우는 참고로 민족과운명에서 닭그네애비인 박통역을 맡아 연기했던 배우로 더 유명하죠~!!!!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개인적으로 민족과운명 지금봐도 질리지않더라구요? 우리 남녘이나 미국, 일본 그외의 자본주의국가 영화계입장에서 민족과운명이 촌스러워보이는 영화인것 같다지만 북녘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대작이거든요? 운명의 갈림길을 부른 여가수는 두명인데 한명은 석란희씨(현재 김원균명칭평양음악대학 강좌장)고 다른한명은 보천보전자악단 소속의 여가수인 리경숙인거 아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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