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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마에스트로 김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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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11,35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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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는 우리에게서 가장 가까운 나라이면서 가장 먼 나라였다. 그 나라는 바로 나 자신이면서 세상에서 자장 낯설은 타인이었다. 그 나라는 내 몸체의 절반이면서 감각을 잃어버린 부분이었다. 하지만, 감각을 잃었을지언정 하나의 몸체는 절단을 내어도 피가 달라지는 법은 없다.
그 어떤 사탄의 세력에 의해 3·8선이라는 드높은 장벽을 쌓고 겹겹이 가시 철망을 둘러놓아도 북쪽에서 떠오는 구름을 막을 수 없고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수는 없다. 아니 그보다 지하에 흐르는 혈맥의 뜨거운 강물을 막을 길은 없으리라. 또한 그것이 하나의 핏줄이요 하나의 물줄기인 이상 남녘에서 슬퍼 몸부림치면 북녘에 꽃이 필 때 남녘의 꽃봉이가 그 입을 열지 않을 수 없겠고 북녘에 열매가 蓉糖 또한 남녘의 열매가 성글지 않겠는가.
분단 이후 44년 우리 남녘 땅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숱한 예술인들이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음악 부분은 더욱더 두드러 진다고 본다. 때마다 빛나는 국제 강연에서의 수상은 물론 구미 각국에서 열리는 전통 있는 협연에서 우리 유학생들은 절대 다수를 차지해 왔다. 세계 각처의 대가란 대가는 서울로 서울로 다투어 모여들어 사시서철 연주회를 가진다. 남한 땅 거리거리 골목골목 피아노 소리 들리지 않는 골목이란 없다. 우리 남한의 음악열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쩜 항상 불안 일로를 걸어온 정세나 우리네 살림에 비하면 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한편 우리는 단 한 번도 북녘 땅의 예술이라든가 예술인들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관심도 들어 볼 기회도 없었다.
1985년 전세계 음악인들의 선망이며 세계 정상에 오르기 위한 최고의 관문인 서독 카라얀 국제 지휘자 콩쿨 제1위에 수장자이며 북한의 지휘자인 김일진, 그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지난 40년간 반공 교육, 반공 선전만 들어온 내 상상 속 북한 땅엔 오로지 전쟁과 혁명을 위한 가공할 무기나 전략이 있을 뿐 음악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고 그런 훌륭한 음악인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더욱더 믿어지지 않고 실감되지 않은 것은 혹시나 그 땅에 음악이 있다한들 순수 예술과는 상관없는 오로지 공산당을 위한 공산당의 음악이 있을 뿐 그처럼 낭만적인 서구 음악을 수업하고 그가 서구 사회에 도전하여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군림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았다.
나는 그를 만나야 했다. 만리를 멀다 하지 않고 나는 또 세상을 돌고 돌아 머나먼 길을 찾아갔다. 나의 짧은 체류 기간과 그의 바쁜 스케줄로 해서 우리의 만남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투숙했던 보통강호텔 6층 면담실, 사철 낭만의 극치를 이루는 보통강변에 가을이 무르익어 가고 있는 그런 아침이었다. 내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는 창 밖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다. 낵 인기척도 금시 알아채지 못한 채 뭔가 사색에 잠긴 듯…. 그가 몸을 돌렸다. 나는 놀랐다. 그는 다만 음악인으로 보기엔 너무도 미남이었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 음악인 아니 영화배우가 잘못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늘씬한 키에 윤이 흐르는 밝은 피부, 빚은 듯 서구적 조형미를 갖춘 귀공자 타입이다. 젊잖게 뒤로 빗어 넘긴 약간의 곱슬머리, 검고 굵게 빛나는 이국적 두 눈망울이 타이론파워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아직도 소년기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은 애띤 인상이다. 그는 소년 같은 해맑은 미소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내가 만난 북한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의 위치나 명성을 전혀 의식할 수 없는 그 소박하고 겸손한 거동은 김일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겸손한 태도가 우리의 만남에 처음부터 아주 친숙감을 주었고 나를 편안케 해주었다. 나는 극히 편안한 마음으로 질문을 시작할 수 있었다. 참다운 예술가에게 있어서 수상 경력 같은 것이 절대적이거나 더욱이 그것이 그 사람을 대변이라도 하는 양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내가 그의 카라얀 콩쿨 수상 경위부터 성급히 묻는 것이 좀 쑥스러운 일이었으나 짧은 면담 시간에 직업적 기자가 아닌 나에겐 순서를 가릴 만한 그런 여유도 기교도 없었다.
