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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한반도의 홍일점 여류 지휘자 조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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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11,31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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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면 풀벌레 소리 더욱더 서러워가고 청아한 가을 하늘이 싸한 가을향을 안겨 준다. 지금쯤 내 소꼽친구네 그 잊혀진 정원에 서 있던 석류나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해묵은 바위틈에 파란 이끼들은…. 그날 밤 슈만의 《시인의 노래》를 불렀던 그 가수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옛날 그이가 불러 준 노래를 들으면 내 마음 괴로워져 가슴을 찢는 듯, 쓰라린 마음 참고 산으로 올라 눈물 흘리면 이 큰 괴로움도 녹아 버리리.》
그 노래가 끝나자 터져난 박수갈채와 함께 깜짝 놀랐던 일, 순간에 어디서 날아들었다, 꽃송이들이 눈발 쏟아지듯 무대를 향해 던져져 연주자의 온뭄에 피아노 위에 그리고 온 무대에 뿌려졌던 그 다홍빛 꽃잎, 꽃잎들…. 음악회는 끝났지만 그대로 차에 오를 수는 없었다. 가랑잎 구르는 가을의 밤길을 한 정거장, 두 정거장 계속 지나쳐 가도 가도 가 가는 곳을 알 수 없었다. 빈 손으로 왔으니 빈 손으로 살다 가더라도 곁에 음악만 있어 준다면 저렇게 혼자 숨어 우는 귀똘이처럼 외로운 신세가 되어도 곁에 음악만 있어 준다면 살 것 같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저승에 가도 그 음악이 함께 따라가 줄까. 그것이 걱정스러울 때가 있다.
나는 그 몇 번인가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내 마음을 사로잡는 한 여인을 보았다. 그러나 그 여인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보아야 했고, 그리고 아주 먼 발치에서 보아야 했으며 긴 머리채 늘어트린 그녀의 뒷모습만 볼 수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조선 여성의 자그맣고 갸날픈 그녀의 뒷모습만을…. 하지만 이 작은 한 여성에 의해 우리 6천을 헤아리는 청중이 그 얼마나 큰 감동의 물결 속으로 인도되며 도취하며 그리고 깨어나던가. 그녀는 분노의 천동과 우뢰를 치게 하고 혁명의 폭풍을 일으키며 그리움의 밀물을 안아드리는가 하면 저 감미한 천사의 하프 소리를 불러 오고 장엄한 대자연의 합창을 초대해 오는 연인. 뭇 남성들을 월등 능가하는 그 박력, 위엄 그리고 다이나미즘으로 그녀가 휘둘러대는 지휘봉 따라 울려퍼지는 대음악 앞에 우리 모두는 다만 아연, 찬탄을 보낼 뿐이었다.
나는 이 신비에 쌓인 여인 가까이에 감히 다가 보고 싶었다. 그리해서 이작은 여인 속에 차고 놈치는 그 놀라운 예술적 에너지 그리고 위엄에 찬 대장군 같은 지휘력이 그 어디로부터 샘솟는 것인지 그 비밀스런 사연을 들어보고 싶었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에 앞서 그녀에 관한 정보 하나를 사전에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름해 《전쟁 고아》라는 사실이다. 나는 더욱 그녀에게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으로서 그보다 더 불행하고 인생으로서 그보다 더 불리한 여건이 또 있겠는가. 그런데 그러한 그녀의 오늘은 오히려 저렇듯 찬란하고 당당하게 세상에 우뚝 솟아 있다. 먼 발치에서 보기만 해도 운명을 딛고 선 통쾌한 인간 승리의 깃발을 보는 것 같아 눈물겨웁다. 과연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 그녀는 이렇게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일생을 눈물로 끝낼 것인데 오늘날에 제가 있게 된 것은 오직 조국이 나를 품어 키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모든 것이 당연한 듯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자라 왔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 철이 들면서부터 고요한 시간이면 생각케 되는 이 감사한 마음을 이루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녀는 결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가슴 아픈 먼 옛일로 돌아간다. 1940년생인 그녀 조정림은 황해도 어느 산골, 대대로 가난한 농가에 7남매 중 끝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집안에 이처럼 빼어난 음악인이 나타날 만한 아무런 음악적, 지성적 배경이라곤 없었다. 다만 그것도 근거라 치면 어머니께서 노래와 춤을 곧잘 하셨고 흥겨운 자리가 벌어지면 바가지 장단을 잘 치셨던 기억이 있다 뿐. 그 어머니와 함께 장이 서는 날이면 계란 따위를 머리에 이고 나가 물물교환을 해오던 것이 지금은 가슴 저리도록 그리운 어린 시절의 아득한 추억이다. 비록 농가의 옹색한 살림이지만 언제나 웃음꽃 피는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이었다. 특별히 평야에 나가 공부하던 언니가 방학에 돌아오면 그 언니에게 풍금을 배울 때가 가장 즐거웠다. 그 고향산천은 평생을 통해 애절한 향토애를 심어준 한폭의 아름다운 전원화이다. 거기서 언니 오빠들과 함께 풀피리 만들어 불고 《정이월 다가고 삼월 이라네》 그 노래도 수없이 불렀다.
세월은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것인 줄 알았다. 그리고 부모형제는 언제까지 그렇게 곁에 있어 주는 사람들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1950년 10월의 일이다. 천지가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폭음이 터졌다. 그리고 난생 처음 보는 이상하게 생긴 인간들이 도처에 나타나 마구 총을 난사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고 3형제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리고 두 오라버니는 그 행방을 찾을 길 없다. 남은 건 막내와 정림이 두 오누이뿐. 그 괴물들의 초부리 앞에 죽어간 부모님을 붙들고 통곡할 경황도 없다. 어린 동생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피해 숨어야 하는 일만이 다급하다. 이리 뛰어도 저리 뛰어도 총을 겨눈 그 괴물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작은 두 몸이 피할 곳이란 없다. 그런데 숨을 곳이 눈에 띄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시체들을 모아다 놓고 가마대기를 덮어놓은 곳이다. 오누이는 재빨리 그 가마대기 속으로 들어가 누워 버렸다. 곁에 함께 죽은 사람들이 무섭지 않다.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이 훨씬 더 무서웠기에…. 그리해서 당분간 피신처는 해결이 되었다.
하지만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다. 처음엔 남의 밭에 들어가 무우를 뽑아 먹는 동생을 제법 누나답게 때려 주었다. 결코 《도둑》이 되어선 안 된다고. 그러나 더 이상 배고픔을 참을 수 없었다. 조용한 틈을 타서 남의 집 담을 넘어 걸려 있는 시래기 중에서 그 중 파란 것을 골라 장독대 된장에 다 찍어 먹고는 줄달음치는 것을 그 몇 번이나 했던지…. 그렇게 지난 것이 얼마쯤이었을까. 마침내 언제까지 버려져 있던 오누이에게도 제2의 어머니 품속 같은 조국의 따뜻한 손길이 찾아 들었다.
김 주석은 즉각 전국에 고아들을 모아들이도록 했다. 두 오누이는 고아들의 수용 학원인 《평양제일초등학원》으로 인도되었다. 그날로부터 조정림에겐 조국이 곧 어머니가 되었고 김 주석이 곧 어버이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 그 아버지의 사랑은 또한 지극한 것이었다. 외국으로부터 원조받은 고운 옷과 양식들은 제일 먼저 학원의 고아들에게 나누어 졌다. 그리해서 오히려 부모 품에 안겨 있는 아이들이 헐벗고 굶주릴 때 그들은 호의호식을 할 수 있었다. 공부도 재미있었다. 영리하고 재능 있는 정림은 학원에서 귀염을 독차지했다. 그런데 그 학원 건너편에는 음악대학이 가까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정림에게 그 음악대학은 그처럼 멋져 보이고 동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새벽마다 뒷동산에 올라가 소리치고 약수를 퍼마시면 음성이 고와진다는 선생님의 말씀대로 소녀는 매일같이 그 일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1953년 5월 정림은 200명의 학원 친구들과 같이 루마니아 유학길을 떠난다. 그때 정림의 나이 12세. 소련 등지의 이웃 나라들을 경유 대륙을 횡당하는 긴긴 기차 여행은 즐겁기 한량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기차가 쉬어 가는 역두마다엔 환역객들로 가득하여 한아름의 선물을 안겨 주기도 하고 《영웅 나라의 어린이들》이라 하여 목마를 태워 주는 등 축제라도 벌어진 듯 열렬한 환영을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왜인가. 그것은 그들의 우방 국가인 조그만 나라가 대미국 제국주의와 용감히 싸웠기 때문이요 또한 그들과 싸우다 죽어간 자들의 어린것들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선을 가리켜 《영웅 나라》라 불렀다.