그는 담담히 말을 시작했다. 그가 서독 백림에서 있게 될 카라얀 국제 지휘자 콩쿨에 처음 뜻을 갖게 된 것은 그의 모스크바 음악대회 유학 시절(당시 4학년 재학 시) 재학 중이던 모교로부터 참가 추천을 받았기 때문이란다. 당시 전세계에서 몰려든 참가 신청자는 200여 명, 그러나 먼저 참가 자격 심사에서 낙방된 50명 가운데 자신도 그 중 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주최측에서 말하는 구실인즉, 아직 《학생 신분》이기 때문이라 했으나 그후 사실 내막을 추궁해 본 결과는 실은 《공산 진영에 약소국 출신》이라는 것이 참 이유였다고 한다. 모두는 이 민족적 수욕 앞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다시 참가 신청을 강력히 요구하자 주최측에서 보내 온 답인즉 《그렇게 정 하고 싶으면 이런 대국제콩쿨이란 어떤 것인지 참관이나 해보라》하는 것이었다. 또 한 번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이렇게 반격을 가했단다. 《그러면 거꾸로 당신들도 우리 실력을 한 번 참관해 보라》
끝내 참가 허락을 받아 내고 말았다. 본선인 4선에 오르기 앞서 3선까지 무사히 통과 8명의 호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 8명이란 프랑스, 일본 2인, 이스라엘, 소련 2인, 미국 그리고 북한의 김일진이었다. 여기서 일전은 4선에 오르기 위해 이 7명의 경쟁자들과 싸워야 했다. 일진은 서베를린 관현악단과 협연, 두 개의 지정곡의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와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심포니를 가지고 음악을 만들어 내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단원 중 여성 플루트 주자의 음정과 템포가 계속 틀리는 것이었다. 일진은 참다 못해 사람을 교체해 주도록 당돌하게 제기하고 주최측은 하는 수 없이 남성 주자로 대치해 주었다. 단원들이 눈이 휘둥그래져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후 일진이 지휘봉을 들면 악사들 전원이 초긴장을 하곤 했다. 3선에서 4선으로 올라간 것은 일진, 미국, 소련 3인이 남았다. 콩쿨 규정에 따라 이들 3인은 흩어져 제각기 1년 동안 더욱 수련을 쌓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일진의 지정곡은 차이코프스키 제 6교향악 3, 4악장, 소련의 지정곡은 제 1, 2악장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지정곡은 베토벤.
소련 연주자가 먼저 나가 심사를 받고 다음 일진의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직접 심사를 맡고 있던 카라얀이 별안간 일진에게 지정곡을 바꿔 3, 4악장이 아닌 1, 2악장을 하라는 지시였다. 일진은 몹시 당황했으나 별수가 없어 즉흥적으로 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후 미국 차례였으나 그의 베토벤 연주는 기질이 안 맞는 듯 해석이 시원찮아 보였다. 드디어 심사 발표가 났다. 일진이 최고의 영예인 제1위를 차지했고 다음이 미국 그리고 그 다음이 소련 순서가 되었다. 나는 그 순간 일진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가 하는 것과 그 자리에 동포들이 함께 하여 축하하며 기쁨을 나누었는가 물었다.

《 그 자리에 남선 유학생들이 더러 와 있었던 것 같은데 남선 대사관 사람들이 많이 와 있어서였는지…. 그네들은 나를 슬슬 피하더군요. 난 오랜만에 우리 동포들을 만나 무척 반가워서 차라도 나누며 회포를 풀고 싶었는데…. 허허!》

그는 쓸쓸한 웃음을 허공에 던진다. 참으로 《외로운 승리》의 장면이 선연히 떠올랐다. 순간 그 옛날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세계 마리톤 제1위를 차지했던 손기정 선생의 외로운 승리가 연상되었다. 분단의 설움이 몸으로 느껴왔다.
나는 다시 이야기를 돌렸다. 오늘날의 김일진이 있기까지 그 배경이 무엇인가. 참으로 나에게 의문스러운 이 수수께기에 대해 듣고 싶었다. 집안에 음악가를 두고 있는 나는 한 사람의 예술인이 키워지기까지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그 눈물겨운 과정에 대해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기에 내 의혹은 더욱 큰 것인지도 모른다.
일진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제가 잘 모르긴 해도 아마 자본주의 사회에서 음악가 하나 키우려면 우선 돈이 많이 필요할 게고 또 성공하려면 배경같은 것도 있어야겠지요. 가령 이름 있는 스승에게 시사해야 한다는가 등등…. 그럼, 우리 뒤에는 누가 있는가. 우리에겐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가 계시고 그 분의 극진한 배려가 있습니다.》
원래 첼리스트로서 만수대 예술단 단원이었던 그가 지휘봉을 들게 된 데는 극적인 일화로부터 시작된다. 북한에는 온 나라가 숭앙하던 《허제복》씨라는 명지휘자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자 김정일은 사흘을 못 자고 가슴 아파 했단다. 그리고 잃어 버린 예술인 한 사람을 애통해 한 나머지 그는 다시금 그에 못지 않은 명지휘자를 키워내도록 결심을 하고 후보 8인을 선출하여 해외로 유학을 보내게 되었는데 자신이 그 중 한 사람으로 피택이 되었다 한다. 그래서 그는 1977년에서 1983년까지 6년간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음악대학으로 유학을 가게된다.