물설고 낯설은 이국 땅 루마니아. 그러나 그 나라는 정림에겐 제2의 고향 땅이 되었다. 가장 다감하고 꿈 많은 아름다운 소녀기를 정림은 그 곳에서 지난다. 그 나라의 자연 또한 수려했고 그 땅은 특별히 현악기가 발달된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보헤미안의 나라가 아니던가. 거기서 정림은 장래의 무지개빛 꿈을 그리기에 족하고 풍요했다. 예능에 뛰어날 뿐 아니라 전 과목에 1등을 도맡아 하는 정림은 또한 교사들의 사랑과 귀염을 한몸에 받는다. 빠짐없이 ①조선역사 ②조선지리 ③조선문학 등 민족 교육을 맡아 해주시는 조국 교사에게나 그외 과목을 가르쳐 주시는 그 곳 이국 교사들에게나 꼭같이…. 정림은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진도는 남보다 배나 빨랐다.
하지만 정림에겐 아직 꽃처럼 구름처럼 피고지는 꿈들이 많았다. 그처럼 주위에 사랑을 받고 호의호식하는 친구들과 즐거운 나날을 보내다가도 저녁 어스름 서녘 하늘이 붉게 노을이 질 때이면 정림은 저 머나먼 곳 고향 땅이 그리워 견딜 수 없다. 그 땅은 정림에겐 그렇듯 슬픔만을 안겨 주었고 지금은 엄마도 아빠도 없는 빈 들만이 허허로이 남아 있을 그 고향 땅이건만 그래도 그리워 혼자 숨어 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정림은 마음속 오선지에다 눈물로 악보를 적어 보곤 했다. 그 고향산천을 주제로 기필코 명곡을 써 내리라고…. 저 노스탤지어의 음악가 드보르작처럼 스메티나처럼….
또 어느때는 혼자 세계 지도를 펴놓고 특별히 그 중에서도 가장 못생긴 것 같은 미국 지도를 유심히 보곤했다. 그것은 거기가 바로 엄마 아빠를 앗아간 악마 같은 털부숭이놈들이 산다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림은 여류 비행사가 되어 보기도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동화 속에서 읽은 요술 담요를 탄듯 하늘을 맘껏 나를 수 있는 것도 신이 나겠지만 그 언젠가 비행기 하나 가득 폭탄을 싣고 가서 그 나라에 떨어뜨려 원수를 갚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때로는 의사가 되어 사람이 오래오래 살도록 하는 특별한 의술을 발명해 내어 우리 모두 달나라에까지 갈 수 있는 그런 꿈을 꾸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음은 항상 음악에 붙들려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에 일이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정림은 하여금 음악의 길로 가도록 운명 짓게 한 한 사건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일상 영화를 많이 보여 주었다. 주로 소련, 이태리, 프랑스의 음악 영화가 많았다. 그날은 이태리의 음악 영화를 보던 중이었다. 화면에 파도치는 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먼저 펼쳐지더니 이어서 30여 명의 하프 주자들이 일제히 하프를 타는 광경이 떠올랐다. 순간 정림은 그 악기, 그 광경, 그 소리에 그만 아찔할 정도로 현혹, 매료됐다. 그 길로 어둠 속을 뚫고 달려가 선생님께 그 악기의 이름을 물었다. 화면은 금새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정림은 그 기막힌 악기를 다시금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벌써부터 음악에 도취해 있는 이 어린 소녀를 데리고 음악대학엘 갔다. 정림은 과연 그 황홀한 악기를 다시금 만나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정녕 동화 속 하늘 나라 선녀들의 악기인 양 신비하고 아름답고 찬란했다. 그 자리에서 미친 듯 달려들어 악기를 맘껏 안아 보고 무작정 타보고 싶은 것을 그저 보기만 하고 돌아서야 하는 것이 너무 서운해서 눈물을 흘리며 돌아와야 했다.
그러자 소녀는 운명적인 굳은 결심을 했다. 하늘이 두쪽나도 하프 주자가 될 것이며 음악인이 되리라고…. 교사들에겐 근심거리가 생겼다. 정림은 최우등생인 이유로 음악보다는 보다 실질적인 방향의 공부를 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그들은 책임으로 느꼈다. 선생님은 고국에 있는 정림 오라버니에게 이 근심어린 사연을 소상히 적어 보냈다. 오라버니 또한 펄쩍 뛰며 보내 온 회답이 《정림이를 의학 공부시켜 보내 달라》는 당부였다.
만 4년의 루마니아 유학 시절이 꿈같이 지나갔다. 정림은 17세의 아릿다운 아가씨가 되어 귀국했다. 그리고 오라버니의 만류를 무릅쓰고 음악대학에 진학을 한다. 처음 예과 3년 동안에 피아노와 작곡 공부를 했다. 그러나 웬지 그 무엇을 해도 성이 차지 않았다. 정림은 4년제 본과에 진학을 하면서 과감한 결심을 했다. 그리고 이번엔 교수 전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휘과로 옮겼다. 정림은 꿈이 컸다. 적어도 지휘봉을 든 이상 세계적인 명지휘자가 되리라고. 여성이 감히 지휘봉을 든 사실에 대해 주위에서 비방, 조소가 들어올 때마다 정림의 결의는 더욱더 굳어 졌고 포부는 오히려 커 갔다. 하루에 2시간밖에는 잠을 자지 않았다. 오직 음악 속에 날이 새고 음악 속에 저물었다.
평양음악대학 전교 최우등의 수석 졸업을 하던 날 정림은 무더기 꽃다발속에 얼굴을 묻고 그 얼마나 흐느껴 울었던가. 쓰라렸던 지난날들이 주마등같이 흘러갔다. 하지만 이제 조정림은 조선의 전인민이 아끼는 보배가 되었고 김 주석이 그처럼 자랑스럽게 여기며 애지중지하는 딸이 되었다. 중국에서 주은래 총리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조정림의 연주회에 참석했던 주은래 총리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손을 붙들고 《띵호! 띵호!》를 연발했다. 곁에 있던 김 주석이 친히 통역을 했다.
《중국에 인민이 8역이라도 조 동무 같은 여성 지휘자는 없다고 그래. 암 그렇고 말고. 조 동무는 우리 주체 시대의 산물이지. 자, 오늘은 조 동무가 제일 수고했는데 조 동무가 가운데 서서 우리 사진 찍자구.》
그녀는 대체로 슈베르트, 드보르작, 차이코프스키의 작품 같은 낭만파 음악을 좋아하지만 종당에는 우리 민족 음악에 뿌리를 내리고 우리의 것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을 주장한다. 평소 수영을 즐기는 한편 테니스는 《프로에 가까운 실력》이라는 주변의 이야기. 학창 시절 그녀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한참 연습하고 있을 때 그 아름다운 선율에 이끌리어 찾아든 그 사람. 그 사람의 괴테, 하이네의 시 낭송에 마음 빼앗겨 굴복, 살아하게 된 그 사람. 그녀의 부군은 영화 문학가다. 슬하에 두 딸을 거느린 그녀는 이제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행복한 아내이며 어머니이다. 현재 공훈예술가이의 칭호를 받아 《피바다 가극단》 지휘릴 맡고 있는 그녀는 또한 우리 한반도의 유일한 여류 지휘자라는 사실에 유념치 않을 수 없다. 그녀 조정림은 말했다.
《이제 내 여생에 남은 일이 있다면 오직 조국 통일을 위히 몸 바치는 일입니다. 내가 지휘봉을 들어 조국 통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는 그 어떤 총칼 앞에서도 지휘봉을 들 것입니다.》
총기어린 그녀의 눈빛이 신념으로 하여 더 한층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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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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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북녘에 대해 참말하면 유죄~!!! 북녘에 대해 거짓말하면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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