그가 처음 카라얀 콩쿨 참가 거부를 당했을 때 일이다. 김정일은 사기가 꺽이지 않도록 특별한 배려를 해주었다. 그 즉시 일진으로 하여금 조선국립교향악단을 이끌고 독일 순회 공연을 나서도록 주선해 주었다. 연주 여행을 떠나기 앞서 김정일은 이렇게 고무해 주었단다.

《한 번 가서 본때를 보여 줘라!》
《힘내서 떨지 말고 하라.》

그렇게 해서 보내 놓고도 부족하여 김정일은 더욱 용기를 주기 위해 평소 그가 애장품으로 지니고 있던 자신의 값진 지휘봉을 특별기 편에 보내주었단다. 그것을 들고 우리 반만년 찬란한 역사를 지난 조선의 긍지를 가지고 용기백배하여 맘껏 휘두르라고…. 과연 일진은 그것을 받아 들고 그의 온 정열과 젊음을 다시 휘둘렀고 당시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연주는 T.V화면을 통해 독일 전역에 방영되었다 한다.
그후 본격적인 콩쿨 참가 작전은 시작되고 그는 콩쿨에 필요한 일체 자료를 대거 수집해 주는가 하면 해마다 세계 각국의 저명 심포니 모임이라 할 잘스부르그 음악 축제에 참관토록 배려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카라얀에 직접 사사할 기회도 마련해 주었다. 그는 평소 연습 시간이나 공연 때면 직접 나와 참관하며 음악인들의 애로가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항상 물었다. 그러나 일진은 주를 단다.
《이것이 제가 수상자라 해서 저에게만 특별히 베푸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수상 전이나 그후에나 한결같으시고 또 누구나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그 누구나 할 것 없이 배려해 주시는 겁니다.》라고.
그는 《돈》을 알지 못한다 했다. 오늘날의 김일진이 있기까지 그를 위해 소비된 금액은 아마도 막중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몇 번이고 돈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못한다. 다만 《전혀 돈을 모른다.》는 답변 외엔. 그 어느 재벌의 아들이 이처럼 맘 편히 호화로이 수업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음악 수업에 앞서 먼저 가난과 더불어 싸워야 했던 내 집안 음악가와 만신창이 그 피눈물어린 과정을 회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어찌된 일인가. 오히려 사유 재산 없는 공산 사회 예술인의 이 풍족함과 그 다함없는 뒷바침이 어찌된 영문인지…, 부럽지 않을 수 없다.
일진은 마지막으로 가슴 아픈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주었다. 수년 전 일이라 한다. 그가 동백림 휠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 공연하던 날, 한날 한시에 큰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극장에서는 정명훈 씨가 서백림 휠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 공연했다. 그후 서독 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났다고 한다.
《한국의 분계선이 독일에 옮겨 온 것 같다.》라고.
그는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정진한다. 방대한 독서 생활을 하며 사색을 하며 그리고 특별히 미술 애호가인 그는 종종 미술관을 찾는다. 한때는 그의 미술에 대한 뛰어난 재능이 인정되어 음악과 미술 그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 고민에 빠진 시기도 있었다 한다. 그는 지금도 해외 연주 여행을 나가면 제일 먼저 그 나라의 미술관을 찾는다 했다.
1955년생(34세)인 그는 자연과학 계통의 교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에겐 7년의 장미빛 열애 끝에 결혼한 미모의 아내가 있고 두 어린 아들이 있다. 영화배우인 그의 아내가 촬영을 나가면 그는 집에서 두 개구쟁이와 씨름을 하는 어진 아빠이며 때때로 아내의 연기를 참견하는 자상한 남편이다. 주변에서 그들은 소문난 잉꼬부부라고 귀뜸을 해주기도 한다.
헤어질 때 그는 다시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언젠가 동생 되시는 분하고 연주를 같이 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 기회가 꼭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호수같은 맑은 눈매엔 저 사바 세계의 어지럽고 괴로운 번뇌 같은 것일랑 흔적조차 찾을 길 없고 오로지 미를 구가하고 사랑을 구가하며 자유를 구가하는 평화 오직 평화가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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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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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김일진의 아내가 춘향전에서 향단역으로 나온 여배우 김영숙이랍니다~!!!!! 참고로 북녘의 김영숙 여배우가 두명이나 있는데 한명은 춘향역을 맡은 단아하고 고운 김영숙이고 다른한명은 향단역을 맡았으며 숲은 설레인다에서 주연급을 맡은 김영숙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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